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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표적(6)/맹인
제 목 : 보시는 주님, 보게 하시는 주님
성 경 : 요9:1-12
찬 송 : 523장
저 자 : 이삼규 목사
출 처 : 20240818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요 9: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요 9: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요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요 9: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딸아이를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에서 나오는 아내에게 들려온 남편의 대장암 4기 판정 소식은 한 가정의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남편의 암 판정 소식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연이은 아내의 혈액암 4기 판정. 마치 소설에나 있을 법한 이 이야기는 2019년 5월에 개봉한 교회 오빠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내용입니다.
“하나님, 저희 가정 이러다 다 죽게 생겼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이 믿음의 가정에 찾아옵니다. 숨 쉴 틈도 없이 쓰나미처럼 닥쳐온 고난 앞에서 이들 부부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서는 것이었습니다. 남편 이관희 집사는 욥과 같이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신실함과 정결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더욱 굳건히 서려고 발버둥치는 그의 모습은,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좌절을 딛고 일어나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전을 주었습니다. 영화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 앞에 서다.’
고난을 넘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 이것이 고통과 고난에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표적 가운데 여섯 번째 표적인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여섯 번째 표적은 유대 종교력으로 7월(7:2; 초막절 또는 장막절, 태양력으로는 10월 경)과 9월(10:22; 수전절, 태양력으로는 12월경) 사이에 역사하신 일입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약 6개월 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은 자신이 신적 권능을 지니신 메시아임을 사람들 앞에서 확증하십니다. 구약 성경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기록합니다.
출 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시 146: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신 이 표적은 그분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대중 앞에 확실하게 드러내신 사건인 것입니다.
√길을 가실 때 주목하신 사람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그림 : 맹인)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보시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행동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가지 표적 중 세 번째 표적에서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베데스다 못을 지나가시다가 근처 행각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그에게 치유 의지를 물으신 데서 시작되었습니다(5:6). 세리 레위를 부르신 장면에서도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막 2:14). 또한 예수님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세리장 삭개오를 “쳐다보시고” 속히 내려오라 하시며 그의 집에 유하겠다 하십니다(눅 19:5). 예수님은 육신이 병들고 연약한 이들, 당시 유대인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던 세리 같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사랑의 눈빛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 곧 이 땅의 약자들을 바라보시고 권능의 손으로 치유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통을 간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로 고통 받으며 신음하는 백성을 ‘보시고’ 당신의 종 모세를 통해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특히 고통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백성을 바라보시고 감찰하십니다(느 9:9). 시선을 멈추고 바라본다는 것은 관심을 가진다는 증거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특히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는 자기 백성에게서 그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지만, 그 순간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련을 이겨내고 소망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도 그러한 하나님의 시선을 갖고 주변의 소외되고 처절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도록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대해서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요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긍정적인 자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사람들은 모두다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맹인된 것은 부모의 죄나 자신이 지은 자범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병 낫기를 기다리던 38년 된 병자는 분명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몹쓸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맹인은 그 부모의 죄도 아니요, 자기의 죄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영광에 이르는 병” 즉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로 범죄 한 일이 없는데도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8장과 9장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는 요한복음 9장이 시작하는 첫 단어(και/and/그리고)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8장에서 이미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1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적했던 무리들에게는 자신을 숨기셨습니다(8:59).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8장에서 이미 선포하셨던 그러한 똑같은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그러면 왜 똑같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경우에는 숨기시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을 드러내셨을까요?
요한복음 8장에는 슬프고도 부끄러운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선포되고 있으며, 그 빛이 비추이므로 빛이 비추이는 대상은 자신들의 처절하고 비참한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첫 머리에 나오는 창조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이 세상을 만드실 때 그 땅은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했으며 사람이 살고 있지도 않은 무 거주 상태였습니다. 이때의 모습은 어두움 때문에 감히 분별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그래서 어둠은 물러가고 밝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지 않으셨다면 오늘날과 같은 세상이 존재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빛은 생명을 주는 빛이요,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었습니다.
(참고-‘있으라’는 말은 be동사로 단순 존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히브리어에 haya(하야) 동사는 존재, 작용, 생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8장에서도 주님은 그러한 일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비춰 주시려는 빛은 물리적인 빛은 아닙니다. 영적인 빛이요, 생명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사건도 선천적인 맹인의 눈을 밝게 해주심으로 영적인 빛을 깨닫기를 소원하셔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그러한 영적인 어두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8:32).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종노릇하고 있음을 부인하였고, 주님께서 증거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마귀에게 속한 마귀의 자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라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크시고 스스로 계시는 자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돌을 들어 치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하고 그리스도를 증오하는 타락된 영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때문에 그들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실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빛만이 어둠의 베일에 싸여 있는 진짜 실체를 드러내 줍니다. 왜 이토록 처절하고 패배한 실체를 보여줍니까?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전적인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와 타락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는 자격 상실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만일 타락한 인간이 은혜에 대해서 어떤 요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무런 의무도 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롬9:15)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이 바로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나옵니다. 그는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구걸로 연명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살다가 일생을 끝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그는 자기 앞을 누가 지나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소경들처럼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캄캄한 인생에게 먼저 찾아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와 세상 종교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사람들이 신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어떤 종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때 당시에 맹인이 한 두 사람이었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맹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맹인 중에서 특별히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중대한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또는 선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먼지와 티끌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쓸모없는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대한 사건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방황하며 고통하며 신음 속에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시니 웬 은혜입니까? 웬 축복입니까?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영적인 맹인입니다.
√엡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떠한 위험이 찾아와도 알지 못하고, 구세주가 지나가도 깨달을 수 없는 가련한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빛이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예수님은 맹인을 위하여 일하셨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위어스비 목사님은 이것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1)성육신을 상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고, 또 사람의 모습으로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실로암-‘보냄을 받았다’
√2)자극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눈에 어떤 티끌이 붙어 성가시게 한다면 재빨리 그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물로 씻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여기에서 그의 일을 끝마치신 것이 아니라 이제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그림-실로암 못)
이제 맹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 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으라는 놀라운 뜻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그들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순종할 때 복이 임합니다. 그 소경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할렐루야!
√(찬양-실로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본문의 맹인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이유를 댈 분은 안 계실까요?
“주님 나는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실로암까지 갑니까? 고쳐 주시려면 그냥 고쳐 주시지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그를 아는 사람들이 “네가 어떻게 해서 눈이 떴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맹인이 뭐라고 대답하였습니까?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영적인 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원한 생명의 빛을 얻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흑암 가운데서 그대로 지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빛입니까? 어두움입니까? 생명입니까? 파멸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삶에서 고난과 고통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겪는 고난의 원인이 단순히 죄만은 아닙니다. 물론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어려움을 통해 그분의 선하심을 나타내기도 하고,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그 어려운 일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과 고통을 보면서 무조건 죄의 결과라고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주목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에서 회복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질병은 죄의 결과’라는 당시 유대 사회의 관념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바른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나의 연약함이나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 죄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해선 안 됩니다.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담겨 있으며, 하나님은 그 연약함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길 기뻐하십니다. 참된 신앙인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일하심이 나타날 것이라는 소망을 잃지 않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