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리그는 항상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이하 ACL)서 자신감이 넘쳤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총 11회(ACL의 전신인 아시안 클럽챔피언십까지 포함) 우승하며 일본 J리그(6회), 사우디 리그(4회)와 비교해 격차가 컸다. 최근 10시즌 동안 6차례 결승에 올랐으며, 4번이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해외 구단 관계자들도 K리그 팀을 만나는 걸 가장 꺼려했다.
그런데 서서히 기류가 변하고 있다. 중국 슈퍼리그의 꾸준한 상승세와 동시에 J리그의 부활, 태국과 베트남과 같은 변방 국가의 선전 등이 이어지면서 ‘K리그가 ACL서 가장 강하다’라는 이미지가 깨지기 시작했다.
결국 2017시즌 ACL은 우라와레즈(일본)가 2007년 이후 10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끝이 났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슈퍼리그와 K리그의 경쟁이 될 것이라는 초반 예상이 크게 빗나갔다. 지난 2월 찬바람을 맞으며 시작된 ACL 플레이오프(PO)부터 추위가 다시 시작되는 시점인 11월 말에 끝난 결승전까지의 이야기를 주제별로 돌아봤다.

2017시즌 ACL서 부진한 FC서울
①K리그 부진, 제주의 충격 역전패
어쩌면 예상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지난해보다 줄어든 투자와 선수영입, 그리고 ACL에 나서는 K리그 팀이 바뀌는 사건 등이 겹치면서 어수선하게 시작됐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전북현대가 심판 매수 사건으로 출전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갑작스럽게 ACL PO에 나서게 된 울산현대는 전지훈련 도중에 귀국했다. 제주유나이티드는 조편성이 바뀌면서 서둘러 전술 및 일정 수정에 들어갔다. FC서울과 수원삼성은 ACL에 나설만한 경기력을 완성하지 못한 채 시즌을 시작했다.
그 결과 서울, 수원, 울산이 조별리그서 탈락했다. 특히 ACL 강자로 큰 기대를 받았던 서울의 부진이 아쉬웠다. 상하이상강(중국)전 2패, 우라와전 2-5 참패 등 큰 실망만 남긴채 ACL 무대를 떠났다. 조별리그 6차전 홈 경기에서 우라와를 1-0으로 꺾었으나 팬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수원은 광저우헝다(중국)와 두 차례 모두 비기면서 가능성을 보였으나, 가와사키프론탈레(일본)와의 2경기에서 1무 1패를 기록하면서 무너졌다. ACL에 나설 준비가 부족했던 울산 역시 기대 이하였다. 무앙통유나이티드(태국)와의 원정 경기에서 0-1로 패하면서 흔들렸다.
삼일절에 감바오사카를 상대로 터진 이창민의 득점과 세리머니
K리그의 희망은 제주였다. 대회 초반부터 마르셀로, 이창민, 마그노 등을 앞세워 좋은 경기를 펼쳤다. 특히 3월 1일, 삼일절에 열린 감바오사카 원정 경기에서 4-1로 대승을 거두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창민의 ‘멀티골'과 '산책 세리머니'는 지금까지도 팬들 기억 속에 있다. 조별리그에서의 제주는 승패를 떠나 경기를 재밌게 풀어나가는 모습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제주도 16강 우라와전서 다 잡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차전서 2-0으로 이기고도 2차전에 3골을 내줘 합계 2-3으로 탈락했다. 특히 2차전서 마키노 토모아키 등 우라와 선수들의 도발에 넘어가 난투극 직전까지 갔다. 이 경기로 인해 16강 탈락뿐 아니라 선수들의 중징계(조용형, 권한진, 백동규)까지 이어지면서 팀 운영에 타격을 입었다.

우라와의 ACL 우승 모습
②9년 기다린 J리그, 10년 기다린 우라와
J리그는 ACL에서 매번 부진했다. 리그 규모나 시스템에 있어서는 아시아 최강을 자랑했으나, 국제 무대에서의 성적은 초라했다. 2008년 감바오사카 이후 8년 동안 결승 진출팀을 배출하지 못했다. J리그도 위기를 느꼈다. 자국 리그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겠으나, ACL에서의 성적이 미치는 영향력을 마냥 무시할 순 없어 리그 차원에서의 노력이 시작됐다. J리그 측은 ACL에 나서는 구단에 한해 일정 배려, 지원금 정책 등을 실시하면서 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결국 J리그는 정상에 섰다. 우라와가 결승전서 알힐랄을 꺾고 J리그 팀으로는 9년 만에, 우라와 자체적으로는 10년 만에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전반기(조별리그~16강)에 나타난 수비 불안을 감독과 전술 교체로 극복해 나가며 8강 이후부터는 단단한 팀으로 거듭났다.
우라와는 내부적으로도 ACL에 더욱 공을 들인 팀이다. J리그 측이 강조한 ACL 강화 정책과 같은 길을 걸은 셈이다. 올 시즌 자국 리그에서의 성적이 신통치 않은 점도 있었으나, 이미 시즌 시작 전부터 ACL에서의 성적에 따라 내년 시즌 예산을 책정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컸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더 많은 투자를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16강, 8강, 4강, 결승 진출, 우승 등 결과별로 내년 예산을 차등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단은 6년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미하일로 페트로비치 감독을 경질하는 강수까지 두며 팀을 정상에 올려놨다. ACL 16강전 이후 수비 보강을 위해 포르투갈 1부 리그 마리티모에서 주전으로 뛰던 마우리시오를 영입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J리그의 강세는 내년에도 예상된다. TV중계권을 성공적으로 판매하며 리그가 과거보다 풍족해졌다. 리그 내에서 도는 돈은 그대로 투자로 이어지고, 결국 스타 선수 영입까지 가능해졌다. 내년에도 J리그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 전망이다.

기대 이하의 시즌을 보낸 울산의 코바
③외국인에서 갈린 한중일 경기력
ACL에서 한국, 중국, 일본 국적 선수들의 실력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과 일본 선수들은 조금 다른 스타일이지만 전반적인 능력은 엇비슷하다. 하지만 중국 자국 선수들의 능력은 한참 떨어진다. 그래서 중국 슈퍼리그는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 외국인선수 영입에 총력전을 펼친다. 상하이상강의 헐크, 오스카, 엘케손, 아흐메도프, 광저우헝다의 알랑, 무리퀴, 굴라트, 장쑤쑤닝의 하미레스, 테이세이라, 마르티네스 등이 대표적인 예다.

우라와 우승의 주역 하파엘 실바
K리그도 슈퍼리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외국인선수 수준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면 결과적으로 제자리 걸음 또는 퇴보했다. 게다가 보유한 외국인선수마저도 ACL서 제대로 쓰지 못했다. 제주만 4명(마르셀로, 마그노, 멘디, 알렉스)을 적절히 활용했을 뿐 서울, 수원, 울산 모두 가지고 있는 외국인선수의 활용도가 크게 떨어졌다. 자국 선수와 외국인 선수의 조화 역시 한중일 리그 가운데 가장 부족했고 볼 수 있다.
J리그는 실력이 확실한 외국인선수 1~2명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4명을 꽉 채우진 못했으나 실속 있는 선수들이 많았다. 우라와의 하파엘 실바, 가와사키의 네투와 정성룡, 가시마앤틀러스의 권순태, 페드로 등이 있었다. 특히 하파엘 실바는 ACL 11경기에서 9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며 우라와 우승의 주인공이 됐다.

다음 시즌엔 볼 수 없는 찬유엔팅과 스콜라리
④찬유엔팅, 스콜라리, 호리…감독 열전
ACL에 선수와 관련된 스토리만 있는 게 아니다. 다양한 감독들의 지략과 말들이 오가는 대회다. 그중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감독을 소개한다. 대회 초반부터 가장 눈에 띄었던 감독은 이스턴(홍콩)의 찬유엔팅이다.
홍콩 팀이 ACL 조별리그에 직행한 것도 화제였으나 감독도 큰 관심을 받았다. 만 29세의 여성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남자 축구 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 감독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경우다. 유럽 하부 리그에서 간혹 여성 감독을 찾아볼 순 있으나, 이처럼 1부 리그를 우승한 이후 클럽 대항전에 나선 건 세계 최초다.
찬유엔팅 감독은 조별리그 G조에 속해 1무 5패 1골 24실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으나 언제나 당당하게 인터뷰를 했다. 항상 배우는 자세로 경기에 임했다. 경기 도중 열정적으로 지도하는 모습도 인상깊었다. 가와사키를 상대로 홈에서 따낸 승점 1점(1-1 무승부)은 ACL의 역사가 됐다. 찬유엔팅은 2016/2017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찬유엔팅의 도전은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아시아 무대를 떠나는 스콜라리 감독
찬유엔팅 감독을 따뜻하게 맞이해준 루이스 펠리프 스콜라리 감독도 광저우헝다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2015년 여름 부임해 ACL 우승, 리그 3연패 등의 기록을 남기고 아시아 무대를 떠나게 됐다. 올 시즌엔 ACL 8강에서 탈락하며 실패했으나, 스콜라리와 같은 세계적인 명장을 ACL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광저우헝다는 2014년 11월부터 8개월간 팀을 맡았던 파비오 칸나바로 감독을 다시 불러들여 2018시즌을 준비한다.
우라와의 우승을 이끈 호리 다카후미 감독도 화제다. J리그에서 명장으로 꼽히는 페트로비치의 후임으로 와서 팀을 과감히 개편하며 ACL 우승을 이끌었다. 전임 감독이 사용하던 백3 전술을 백4로 바꾼 다음 변칙적인 선수기용으로 반전을 만들어냈다.

시리아 공격수이자 ACL 득점왕 카르빈
⑤카르빈, 6년 만의 AFC 소속 선수 득점왕
ACL 득점왕은 대부분 AFC 소속 국가 출신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특히 브라질에서 온 선수들이 단골이었다. 대회 득점왕은 ACL이라는 이름으로 대회가 치러진 2002/2003시즌부터 2016년까지 14차례 중 10차례가 비(非) AFC 소속 국가 선수였다. 가장 최근에 득점왕에 오른 AFC 소속 국가 선수는 2011년 이동국(9골)이었다. 이후 5년간 브라질(히카르두, 무리퀴, 굴라트, 아드리아노)과 가나(기안)에서 온 외국인선수가 득점왕에 올랐다. 그만큼 ACL이 외국인선수의 능력에 좌지우지되는 대회였던 셈이다.
하지만 올 시즌엔 이동국 이후 6년 만에 AFC 소속 국가 선수가 득점왕에 올랐다. 주인공은 알힐랄의 오마르 카르빈(시리아)이다. 비록 결승전서는 좋은 기회를 놓치며 아쉬운 상황을 연출했으나, 이전까지의 활약은 굉장히 뛰어났다. 카르빈은 ACL에서 450만 파운드(약 66억 원)의 이적료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다. 14경기서 10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하며 2018시즌 전망을 밝게 했다.

서아시아 팀의 우승은 여전히 힘들다
⑥여전히 멀어 보이는 서아시아의 우승
득점왕이 서아시아 쪽에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우승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2011년 알사드(카타르) 이후 6개 대회 연속 동아시아에서 우승팀이 나왔다. 2006년부터 보더라도 12년간 알사드가 유일한 서아시아 우승 팀이다.
서아시아 국가들은 AFC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2014년부터는 동서 분리 규정을 강화하면서 중동 팀에 힘을 실어줬다. 8강부터 동아시아와 서아시아가 만나는 규정을 수정해 결승전서만 붙기로 했다. 그래서 2014년부터는 무조건 서아시아에서 결승 진출 1개 팀이 나올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서아시아 결승 진출 팀은 2014년부터 연속해서 웨스턴시드니(호주), 광저우헝다(중국), 전북현대(한국), 우라와레즈(일본)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특정 리그에만 연달아 패한 게 아니라 동아시아 축구 강국 4개국에 돌아가면서 패했기 때문에 규정 변경 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매 시즌 결승전서 굴욕만 당하고 가는 셈이다.
글=김환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알힐랄, AFC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