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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영적인 성장이란 무엇인가?
“신부님, 제가 가톨릭 신자가 되어 20년을 살았는데, 그 전과 비교해 크게 변화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참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는데, 요즘은 기도도 잘 되지 않습니다.” “신부님, 저는 가톨릭 신자가 되면 집안이 평화롭고 자녀들도 잘 되기를 기대했는데, 늘 고만고만 하고 마음이 답답합니다. 불교 신자인 옆집 사람은 돈도 잘 벌고 자식들도 다 잘 되어서 부럽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늘 편안하지 않습니다. 죄 많은 저에게 벌을 내리실 것 같아 늘 불안한 마음으로 성당에 갑니다.”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위와 같은 내용으로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면 하느님께서 보호하시어 뭔가 외적으로는 하는 일도 잘 되고 자녀들도 모두 건강하기를 바라고 내적으로는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의 평화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바라는 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안이 잘 되지 않거나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찾아 오면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심지어 가톨릭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묵상해 보면, 우리 자신의 주변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자연 재해가 찾아 오기도 하고,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도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는데 늘 고통스런 십자가는 우리 삶에 함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세상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과 세상의 고통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통이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 고통이 없는 삶, 많은 부를 누리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다니고 취직도 잘 하고 시집 장가 잘 가서 아들, 딸 쑥쑥 잘 낳고 걱정없이 사는 삶에 국한되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이 주는 행복을 넘어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리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부富나 내적인 평화만이 아니라 영적인 참된 행복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 세상에서부터 미리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영적인 성장의 의미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새로운 삶의 가치와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을 넘어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된 행복으로 건너가는 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입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은 도구입니다. 고통과 십자가도, 심지어 우리의 죄도 영적 재탄생과 부활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성장의 여정에서 내적 기쁨과 주님과의 일치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밤’과 같은 주님의 부재의 순간도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성장은 우리가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하느님의 부재(不在)와 영적 성장
예전에 어느 자매님께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아들 바오로는 어린 시절에 본당에서 복사도 하고 열심히 주일 학교에 참석했는데 언젠가부터 성당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학업 때문에 점점 성당에서 멀어지고 대학에 입학하고 난 다음부터는 아예 성당에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주일 미사는 그래도 지켜라’고 말하면, ‘엄마,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세상에 왜 이렇게 고통이 있고, 전염병이 만연한 거야. 내가 생각할 때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아요.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당신의 자녀들과 창조물들을 고통스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라고 반박하며 성당에는 마음 약한 엄마나 다니고 더 이상 자신의 종교의 자유를 간섭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 그 자매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가톨릭 가정에서 생겨가는 일 같습니다. 자녀들의 ‘하느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세상에는 이렇게 고통이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는 그 전제가 부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만은 아니니까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자비롭고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시며,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초월해 계셔서 우리는 마지막까지 하느님에 대해서 다 알 수 없는 그런 분이시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시며, 우리 모두를 선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넘어 더 큰 선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보다 더 크신 분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너무도 사랑하기에 아들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허락하시고, 그로 인해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데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줄 몰라보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 눈을 뜨지 못했고, 귀가 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시면서 동시에 모든 곳을 초월해 계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만을 알고 있는 아들 바오로에게 자비와 인내와 기다림의 하느님, 더 큰 선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은 아직 부재중입니다.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 바쳐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그는 아직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치워 주시는 하느님만을 알고 있기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던 바오로가 훗날 삶의 고통과 시련 앞에서 어느 날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령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후, 토마스 사도처럼 의심을 버리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아직 하느님을 깨닫지 못한 이에게는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아직 세상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이들은 이제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성장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 변화와 성장의 여정은 하느님의 초월성 때문에 우리 삶의 전 과정에서 계속됩니다. 새로운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찾아 오십니다. 하느님의 부재는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라는 표시입니다. “나는 지금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영적 성장의 길 (1) 신앙생활에 위기가 찾아올 때 기억해야 할 것, ‘과정과 도구’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하느님을 참으로 많이 원망했어요.” “본당 신부님께서 어떻게 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사제라면 신자들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하지 않나요?” “성령 세미나를 하고 와서 치유를 받고 기쁨에 충만한 삶을 살았는데 두 주일이 지나니 다시 모든 것이 공허해졌어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온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무력함과 고통, 혹은 힘겨운 사람들로 인해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는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는 고백을 듣곤 합니다. 외적으로 육신의 질병이나 삶의 고통 앞에 하느님을 원망하며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있고, 내적으로 사제나 수도자 혹은 교우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영적으로는 신앙생활의 진보가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무기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교회를 떠나거나 쉬는 이들이 영적인 측면에서 공통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정’과 ‘도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 영적 기쁨과 충만함, 영적 공허와 어둔 밤,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교우들과의 친교나 갈등 등 모든 것이 예수님과의 일치를 위한 일종의 과정이요, 도구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완성된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여정 중에 있습니다.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듯이 다른 이들도 그 과정 중에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합니다. 인간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처럼’ 생각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사의 도구들뿐만 아니라 주님 사랑을 배우는 다양한 길을 우리에게 선물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산을 넘고 넘어가는 이 길에서 정상에서의 영적인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골짜기에서의 어둠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을 느끼기도 합니다.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나와 맞지 않는 힘겨운 사람 때문에 길을 걸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다시 주님을 향한 길을 걸어갈 때 또 다른 정상에 올라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산에 오르기 위해서 우리는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날, 그 모든 여정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그분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다 사랑을 배우는 도구들입니다. 심지어 고통과 시련도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힘겨운 사람이 다가올 때, ‘저 사람만 없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저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 여기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을 통해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을 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이!’라고 원망하기보다는 ‘이 시련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가?’라고 더 큰 선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시련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의 모든 것은 더 큰 사랑을 배우기 위한 과정이요 도구라는 것을 기억할 때 눈앞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영적인 자유로움 안에서 인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20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가톨릭마산 7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분도 명상의 집)]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예수님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많은 영적 서적이나 스승들이 ‘마음을 비우라!’라고 하는데, 도대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려놓아라,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하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까?”
“한계를 지닌 연약한 인간이 완전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지닌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우리 마음 안에 그 사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합니다. 너무도 사랑하여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고, 그 사람이 행복해하면 자신도 행복해집니다. 떨어져 있으면 만나고 싶고,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은 혼인을 하게 되죠. 그러나 결혼해서 살다 보면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결혼 전에 했던 상대에 대한 자상한 배려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뜻에 따르기를 고집하거나 상대에 대한 지나친 기대치 때문에 실망하거나 심지어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더 깊이 서로를 알게 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방법과 자신을 희생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됩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며 새롭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 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다 보면 안타깝게도 서로 헤어지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사랑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를 더 깊이 알아 가기 위해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인데, 정서적으로 미숙한 이들은 들을 줄 모르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갈 수 있다면 부부의 사랑은 하늘 사랑에 도달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남녀가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을 때 자신의 뜻보다는 상대방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처럼,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사랑하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비워지고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고, 지금도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통해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할 때보다는 우리 자신의 뜻이 가득할 때가 더 많은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의 원의 대로 하느님께서 그 뜻을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할 때도 많습니다. 이는 주님을 자신의 뜻대로 뭔가를 이루어 주시는 마술사로 여기는 미숙한 신앙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나아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듯이,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잉태에 대한 예고에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라고 순종하셨듯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마음을 비워내어 더 큰 사랑을 이루어 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라고 순종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순종은 온전한 ‘자기-비움(self-emptiness)’의 극치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비움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하나 되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찾으며 자신을 비워 나갈 때, 우리 마음은 더 큰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가장 큰 예수님의 뜻인 사랑을 선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자기 보호 본능은 늘 이기적인 성향으로 기울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성령 은총이 가득하셨기에 성모 마리아는 기꺼운 순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총을 가득 받기 위해 우리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준비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말라 가고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그분의 사랑이 되어 갑니다.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이미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과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님
대림 시기입니다. “대림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니 어떤 분께서 “‘클 대’ ‘기다릴 림’ 성탄을 기다리는 가장 큰 기다림의 시기 아닙니까!”라고 답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아닙니다. 대림이란 한자 말은 ‘클 大’ ‘기다릴 림’(‘기다릴 림’ 자는 있지도 않습니다)이 아니라, 대림(待臨)은 ‘기다릴 대’ ‘임할 임’이라고 하여 ‘(주님의) 임하심을 기다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례적으로도 주님의 첫 번째 오심, 즉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기, 그리고 주님의 두 번째 오심, 즉 종말을 기다리는 시기로 설명을 하면 되기에 대림이라는 말은 그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자적 풀이는 대림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라는 단어의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Adventus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영어로 arrival, ‘도착’을 뜻합니다. 우리가 대림절에 ‘기다림’이라는 단어에 너무 집중을 하다 보니, adventus의 본래의 의미인 ‘도착’ ‘도래’ ‘출현’의 풍부한 의미에 대해서는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다림’이란 말은 왠지 ‘우리 인간 편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고대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반면, ‘도착’이라는 말은 ‘하느님 편에서 우리 인간에게 이미 오셨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로 하셨고, 이미 오셨습니다. 영원에 계신 그분께서 이미 우리 안에, 우리 삶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른 채 여전히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와 함께하심을 깨닫는 것이 바로 대림 시기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즉, 저 멀리 우리와는 가까이할 수 없는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길 기다리는 시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주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그분으로 살기 위해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시기가 바로 대림 시기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수없이 대림 시기를 맞이하고 성탄을 보내왔습니다. 어떤 해에는 뜨거운 마음으로, 어떤 해에는 미지근한 마음으로, 그리고 성탄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으면 대림 시기를 잘못 보내서 그렇다고 자책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대림 시기를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 제가 느끼는 대림 시기와 성탄 시기에 대한 묵상이 이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저에게는 사실 대림 시기도, 성탄 시기도 따로 없습니다. 매일매일이 기다림의 날들이요, 매 순간이 주님께서 저에게 오시는 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에는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 계시다가 12월 24일 밤이 되면 짠!!!” 하고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당신 성령을 통해 매 순간, 모든 곳에,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 안에 살아계십니다. 설령 제가 그분을 잊고 지내더라도 말입니다. 제가 오늘 주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할 때, 그 순간이 바로 저의 성탄입니다.요컨대, 우리가 자신 안에 태어나실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고, 비워내는 오늘이 바로 대림이요, 사순인 것입니다. 오늘 이기적인 자신의 마음과 욕심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찾고 선택할 때 대림은 그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죽고 다시 태어남을 체험한 이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모든 곳에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믿음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주님 안에서 깊이 나아간 이들에게는 오늘이 대림이요, 오늘이 성탄이요, 오늘이 성금요일이요, 오늘이 바로 주님 안에서 충만한 은총의 시간인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오늘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소소한 일상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을 발견하고 누리며 감사하는 천국에서의 삶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우리가 기도와 고행, 선행을 많이 해야만 은총을 받을까요?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기도와 선행, 고신극기를 많이 해서 하늘에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말이 맞을까요? 뭔가 부족합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과연 기도와 고행을 많이 하는 만큼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걸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이만큼 노력해야 이만큼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런 분일까요? 어떤 교우들은 “날마다 기도하고 봉사하고 고행과 자선을 하는데, 왜 우리 집안은 늘 잘 풀리지 않습니까?”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선행과 육신의 고행과 같은 우리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2018년 교황청 신앙 교리성은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Placuit Deo)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신新펠라지우스주의의 개인주의와 신新영지주의의 육체 경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新펠라지우스주의가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구원은 개인의 자력이나 순전히 인간적 체계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체계에서는 하느님 성령이 주시는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신新영지주의는 자기만의 주관주의에 갇혀 버리는 순전히 내적인 구원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 모델에서 구원은 자기의 지적 수양으로 이루어집니다.”
펠라지우스주의란 인간의 본성은 스스로 죄를 피하고 구원을 위한 공로를 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은 필요 없다는 이단입니다. 영지주의는 하느님과 세상, 영과 육, 선과 악 등을 대립된 입장으로 보는 이원론二元論적 사고를 취하고 있으며 믿음이 아니라 ‘앎(gnosis 그노시스)’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다시 부각되고 있는 신펠라지우스주의와 신영지주의가 문제가 되는 근본 이유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고 보편적 구원의지를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선업이나 노력을 넘어 모든 이에게 성령을 통해 당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육신을 취하셔서 몸소 겪으신 인간의 삶과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은 육신과 영혼 모두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를 통해 우리 모두는 이미 구원되었습니다. 이것을 ‘객관적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각자의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주관적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이미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인 것입니다. 이 여정 가운데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방식으로 그분의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면 우리는 천국에서 누리는 지복직관의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우리가 한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기도하고 선행을 베푸는 모든 우리의 노력 역시 은총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수십 년이 걸리는 듯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영원의 차원에 계시는 하느님께는 오직 현재만이 있기에 그때가 가장 적합한 때인 것입니다. 가령 필자가 유학시절 알고 지내던 어느 형제는 오랜 기간 하느님을 잊고 세속의 일에 열중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60대 말, 어느 날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홀로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는 이가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는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그 이후로 그 형제의 온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지나온 시간을 반성하고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고 여기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살고 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느님의 은총의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듯 우리도 가족과 이웃들이 하느님의 때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기도와 인내, 그리고 사랑으로 기다려야 할 것이다.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더 큰 사랑의 길: 나와 다른 사람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의 남편은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기도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가도 남편의 일관성 있는(?) 이기적인 태도에 화가 날 때가 많아요. 왜 저를 이토록 배려해 주지 않는 걸까요?”
“저의 공동체 안에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제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그 자매에게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해 주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밤새 원망하고 화를 내며 속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무수히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느님도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거나, 사랑해야 할 이웃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지내기도 합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과 입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관계가 불편해지는 경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상대가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많이 사랑하는 것을 넘어 ‘제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가령 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 사랑을 베풀었지만 자녀들은 오히려 그로 인해 사회성을 잃어버리거나 자기만 아는 삐뚤어진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나와 맞지 않거나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이들과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우리 마음속에 품어야 할 생각은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은 타고난 기질이나 교육 환경, 문화와 종교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와 다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삶이 완전하지 않고, 자신 역시 부족한 죄인이면서 어떻게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다른 이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물론 공동체 내에 상식 밖으로 자신만 생각하는 미숙한 사람,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이 공동체에 있을 때에는 참 불편합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이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미친 듯이 화를 내지만, 다른 사람은 그저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가 이내 평화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불편한 시간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고 오히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더 큰 사람이 되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마음 그릇을 더 크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대해 소위 ‘속 시끄럽지 않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의 마음이 더 넓어지고 나의 사랑이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성장시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공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멀리서 지켜보는 사랑을 했습니다. 기다려 주는 것, 침묵하는 것도 사랑의 방법입니다. 자신이 보기에는 자신의 생각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 같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을 닮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더 큰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정진의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적인 삶을 덕을 갖춘 삶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며 예수님의 사랑이 되기 위해 정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덕이 쌓여 가는 것이지, 성덕 그 자체를 영적인 삶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삶의 진정한 목표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영적인 삶을 시작해야 할까요? 다음 호에서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더 큰 사랑의 길: 나의 내면에서 시작하십시오
“20년간 신앙생활을 했는데, 예전의 열정은 식어버리고 습관적으로 의무감 때문에 성당에 다니고 있어요.”“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 같아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고 싶은데, 좀처럼 변화되기가 쉽지 않아요.” “절에 가면 참 자아眞我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하는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참 자아(the true self)를 찾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미국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이자 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저는 영적인 삶이란 인간의 진정한 자아의 삶이요, 내적 자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내적 자아의 불길이 종종 방치되어 불안과 무익한 걱정의 잿더미 아래에 질식되어 있곤 합니다. 영적인 삶은 삶의 물질적 필요에 대한 즉각적인 만족을 향해 있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향해 방향 지어져 있습니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머리말) 머튼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세속적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과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내면 안에 관상(觀想, contemplation)의 씨앗을 심어 주셨는데, 어떤 이는 이 씨앗이 싹트고 자라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가 하면 다른 이는 아직 씨앗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의 내적 자아가 깨어나고 그 자아를 하느님 현존에 머물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는 여정이 바로 영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를 회복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관상’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관상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과 사랑으로 일치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깊은 영적 일치의 체험은 유한한 우리의 이기적인 사랑을 성장시켜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건너가게 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내면 안에 ‘이미’ 주어진 사랑의 본성이 깨어나 더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으로 성장해 사랑이 되어가는(Becoming Love) 여정이 바로 영적인 삶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영적인 성장은 ‘사랑의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15-16)
영적으로 성장한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날마다 성전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만 하고, 계명을 잘 준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기도하고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난 사람이라면 그 삶은 사랑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현실에 충실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같이 내어 주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은 본래 낙원에서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고집하며 자신만을 사랑하려던 인간의 교만은 낙원에서의 사랑의 일치를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 본래의 자신이 됨으로써 이 낙원을 회복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분의 사랑과 하나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참 자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짓 자아와 경험적인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을 치워내면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자아, 악의 영역이 침범할 수 없는 본래의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眞我를 찾는 것과 다른 점입니다. 불교에서는 진아도 결국은 무아無我임을 깨닫게 되며 모든 얽혀 있는 관계(인연)로부터 해탈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으로 구도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의 자아를 잃어버림은 자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초월적 자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아의 부서짐과 더 큰 사랑의 길은 함께 가는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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