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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솜씨(7:1-9전반)
우리는 지금부터 이 승리의 춤에 대한 말씀을 읽게 된다 (7:1-5). 우리는 말씀에서 그녀의 생활과 그녀의 태도를 검토해 봄으로써 그녀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어떤 준비를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꿰미 같구나”(7:1)
이 지점에서 성령께서는 앞에서 언급된 질문에 대해 일부 방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들의 노래는 그녀가 성령의 원하는 바를 완전히 깨달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녀가 다시 나타나면서, 그녀에 대한 제3자의 묘사는 그녀의 절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귀한 자의 딸아’라고 부를 때, 그녀의 가문이 높으며 왕가에서 태어난 여인임을 인정하고 있다. ‘신’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녀가 ‘평화의 복음’을 신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엡6:15절에서 보듯이 주님의 일에 대한 그녀의 준비상태를 나타낸다. 준비 작업에 주의가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그녀의 신이 강조되어 언급된 것이다. 그녀에게 맡겨진 복음전파의 사업은 진주보석과 같이 귀한 것이었다.
‘넓적다리’는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그녀의 증거의 힘을 뜻한다. 이 힘은 여러 해 동안 주님께서 그를 훈련시키고 단련시키는 동안 하나님의 선물로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다. 만일 우리의 넓적다리가 보석과 같이 되려면 야곱의 넓적다리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 뼈를 치매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창32:35)
여러분은 주님께서 브니엘에서 야곱과 씨름하시다가 야곱의 환도 뼈를 위골시킨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야곱을 훈련시키자는 목적으로 행하신 것이었다. 야곱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 영적인 일의 힘은 육신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로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숙련된 장인의 솜씨’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장색이 되시기 때문이다.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7:2)
이 구절은 그녀의 내적인 상태를 말해 주고 있다. 섞은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키고 밀단은 주님의 살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녀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의 살과 피에 참예한 경험에서 오는 내적인 만족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은 그녀가 주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맛보는 법을 배워 알았다는 뜻이다. ‘백합화를 두른 밀단’은 그녀가 순수한 믿음으로 생명의 포도주와 밀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유방은 암사슴의 상태 새끼 같고”(7:3)
이 구절은 앞에서처럼, 백합화 가운데서 사슴을 먹이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그녀가 은혜 가운데서 어떻게 자라왔는가가 아니고 그녀가 이제 성숙해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는 위치에 와 있다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은 윗 구절에 언급된 쌍태와 같은 짝으로서 믿음과 사랑이 충만할 때 그 힘으로 그녀는 남을 먹일 수 있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7:4)
여기에 언급된 ‘목’은 4:4에 다윗의 망대같다고 묘사된 ‘목’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 지금 망대에 비유되어 표현된 현재의 ‘목’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때문에 보다 새로운 양상을 지닌다. 상아는 고통의 과정을 표시한다. 이러한 고통은 단순히 피동적인 성격의 고통이 아니라, 주님께 관련되는 그녀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겪게 되는 고통이다. 이와 같은 고난과 시련이 있을 때, 그녀는 망대와 같이 묵묵히 서 있었다. 따라서 상아 망대는 주님의 뜻이 그녀의 생활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는 그녀의 자세를 암시하는 것이다.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7:4 중반)
그녀의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다. 그러나 못 속의 맑은 물 같다. 이 물은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우물물과도 다르고 항상 조잘거리며 흘러나오는 분수 물과도 다르다. 못은 언제나 햇볕에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랑하는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순수하게 마음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그녀의 마음에는 먹구름 같은 의심의 갈등도 없고 다만 잔잔한 평안을 유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헤스본’은 ‘현명하다’라는 뜻이고, ‘바드랍빔’은 ‘큰 무리 가운데 한 여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이 여인은 다른 보통 신자들을 훨씬 앞질러 성숙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7:4후반)
냄새를 맡는 후각은 사물이 충분히 익어서 충만하게 될 때에 나타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코는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예리한 청각과 시각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나 냄새 맡을 줄 아는 후각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후각은 들은 말이나 본 행동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분별에서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감각은 보고 듣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것으로서 향기와 더러운 냄새를 분간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자연적인 추리 방법에 의해서가 아닌 정확하고 직관적인 내적 깨달음에 의해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인식하는 영적인 분별력이다. 이 후각은 즉시 어떤 것이 하나님께 로서 난 것인지 아닌지를 안다. 동시에 이 감각은 악한 냄새, 더러운 냄새도 알아낸다. 이와 같은 신자는 교리상의 잘못을 지적할 만한 타고난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또 다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할만한 이성적 판단력은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교리와 생활상의 잘못을 직시할 수 있는 내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코의 뜻이다. 이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의 망대같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과 향기와 관계되어 있는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특별한 판단력을 가진, 아주 예리하고 높은 감각을 두고 한 말이다. 오늘 날의 문제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박한 냄새 밖에 맡지 못하는 ‘납작코’의 소유자라는데 있는 것이다
“머리는 갈멜산 같고”(7:5전반)
갈멜산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위해 행동했던 장소다. 이곳은 바알에게 속하는 모든 것과 엘리야가 싸움을 벌려 모든 악한 것과 거짓된 것을 이기고 승리하였던 장소다. 갈멜산은 그의 힘 있는 기도가 상달되어 하늘로부터 불의 응답을 받은 곳이다. 이 여인의 머리가 갈멜산과 같았다면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 온통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능력으로, 그리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뜻한다.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7:5후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머리털은 특별나게 뛰어난 헌신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깊이 있는 헌신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이 머리카락은 왕을 사로잡고 왕을 멜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여인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는 이와 같은 신자들은 순종이라는 기구에 의해서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이들의 간구와 기도에는 응답이 따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전 신앙생활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그녀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동기와 목적에서 벗어나 온전히 헌신한 단계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능력이 그녀에게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헌신과 순종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그리고 그의 마음이 주님 즉 신랑의 영공을 깨닫고 그러한 뜻으로 충만해졌을 때에 그녀의 머리는 자주색으로 변했던 것이다. 물론 자주색은 보좌의 권위를 나타낸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그녀의 욕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육적인 능력으로 매여 있다는 뜻이 아니고 그녀가 주님을 영적인 애정으로 주님을 받들어 모시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소원과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에 매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의 인격의 표현을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그것은 ‘주님, 제 안에 주님의 완전한 목적과 계획을 이루어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완전한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라는 기도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좌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가를 배웠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의 자줏빛 머리털로 상징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7:6)
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앞구절에서는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의 여인들의 합창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성령님께서 이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서 표현했던 것은 바로 주님 자신의 마음이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노래를 불렀던 분이 자기 자신이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계속해서 5절까지 경청하는 동안에 갑자기 노래를 불러 화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생명이 풍성하게 된 영적인 기쁨을 성령과 함께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7:7)
그녀의 신앙생활의 전반부에서는 전진도 성숙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영적인 규모(키)에 대해서 언급할만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성숙한 시기가 되자 주님께서는 그녀의 키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키를 종려나무에 비유하셨는데, 종려나무는 키가 크고 곧은 것이 특징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종려나무는 주 예수님 자신을 대표한다.
주님께서 택하는 신부가 종려나무 같다고 하는 사실은 그녀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13) 이르렀다는 것을 뜻한다. 종려나무의 뿌리는 깊은 생수의 물줄기와 연결되어 있다. 비록 열대지방의 작열하는 태양빛에 노출되어 있지만 나무의 잎과 열매는 아무런 장애 없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 여인이 비록 사막과 같은 세계에서 무서운 시험과 시련을 당하지만 이와 꼭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세상의 영향에 좌우됨이 없이 성장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주님께서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다른 사람에게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증가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방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양을 공급할 목적으로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을 때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은 거의 없었다. 이제 그녀는 성숙할 대로 성숙했다. 따라서 남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구절에서 언급되어 있는 유방은 영양을 공급하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유방은 다른 사람들의 시장기를 채워줄 수 있는 포도송이에 비유되고 있다.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사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은 것이니라”(7:8-9전반)
이 구절들은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른 성숙한 이 여인에게서 주님께서 마치 무엇을 취할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사랑하는 여인이 주님을 찾고 있다기 보다는 주님께서 이 사랑하는 여인과 같은 성도를 찾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가지에 생명이 있고 그녀에게 말하자면 신령한 규모가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자 주님에게는 상호간의 교제를 위해서 취할 것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전에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2:3)라고 말했을 때와 굉장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그녀의 성숙한 생활 가운데서 자기에게 특별히 만족할만한 양상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을 언급하고 있다.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유방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며 이 능력이 증가하리라는 희망을 표현한 말씀이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녀의 후각이 잘 발달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여기서 강조되어 있는 것은 특별한 감각기관이 아니라, 그녀가 지금까지 주님과 가졌던 접촉과 경험의 결과로 그녀의 전 인격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향기로운 냄새이다. 사과의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서는 직접 사과를 먹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과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참예한바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의 생명의 향기를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풍겨낼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언급하고 있다
‘네 입은 좋은 포도주와 같은 것이니라’ 이것은 그녀가 내세에 대해 맛본 적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제일 좋은 포도주는 앞으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천년왕국이다. 요2:10절에서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이것은 마26:29에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한 것을 볼 수 있다. 신부는 주님께 천년왕국이 주님께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를 맛볼 수 있게 해드린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동역자(7:9후반 –13)
주님의 대화가 이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주님과 완전히 연합되어 있는 신부는 그분의 말을 가로채 이와 같이 말한다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7:9후반)
이 구절은 그녀와 그의 사랑하는 주님이 함께 천년왕국의 지고한 축복을 약간 맛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7:9후반)
이 여인이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그 맛을 즐기듯이 영적인 면에서 수면의 안식을 즐기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 ‘자는 것’은 5:2절의 잠자는 것과 같이 조금도 게으른 것이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잠자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과 일치되어 있는 존재로서 신자들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언급된 잠은 죄와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7:10)
그녀의 관심은 이제 그녀가 사랑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시험해 보는 데에 쏠려 있다. 이 단계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으며 이기적인 목표를 모두 포기했다. 주님께서 그녀를 소유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안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제 그를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지 되어있는 것이다. 그녀의 첫째가는 관심사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온전히 주님께 바쳐졌고 주님께로 향하는 그녀의 영적인 애정은 그녀의 마음에 충만해 있다.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 육신적으로 주님을 붙잡는 자세는 이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초기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그녀의 최대관심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나에게 속했다’는 것이었고, ‘내가 그에게 속했다’는 사실은 이차적인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에게는 그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서 주님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소유욕이 작용하고 있었다. 비록 후에 이러한 순서에 약간의 재조정이 있긴 했지만, ‘주님은 나의 특별한 소유’라고 하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동안의 훈련과 심오한 경험을 인해서 우리는 더 이상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속하였다’는 오만한 표현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그녀의 표현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로 바뀌었다. 영적인 진보에 있어서 우리는 때때로 신자들이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어떤 것을 추구할 때가 있음을 보게 된다. 주님과 갖는 개인적인 교제의 시간에, 자기 자신의 자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욕심도 품지 않고 오직 주님의 목표만을 위해서 완전히 자신의 전체를 주님께 바치는 단계에 이른 성도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따라서 문제는 배우자 자신의 개인적인 쾌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주님 자신의 뜻과 소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받아주실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 뿐, 자기 자신을 주님께 강제적으로 의탁하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주님께 바람직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가장 숭고한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내가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얻고,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느냐가 아니고 하나의 신자로서 나는 어떻게 주님께 바람직한 사람이 되느냐는 데에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영적인 경험 가운데 가장 기쁘고 만족할 만한 경험인 것이다.
이 사랑하는 여인이 주님의 끊질긴 처리에 의해서 그녀의 자아가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말살되었을 때, 이 지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며, 여기서 그녀는 사랑하는 주님과 동역자의 위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그녀는 주님을 위해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외부적으로는 그녀가 어떤 운동을 개시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녀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녀로 하여금 이러한 활동을 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녀와 주님과의 연합은 너무나 완전한 것이어서 이제 그녀의 일은 하나님의 영감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7:11전반)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업을 하기 위해서 들로 나감에 있어 그녀는 결코 혼자 행동하지 않고 주님께서도 그녀 없이 혼자 개인적인 방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은 이제 함께 일터로 나간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데에 있어서 동역자 주님이 함께 한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 그녀는 이제 이기적인 동기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었고 빠지기 쉬운 편협한 편견에서도 해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집회’, ‘내 교회’, ‘내 일’, ‘내 모임’에는 관심이 없다. 이제 그녀는 ‘주님의 관심’이라는 넓은 들판에 마음이 가 있다. 그녀는 세상적인 ‘비전’, 아니 세상사와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숭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네에게는 이제 ‘나의 일’이라고 할 것이 없고, ‘나의 활동무대’라고 주장할 장소가 없다. 주님의 듯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그녀의 활동무대가 있고, 그녀는 주님과 이점에서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주님의 활동무대로 가득 메꾸어져 있다
“동네에서 유숙하자”(7:11후반)
이 구절에서 ‘동네’는 복수로 되어있다. 주님과 함께 이제 그녀는 세상에서 순례자의 성격을 지닌다. 그녀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정착된 가정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은 순례의 생활이다, 순례의 여행을 하는 순례자는 지상 어느 곳에서도 정착지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동네에서 동네로 전전한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라 여행하는 동안, 그녀는 주님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실 때 함께 그를 좇는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는데서, 우리는 주님이 목적하는 일에 대한 완전한 세계관을 가져야 할 뿐만아니라, 순례자의 실제와 성격을 끝까지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7:12전반)
이곳에 언급된 포도원은 그녀의 개인적인 포도원이 아니고 그녀의 생활 범주 밖에 있는(복수로 표현되어 있는) 포도원이다. 그녀의 관심과 부담은 이제 여러 가지 주님의 일에 쏠리고 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있어서 처음에는 어느 신자든지 너무 여러 포도원에서 일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포도원을 가꾸는 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여인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을 대 외친 탄식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1:6). 그러나 이제 와서 그녀는 영적으로 성장을 해서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돌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떠난 그녀는 이제 많은 포도원을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주님의 일 전체가 그녀의 관심사이다. 그저 그녀에게 맡겨진 특별한 일에만 관심이 쏠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포도원에서든 주님을 위한 일이면 함께 관심이 가게 된다. 나는 그녀가 어떤 특별한 일에 개인적인 의욕을 상실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의 일꾼들이 여러 포도원에서 일할 때 전체적인 책임감, 즉 연대의식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포도원을 돌보고 경작하는 법을 먼저 배운 사람이 아니면 되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일찌기 일어나서’ 이 말은 그녀의 부지런한 성격을 나타낸다. 주님의 일에 있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게으른 것은 절대로 신령한 생활의 특징이 될 수 없다. 오직 참으로 신령한 사람만이 주님 앞에서 착실하고 부지런 할 수 있다. 사람의 활동 가운데는 육신적인 생명으로부터 기인하는 활동이 있는데 이것은 영적인 활동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일 중에는 자기중심의 원칙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이런 것은 주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육신적인 활동도 저지해야 한다. 그것이 육신적인 분주함이든, 게으름이나 책임감의 결여든, 육신적인 것은 모두 부인되어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지, 육신적인 형태의 일들은 제지되어야 한다. 영적인 성격을 띈 부지런함과 신령한 게으름은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보면 알 수 있다. 때가 악하니만큼 시간을 아끼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명령이기도 하다(엡5:16)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7:12중반)
주님과 함께 포도원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관심은 열매를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생명의 현상에 집중되어 있다. 자아중심적인 생각에서 해방된 그녀의 마음은 주님의 일에 대한 관심과 흥미로 가득차 있으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동안 각 신자의 생활 속에 생명이 얼마나 성장했느냐 하는 데에 관심이 쏠려 있다. 아주 어린 신자에게서 지극히 조그만 생의 기미를 볼 때나 지극히 연약한 식물을 볼 때에도 그녀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이 신부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최대 관심사는 누가 지도자가 되며 신자들이 어느 특정한 모임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에게 소개시키느냐하는 문제다. 이와 같은 형태의 일과 교제는 주님과 완전한 영합을 경험한 후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7:12후반)
그런데 ‘거기서’가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것은 주님의 관심이 쏠려 있는 들이나 포도원이나 동네를 말한다. ‘거기’는 세상에서 주님의 일이 펼쳐지고 있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녀가 주님께 그의 사랑을 바칠 수 있는 곳은 이러한 영역뿐이다. 그녀는 주님의 일에서 주님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전에는 일이 그녀의 사랑에 장애물이었다. 봉사는 말하자면 ‘마르다’가 주님의 발치에서 즐겼던 ‘마리아’의 사랑의 교제를 즐기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봉사는 그녀에게 거침돌이 되었었다. 전에 주님을 섬길 때 경험했던 봉사는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었다. 이와 같은 문제는 불완전한 연합에서 오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한 연합의 단계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녀는 주님과 그의 일을 융화시킬 수 있고, 주님과 그의 백성들을 연합시킬 수 있고 서로 다른 형제들을 주님과 아름다운 화해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녀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표현할 수 있고 그녀 안에 주님의 일을 표현할 수 있는 곳도 이러한 범주이다. 이와 같이 고양된 영적인 봉사를 통해서 그녀는 주님에게 그의 사랑을 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에서 그녀는 더 이상 도중에 어디에선가 주님으로부터 떠나 주님과의 교제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합환 채가 향기를 토하고”(7:13전반)
합환 채는 사랑을 상징하는 식물(풀)이며 창30:14-16에서의 경우와 같이 합환 채는 신부와 신랑 사이의 가장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녀의 신앙생활에서 이와 같은 상태에 도달한 신부는 사랑하는 주님과의 연합에서 각종 향기를 내뿜을 뿐이다. 그녀는 주님과의 사랑에서 완전한 연합을 이룩한 것이다.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묶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7:13후반)
문이란 가깝다는 것을 가리킨다. 비록 그녀의 관심이 여러 동네와 포도원에 깔려 있지만, 이것은 그녀가 스스로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먼 거리를 가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님께서 맡겨준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있는 그곳에서 거두어들일 열매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그녀의 주의가 여러 가지 종류의 열매에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아의 생활에서 해방되기 전에는 자기가 인정하는 형태의 열매가 아니면 어떠한 신자의 생활에서도 열매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자기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열매가 한 가지 종류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열매 중에는 새로운 것도 있고 오래된 것도 있었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의 영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성격이 다른 신자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열매를 맺었으며, 이제는 이 진리가 아주 명백해졌다.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중 한 부류의 신자들만 보더라도 각각 다른 열매를 맺고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 다양하다(갈5:22-23). 이러한 열매는 주님의 찬양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봉사의 열매 역시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이다. 그러나 추구의 영광은 주님께 속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