송담 스님과의 인연
현성 성은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출가를 했습니다.
군 복무 생활 당시 한 스님 영창에서 꺼내기 위해 약속한 것을 지키려 3년만 출가 약속 지키기로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여 용주사로 출가하게 되었으니. 용주사로 택한 연유는 용주사에 갔다가 공청을 들었으니 "불청불인지"였는데 "부처님에 대하여 듣는 것만으로 부처를 인지하여 알고 깨달으리라"라는 의미가 함께 들리고 새겨졌으며 다시 탑 주변에서 삼보를 상징하는 보물찾기 종이인 듯, 종이 한 장을 발견 집는 순간 여기가 내 출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 바로 출가 의사를 밝히니 주민등록을 보자 하였으나 당시 집에서 가져오지 않아 다음 날 가지고 오겠노라 하고 집으로 와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공부하러 간다고 하니 어머니는 당시 공무원 시험 준비 공부하러 가는가 보다 생각하신 듯 했지요.
그렇게 용주사로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하였습니다.
1986년 하안거 전날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결제 법문을 위해 오신 송담 스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당시 행자 총 5명은 스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스님 계신 방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한국 최고의 도인이라는 분이 와 계신다는 소식을 안내받고 행자 중 맨 마지막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도인의 모습이 아닌 작은 체구의 스님이 일원상을 그리고 계셨지요.
함께한 행자들은 긴장한 듯 숨죽여 반듯이 앉아 있을 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문살에 드러난 창호지마저 고요로웠다.
나는 생각했다. '뭔 저런 분이 도인이라니' 그 순간 알 수 없는 에너지에 나는 점점 내려 앉는 듯하며 스님께서는 위로 올려다보이는 듯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음! 뭔가 있구나.'
그렇게 첫 만남에서 내 생각들은 특별한 의미가 되었답니다.
스님께서 나에게 묻기를 "법명은 무엇인가" 하여 "아직 받지 않았습니다." 하니 "그럼 이름은 뭔가 "하여 "김수호입니다." 하니 원상을 그리고 시심마 라고 쓰시고는 나의 이름을 적으셨다.
사실 당시 나의 법명은 도용이었다.
"길도 자" "쓸 용"이니 군 복무 시절 1군단 법당에서 수계받으며 받은 것입니다.
나의 이름 역시 스님으로 받은 것이니 역시 법명이라 해도 어긋남이 안될 것이다.
경기도 양주군 남면 감악산에 있는 암자에서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두분이 백일 칠성 기도 다니시어 내가 세상 중에 태어난 연유 이력입니다.
태어나 스님께 쌀 다섯 말 보시하고 얻은 이름이 수호 목숨 수 좋을 호이니 자비로운 좋은 삶을 엮어낸다는 뜻이니. 법명이 되는 것에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태몽은 집 앞 바깥마당을 지나고 작은 도량 건너면 변소가 있고 변소 옆 산에서 이어진 작은 도량이 있는데 길옆 사람 키 높이만큼 위쪽 밭에서 비가 오면 물이 쏟아지는 작은 폭포 같은 곳 옆 맑은 샘물이 있어 물이 찰랑이며 가득 찬 샘터를 보는 꿈을 꾸었으니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시심마(이뭣고) 화두를 주시며 작은 소리로 설명하셨으니 당시 행자 중 나만이 스님의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지요.
나는 송담 스님 화두 공부를 말씀하실 때 그래 이거면 그동안 내가 해오던 일인데 해볼 만 하네 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방을 나오고 보니 아무런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4분의 성고, 성본, 성각, 주철, 행자님들에게 스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글로 적어서 알려 주었지요.
그렇게 스님과의 첫 인연을 시작으로 하안거를 맞이하였습니다.
용주사 출가 전에 충주 대원사 갔다가 그곳에서 출가 하려고 말씀드리니 그곳 주지 정관? 스님 출가는 사회에서도 성공한 모습으로 출가를 해야 한다고 하기에 송담 스님이 오셔서 법문하신다는 안내장을 써주고 온 일이 있으니. 나름 인연이 깊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몇 년간 나의 출가 후 양주 고향 시골에 홀로 계신 할머니와 수원집 어머니께서 생활하는 데 지장 없도록 할머니께 시골집 사드리고 어머니에게 드릴 작은 가게를 어머니 명의로 개업하였고 꼭 1년간 운영하여 안정화하고 용주사로 출가 하였으니. 나의 출가 이력도 괜찮은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당시 화두 글은 액자에 담겨 내게 그 시절 그때 법문을 설하고 있답니다.
용주사에서 하루 천배 절을 하며 정진하던 어느 날 저녁 밖으로 나가 달을 보는데 달과 반야심경이 가슴으로 확 일 순간 들어오더란 말입니다.
그 연유로 은사 스님께 찾아 들어가 선방으로 가겠노라 하니 원주 한 철 살아주고 가라 하시기의 예하고 나와 일주일 후 다시 찾아뵙고 다시 말씀드리니 그리하라 하시니 이것이 참선 첫 동안거를 알리는 행위가 되었답니다.
1986년 승보사찰 총림 송광사 수선사 선방에 방부를 드리러 가기 전 용화사 법보전 송담 스님 설법을 들으며 무상이라는 법문에 알 수 없는 눈물이 한없이 흐르니 또 다시 스님과의 인연의 고리가 엮어진 것이지요.
송광사를 내려가면서 정읍에 내려 몇 번의 기연이 있던 내장사를 찾아가는 날 또다시 특별한 기연이 있었으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내장사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니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후레쉬도 없이 캄캄한 길을 발로 더듬듯 걸어가는데 이마 앞에서 새소리가 나며 인도하는데 절 불빛이 보이고 절 앞에 이르자 새소리 또한 사라졌습니다.
나는 관음전에서 정진하며 밤을 보내고 다음 날 걸어서 구봉암에서 차와 떡을 얻어먹고 암주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백양사까지 걸어서 도착하여 참례하고 송광사로 내려가 총림에서 첫 안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송광사 이야기는 차후 거론 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정 스님과의 만남도 이때이니 그 특별함이 있습니다.
동안거 마치고 송광사 주소지 퇴거 신고하였고 용화사 법보선원으로 전입 신고를 하면서 무조건 용화사 선방에서 지내야 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으니 당시 용화사 선방 방부는 최소 2년에서 5년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던 때라 나의 행동은 모험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절실함이 있었습니다.
송광사를 나와 부산 해운정사 진제스님을 찾아가 법을 묻고 나와는 큰 인연이 아님을 느껴 발길을 바로 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으로 돌렸습니다.
용화사에 도착하며 방부를 들였고 역시 선방 방부는 많은 선객이 밀려있어 기약할 수 없었지요.
나는 사중 객실에 머무르며 산철을 지낼 것임을 선포하였답니다. 그렇게 산철 결제 날 나에게 선방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전해 받고 그렇게 선방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약 2년간 머물러 지내며 또 한 차례 송담 스님과 만나 공부 이야기를 하였으니 산철 해제 후 용주사를 둘러 은사 스님께 인사드리고 다음 날 법당으로 올라가는데 총무 보살 모친 49재가 있어 은사 스님이 법당 옆 주지 채 방에서 나오셔 신발을 신고 있는데 법당에 가려고 지나던 나는 스님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넸으니 그 말은 "스님 49재 법문하실 줄 아십니까" 였으니 은사 스님이 황당하였으리라. 나의 물음에 스님께서 나를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그럼, 네가 일러봐라"였습니다.
나는 주저함 없이 오른손으로 일원상을 그리니 스님께서 내 왼쪽 뺨을 후려쳐 내가 그 순간 곧바로 말하되 "그것 아닙니다" 하니 스님은 말없이 법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지 업무실로 내려가셨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있다 교무 성무 스님이 나를 찾아와 스님께서 보자고 하시다기에 주지 업무실로 내려가니 은사 스님과 총무 자승스님 그리고 교무 성무 스님이 앉아 있어 나는 방으로 들어가 앉으니 은사 스님께서 나에게 "위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이야기하라" 하시기에 "스님께 이미 말씀드렸으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니 옆에 있던 자승스님이 전생 이야기하냐기에 나는 자승스님에게 "스님이 모르는 것이면 입을 닫으세요" 하니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렇게 마무리되고 용화사로 돌아와 송담 스님을 뵙게 되었다.
인사를 드리고 앉아 스님에게 "불교라는 것이 이름만 붙여놓은 것 아닙니까" 하니 스님께서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하시어 나는 다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 여래
凡所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금강경 사구게를 들어내어 말하고 공을 말하고 원상을 말하니 스님께서 말씀하시되 "항상 그런한가" 하시어 "항상 그러하지는 않습니다" 하니 "항상 그러해야 하느니라" 하시며 "이제 두 번 다시 공부에 대하여 어떤 것도 묻지 말아라, 묻지 않아도 된다. 항상 그러해야 하느니라" 하시어 나는 인사 삼배 드리고 일어나 뒤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말씀하시기를 "죽어봤냐?" 하시니 나는 대꾸 없이 방을 나왔습니다.
나에게는 6살부터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의문점으로 그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 위한 노력이 지속 되어온 터인지라 1977년 7월 8일. 18살 때 처음 몸 밖으로 빠져나와 몸뚱어리 바라보니 그 상태를 '허공에 눈'이라 설명했고 군 병장 시절인 24살 때는 한 경계에 이르러 인생 문제를 해결했다 하며 글을 지어 홀로 읊으며 생각하였습니다.
박속에 우주요 우주 속에 박이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생겨나네
만상의 변화가 마음에서 생겨나니
마음 하나 길들이면 생멸이 없도다
한 생각 사라지면 백야에 어둠 없어
주객은 간곳없고 처처가 주인일세
제대 후 충주 살미에서 한수 충주댐 수몰지구로 마음 중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일 여정으로 갔다가 3일 만에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니
그렇게 죽음에 대한 의문을 놓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죽어봤냐는 물음이 특별함이 없었으리라.
그렇게 선방으로 돌아온 나는 송담 스님과의 인연의 폭을 좁혀 갔습니다.
내 삶에서 송담 스님과 만남은 나를 깨우고 확인하는 특별함 있는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용화사 선방에서 지내며 나의 몸은 약해져 갔고 밥을 먹으면 밥알이 그대로 나오는 상태가 되었으니 당시 나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으라 봅니다.
그렇게 지내던 용화사를 떠나서 봉암사 선원에서 동안거 지냈고 천안 광덕사 선방으로 올라와 하안거를 지냈고 어느 부부가 찾아와 만복사지 토굴을 수리하여 쓰시면 좋겠다 하여 내가 가겠노라 하고 하안거 해제 후 산철부터 만복사지 토굴을 3개월간 수리하여 동안거 결사를 거쳐 그렇게 광덕에서 10년을 보냈습니다. 만복사지에 토굴 수리하고 거처할 때 몸무게가 45킬로였습니다. 만좌선실이라는 이름으로 송광사 일도 스님과 정현 스님 그리고 나 세 명이 동안거를 마쳤습니다.
그렇게 지내며 해제 후 현몽한 안심대로 거처를 옮겨 텐트 생활을 하며 조립식 판넬 토굴을 짓고 만좌선실 현판을 옮겨 달아놓으니 그렇게 광덕에서 10년을 보낸 인연 지기가 되었지요.
광덕사 선방 역시 전강 스님 조실로 송담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는 도량이었답니다.
사진
선원장 송담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