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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소폭포의 길
----천금순의 시세계
반경환
천금순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했고, 1990년『동양문학』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마흔세 번째의 아침』,『외포리의 봄』,『두물머리에서』,『꽃그늘 아래서』,『아코디언 민박집』등이 있다. 천금순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인『직소폭포를 보다』는 “세상사 번뇌 사라지듯/ 새소리로 귀를 씻고/ 직소폭포 한줄기로 마음을 비운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자연인의 삶, 즉,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 천하제일의 시인의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너도 시인이 될 수가 있고, 나도 시인이 될 수 있다. 정치인도 시인이 될 수가 있고, 학자도 시인이 될 수가 있다. 군인도 시인이 될 수가 있고, 의사도 시인이 될 수가 있다. ‘직소폭포의 길’은 ‘꽃길’이고, ‘꽃길’은 온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의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방드르디를 쓴 미셸 투르니에가 죽었다
계절의 순환 속에
어김없이 봄이라는 계절을 확인하듯
일제히 수직으로 솟아오르던 목련도
벚꽃도 눈보라처럼
내 등 뒤로 흩날리며 다 졌다
지는 것은 아름다운가
아름다움은 주위에 허무를 만들어내고 있다
벽에 걸린 달력의 커다란 숫자를
나는 확인하고 있다
또한 메밀국수를 끓이면서 3분을 재고 있다
나는 아직도 매일, 매 시간, 매 분, 그 다음날
시간, 혹은 분 쪽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있는가
땅 속에 묻힌 씨앗처럼
바윗덩어리 속에 갇혀 있었지만
지금은 그늘을 드리우는 거대한 나무처럼
섬의 주인이 된 방드르디 (그리스도가 죽은 날)
저 피고 지는 꽃들의 순간적인 눈부심이야말로
심층 속에 묻혀 있던 평화가
화산 폭발하듯 개화한 것이 아닌가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그것은 생명을 이루는 바탕이나니.”
----[방드르디를 읽다] 전문
미셸 투르니에(1924~2016)는 프랑스가 배출해낸 세계적인 작가이며, 그의 대표작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문명을 등지고 28년 동안이나 무인도에서의 삶을 그려낸 걸작품이라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패러디이면서도 다니엘 디포의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자연인의 삶을 완성해낸 걸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무인도살이를 하던 중, 원시 자연인인 프라이데이를 그의 하인으로 삼을 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자연인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기독교와 자본주의, 그리고 대영제국의 제국주의를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문명인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프랑스식 이름)는 서양문명의 대명사인 로빈슨 크루소를 자연화시켜 그와 함께 모든 옷을 벗어버리고, 그 어떤 거추장스러운 물건도 만들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
천금순 시인의 [방드르디를 읽다]는 여행자, 혹은 구도자의 삶을 살아온 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가장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방드르디를 쓴 미셸 투르니에가 죽었다”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그의 인생관이 되고, “저 피고 지는 꽃들의 순간적인 눈부심이야말로/ 심층 속에 묻혀 있던 평화가/ 화산 폭발하듯 개화한 것이 아닌가”는 그의 세계관이 된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명제가 되고,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그의 삶의 과제이자 목적이 된다. 미셸 트루니에도 죽었고, 일제히 수직으로 솟아오르던 목련도 졌고, “벚꽃도 눈보라처럼/ 내 등 뒤로 흩날리며 다 졌다.” 비록, 지는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허무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천하제일의 섬주인이 된 방드르디처럼, “저 피고 지는 꽃들의 순간적인 눈부심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목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떠한 삶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신 꽃길일 수 있을까? 방드르디처럼 그 모든 것을 다 거부한 자연인의 삶을 살 것인가? 로빈슨 크루소처럼 끊임없이 현대문명을 찬양하면서 살아 갈 것인가? 이것은 매우 어렵고도 힘든 문제이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어느 정도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가능하면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은 문명보다도 더 크고, 우리 인간들은 결코 자연을 정복할 수가 없다.
천금순 시인의 [방드르디를 읽다]는 자연인 방드르디를 찬양하며, 이 세상의 꽃을 피우고, 그 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세상의 탄생은 그의 출발점이 되고, 꽃을 피우는 것은 절정이 되고, 죽음은 그의 목적이 된다. 미래가 현재를 지배하고, 비존재가 존재를 지배하는 역도인과성逆道因果性의 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길’일 것이다. 요컨대 천금순 시인의 ‘직소폭포의 길’은 그의 ‘꽃길’이고, 그의 ‘꽃길’은 모든 번뇌 다 사라지듯 새소리로 귀를 씻고, 직소폭포 한 줄기로 마음을 비운 자연철학의 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봄바람을 타고 변산반도 암봉 쇠뿔바위봉으로 간다
국립공원 휴식년제에서 풀려 난지 2년이 지났는데
산불방지로 못 오른다 하여 발길을 돌려
실상사 직소폭로로 향했다
낮은 보리들이 파릇파릇하고
냉이를 캐는 아낙네들
오랜 실상사 절터 뒤
암자에서 들려오는 반야심경 목탁소리
세상사 번뇌 사라지듯
새소리로 귀를 씻고
직소폭포 한줄기로 마음을 비운다
지금 떨어지고 있는
저 폭포는
삶과 죽음을 동행하고 있는
시詩의 마음 아닐까
----[직소폭포를 보다] 전문
소위 성공한 자들은 대부분이 대사기꾼들이라는 말이 있다. 의사는 수많은 환자들이 발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변호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소 고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인들은 시시때때로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재벌들은 아주 값싼 제품을 아주 비싼 값에 팔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 의사들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환자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과연 우리 변호사들이 수많은 소송전으로 인해 가산을 다 탕진하고 패가망신하는 의뢰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단 말인가? 과연 우리 군인들은 대량살상 무기에 의하여 그 어떠한 참상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고, 과연 우리 재벌들은 이 땅의 서민들이 그 최저생활의 밑바닥에서 그 얼마나 신음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있단 말인가?
소위 정치인들과 학자들과 사제들과 예술가들은 돈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돈을 밝히게 되면 진정한 정치인과 학자와 사제와 예술가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 정치인들과 학자들과 사제들과 예술가의 길은 ‘무보수 명예직의 길’이며, 그들의 돈에는 저주가 달라붙어 있어 악마처럼 그들을 타락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소속된 사회와 전체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지, 돈을 벌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업예술가는 거짓말의 화신이자 변절의 대가가 되고, 순수예술가는 정의의 화신이자 전인류의 스승이 된다. 돈과 명예는 같은 무대에 설 수가 없고,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꽃무릇 다 진 선운사
고즈넉한 새벽
이 고요
도솔암 가는 길
떨어진 도토리 가득하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아니
내 등 뒤
누군가의 노랫소리
----[도솔암 가는 길] 전문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의 12만 유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끊임없이 정진을 했던 곳이 도솔천이고, 도솔천은 미래의 부처를 탄생시킨 성지라고 할 수가 있다. 도솔암은 미래의 부처가 사는 곳이며, 모든 욕망을 다 비우고 꽃무릇 지듯 해탈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꽃무릇 다 진 선운사/ 고즈넉한 새벽/ 이 고요/ 도솔암 가는 길/ 떨어진 도토리 가득”하고,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아니 내 등 뒤/ 누군가의 노랫소리” 등---, 그 모든 것이 아름답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한 알의 씨앗이 꽃을 피우고 죽은 것도 한순간이고, 한 생명이 태어나 자식을 낳고 죽는 것도 한순간이다. 시간은 너무나도 짧고, 빠르고,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도 없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꽃길이며, 이 ‘직소폭포의 길’은 삶과 죽음이 동행하는 ‘시인의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탐욕은 만악의 근원이며, 소위 성공한 대사기꾼들은 하루바삐 은퇴를 하고 진정으로 그가 소속된 사회와 인류 전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천금순 시인은 [도솔암 가는 길] 이외에도 수많은 꽃에 대한 시들을 썼는 데, [소풍], [방드르디를 읽다], [문주란], [한순간], [꽃길], [꽃이 진다], [사람꽃], [백일홍 노래] 등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꽃은 생존의 결정체이며, 온몸으로 자기 짝을 부르는 구애활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구애활동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꽃을 피우며, 이 꽃을 통해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압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름다움은 종의 건강과 종의 미래가 되고, 아름다움은 또한, 종의 행복과 종의 영원성을 보장해 준다. 모든 생명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꽃을 피우고 죽는 것이 자기 자신의 의사가 아니듯이, 이 삶의 의지는 종족의 의지가 개체성으로 숨어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 너도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산다. 풀과 나무도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 벌과 나비도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산다. 이때에 각자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자 로맨스의 주인공이라고 착각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종족의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이 사랑의 싸움이, 그 발정기에는 곧잘 목숨을 건 혈투로 이어지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로맨스로 결정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돌틈 사이 핀 것이니 돌꽃인가
하늘엔 구름꽃
땅엔 들꽃
연못엔 연꽃
바다엔 파도꽃
허공엔 바람꽃
----[돌꽃] 부분
우아란 말끝에
호수공원 앞
비에 젖고 있던 동백이
모가지를 직선으로 떨어뜨린 채
뚝 지고 있었다
----[우아한 죽음] 부분
숨이 막힐 듯
가녀린 몸짓으로 피어오르더이다
기어이
한 마리 학의 날개로
파닥이며 솟아오르더이다
일제히
피어 황홀한 자태를 보여주더이다
이십여 년 만에
귀한 선물을 안겨주더이다
---[문주란] 전문
꽃은 생존의 결정체이며, 아름다움은 종족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돌틈 사이 핀 것이니 돌꽃인가/ 하늘엔 구름꽃/ 땅엔 들꽃/ 연못엔 연꽃/ 바다엔 파도꽃/ 허공엔 바람꽃”이라는 [돌꽃]처럼 이 세상에 꽃 아닌 것이 없고, “우아란 말 끝에/ 호수공원 앞/ 비에 젖고 있던 동백이/ 모가지를 직선으로 떨어뜨린 채/ 뚝 지고 있었다”의 [우아한 죽음]이나 “순간, 한순간/ 생애 한순간/ 붉은 꽃봉오리”의 [한순간], “이십여 년만에” “피어 활홀한 자태를 보여”주는 [문주란]처럼, 이 세상에 온몸으로, 온몸으로 꽃을 피우지 않는 생명체는 없다. 꽃길은 직소폭포의 길이고, 직소폭포의 길은 시인의 길이다. 시인의 길은 사람꽃의 길이고, 사람꽃의 길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풍경이 되는 길이다.
이 세상의 삶은 만물의 영장의 삶이 아닌 자연의 삶이며, 이 자연의 터전을 벗어나서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가 없다. 장자와 노자가 ‘무위자연의 삶’을 강조한 것도 그렇고,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철학도 자연의 삶을 강조한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탐욕을 만악의 근원이라고 규정하고 탐욕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한 모든 종교들도 그렇고, 따라서,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문명인들처럼, 반자연적이고 파렴치한 악마들도 없을 것이다.
자연휴양림을 지나
천상병 시인의 옛집으로 가고 있다
시인이 살았던 집
시인은 없고
빈 부뚜막의 솥단지 하나
꽃 화분 두어 개
비에 젖고 있다
----[소풍] 부분
한 걸음 한 걸음 부드러운 오름의 곡선은
볼 수 있으나 만질 수 없는
하늘과 가까워지는
그곳에 내가 멈추어 섰다
용의 눈을 닮아서인가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제주의 풍경이 넓고 아름답다
햇빛의 거센 바람이 내가 쓴 모자를 날려버리고
하늘 아래 기차길을 따라 도는 레일바이크가
그와 나를 태우고 초록의 들판을 가로 지른다
제주의 한 풍경이 되어버린
사진작가 김영갑의 사진 속 풍경이 그려진다
----[용눈이 오름] 부분
내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봄꽃 화사한 미소를 만나러갑니다
환자의 내면의 고통과 병을
마음으로 치료하는 그를
나는 사람꽃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꽃] 부분
천금순 시인의 여행시들은 꽃길을 찾아다니는 시이며, 그는 꽃길에서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자연과도 하나가 된 사람꽃을 만나고 그 꽃에 감동을 하게 된다. 방드르디의 남태평양, 사진작가 김영갑의 제주도, 천상병 시인의 안면도 옛집, 코로나 시대의 강릉 입암동, 네팔 대지진 때의 카투만두, 국립중앙박물관 안의 폼페이, 지리산의 아코디언 민박집, 꽃대궐 속의 꽃길, 세월호가 침몰한 팽목항 등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지리산을 돌고 돌아 소릿길”을 만들고 죽어간 “아코디언 민박집” 주인도 사람꽃이고, 제주도의 풍경 자체가 된 사진작가 김영갑도 사람꽃이다. 이 세상에 소풍 왔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간 천상병 시인도 사람꽃이고, “환자의 내면의 고통과 병을/ 마음으로 치료”해주는 의사도 사람꽃이다.
천금순 시인의 ‘꽃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는 [바다의 무덤]이 되어 온몸으로 영원불멸의 꽃을 피우고 있는 문무대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저 검은 동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 바위 속 문무대왕릉
십자형 수로 가운데
봉긋 솟은 화강암 위
갈매기 떼 꽃인 양 앉아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바다의 무덤이 봉긋 솟았다
쏴-아 주상절리의 절창
사람과 돌과 바다가 하나 되어
출렁이고 있는 저 무덤들
----[바다의 무덤] 전문
국가가 있고, 국민이 있는가? 국민이 있고, 국가가 있는가? 국가를 강조하면 국민의 자유가 제한되고, 국민을 강조하면 국가의 조직과 그 질서가 무너진다. 중요한 것은 도덕과 법률, 즉, 그 구성원들의 사회적 약속에 따라 가장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험에 빠질 때면 국가가 우선시 되어야 하고, 모든 국민들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꽃은 자연과 하나가 된 풍경이며, 이 자연과 하나가 된 풍경은 자기 자신의 모든 욕망을 다 비운 구도자만이 피울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람꽃은 구도자의 모습이며, 우리 인간들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할 수가 있다. 천금순 시인의 꽃길은 직소폭포의 길이고, 직소폭포의 길은 시인의 길(사람꽃의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흐 꽃이 진다/ 세월호 침몰 90일째”, “세월호 참사는 끝나지 않았다”([꽃이 진다])라고 팽목항을 찾아가고, “입으로만 외치는 구호가 아니다/ 어제의 희생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외치고 있는 것이다”([겨울광장에 서서])라고, 촛불을 들고 그 구원의 손길을 펼쳐 나간다. 아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며, 실천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조국애는 사람꽃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며, 모든 국민과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저 검은 동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 바위 속에 핀 꽃, “십자형 수로 가운데” “화강암 위/ 갈매기떼”로 핀 사람꽃,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의 사람꽃, “사람과 돌과 바다가 하나 되어” “쏴-아 주상절리의 절창”으로 핀 문무대왕꽃----. [바다의 무덤]은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승리이며, 천금순 시인의 ‘직소포의 길’, 그 시인 정신이 피워낸 ‘사상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대
밤새 앓는 소리
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반쯤 열어 둔 창
반달이 서서히 오른쪽으로 이울고 있다
달아 난
내 잠과 더불어
내 말똥말똥한 눈망울도 이울고 있다
새벽 3시
시계 초침소리
아으 다리야
아으 엉치야
아으 어깨야
아으 힘들어
아으 엄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온몸에 맨소래담 바르고
출근 도장을 찍으러 가는 그대
온몸으로 우는 절정의 매미소리 뒤로하고
온몸으로 우는 풀벌레 소리 뒤로하고
온몸으로 우는 달빛 뒤로하고
어느 새
그대 앓는 소리로 가을 깊다
----[그대] 전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무엇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무엇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어떤 삶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직소폭포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꽃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사람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문무대왕처럼 조국의 수호신으로 죽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나 아름다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은 천길 벼랑 끝에 있고, 아름다움은 ‘화무십일홍’ 속에 있다. 아름다움은 최하천민의 노동 속에 있고, 아름다움은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죽음 속에 있다. 꽃길은 직소폭포의 길이고, 직소폭포의 길은 사람꽃의 길이고, 사람꽃의 길은 단 하나뿐인 몸으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의 길이다.
그대는 나이고, 나는 그대의 짝궁이다. 그대도 산업전선의 밑바닥에서 노동을 하며 살고, 나도 여성개발인력센터에서 도우미로 일을 하며 시를 쓴다. 그대 밤새 앓는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고, 반쯤 열어 둔 창으로 반달이 서서히 오른쪽으로 이울고 있다. “새벽 3시/ 시계 초침소리/ 아으 다리야/ 아으 엉치야/ 아으 어깨야/ 아으 힘들어/ 아으 엄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온몸에 맨소래담 바르고/ 출근 도장을 찍으러 가는 그대”의 신음소리는 온몸으로 우는 매미소리와 풀벌레소리와도 같고, “어느 새/ 그대 앓는 소리로 가을”은 깊어만 간다.
꽃은 상처이고, 상처는 고통이다. 꽃길은 가시밭길이고, 시인은 온몸으로 그 비명 소리를 토해내는 악기와도 같다.
모든 꽃은 고통으로 피어나고, 모든 꽃은 고통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 아름다움, 이 아름다운 시, 즉, ‘사상의 꽃’은 그 고통의 절벽을 바라볼 때만이 아름다울 뿐이다.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안정성을 확보한 독자이고, 모든 시인은 자기 자신이 몸소 천하제일의 직소폭포에서 뛰어내리는 연기자일 뿐이다.
황사로 뿌옇던 하늘이
오랜만에 맑습니다
산 능선 위로
몇 송이의 구름이
하얀 목련인 양
피었다 집니다
진달래도 피었습니다
분홍빛 능선을 따라
군인들이 행진을 합니다
바람에 활짝 핀
벚꽃이 춤을 춥니다
꽃대궐 속
예쁜 마을이 보입니다
꽃비가 온 어제
오늘 꽃동산 아래
길들이 점점 멀어집니다
----[꽃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