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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치면 ‘북의 홍명희, 남의 이문구’라
할 정도로 우리말 특유의 가락을 잘 살려냈다!
명천(鳴川) 이문구를 그리며
이 책은 이문구의 산문 중에서 특히 문학과 관련된 것들을 추려 모은 것이다. 그가 처음 문학을 하게 된 동기와 배경을 말한 글부터, 작품의 창작과정과 주인공에 대해 쓴 글, 그가 만난 작가들, 그가 읽은 문학작품들에 대해 쓴 글 따위를 두루 엮었다.
이문구는 한국문학이 낳은 최대의 스타일리스트였다. 그는 글이 곧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그의 글을 아무데나 펴서 읽어보면 즉시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는 점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끙— 넘이사 크릿스맛쓰를 쇠건 양력 슬을 쇠건, 감자 먹을 늠이 고구마 먹기지..... 넘 잠두 품매게 자다말구 일어나 쇠스랑 고스랑 허구 지랄덜여, 거.”(「우리동네 이씨」)
그녀는 별쭝맞게도 눈치가 빨라 무슨 일에건 사내 볼 쥐어지르게 빤드름했고 귀뚜라미 알 듯 잘도 씨월거리곤 했는데, 남 좋은 일에는 개미 허리로 웃어 주고, 이웃의 안된 일엔 눈물도 싸게 먼저 울어댔으며, 욕을 하려들면 안팎 동네 구정물은 혼자 다 마신 듯이 걸고 상스러웠다.(『관촌수필』 중 「녹수청산」)
이런 글들로 이문구 아닌 다른 얼굴,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겠거니와, 그때 그는 비유하자면 물건을 고르더라도 대형마트나 백화점보다는 동네 슈퍼나 3·8일 보령장이 제격일 사람이었다. 그 스스로 말하기를, 시장에 가더라도 ‘간판이 걸린 가게보다 난전을 기웃거리는 쪽’(「말을 찾아서」)이라 했다.
그런데 스타일리스트라는 말이 혹 오해를 불러일으킬지 모르겠다. 외국에서 건너온 이 말은 사전에 기대면 글을 빼어나게 잘 짓는 문장가를 이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멋을 잘 부리거나 꾸밈이 심한 사람을 이르는,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하지만 이문구에게 이 말을 붙일 때는 조심해야 한다. 스타일리스트로서 이문구가 글이 곧 사람임을 보여주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비단 그의 얼굴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간판이 걸린 가게보다 난전을 기웃거리는 쪽’이라는 말은 비단 그의 외모가 방금 버스에서 내려 여기가 어딘가 두리번거리는 촌사람 같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릇 말공부를 하는 작가라면 ‘의식적으로’라도 ‘간판이 달린 가게보다 난전’을 기웃거려야 한다는 그의 작가정신까지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작가정신이라고 해서 별쭝맞은 게 아니다. 그저 ‘난전의 사상’, 혹은 ‘저자거리의 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 정신이 아직 코흘리개 시절의 어린 그를 비바람 몰아치는 거리로 내몬 비극의 가족사와 맞닿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 거리에서 그는 사람들을 만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그의 문학은 결국 사람의 문학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는 좌우가 따로 없었고, 상하가 따로 없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근자에 한국문학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진단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든지, 누구보다 한국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들이 받았을 충격과 상처가 가장 컸으리라.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 참으로 지난할 텐데, 이럴수록 작가들이 자세를 다잡아 더욱 정진하는 수밖에 달리 뾰족한 해법은 없을 것이다. 새삼 명천(鳴川) 이문구를 그리게 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는 문학이 크게 별쭝맞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학도 결국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바로 작가의 존재이유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책은 지극히 단순명쾌한 그의 문학론이자 한국문학이 늘 잊지 말아야 할 초심이다.
§. 저자 소개
이문구
194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재학 당시 김동리로부터 장차 한국소설의 대단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다갈라 불망비」(1965)와 「백결」(1966)이 추천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풍진 세상을』, 『해벽』, 『관촌수필』, 『우리 동네』, 『유자소전』, 『장한몽』,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등 수많은 분신을 남겼고, 한국창작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펜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우리 고유의 사투리에 대한 탐구는 ‘이문구 문체’라는 한국문학사의 새 개념을 탄생시켰다. 2003년 2월 25일 지병으로 타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 차례
-책머리에
1부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보다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보다/남의 하늘에 묻어 살며/글로 벗을 모은다/편지/두메의 낙수/떠날 사람과의 마지막 잔
2부 작가의 편지
한순간의 오랜 이음/울며 쓴 글/작가의 편지/장한몽에 대한 짧은 꿈/찾지 못한 옛 주인/한 소꿉친구의 기억/초천전후/우리 동네 시대/작가와 개성/추억 만들어 주기
3부 말을 찾아서
뿌리 뽑힌 인간/생활혁명의 제창자/말을 찾아서/집필괴벽/부담스러운 꽃/욕된 시대의 고통과 희망/젊음을 밑천으로/영상시대의 길목에서/‘창비’의 보릿고개와 보리밥/내 작품 속의 주인공들/세월 타령/동리 선생과 담배/김동리의 「역마」/문학의 해를 보내며/한승원과 개펄/허름해서 좋은 ‘위화의 사람들’/파크와 가든
4부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민의 계절/보내고 맞으면서/제5의 맛을 아는가/문협 시절을 추억하다/옷이 날개라면/심상과 상징/훈수꾼의 육두문자/문학이란 무엇인가/조용히 살 수 없었던 시절/나는 늘 남의 책이 커 보인다/방이 있게 해준 책/책 뒤에 다는 말
§. 본문 중에서
어느 해 여름이던가, 가족과 더불어 피서를 다녀온 이호철 선생은 피서 일을 예정보다 며칠 앞당겨 상경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대천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갔었다. 첫날을 피서를 왔다는 기분으로 지냈다. 그런데 이튿날이었다. 해수욕을 하노라니 문득 대천이 바로 이생(李生이란 나를 뜻한다)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우연히 떠오르는 거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생의 셋째 형이 어린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행적에 연루되어, 산 채로 가마니에 담겨 수장됐다던 곳이 곧 여기였구나 하는 것도 더불어 생각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 선생은 물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이생의 얼굴이 물 위에 어릿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 선생은 이튿날 아침에 상경하고 말았다.
재작년 초동 여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고은 선생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고 선생은 양키잡지를 뜯어 만든 큼직한 봉투에 무엇인가를 잔뜩 담아들고 있었다. 나는 전례에 비추어 조카들 주라고 과일을 사들고 왔으려니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못 먹는 돌멩이였다. 아무 볼품도 태깔도 없는 신작로 바닥에 흔히 뒹굴던 자갈이었다. 나는 그 ‘쓸데없는’ 자갈 여남은 개를 쳐다보며 이것은 또 무슨 시편詩片들인가 하고 공상을 하려 했다.
고 선생이 말했다. 고향 군산을 들렀다가 금강나루로 해서 장항선에 실려 상경했다. 도중 무슨 볼일이 있어 대천에서 내리게 되었다. 황량한 대천역에 내리니 문득 그 바닥이 이생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번개치듯 했다. 썰렁해진 마음은 곧 이생이 한 많은 고향을 등지며 마지막으로 눈물지은 곳이 바로 그 정거장이었다는 데까지 미쳤다. 그리고 서울 속의 이생을 생각했다. 선생은 돌멩이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그 돌멩이를 전해줌으로써 이생의 고향을 정표로 삼고자 함이었다. 고 선생은 그 후 「황포일기荒浦日記」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대천일기」라는 제목의 변형이었다.
-「남의 하늘에 묻어 살며」 중에서
나는 놀던 물을 만난 것처럼 발안이 마음에 들었다. 와서 한구석에 끼어 살았으면 싶었다. 장터를 지나가는 내에 붕어와 피라미가 은어떼처럼 반짝거리는 것이 어려서의 한내(大川)를 떠올리게 하면서 향수를 자아내었다. 장터에서 담배 한 대 겨를만 걸어 나가도 비어 있는 농가가 수두룩하다는 말에 박씨를 따라나섰다가, 목계를 비롯한 일행의 노고를 생각하여 절반쯤에서 동네 언저리만 먼발치로 쳐다보고 되돌아섰다. 동네가 어떤지, 집이 어떤지 가 보지도 않은 채로, 장차 아니 곧 그 동네의 주민이 되기로, 가다 말고 중도에서 선뜻 결정을 해 버린 것이었다. 목계도, 김주영 씨도, 조태일 씨도 그 싱거운 결정에 대하여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는 기미가 없었다. 놀던 물을 만난 듯한 느낌이 이심전심이었던 탓은 아니었는지, 그것은 나중에 생각해 봐도 알수 없는 일 가운데의 하나였다.
나는 그 다음 주 일요일부터 그 동네의 동네 사람이 되었다.
나는 짐을 풀어 놓은 뒤에야 처음으로 집을 한 바퀴 둘러보게 되었다. 집을 짓고 5대째 살다가 6대손을 본 뒤에야 이웃에 양옥을 지어 옮겨 가면서 빈집으로 버려두었던 것이라고 하니, 따져 볼 것도 없이 조선조 순조 연간이나 늦어도 헌종 시대부터 낡기 시작한 옛날이야기 속의 초가삼간임이 역연하였다. 그나마도 해마다 바심을 마치면 땅임자에게 벼 한 가마니를 텃도지(垈賭地)로 바쳐야 하는 남의 터에 지은 오막살이였다. 이엉을 이은 지 여러 해 되어 여기저기 골이 팬 지붕에는 골 따라 풀이 우북하게 깃고, 동네 조무래기들이 전쟁 놀이터로 쓰는 사이 굴뚝은 허물어져 쥐구멍만 남고, 울타리랍시고 두른 수수깡 울바자도 시늉만 남은 개구멍 천지라 사방이 난달이나 다름없는 위에, 뒷간은 거적문이 간 곳 없어 주야로 동남풍이 주인이요, 두레박 우물은 조무래기들이 심심하면 집어 넣은 돌멩이며 연탄재며 나무토막이며 농약병 따위로 메워져서, 장정 두 사람이 한나절 내 퍼낸 것이 경운기로 두 왕복을 하며 내다 버리고도 두어 삼태기나 남았다.
벽파풍창에 툇마루는 오르고 내릴 적마다 널빤지가 들솟고, 오뉴월의 소나기 한줄금에도 지붕의 썩은 새가 바지게로 한 짐씩 처져 내려 처마 밑이 퇴비장으로 돌변하는 집이었지만, 나와 아내는 그것도 내 집이라고 아무 소리 없이 살았다. 남이 준 강아지를 기르고, 염소랑 토끼랑 병아리를 치고 오리도 쳤다. 집터서리를 일구어서 여러 가지 채소를 심고 화초도 가꾸었다. 박광서 씨가 얻어다 준 은행나무와, 화성군의 문학청년 홍일선(시인) 씨가 아무도 없는 사이에 와서 심어 놓고 간 잣나무 두 그루는 어느덧 아름드리로 자랐다.
이 마을의 주민이 된 첫해 1년 동안, 나와 아내는 온 동네 사람의 구경거리 혹은 관찰 대상자였던 모양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첫째는 낙향의 이유였다. 다들 서울로 올라가지 못해 안달인데 도리어 한촌으로 내려왔으니 혐의쩍은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생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헌책이 많은 것을 보면 서울에서 책 외판원을 하다가 망한 것이 분명한데, 혹자는 글 쓰는 사람이라고 하고, 혹자는 글씨 쓰는 사람이라고 하고, 혹자는 책 쓰는 사람이라고도 하니, 글 쓰는 것, 글씨 쓰는 것, 책 쓰는 것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같으면 무엇이 같고 다르면 어디가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일보다는 아는 일이 더 많았다. 내가 술을 먹어도 보통으로 먹는 술이 아니라는 것, 어디서나 두루춘풍에 무골호인처럼 물렁한 사람이라는 것. 담배와 커피에 인이 박힌 사람이라는 것.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으며, 생전 가도 노래하는 법을 못 보고 스포츠에 무관심이라는 것. 내외가 검소하여 모양낼 줄을 모르며, 새우젓이고 개고기고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되 입맛은 경기비렝이(경기도 비렁뱅이-입이 분수없이 높다는 뜻)로 미각이 발달한 사람이라는 것. 부화장에서 나온 갓 깬 병아리를 1백 마리씩 사다가 길러도 도중에 한 마리라도 실패하지 않고 오롯이 기를 정도로 보기보다 찬찬한 성격이라는 것. 그리고 특히 농사가 직업인 사람 못지않게 농사일에 익숙하다는 것. 기타 생략.
-「우리 동네 시대」 중에서
하루는 시내로 장을 보러 나갔다. 내가 장을 보러 다니는 대천은 천수만 어구에 여기저기 떠 있는 열다섯 개의 유인도를 앞에 두고 있는 데다, 대천항을 비롯하여 오천항과 무창포항 등 큰 어항을 좌우에 끼고 있는 인구 오륙만의 작은 항구도시여서, 조금 무렵이라고 해도 장에는 늘 어물이 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물때가 좋을 때였는지 장도 아닌 무싯날이었음에도 길가에 늘어앉은 난전까지 갓 올라온 생물이 넘쳐 나고 있었다.
나는 간판이 걸린 가게보다 난전을 기웃거리는 쪽이 마음이 더 편한 축이다. 한 중년 아낙네의 고무함지박에서 넙치인지 도다리인지 가자미인지 모를 생선 몇 마리가 꼬리지느러미로 바닥을 치며 아가미를 벌떡거리고 있는 것이 먼발치로 보였다. 다가가 보니 횟집에서 가져가면 몇만 원짜리 접시로 요리될 만한 넙치였다. 혼자서 하는 자취생 처지에는 분에 넘치는 반찬감이라 값도 묻지 못하고 망설이는 참인데, 지나가던 노파가 함지박 앞에 앉더니 한 손으로 넙치를 쳐들어 보면서 물었다.
“월매나 헌댜?”
“만 원 한 장은 받어야 허는디, 마수닝께 팔천 원만 줘유.”
그러자 노파는 넙치를 던지듯이 놓으면서 볼멘소리로 퉁명을 부리는 거였다.
“팔천 원이라구 이름 붙였남.”
나는 슬며시 자리를 떴다. 흥정이 끝나서가 아니었다. 노파의 퉁명 덕분에 넙치보다 더 싱싱한 말을 얻었으니, 그 자리에서 머무적거리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은 시간시간에 버스로 시내에 나가는 길이었다. 그날은 마침 대천장이어서 버스가 미어지는 판이었다. 군사정권은 ‘하면 된다’는 구호 하나로 하지 못한 일이 없었지만, 끝내 없애지 못하고 저먼저 거꾸러진 것이 닷새를 한 파수로 하여 서는 오일장이어서, 장날만 되면 식전부터 장꾼으로 터져 나가던 것이 시내버스였던 것이다.
차는 앉아서 졸며 가는 사람보다 손잡이에 매달려서 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내가 다니는 버스 노선의 길가에는 유수한 재벌의 재단에서 경영하는 종합병원이 있었고, 버스는 오면가면 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사람이 많은 그 종합병원의 앞의 정류장에서 한동안씩 지체하다가 떠나는 것이 예사였다. 그날도 내가 탔던 버스 역시 그 종합병원 앞에서 남의 시간을 적지 않게 축내고 있었다. 차가 한참 그러고 있을 때였다. 문득 내 옆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업세, 이런 구석쟁이에 종합병원이 다 있구······. 야, 여긴 그래두 살 만허겄구나야.”
힐끔 돌아다보니 나처럼 손잡이에 매달려서 가던 한 늙은이가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길가에 있는 종합병원을 차창으로 내다보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아마 그쪽으로 처음 와 보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 늙은이 앞에 앉아 있던 일행인 듯한 늙은이가 이렇게 말을 받는 것이었다.
“흥, 살 만허다마다. 사람을 잡아두 종합적으루다가 잡으닝께······.”
나는 웃으면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당연히 웃음소리가 들릴 듯한데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누구 하나 웃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차에서 내릴 때까지 그 많은 승객 가운데 아무도 웃는 이가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머릿속이 자못 번거로웠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결론을 하였다.
짐작하건대 아무도 웃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터였다. 첫째는 농담이 아닐 뿐 아니라, 그 늙은이의 오랜 사회적 경험 및 살림살이의 앙금에서 우러나온 뼈저린 체념의 소리였다는 것. 다음은 농담이었건 진담이었건 사람의 살림살이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말이기에 그동안 어디서나 늘 들어 왔던 살림 사는 말의 하나에 불과한 말이었다는 것.
작가의 말공부는 결국 사람이 살림하는 데서 우러나는 말들을 챙겨보는 일. 이리저리 휘둘려 사는 동안에 저도 모르게 잃거나 잊거나, 흘리고 놓쳐 버린 말들을 되찾는 일. 그렇게 되찾은 말을 자기의 글에 자주 써서 읽는 이로 하여금 낯익게 하며, 그리하여 차츰 널리 쓰이게끔 터를 넓히어 나날이 늘어 가는 신조어 · 외래어 · 외국어에 밀려서 시나브로 은퇴하거나 실종하는 것을 혹은 막고, 혹은 늦추고, 혹은 그전보다 더 많이 쓰이도록 이바지하는 일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말은 사람이 살림살이하는 데서 저절로 우러나는 살림 사는 말이, 우리네의 땅과 삶과 살아온 자국에 붙박이로 깊이 뿌리를 내린 전통적인 민족어가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우리네의 살림 사는 말에는 우리네가 오랫동안 나름껏 내림해 온 우리네만의 체온과 체취와 체통이 스며 있고, 우리네의 줏대와 성품과 생각이 들어 있고, 거짓과 꾸밈보다 실질을 사며, 실제보다 더 늘리거나 줄이고, 꼬거나 휘면서도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마저 참고 견디고 누르거나, 차차로 나아져서 그럭저럭 괜찮을 듯이 느끼게 하는 은근한 덕성을 지녔을뿐더러, 절약과 검소를 택하여 쓸데없이 떠들고 늘어놓지 않는 품위까지 갖추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말들을 어떻게 찾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말을 찾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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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리운 이문구선생님의 산문집이군요. 반드시 읽어야 할!^^
아, 선생님! 저도 이문구님 글을 엄청 좋아합니다~ 그 분이 쓰신 글은 아마 다~~~읽은 것 같아요. 우리동네 도서관에서 제가 '이문구 연구'하는 줄 알 정도였답니다 ㅎㅎ
마중물님의 멋진 유머는 이문구님 글에서 일부 나왔겠네요.^^ 멋진 마중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