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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44) 생명으로의 리턴
자살 막으려면 사회적 개입이 필수
가정불화, 폭력과 학대, 학교 부적응, 장기 실직, 관계단절, 외로움, 질병, 심각한 재정적 압박 등과 같은 사회환경적 문제 등이 자살 행동의 발단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개인의 의지, 가족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고 사회적 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의 자살 심각성은 한국형 복지국가 디자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표징(表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살 행동은 ‘경계가 무너진 시간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정적 경험을 반복하면 과거뿐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역시 고통스럽게 지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사회에 나가면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통해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한부모 가정이라도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게 가능하고, 실직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생활과 새로운 기회가 부여되어야 시간성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보면, 자살시도자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너무나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시간성은 사회복지서비스, 복지권(entitlement) 등의 필요성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생색내기’식 복지나 정신의학적 자살 예방이 아닌 노동, 복지, 건강, 돌봄, 관계, 노후 등을 보장하는 통합적인 사회 정책이 중요한 자살 예방 방법임을 시사합니다.
자살 행동은 가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자살시도자가 의식하는 자살 행동의 근원에는 세상(사회)과 더불어 가족이 있습니다. 자살시도자들이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삶은 한마디로 ‘폭력적이고 불행한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불행의 흔적을 행여 타인이 알아챌까봐 눈치 보며 끝없이 새로운 삶을 모색했지만, 가족보다 더 폭력적인 사회를 경험하며 자신이 찾는 것은 언제나 어디에도 없다는 것만 체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예방하고 대처하기 위해 국가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건강한 가정, 건강한 양육환경 지원이어야 합니다. 신체적·성적 학대, 정서적 방임과 유기 등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모나 한부모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양육할 수 없다면, 국가가 아동 청소년의 보호자로서 최적의 양육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자살 행동은 단절된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대다수 자살시도자는 자신이 혼자이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호소합니다. 특히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는 더더욱 사람들을 만나기 주저하고 꼭 필요한 도움 요청마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만나는 사람마저 제한돼 있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주위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이들의 생활을 이해하고 일관된 관심을 제공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합니다. 현재 사회서비스 제공체계는 대부분 발생한 문제에 사후대처하는 형태로 되어 있으나, 앞으로는 일상적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관계를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 사회서비스 체계의 개혁과 누구도 관계에서 소외되지 않는 사회참여 방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43) 살아야 하는 이유
들이닥치는 고통을 견디는 방법
자살시도자가 원망에 찬 눈빛으로 묻습니다.
“단 한 가지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세요.”
자살 유가족 역시 한숨을 몰아쉬며 질문합니다.
“이러한 고통을 감당하면서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세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절박한 물음 앞에서 저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그 질문에 실린 무게에 압도되어 말문이 막혀버릴 때가 많습니다. 상담을 하면서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저 자신이 모순덩어리, 바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솔직히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현실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살아갈 이유,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저는 애초부터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마음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삶의 가치가 있어서 사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무심(無心), 무념(無念)이 원래 우리의 상태인데, 고통에 처한 자신을 더 비극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일종의 해법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해법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미망(迷妄)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으며, 점점 더 죽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 슬픔, 상실, 실패, 소외 등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그저 겪을 수밖에 없고,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더 선명하게 부각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자신을 더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중첩된 고통과 상처로 힘든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야 하는 이유’나 ‘한껏 각성한 자기’를 망각하고 누그러뜨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경험상 이러한 망각과 완화에 가장 도움이 됐던 것은 ‘인간적인 유대와 관계’였습니다. 잘난 사람,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평범하고 순박한 사람과의 관계성이 사람을 살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저 옆에 있어 주고, 그저 같이 걸어주고, 그저 같이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살아야 하는 이유’(엄밀하게는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과 동일)를 찾는 사람이 다시 원래의 무심한 상태로 환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순박한 사람들과 흉허물 없이 되는 이야기, 안 되는 이야기를 마구 떠들 수 있는, 가능하면 유치찬란한 인간관계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잘 어울려 노는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도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치한 상호작용이 사람에게 생명력을 줍니다. 그래서 ‘유치’를 뒤집으면 ‘치유’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42) 굿 나이트(Good Night)
어제도 푹 잠들지 못한 이들에게
자살 유가족이 겪는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잠 못 이루는 고통입니다. 많은 유가족이 우울감과 수면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항우울제나 수면제를 복용합니다. 약을 먹어도 잠이 오지 않아 대체제로 알코올을 택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물론 그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알코올이 뇌를 각성시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습니다. 술을 먹어야만 잠을 이룰 수 있다는 사람도 사실은 몸이 녹다운 된 것이지, 뇌는 선잠을 잤기 때문에 아침에 개운치 않습니다.
잠은 일상생활에서 오는 근심을 풀어주고 스트레스의 중압감을 가볍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잠은 일시정지의 기능도 있어서 부정적 생각과 현실의 힘듦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줍니다. 신기하게도 인간의 뇌는 깨어있을 때보다 수면 상태에서 놀라운 치유 기능을 발휘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잠은 ‘영원한 어머니의 품’이고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어머니가 우리를 쓰다듬고 돌봐주시는 것처럼 깊은 위로를 받고 나이와 상관없이 성장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잠 못 드는 유가족을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수면 방식이 아니어도 수면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벌을 서듯 꼭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잠을 안 자도 괜찮다’라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누운 상태로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하면서 자신의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낸 시간만큼 잠을 잔 걸로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 누워서 하는 게 힘들다면, 선승들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해도 괜찮습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상좌였던 춘성스님은 평소 이불을 덮지 않고 가부좌를 튼 채 잠을 잔 것으로 유명합니다. 춘성스님은 이불을 ‘옮기다(移)’, ‘떠난다(離)’를 써서 이불(移佛), 이불(離佛)이라 칭하고 부처와 불심이 떠나지 않도록 평생 이불 없이 수행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아침이 되면, 무조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합니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고 오전 내내 잠을 자게 되면 또다시 불규칙한 수면 패턴이 만들어집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아무리 피곤해도 일과를 정상적으로 보내야 합니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일, 활동, 운동 등을 통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간밤에 못 잔 잠을 보충하기 위해 중간 중간 쪽잠을 자게 되면 수면 문제를 해소하기가 어렵습니다.
세 번째는 밤에는 어둡게, 낮에는 밝게 생활해야 합니다. 많은 유가족이 낮에도 암막 커튼을 치고 어둡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집안에 충분한 햇빛과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밖에 나가 햇빛도 받고 산책도 해야 합니다.
반대로 밤에는 실내를 어둡게 하고 가급적 스마트폰 불빛도 멀리해야 합니다. 겨울철 일조량이 적은 북유럽 국가의 사람들은 실내에서 밝은 램프를 켜고 운동하기를 즐깁니다. 수면에 영향을 주는 세로토닌, 멜라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조절 기능이 빛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실을 수용하는 과정은 아주 긴 싸움입니다. 어차피 할 싸움이라면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잠을 잘 자야 합니다. 그래야 자존감을 잃지 않고 싸울 수 있고 또 슬퍼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40)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배우는 자살예방 ① ‘보다’
타인의 고통 보고도 무관심한 우리
인생길에는 다양한 만남이 있는데 참으로 귀한 만남이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만남도 있고, 때론 인생길에 쓰러진 이들을 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 10장에도 그렇게 길에 쓰러진 이가 나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보고’는 지나쳐 반대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겠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은 피를 만지거나 죽은 이를 접촉하게 되면 부정한 사람이 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무엇을 더 기뻐하시는지를 안다면 이는 명백히 작은 선을 위해 큰 선을 저버리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은 서로 관계가 나빴기에 그냥 모른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과거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지 쓰러진 이를 ‘보고’는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고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OECD 1위라는 한국의 자살률은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방송 미디어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통해 그러한 죽음들을 늘 접하고 있습니다. 이제 머리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정신질환, 폭력의 희생, 회복 불가한 신체적 고통, 삶의 절망적인 고통 등 다양한 요인이 자살의 원인으로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진정 ‘애통한’ 마음으로 자살로 죽음에 이른 연령을 위해 기도하고, 자살유가족을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애통한 마음을 갖는 것과는 별개로 가톨릭 신앙인은 이 시대의 자살 문제가 갖는 심각성을 인지하고, 자살 예방 실천에 개인과 신앙 공동체가 함께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고 자살 위기자를 구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살 위기에 처한 내 이웃을 ‘내가 돌봐야 하는 내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신 하느님께 카인이 한 “모릅니다”라는 대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라고 말했듯이 신앙인은 더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날 “무관심의 세계화”가 빚어내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며 현대인의 슬퍼할 줄 모르는 능력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많은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을 직접 ‘보고’ 미디어를 통해 매일 접하면서도 이에 대해 무감각하고 남의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로부터 슬퍼하는 능력을 없애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사람이 악하거나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선량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이웃을 향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약한 이들은 자신의 수명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우리의 무관심한 마음과 투쟁하고 계십니다.
[가톨릭신문 -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 공동기획 ‘우리는 모두 하나’] (39)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기적
곁에 아무도 없을 때 휘청이는 사람들
몇 년 전 24시간 상담 기관에서 야간근무 중 한 청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청년은 난치병 투병 중이고,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이미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려는 시점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청년 주변에는 유일하게 어머니가 계셨으나 어머니마저 치매로 요양원에 계셨고 아들을 못 알아볼 뿐 아니라 심한 욕설과 공격성을 보이는 상태였습니다.
청년은 지금까지 가혹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아왔고 전화할 당시의 삶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마음 고생을 하며 살아왔고, 지금은 몸 고생까지 감당하게 됐다고 하면서 이제는 그만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청년에게 도움을 줄 방법은 없었습니다. 청년의 마음을 돌이킬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청년이 처한 상황이 안타까워 울었습니다. 그러자 청년도 같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에 시작된 통화는 동이 틀 때까지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이해가 됐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후, 저는 청년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 돼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상담자로서 감정조절을 하지 못한 것도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청년은 제가 함께 울어준 것이 그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울고 싶을 때,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될 때 한 번씩 전화해도 되는지 물어왔습니다.
여전히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 쇳소리가 섞인 “그럼요”라는 저의 응답에 청년은, 한참을 울고 난 아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는 것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한번은 60대 후반의 여성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일흔을 바라보는 연세였고 전혀 꾸미지 않으셨지만 정말 아름다우셨습니다. 그런데 상담실에 들어오시는데 거동이 매우 불편해 보였습니다. 그녀는 몇 년 전부터 알 수 없는 마비가 와서 혼자서는 움직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국내는 물론 외국 병원도 가 봤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부유했지만, 매우 엄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성장했고, 결혼도 집안 간 결혼으로 명망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과묵했고 사업에만 집중했습니다. 사적인 관계가 거의 차단된 채, 누구의 아내로 더 엄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자녀도 없었기에 그녀의 삶은 조용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비가 왔고, 자살 시도를 반복했고, 여전히 서먹한 남편에게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부유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눌 단 한 명의 친구도 없는 그녀에게 저는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재잘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도 조금씩 감정을 표현하고, 입에 물린 재갈을 풀고 같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상담회기가 거듭되면서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인형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진짜 나로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젊은 시절 꿈이었던 그림을 시작했고, 집을 다양한 자기표현을 위한 작업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지팡이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지만, 차츰 경직된 몸이 풀리고 타인의 부축 없이 상담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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