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내 고향 금광평(金光坪)
2. 금광평(金光坪)의 풍광(風光)
어단리 칠성 저수지 / 금광리 동막 저수지 / 흙 파는 포크레인(Poclain)
금광평(金光坪)은 제법 넓은 들판으로 서쪽은 태백준령(太白峻嶺)이 막아섰는데 큰골 법왕사(法王寺) 골짜기에서 발원한 학산천(鶴山川)은 금광평의 북쪽을 싸고돌아 학산 본동(本洞)을 지나 남대천으로 흘러들고, 어단리(於丹里) 삼덕사(三德寺) 아래의 동막(東幕)골 골짜기와 단경(丹景)에서 발원한 어단천(於丹川)은 금광평의 남쪽을 싸고돌아 금광리와 덕현리를 거쳐 안인천(安仁川)을 이루고 동해(東海)로 흘러드는데 그 가운데 분지(盆地) 형태의 제법 넓은 벌판이 금광평(金光坪)이다. 어린 시절 내가 자란 학산 금광평(金光坪)은 6.25사변 후 북에서 넘어온 피란민의 정착을 위해서 정부에서 당시 황무지(荒蕪地)와 다름없던 이곳을 개간(開墾)했는데, 후일 개간한 사람들에게 땅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불하(拂下)를 해 주었다고 한다.
6·25사변 후 어려운 시절이라 품팔이꾼으로 타관사람들이 수도 없이 몰려와서 마을이 갑자기 북적거렸는데 공사현장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였지만 우리 집도 건넌방을 비워서 세를 놓았었다.
허허벌판에 쓸모없는 잡목들만 들어차 있던 벌판은 정부의 개간사업으로 마을 한쪽 작은 개천 주변에 기다란 늘레집이 들어섰는데 소문을 듣고 몰려온 피란민들에게 부엌이 붙은 방 한 칸씩 무상으로 배정해 주었는데, 당시 늘레집은 10여 호가 함께 붙어 있는 기다란 집이었다.
개간사업이 시작되면서 마을 사람들로 ‘개척대(開拓隊)’도 조직되었는데 늘레집 가운데 칸을 사무실로 꾸며 간판도 달고 개척대장(開拓隊長)도 뽑아 정부 측의 창구(窓口) 역할(役割)을 했다.
당시 개척 대장은 노(魯)씨 성씨를 가진 분이었는데 ‘노반장’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동네 사람들은 모여서 마을 회의도 하는 등 제법 마을의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수리조합공사는 골짜기의 물길을 돌리고 먼저 깊은 구덩이(掘方:호리가다)를 판 다음 흙과 자갈을 다져 넣는 일을 한다. 공사현장 바로 밑에는 기다란 숙소와 그에 딸린 식당(飯場/함바)도 생겼고, 흙을 실어 나르는 트럭도 10여 대씩 와서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 마을 앞에 제법 높이 솟아있던 언덕을 송두리째 파내 트럭으로 흙을 실어 나르느라 항상 동네는 흙먼지로 자욱했다. 우리 어머니와 막내 누님도 동네 사람들과 같이 먼저 공사가 시작된 2공구 공사장에 나가 일을 하셨는데 ‘하꼬(箱)떼기’를 하였다고 한다. 밑이 없는 커다란 나무상자(하꼬/箱)를 놓고 그 속에 저수지 바닥의 흙을 파다가 하나 가득 채우면 도장을 받았다가 저녁에 도장 갯수를 세어 전표(錢票)를 받는다.
처음에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인데 나중에 둑이 제법 높아지면서 바닥에서 흙을 퍼담아서 이고, 지고 가파른 비탈을 올라와 둑 위에 놓은 하꼬에다 쏟아붓는데 물먹은 흙은 다져지면서 부어도 부어도 한 하꼬(箱)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전표(錢票) 쪼가리를 받아 들고는 서둘러 집으로 와서 저녁을 끓여 먹는 둥 마는 둥, 어둠 속에서 밭일과 집안일을 돌보고는 다음 날 새벽이면 다시 공사장으로 나갔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터였다. 남자 장정들은 두 사람이 한 조(組)가 되어 레일에서 구루마(밀차)를 탔다.
어느 정도 높아진 둑 위에다가 레일을 깔고는 산 쪽에서 구루마(車)에 흙을 퍼 담아 올라타고는 부레끼(ブレーキ/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막대기를 잡고 호기 있게 레일을 달려 내려온다.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도 요란한데 끝부분에 오면 막대기를 뒤로 힘껏 당겨 구루마를 멈춘 다음 위에 얹은 거푸집 모양의 나무상자를 벗기고 삽질로 흙을 반쯤 퍼낸다.
나머지 흙은 브레이크 막대기를 뽑아 지렛대 모양으로 구루마 옆구리에 대고 밀어서 옆으로 전복시켜 흙을 부었다. 그리고는 다시 거푸집과 막대기를 올려놓고 둘이 밀면서 온 길을 되짚어가고 오기를 반복한다.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리던 구루마 행렬과 개미 떼처럼 바닥에서 파낸 흙을 이고 지고 줄 맞추어 비탈을 오르던 아낙네들과 아이들,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트럭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일하고 받은 전표는 한 달에 한 번 간조(かんじょう/勘定:중간정산)를 하여 사무실에서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외지에서 공사판에 돈을 벌려고 온 사람들은 숙소 사용료, 밥값 등을 제하고 나면 몇 푼 남지도 않으련만 그나마 일거리를 구하려 타관에서 오는 사람들이 매일 북적거렸다.
젊은 사람들은 간조(勘定)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전표를 와리깡(할인)하여 술을 먹거나 담배를 사 피웠는데 와리깡(割勘/할인)을 해주는 전주들은 보통 10%를 떼고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기간이 20일이 넘으면 15%씩 터무니없는 고리(高利)로 떼고는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싫으면 그만두라는 등 횡포를 부려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어느 날, 만복이 형이 나서서 인부들을 모아 고리(高利)로 와리깡(割勘)을 못하도록 바로잡기도 했다.
사천집에 밥을 붙여먹던 명철이 형은 타관에서 온 사람으로 2공구 수리조합의 현장 십장(什長)이었다. 공군을 제대했다 하고 키도 훤칠하며 말도 시원시원할뿐더러 예전에 주먹깨나 날렸다더라고 소문이 나서 동네 처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사천(沙川)집 큰딸인 명자가 쫓아다녔는데 연당(蓮塘)집 연옥이도 쫓아다녀서 결국 친한 친구 사이가 갑자기 연적(戀敵)이 되고 말았다.
명철이 형은 딱히 누구를 찍어 정을 주지 않고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쳤던 모양이었다.
명자와 연옥이도 물론 공사판에 나가 하꼬떼기를 했는데 미처 하꼬 언저리까지 흙이 차지도 않았는데 도장을 찍어주기도 하였고 슬금슬금 그늘 밑에 앉아 농땡이를 쳤는데도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후하게 전표(錢票)를 받고는 했다.
저녁이면 명철이 형은 명자네에 과자 쪼가리며 빗이나 민경(面鏡:손거울) 나부랭이를 내놓아 명자 어머니의 환심을 샀다.
다음 날은 다시 연당집에 가서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울이 고향이라는 둥, 집에 엄청나게 부자라는 둥, 시원시원한 달변(達辯)으로 연옥이 어머니의 마음을 휘어잡고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사천집과 연당집에서는 미리부터 서로 사위로 점을 찍고 과년한 딸이 달밤에 명철이와 쏘다니는 것을 모르는 체하였다.
어떤 때는 셋이 만나서 쏘다니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중 하나와 은밀히 만나기도 했는데 이따금 여자 둘이 아옹다옹 말다툼하고는 했지만, 그런대로 잘 지나갔다.
마을 어른들은 그래도 집안 사정을 보면 연당집 연옥이가 낫다느니, 타관 놈을 어떻게 믿느냐는 둥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동네 청년들은 타관 놈이 마을 처녀들을 망친다고 괜스레 열기를 터뜨리고는 했지만, 감히 누구 하나 명철이 앞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그랬는데 막바지쯤 명철이가 연당집 연옥이로 기우는 듯 행동을 했던 모양이었다. 얼마 동안 명자는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약을 먹었다더라, 밤에 물에 빠져 죽는다고 연당(蓮塘) 가에 서 있는 것을 끌어왔다더라, 사천댁이 머리채를 잡고 행실 똑바로 하라고 등판대기(등판)를 후려갈기는 것을 봤다는 등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공사가 끝나고 명철이 서울로 가면서 연당집에 곧 어른들을 모시고 오겠다고 약조를 하고 주소도 적어주고 갔다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주소를 들고 서울로 찾아가겠다는 연옥이를 붙잡아 놓고 한 달쯤 기다린 끝에 그 주소로 편지를 써서 보냈더니 편지가 되돌아 왔다고 하였다.
명철이 말고도 외지에서 온 품팔이꾼과 눈이 맞아 쉬쉬하면서 만나던 처녀들도 몇몇 있었는데 공사판을 떠난 후 한 사람도 맺어진 사람이 없었다. 타관에서 온 떠돌이 공사판 놈들을 믿은 사람이 바보라는 둥, 그놈의 수리조합 공사 탓에 동네 처녀들만 바람이 들고 망쳤다는 둥 말들이 많았지만, 후일 모두 시집들을 가서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다.
피란민들은 이북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많았고 수리조합(水利組合) 공사가 벌어지면서 경상도와 전라도 쪽에서도 품팔이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6.25 사변 직후라 인심이 흉흉했는데 특히 상이군인들의 행패가 심했던 것 같다. 목발을 짚은 상이군인들이 가게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는 것은 물론, 지서(支署:경찰서)에 들어가 순경들 따귀도 후려갈길 정도였다니..
또, 당시는 북한 공산주의 사상(思想)에 물든 사람도 많아 툭하면 잡혀가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 우리 마을에도 이북(以北/北韓)에서 피란 온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노(魯) 반장과 뭔가 다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반장이 강릉 읍에 갔다 오다가 진재(長峴/모래고개) 입구에 헌병들 초소를 지나다가 걸려들어 바로 뒤의 골짜기에서 총살(즉결처분)을 당했다고 한다.
함께 오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 과부가 조금 뒤에 따라오던 노반장을 헌병에게 손가락질하며 악질 빨갱이라고... 동네 사람들 귀에 들어가 다음 날 아침에 과부집에 몰려가 보니 야반도주....
이미 집이 텅 비어있었단다.
마을에는 원래 거주했던 몇몇 토박이들도 있고 경상도나 전라도, 혹은 인근에서 옮겨와 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사가 오래였던 학산 본동(本洞/현 학산 1리) 사람들은 모두 외지 떠돌이들의 집단이라 하여 뭉뚱그려 ‘삼팔따라지(3.8선을 넘어온 피란민을 비하하는 말) 동네’라는 둥, ‘개발대 놈들’, 혹은 ‘맨발대(가난/진흙땅) 놈들’ 이라 부르며 깔보았던 것 같다.
마을역사가 오래고 명문가들이 많은 학산 본동(本洞)에 비하면 땅이 척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땅뙈기는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개간 직후는 모두 밭이었는데 제법 벌판이 넓어 마을 위쪽인 옥봉(玉峰) 쪽은 수박이나 참외밭도 많았고 감자밭도 상당히 컸다. 훗날 논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초기에는 보리나 밀, 조나 감자를 심어도 거름기가 없는 땅이다 보니 수확이 신통치 않았는데 그 척박한 땅에서도 청밀(호밀)은 잘 자라서 키가 2m 이상이나 자라고 제법 수확이 괜찮았다.
그러나 청밀은 밥을 하면 시커먼 색깔로 맛도 없었고, 식으면 돌덩이처럼 딱딱해졌는데 가루를 내어 국수를 하면 시커먼 색깔에 찰기(끈기)가 전혀 없어서 국수 가락이 흐물흐물하여 젓가락으로 집으면 뚝뚝 끊어지며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6.25 사변 후, 법왕사(당시 七星庵) 입구의 큰골 입구를 막아 저수지(貯水池)를 만들었는데 당시 ‘제3 공구 수리조합(第三 工區 水利組合)’이라 했고 지금의 ‘칠성지(七星池)’가 생겼다.
또 동막골 입구를 막는 공사도 있었는데 ‘제2 공구 수리조합(第二 工區 水利組合)’이라 했고, 공사가 먼저 끝나서 지금의 ‘동막지(東幕池)’가 먼저 생겼다.
수리시설이 갖추어지기 전, 불모지였던 금광평은 갑자기 과수원 바람이 불어 돈푼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과수원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어단리 쪽에는 제일 큰 과수원인 ‘만평(萬坪) 과수원’, 그 아래 금광리 쪽에는 남(南) 씨 형제 중 동생의 과수원인 ‘남(南) 씨 과수원’이 잇달아 들어섰고, 우리 마을인 학산리 쪽에는 네 개의 과수원이 잇닿아 있었는데 남 씨네 형인 ‘재집 과수원’, 우리 ‘고모집 과수원’과, 강릉 시내에서 양조장을 하다가 우리 마을로 온 ‘대포 영감 과수원’, 그리고 내가 중학교 입학할 때 책가방과 모자를 사주었던 ‘이(李) 씨 과수원(현 임마누엘 과수원)’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온통 과수원 동네였던 셈이다.
당시, 마을 가운데에서 흙을 파고 실어나르느라 우리 마을은 항상 흙먼지로 자욱한 마을이었다.
수리조합 공사가 끝나자 대부분 논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과수원이 몇 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