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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초막절 곧 수장절이며 추수감사절이다
레23:35-44 눅17:13-19
금년추석은 여느해와는 달리 매우 더운 추석이었다. 지난해 9월 최고 기온은 26℃라고 하였는데 금년 9월은 추석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30℃를 넘으니 에어콘을 틀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들 하는 것을 들으니 이런 기상이변은 처음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더워서 야단들이지만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태풍 야기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도 잃고 집도 잃고 논밭에 심었던 곡식들도 휩쓸려가 벼렸으니 그들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지금 덥다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지난 9월 6일 남부 하이난과 광둥성 등에 상륙한 제11호 태풍 '야기'는 중심 풍속 시속 240km의 초강력 태풍으로 중국에서만 4명이 숨지고 90여명이 다쳤는데, 하이난섬 내 주택 2만5천채가 파손되어 이재민은 120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또 이어서 상하이를 강타한 제13호 태풍 '버빙카'도 순간 초속 42미터의 강한 바람이 불면서 상하이에 있는 나무 1만그루를 뿌리째 뽑았다고 하는데 이 태풍이 물러가자 마자 이번에는 14호 태풍 '풀라산'이 중국 동부에 상륙했다. 최대 태풍인 '버빙카'가 훑고 지나간 상하이와 저장성은 나흘 만에 다시 찾아온 태풍 풀라산에 바짝 긴장한 상태이다. 이번 연이어 중국을 향해 온 태풍중 제일먼저 온 태풍이 야기이다. 야기는 지난 7일 베트남에 상륙해 홍수와 산사태 등으로 사망자는 281명, 실종자는 67명이다. 일본도 역대급 태풍 ‘산산’으로 큰 피해가 발생하였지만 이처럼 태풍이 잇따라 중국으로 향하는 가운데 한반도는 올해 태풍이 상륙하지 않고 폭염만 지속되면서 우리나라만 태풍의 무풍지대라고 한다. 그런데 폭염이 난 자리에 폭우가 들었다. 20일과 21일 전국 대부분 지역에 큰 비가 내렸다. 제주도와 영호남은 곳곳이 물에 잠겨 피해가 속출했다. 부산과 주변 도시에선 역대 최대의 9월 하루 강수량을 기록했다. 특히 21일 하루 내린 비의 양이 112년 기상 관측 역사상 가장 많은 곳이 속출했다. 부산(392mm) 울산과 등은 이날 9월 일 강수량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어제부터 비가 오면서 이젠 폭염도 물러갔고 가을날씨로 접어드는 것 같다.
우리교회는 지난주에는 추석을 앞두고 성탄예배를 드렸으며 오늘은 추수감사절예배를 드리고 있다. 우리의 추석날이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이며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을 아는 교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옛날 추석 때는 고향에 성묘하러가는 사람들이 북새퉁을 치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성묘문화도 디지털시대에 맞게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도권에서 최대 묘지가 있는 인천가족공원을 방문하는 성묘 인원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시민들의 안전하고 편안한 성묘를 위해 직접 성묘를 오지 않고도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온라인 성묘 서비스도 운영 되는데 인천시설공단은 이번 추석에도 온라인 성묘 시스템을 통해 ▲온라인 차례 지내기 ▲고인갤러리(사진, 동영상) ▲유가족 메신저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실제로 인천시가 2021년 전국 최초로 시작한 온라인 성묘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으며, 올 추석에도 성묘객 분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부터 추석 명절을 지켜왔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올해는 추석명절이 너무 일찌기 다가와서 그런지 명절분위가도 예전 같지 않다. 시절따라 가는 절기가 백로지나 秋夕이라고 했는데 우리민족 큰 명절 팔월 한가위 추석이면 집집마다 전 부치고 송편을 대광주리에 가지런히 놓으면서 가족 모두가 기뻐하였기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화두가 자연스러웠는데 보통 믿지 않는 가정에서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대세를 이루지만 추석에 대한 연구를 하다보면 우리민족들도 아주 오래 전 삼한시대 이전에는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다는 제천행사라는 것이 고대 역사책에 나오는데 중국의 고대사는 분명히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믿었던 민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중국고대서인 후한서에서 동예전은 "시월이 되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말씀을 읽으며 밤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이라 한다." 삼국지에서는 고구려는 "시월에는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동맹이라 했다." 진한은 "성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께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이라고 했다." 중국의 고대사 뿐만 아니라 1675년(숙종 2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규원사화에도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이자 임금임을 밝히고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신씨이강어단목지하 이환검신인(神氏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이라 해서 그 뜻을 살펴보면, '신씨천황께서 이미 박달나무 밑에 하강했고, 환검신인이 다시 단목(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단(檀)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은 것이며, 단군이란 박달나라의 임검이다'라는 내용이다.
단군이후 약 2천년 지나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가 들어올 때를 전후해서 한문이 들어왔었던 때 사가들이 역사를 한문으로 서술하다 보니까, '박달 임검'을 박달단(檀) 임금군(君)자로 쓰기 시작해서 그 때부터 단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규원사화에 보면, 제3세 가륵임검 때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단군이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내고, 교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고, 도를 이뤄 행하게 한지 몇해 동안의 백성들이 모두 감화되어 악은 없어지고 천하는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는 창세기에서 노아가 홍수 심판 후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창8:20) 노아가 주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가운데서 취하여 제단에 번제헌물을 드렸더니.
이 말씀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교시하는 내용은 성경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중국 고대사와 규원사화를 통해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믿는 민족임을 알 수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나 유교를 전통종교로 생각하고,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인식하는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귀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은 유일신을 믿었던 민족이었다. 그러면 불교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AD 67년 중국대륙에 들어온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소수림왕 2년 즉 AD 372년이었다. 아무리 교통이 불편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불교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데 300년 넘게 걸렸던 것일까?
그것은 고구려에서 불교를 막아낸 강력한 종교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샤머니즘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무당이나 점쟁이의 세력이 불교를 300년 동안이나 못들어 오게 했다는 것은 억지 논리다. 소수림왕은 호국 불교를 도입하고 그 후 384년에 백제를 방문한 호승 마라난타를 불승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라난타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우리 주께서 오신다라는 뜻의 마라나타와 유사하다. 호(胡)는 서역에서 왔다는 말이고, 당시 기독교의 선교사도 승(僧)이라는 말로 불렀다. 어쨌든 불교는 고구려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라 포교를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고구려가 받아들이고 다시 155년이나 지난 뒤인527년 법흥왕 때 불교 도입을 주도한 세력이 병부령 이사부와 어릴 때 고구려에 들어가 혜량이라는 중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돌아온 무장 거칠부 등 군부세력들이 호국 불교를 들여오고 다시 5년 후인 532년 기독교의 종주국이었던 금관가야를 멸망시키자 백제의 성왕은 마침내 백제에도 불교를 들여오기로 결심했다. 541년에 성왕은 양나라로부터 불경과 불상을 도입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1700년 밖에 안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토속종교인양 주인 행세를 하고 그보다 2000년 전에 들어온 기독교는 찬밥신세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4~500년 전에 동양의 공자와 서양의 플라톤과 인도의 석가가 인생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고, 예수님이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시대는 흘러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구한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옴으로 기독교 선교 130년 정도에 기독교인이 800만 정도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전 세계의 대형교회는 거의 우리나라에 있을 정도이니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유독 그 전파되는 힘이 가히 놀라울 정도였던 배경이 무엇인가?
AD 67년 중국대륙에 들어온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소수림왕 2년 즉 AD 372년이었다. 아무리 교통이 불편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불교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데 300년 넘게 걸렸던 것일까?
그것은 고구려에서 불교를 막아낸 강력한 종교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샤머니즘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무당이나 점쟁이의 세력이 불교를 300년 동안이나 못들어 오게 했다는 것은 억지 논리다. 소수림왕은 호국 불교를 도입하고 그 후 384년에 백제를 방문한 호승 마라난타를 불승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라난타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우리 주께서 오신다라는 뜻의 마라나타와 유사하다. 호(胡)는 서역에서 왔다는 말이고, 당시 기독교의 선교사도 승(僧)이라는 말로 불렀다. 어쨌든 불교는 고구려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라 포교를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고구려가 받아들이고 다시 155년이나 지난 뒤인527년 법흥왕 때 불교 도입을 주도한 세력이 병부령 이사부와 어릴 때 고구려에 들어가 혜량이라는 중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돌아온 무장 거칠부 등 군부세력들이 호국 불교를 들여오고 다시 5년 후인 532년 기독교의 종주국이었던 금관가야를 멸망시키자 백제의 성왕은 마침내 백제에도 불교를 들여오기로 결심했다. 541년에 성왕은 양나라로부터 불경과 불상을 도입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1700년 밖에 안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토속종교인양 주인 행세를 하고 그보다 2000년 전에 들어온 기독교는 찬밥신세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4~500년 전에 동양의 공자와 서양의 플라톤과 인도의 석가가 인생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고, 예수님이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성경에는 한국을 지칭한 것이 직접적으로는 없지만 동쪽이나 동방을 표현한 말씀들이 우리나라를 상징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41: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려오고 땅의 우두머리(돌모퉁이)들로부터 너를 불러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내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으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였노라, 하였노라
(사46:11) 내가 동쪽에서 굶주린 새를 부르되 곧 먼 나라에서 나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리라. 참으로 내가 그것을 말하였은 즉 또한 그것을 이룰 것이요. 내가 그것을 작정하였은즉 또한 그것을 행하리라.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와같은 말씀들은 마지막 때 동방의 한 민족을 불러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말씀이신데 여기에 합당한 민족이 어느 민족일까?
우리 민족은 5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35년간 일본치하에서 오욕의 세월을 보냈고 해방 후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가난과 수치와 모멸을 겪으면서도 우리에게는 당장 하루를 사는 생계가 더 급했던 우리들이었는데 경제 개발로 경제성장이 급상승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재야에서도 잃어버린 역사 찾기를 위한 연구가 시작됐다. 그와 함께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등 민간사서들도 출판되면서 이런 뿌리찾기를 위해 정부가 설립한 정신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민족사관 연구에 힘쓰고 있다. 이제는 교회도 ‘우리 것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대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니라 균형잡힌 기독사관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2000년 전의 땅을 찾아 들어가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는데 우리나라는 고조선 때부터 섬겨온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를 외래 종교로 단정하고 이 땅에 들어온지 1700년도 안되는 불교를 전통 종교라고 내세우는 것부터 바로 잡을 필요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민족과 중국 민족은 무려 20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민족이었는데, 왜곡된 역사로 인해 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불교나 유교가 전통종교인 줄 알고 살아왔다. 우리 민족이 노아의 장자인 셈의 후손으로서 원래 하나님을 믿었던 민족이었기 때문에 구한말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민족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인 마지막 때 역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동쪽으로부터 올라와 땅과 바다를 해할 권능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치며(계7:2). 이런 말씀은 마지막 때는 해 돋는 동방에서 일어나 온전한 진리의 빛을 전 세계에 비추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큰 부흥의 역사를 일구어 내는 것이 한국교회의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삼국시대 이전 이 땅에 살았던 조상들이 가을에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은 단군시대부터 이미 하나님을 믿었던 민족이다. 창세기 10장 25절 이후에 나오는 욕단의 후예가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잘 믿던 우리조상들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기 까지 우리 조상들은 추석에 제천행사를 통해 하나님을 믿었던 민족이었기에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하였고 오늘날 우리나라는 도시이건 시골이건 아니면 해외에 나가든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교회가 제일먼저 세워진다는 것은 우리민족은 특별히 하나님이 택하셨던 우리 대한민국이 아닌가? 그러므로 추석을 맞이하여 감사를 드릴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이렇게 천고마비의 가을에 추석명절을 주셨고 이 명절을 통해 금년 한해에도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 조상차례로 추석을 맞이하는 일반인들
추석을 맞이하는 일반인들은 당연히 차례상 차려놓고 절하면서 추석을 지내지만 다른 종교인들은 어떻게 지낼까 하던 차에 얼마 전 명절 때 카톨릭식 차례를 소개한 글을 읽었는데 카톨릭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 왔을 때는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박해를 받은 적도 있지만 20세기 들어와서는 한국의 제사가 효의 실천이며 미풍양속이라고 해서 지금의 카톨릭은 제사에 대한 추도예식을 보급한다는 내용인 즉 이렇습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신자들이 미리 조상의 이름과 봉헌금을 성당에 제출하면 추석이나 설날 당일 성당 앞에 간소한 합동차례상이 차려놓고서 합동위령미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합동위령미사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즉 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자비를 청하는 성경구절에 전통가락을 붙여 구성지게 노래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기도법이라고 합니다. 합동위령미사중에는 물론 죽은 조상을 위한 기도문이 낭독되고 가족들끼리 지낼 때에는 차례상에 십자가를 놓고 성경을 읽고 향을 피운 뒤 절을 하고 마지막으로 연도를 한 뒤 성가를 합창하는 것으로 차례가 끝나면 차린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인데 이런 카톨릭 차례는 카톨릭교리와 어긋나지 않으며 조상에 대해 공경의 뜻을 표하기도 하므로 명절날에 카톨릭 신자들이 많이 행한다는 합동위령미사는 그들에게는 다소 위로는 되겠지만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드린 미사를 하나님이 받으실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제가 자신있게 말하건데 복은 고사하고 저주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카톨릭 교리대로 명절날 합동위령미사 지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상앞에 절하지 말라는 제1계명에 대한 것을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성경은 이방인들의 제사는 마귀들과 교제하는 것이라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고전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들이 마귀들과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
카톨릭 위령미사나 개인이 드리는 제사가 이방인들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결국 조상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제사를 드린다면 이방인의 제사이므로 마귀들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추도예배라 하더라도 이방인의 제사라고 밝히고 있다면 오늘날 카톨릭에서 드리는 명절합동위령미사도 미풍양속과 효도와 교리를 들먹이면서 돌아가신 분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분명히 이방인의 제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장례식 이후에는 죽은 자를 위해 제사드리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제사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제사의 또 다른 방법이며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면 그런 행위에서 벗어나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추석 명절
올 한해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지진 기근 홍수 가뭄 산불 같은 자연재앙으로 인간들도 동물들도 큰 고통을 받기도 하였는가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런 재난에서 비껴갔으니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있나요? 정말 올 추석도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잘 익은 과일들이 이렇게 풍성한 것을 보면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햇빛과 비를 때맞춰 골고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하건데 추석의 진정한 의미는 성경에 기록된 수장절처럼 한 해의 농사를 잘 거두고서 풍성한 오곡백과를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명절을 지켜야 합니다. 추수감사절은 추수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절기인데 우리나라 추석명절은 바로 추수감사절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셈의 후손으로 노아가 아들 셈에게 이르기를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창9:26)하셨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이란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만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12:7)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추석에 가장 많은 듣는 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으라는 덕담이 있듯이 이러한 기쁨을 온 가족이 함께 누린다면 추석은 연중 으뜸 명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들이 복을 준다고 생각하고 추석을 맞이하여 햇곡식으로 빚은 송편과 햇과일을 제사상에 올려서 조상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가까운 다른 나라들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2) 이웃나라의 추석 문화
1) 달에게 제사를 지내는 중국의 ‘중추절’
우리나라처럼 중국도 음력 8월 15일 중추절은 일찍이 주나라 때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달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 중국은 우리나라처럼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일부는 달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달을 쳐다보며 소원을 비는 놀이를 한다. 달은 무생명체로 인간에게 복을 줄만한 존재가 아닌데 인간이 피조물에게 복을 달라는 것이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또 중국은 중추절을 맞이하여 제사상에는 둥근 달의 모양을 본떠 만든 월병을 놓는데 제사 끝나면 먹는다고 한다.
2) 조상의 영혼을 맞아들이는 일본의 ‘오봉’
일본은 양력 8월 15일에 맞이하는 오봉은 조상의 영혼을 맞아들여 대접하고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날로 대표적인 행사는 무카에비로,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 묘소나 길거리 대문 등에서 불을 피우는 것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오도리라는 민속춤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저녁에 ‘유카타’라고 하는 무명 홑옷을 입고 마을 광장에 모여, 통나무로 짜 만든 높이 3~4미터 정도의 ‘야구라’라는 망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이는 저승에서 찾아온 조상의 영혼들이 이승에 있는 후손들과 함께 즐겁게 춤을 추고 다시 저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의 중추절이나 일본의 오봉같은 문화는 추수의 수확을 주신 하나님에게는 어떤 감사도 없다는 것이다.
3)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미국 추수 감사절의 유래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102명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2달간의 항해를 걸쳐 1620년 11월 19일에 미국 동해안 프리머스에 도착했는데 이후 이들은 첫 번째 맞이한 혹독한 겨울추위와 기근으로 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51명이 이듬해 가을 첫 수확을 거두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라고 한다니 미국선조들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뉴욕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신앙의 자유를 찾은 102명의 청교도들을 상징한다는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상륙한 102명중 첫 겨울을 보내면서 추위와 병으로 절반이나 죽었지만 살아남은 청교도들의 후손인 미국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그 다음날은 Black Friday로 Thankgivings을 지키고 있다.
2.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한국 교회에가 보통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전해준 영향이었지만 성경을 보면 추수감사절은 수장절(초막절)을 근거로 지켜야 하는데 수장절은 추수를 마치고 창고에 저장한 후 추수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절기이다.
(출23:16) 네가 밭에 뿌린바 네 수고의 첫 열매의 수확절을 지키라. 이는 밭에서부터 수고하여 얻은 것을 거두어들인 때 곧 한해의 끝에 있는 수장절을 지키라.
(레23:34-35) 34 이스라엘 자손에 말하여 이르라. 이 일곱째 달의 십오일은 이레동안 주를 위한 장막절이 되리라. 35 첫째 날에는 거룩한 집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그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스라엘의 수장(초막, 장막)절은 한해의 농사를 거두어 들인 후 한주간의 초막생활을 통해 조상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절기이므로 초막절이라고도 한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추석은 성경의 초막절 혹은 수장절을 근거로 드려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연관성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비와 햇볕과 바람을 골고루 주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면 먹고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실제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세세히 돌봐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까지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추석을 맞아서 우리를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조상들은 아주 오랜 옛날에는 한 해의 농사를 마친 후에는 제천행사로 감사를 드렸던 것이 고려시대로 오면 ‘풍농제라는 절기가 되었고 조선시대로 오면 국가적 행사로 추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한가위는 그 동기가 농사의 결실을 맺게 해준 하늘에 제천행사를 드리는 의식에서 비롯된 만큼 추석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이 추수감사절은 레위기에 기록된 수장절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절기는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가을축제인데 우리조상들은 한가위를 기준으로 첫 수확물로 드렸으므로 이제는 추석날을 추수감사절로 정한다면 더 성경적이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기독교의 토착화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들에게는 추수 감사절을 추석날에 지키는 것도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2) 추석의 새로운 모델
이제는 추석을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문화로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1) 죽은 조상들 추모하는 문화에서 산 가족들이 즐기는 문화로
인간이 죽으면 육은 흙으로 되고 영은 구원받았으면 천국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지옥에서 영존하는 것인데 한 번 떠나간 영혼은 다시는 세상으로 올 수 없는데 조상에게 제사하는 추석문화는 한마디로 주인공 없는 잔치와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겠습니까? 정말이지 제사는 죽은 부모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이런 제사를 통해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 교제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2) 과거 지향적 문화에서 미래 지향적 문화로
미래지향적 문화는 앞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문화로서 우리 인간들은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미래를 보장하는 하나님을 믿으면 사는 날까지 두려움 없이 평안히 지낼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믿음과 앞으로도 항상 인도해 주실 것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감사를 드리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좋은 일 생길 때만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좋은 일이 생기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으며 또 모든 일에 감사하고 지난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서도 하나님께 미리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를 선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떤 사람이 감사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나요? 주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항상 미래 지향적인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3. 추석이 초막절(수장절)이며 곧 추수감사절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대표적인 절기가 유대력으로 1월 유월절, 5월 오순절, 7월 초막절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절기는 정월 설과 팔월 추석인데 우리의 정월 설은 새해가 시작되는 年頭절기인데 유대인들의 유월절도 해가 바뀌는 신년 명절이고 보니 우리의 설 명절에 해당되고 추석은 한 해의 농사를 추수하는 감사의 절기인데 초막절도 포도 올리브 무화과를 추수한 후 창고에 저장해 놓고 온 백성이 함께 지키는 가을 절기로 놀랍게도 초막절과 추석은 곡식을 추수한 것에 감사를 드리는 것도 같지만 날짜까지도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수장(초막)절과 추석은 날짜가 일치한다.
음력 8월 15일인 추석은 청나라 초기의 시헌력을 따른 것이다. 유대력 7월15일인 초막절은 레23:39에 따르면 토지의 소산 거두기를 마치고 즉 추수한 것을 저장하는 때이므로 수장절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초막절을 수콧이라 부르며, 추분과 가까운 음력 대보름 저녁부터 초막절을 시작한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추석과 격년으로 날짜가 거의 겹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격년에는 1달 차이가 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년을 바벨론 달력을 따라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점에 맞추어 니산월을 정월로 삼아서 그 니산월, 즉 정월 보름에 그들이 출애굽하여 일곱 번째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즉 50일째 되는 날에 둘째 절기인 칠칠절, 즉 오순절을 지켰고 또 일곱 번째인 티쉬리월 15일에 세 번째 절기인 초막절을 지켰다. 그래서 유대력으로7월 15일에 지키는 초막절이 우리나라의 음력 8월 15일과 격년으로 겹친다는 이유는 유대력이 시헌력 보다 한 달이 늦기 때문인데 우리의 추석과 초막절은 항상 그 날짜가 격년으로 일치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다만 우리의 달력이나 유대인의 달력 중 어느 한쪽에 윤년이 들어 있는 해에만 한 달의 차이가 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것을 알게 된다면 추석이 곧 초막절이며 이날이 곧 추수감사절이라고 볼 수 있다.
(2) 달밤을 즐기는 놀이에서 일치하다
우리들 하루 생활의 시작은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에 끝나는 것인데 유대인들 하루는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날 해 떨어지는 저녁에 끝난다. 실제로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날에 모든 것을 창조해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이 하루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절기 행사에서 말할 것도 없이 저녁 행사가 모두 중요했는데 그 저녁이란 언제나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떠오르는 시각에 시작이 되면서 그들에게 달밤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이다. 일찍부터 태양을 섬겨오던 애굽 사람들과는 아주 정반대인 것이다. 우리나라 추석이라는 명칭을 보면 가을 추(秋)자와 저녁 석(夕)자로 가을 저녁이란 뜻이다. 아침도 아니고 대낮도 아니고 가을저녁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놀라운 명칭인가? 저녁을 중요시한 날은 연 중 추석밖에는 없다. 수장절과 추석은 밤에 즐기는 명절로 일치한다.
(3) 고향을 찾고 조상을 기억하는 풍습도 같다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에서도 초막절은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흩어진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들은 매년 초막절에는 고향을 찾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고 이 초막절에 순례를 못하는 자들은 자기 집 곁에 초막을 짓고 전 가족이 그 속에 들어가 절기를 지켰다. 바로 옛날 광야에서 나그네로 장막을 치고 살았던 조상들의 장막 생활을 잊지 않고자 그들은 광야의 장막 생활을 터득하며 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추석이 되면 조상 무덤이 있는 고향을 가서 부모 산소에 벌초도 하고 성묘도 할 수 있고 부모 형제들도 만날 수 있다는 것들이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이 공통으로 느끼는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4) 추수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절기이다
수장절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헌물은 추수해 드린 올리브와 무화과 그리고 포도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 가나안 농경문화에 따른 감사 예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절기일지라도 가축을 치는 일부의 사람들은 양이나 짐승을 드려 이스라엘의 유목 문화적 전통을 그대로 고수해 오기도 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전에는 추수한 후에는 하늘의 신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천행사를 하였으나 고려시대 풍농제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추석날에는 고향을 찾아 조상에게 감사의 차례를 지내고 산소를 찾아가 성묘를 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마을은 각종 놀이 행사에 참여도 했다. 이런 것은 같은 유교 문화권 안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직 한국인들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이다.
4. 누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1) 고난을 겪은 사람들만이 감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잘 나갈 때 보다는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게 된다. 질병을 통해서, 때로는 사업의 어려움을 통해서, 때로는 고독한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장 힘들어 하는 때가 정말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누가복음 17장 에는10명의 문둥병자들이 길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치료받았다.
(눅17:13-14)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외쳤을 때 긍휼을 요구하는 문둥병자들에게 주님이 내려주신 긍휼은 14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이처럼 가장 어려운 때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다 낫지만 감사한 사람은 오직 사마리아 사람뿐이었다. 감사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감사할 수 있을까?
(2) 은혜를 잊지 않은 자가 감사할 수 있다
받은 은혜는 아무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자들만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눅17:15-16)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16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열 사람이 정결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그 아홉사람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 고침 받은 자들은 열 명인데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열 문둥병자 중 사마리아 문둥이 한사람만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았어도 소유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소유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들만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수 있으며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 있어도 감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까? 감사를 상실하고 사는 자입니까? 문둥병자 중의 한 사람은 자신이 치료받았던 것보다도 그것을 치료해 주신 예수님에게 더 큰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또, 누가 감사할 수 있습니까?
(3)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자만 감사할 수 있다
주님이 돌아온 한 문둥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눅17:17-18)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주님이 물으신 아홉과 돌아 온 한 사람의 차이는 바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 차이였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모두 다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주셨는지도 잘 알았는데 아홉은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못했던 것은 저들은 예수님에게 감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게 그 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어서 가장 먼저 주님께 드려야 할 감사가 뒷전으로 밀린 결과 저들은 감사를 상실한 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아홉명 문둥병자의 모습이 바로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지 한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데 늘 감사하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를 드리며 사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가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차이가 난 게 아니라 감사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눅17: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아멘.
주님의 구원은 감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향한 감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이번 한 주간도 우리가 받는 것보다 주시는 분에게 더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찬양 하십시오. 지극히 작은 일 하나라도 받을 때마다 그분에게 찬양 드리고 감사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마지막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영혼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위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으면 구원받기 전 죄인이었을 때를 잊지 말고 감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비천하고 사악한 죄인이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셋째 하늘나라에 올라가기도 하고 신약 성경의 27권중의 13권을 기록하였지만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자라'고 했으며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겸손히 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 감사를 드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없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감사는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4) 감사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감사하는 사람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온갖 것들을 새롭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은 물론이요, 그 사랑의 통로가 된 것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의 씨앗이 되어주신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내 오장육부와 이목구비도, 나의 지식과 지혜도, 내가 입는 옷도, 내가 사는 집도, 내가 사용하는 온갖 물건들도 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이웃에게 신세를 지고 사는데 성경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사랑의 빚을 지면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모두가 다 감사해야 될 대상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되었듯이 우리도 온갖 죄악의 노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원받게 된 은혜야말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가장 큰 영적 선물입니다.
오늘 민족 명절인 추석을 보내면서 이처럼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또 우리주변의 이웃들에게 까지 다 내가 감사해야 될 대상임을 알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측면에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더 나아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을 통하여 햇곡식과 햇과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추석과 추수감사절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감사절이라 할 수 있는 추석과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그 본질적 의미상통하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원형적 의미(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를 되새기며, 추수감사절의 시기를 추석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건강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합니다. 건강 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건강 하나만 있어도 절대로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건강하면서 불행을 논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약간의 물질의 여유가 있는 것에도 감사하여야 합니다.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는 가장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에 감사입니다. 두 번째는 여유 있는 재산으로 남에게 주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그런 재산이 있는 것에 감사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일하라고 했는데 에베소서 4장 28절에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서는 이런 여유재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불필요한 재산이 없는 것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인간은 불필요한 재산 때문에 걱정도 하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깨지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바로 그 세 번째 이야기에 해당되는 사람에 대해 자기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눅12:20). 재물을 많이 소유했지만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가난했더라면 예수님께 나와서 구원받았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어리석은 부자이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입니다.
5. 추수감사절은 마지막 추수(심판)를 예고하는 것이다
추수가 한 해 농사의 마지막을 말해듯이 우리가 생을 마치는 날 우리에게는 최종적인 수장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알곡은 곳간에 가라지는 불태움을 당하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추수 때까지 세상이라는 밭에서 뿌려진 씨는 좋은 씨와 가라지가 자라는 데 에레미야 31장 27절에는 구체적으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뿌려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씨에 속하는 것 같은가요?
(렘31:27)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을 심으리라
실제로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좋은 씨를 뿌리셨고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했는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지만 가라지를 금방 뽑을 것 같았지만 예수님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여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추숫군들에게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하늘 곳간에 넣으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가 바로 세상 마지막 추수 때이다. 추수하는 날까지 이 세상에는 좋은 씨로 난 사람도 있고 가라지로 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한다면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이 세상밭에 뿌려진다는 말씀을 기억하자. 세상 추수 때엔 짐승의 씨를 먼저 심판한 후 사람의 씨를 거두어서 천국곡간에 저장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하루를 위해 일생의 마지막 날이 땅에서 수확한 것을 결산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내가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매년 추수감사절은 한해의 수확한 것을 정산하지만, 최종적인 추수감사절은 일생을 통해서 우리가 수장한 것을 주님이 정산하고, 상급을 결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분이 상주시는 분임을 믿음으로 산 사람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상을 받는 것에 대해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푯대로 삼아 달려간 사람은 부름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둔 사람은 그 보물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초막생활의 고난을 잠시 받는 가벼운 것으로 여기고 이겨낸 사람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 사람들은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해 심은 자들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둘 것이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초막절이 한해의 마지막 절기이듯이 이 초막절은 일생동안 수장한 것을 결산하는 마지막 추수감사절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나온 1년을 돌아보면서 주님이 주신 복을 헤아려 보고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감사의 표현을 찐하게 해 보면 불평과 불만의 응달에서 양지바른 감사촌으로 주소가 변경될 것이다.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그릇된 가치관을 버리고 말씀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보자. 여러분, 소유와 생명은 별개입니다. 행복이란 나의 영혼이 영생하느냐 못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것이 확보되기 전에는 세상 물질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데 인생마지막 날 통곡하는 자가 누굽니까?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게 결론입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부자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많이 쌓아둔 부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는 인색하여 땅에만 쌓아둔 부자가 있는데 그런 인간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는 당연히 천국과는 거리가 먼 인간입니다. 여러분, 제발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고 하늘나라에 부요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늘나라를 위해 보물을 쌓아 둘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추수할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