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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94:1-6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 칼빈
시편 기자는 사악하고 광포한 자들을 물리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합니다.
저들은 비열하고 포악한 수법으로 정직한 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국 내의 원수들을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불의한 지배는 주의 백성들에게 대해서 이방 나라들로부터 받은 온갖 침해만큼이나 괴롭고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1. 본문 1-2절은 “(1) 여호와여 보수하시는(응보의 - 칼빈)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 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2)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 입니다.
유대인들은 우호관계가 그리 좋지 못한 여러 이웃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모진 원수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과 압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이 내부적인 방해는 이방 악인들의 걷잡을 수 없이 만연된 폭력보다도 더욱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그 박해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진지하게 구하는 것을 보고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대해 사용하는 ‘빛을 비취시고 자신을 하늘 위에 높이소서’라는 표현을 일반 말로 고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자 혹은 보응하시는 자로서의 신분을 실제 방법으로 나타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리 할 경우 하나님은 죄에 대해 정확한 형벌을 내리기 위해 심판의 보좌에 오르사 세상 질서와 통치를 유지하심에서 권능의 하나님으로 알려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개적인 방법으로 그의 손을 펼쳐 우리를 돕지 않을 경우 우리는 마치 그가 우리를 그냥 지나치신 것으로 생각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표현은 단지 우리 자신들에 관해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 번을 거듭하여 하나님을 “보수하시는 하나님”으로 부르고 나서 다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로 부름에 있어서 시편 기자는 이 명칭들을 자기가 처해 있는 현 상황에 적절한 것으로 생각하여 사용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직분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시편 94 편
시편 기자는 마치 ‘여호와여! 죄인들을 보응하시고 땅을 심판하시는 것이 주의 일이니이다. 저희가 저희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는 일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저희의 사악함 가운데서 어떻게 무례히 승리하고 있는지 보소서’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임무에 대하여 충고를 받으실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야말로 결코 무관심에 빠지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심판을 늦추고 계신 것으로 보일 때라도 그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신 그 시기에 맞추고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고 그러한 때일수록 더욱 담대히 기도에 열심을 내는 데에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사용하는 반복 표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인들이 제멋대로 포악을 자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악을 보응하시는 땅의 심판자로서의 신분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에 하나님이 어느 때 라도 물러가 자신을 숨기실 것처럼 보이는가?
여기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빛을 비추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2.본문 3절은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입니다
시편 기자는 본 절에서 자기 간구에서 보인 불같은 재촉을 정당화시킵니다.
악인들이 그 정도까지 무모하게 행하던 때에는 당장에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그처럼 화급할 때는 그 상황이 당연히 그리고 담대히 우리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요청이 사리에 맞는 것이면 보다 쉽게 응답될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의 탄원이 근거 없는 것이거나 사소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장 극악무도한 침해를 받아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것으로 주장합니다.
저희의 박해가 계속되어 심히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주목됩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계속 오래 참으시는 중에 더욱 완악해졌고 그 결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되었을 뿐 아니라 고집스런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악함을 호의를 가지고 보시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두 번 반복된 “언제까지” 라는 말은 저들이 이제까지 벌을 받지 않고 지나올 수 있었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던가를 보여줍니다.
시편 94 편
이것은 저들이 마치 악을 방금 시작했던 것과 같았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오랫동안 묵인을 받아와서 이제는 말로 할 수 없이 잔학무도해졌음을 뜻합니다.
이전 시대에 악인들이 교회에 그 정도로 압제를 가하였어도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구제하기 위해 아무런 손을 쓰지 않으셨던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의 교회로 오랫동안 계속되는 박해에 처하게 하신 일로 놀랄 필요가 없거니와 즉시 현재의 악을 고치지 않으신다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완전히 버리셨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개가” 라는 말은 악인들이 계속되는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 또 그들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때 느끼는 철면피 같은 오만무례함으로 가득 차 있는 기쁨을 가리킵니다.
3. 본문 4절은 “저희가 지껄이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자긍하나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더욱더 분명한 말로 저희의 박해가 얼마나 흉악하고 포악한지 저희가 서슴지 않고 저희 죄악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동사 נבע(나바)는 ‘말하다’ 이상의 무엇을 뜻합니다.
문자 그대로 그 동사는 ‘침을 튀기면서 마구 지껄이다’를 뜻하며 비유적으로는 분별없는 혹은 경솔한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악인들이 교만과 허영의 충동질을 받아 헛되이 저희의 권력을 자랑하고 피흘림과 폭력과 소름끼치는 잔인한 협박을 발함으로서 얼마나 자신들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격하시키는가를 봅니다.
시편기자가 언급하는 바는 수치와 겸손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는 사악한 행위를 자랑할 때 나오는 입의 거품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기자가 ‘거친 말들을 하며’(칼빈) 라고 한 말의 뜻입니다.
그것은 두려운 생각이나 신중한 고려도 전혀 없이 가장 걷잡을 수 없는 방종에 빠져 들어가는 이야기를 지껄여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전에 주의 백성들은 교회가 이같이 난폭한 압제와 실정에 시달리는 것을 보는 무거운 시련을 견뎌 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아직도 참담한 악정에 시달리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이상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얼마동안은 저희의 사악함을 묵인하실지라도 마침내는 자기 자녀들을 구원하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시편 94 편
4. 본문 5-6절은 “(5)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6)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입니다.
허영에 가득 차 부끄러움을 모르는 저들의 말을 지적하고 난 시인은 이제 더 나아가 교회를 잔인무도하게 박해하는 데 나타난 저들의 행위들에 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교 군왕들의 신민들이 불의의 박해를 받는 것도 견디기 힘든 일이나 더 힘든 것은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그의 특별한 기업인 사람들이 압제의 발 아래 짓밟힘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대하는 기도는 저자가 앞서 지적한 우리나 다른 형제들이 악인들, 특히 자국 내의 원수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우리가 본받아 힘써 기도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안전은 주께 귀중한 것입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그의 손으로 지으신 솜씨인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특별한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어느 때라도 우리가 해를 받게 될 경우 우리로 보다 확고한 신뢰심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다음에 저희가 “과부”와 “고아”를 아끼지 않고 “나그네를 죽이며”가 붙여져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교제 가운데서 공평과 공의를 베풀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명하신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특별히 보살피도록 우리에게 권고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더 해 받을 위험이 크고 더 보살핌과 동정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은 유례없는 불신앙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권위를 모욕하는 것이며 일반 공의에 위촉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배려해 주신 특별한 보호의 권리를 침해하는 처사이기도 합니다.
그 같은 처사로 비난을 받아야 할 자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특히 어린 자녀들에 관해서는 그들의 무력함과 어린 나이로 인하여 개들이나 들짐승들에게 공격받지 않도록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그같이 연약한 자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가공할 만한 잔학한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그 당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널리 자행되고 있던 끔찍한 일들의 한 예를 대합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명하신 율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 안에 온갖 사악함이 얼마나 가공할 정도로 넘치고 있었던가를 봅니다.
우리도 그와 비슷한 타락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그네를 핍박하고 과부를 강탈하고 아비 없는 자들을 유린하는 것을 감시하여 우리로 그들의 불행을 덜어줄 것을 촉구하는 시편 기자를 본받아서 그들을 지켜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94 편
시94:7-10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본문에서 시인은 그 원수들의 무지(無知)를 책망합니다(7-11).
그들의 무지는 저희의 악행을 하나님이 보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 무신론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신다고 하니 이것은 그들이 실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제외하는 사상입니다.
인간의 무지에 있어서 무신론이 그 중에 가장 암매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증거는 이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니 그것은 제일 큰 무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목적 있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맹목적인 우연에서 나왔을 리 없습니다.
1. 본문 7절은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입니다.
시편기자는 악한 자들이 우매와 무지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저들이 그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정확히 이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하나님은 마치 인간의 일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 판에 새겨진 진리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것일진대 이 진리는 저희 행실에 대하여 하나의 점검과 제재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저들이 자신의 동료 피조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강탈하고 파괴하는 등 사악을 저지르는 일을 계속 자행하는 사실은 저들이 사실상 하나님이 보지 못하는 곳에 안전히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비열하고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안전감에 빠져 있습니다.
이들이 도취되어 있는 그 안전감은 적어도 이들이 마치 자신들의 행실에 대하여 문책 받을 것으로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듯이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줍니다.
그들이 여러 말로 하나님은 세상에서 되는 일들, 곧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단 한 가지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극악한 신성모독죄에 걸리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시인은 적절히 저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부인한 사실로 비난합니다.
시인의 고발에 의하면 저들은 실로 공공연히 하나님에게서 심판자와 통치자의 권능과 직무를 박탈하였습니다.
시편 94 편
이는 저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감독하시는 섭리를 추구했다면 저자가 더 상세히 언급한 바와 같이 저들이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가장 저열하고 가장 파렴치한 타락상을 밝힙니다.
시인의 지적에 의하면 그 죄인이 하나님 경외를 버리고 멋대로 방자히 행합니다.
그같이 이성을 잃은 처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들어본 적이 없던 이교의 세계에서조차도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양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그 같은 경멸과 모독을 자행하는 처사는 가공할 문제였습니다.
2. 본문 8-9절은 “(8)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심판자이신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가증한 불경죄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교묘히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심지어 술수를 써서 하나님의 목전에서 숨으려고 생각하는 저들의 어리석음을 엄히 경책합니다.
“백성 중 우준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시편 기자가 그들을 단순히 어리석은 자로 단정한 것보다도 더 강력한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우매함은 더욱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시편기자는 여기서 통치자들과 당시 사회의 고위층에 속한 자들을 가리켜 말하고 또 그들을 ‘백성 중 타락한 자들’ 곧 일반 세속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자들로 칭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만감에 눈이 어두워지기 쉬운 교만한 자들은 기를 꺾어 놓고 또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의 자만을 꺾기 위해 그들을 일반 백성과 동일한 수준에 놓습니다.
우리는 또한 시편 기자가 저희의 오만에 대한 풍자적이면서도 신랄한 암시로 저희가 주로 유례없는 어리석음이나 우매함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 위에 월등히 뛰어난다는 점을 시사함과 동시에 추가적인 질문을 덧붙여 저희가 그 어리석음에 집착하기를 고집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편 94 편
이는 그런 내용이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라는 질문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공연히 하나님께서 사건들을 인식하고 계신 사실을 부인할 정도로 방자한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악인들에게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는 질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주장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 뜻에 반하여 드러내는 극단적인 오만과 자기 방어는 저들이 저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내보내고 그 자리에 단지 죽은 것에 불과한 우상을 대신 앉혔다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이는 저들이 만일 하나님께서 저들의 행위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었다면 적어도 저들이 동료 피조물들을 존경하는 만큼이라도 하나님을 존경했을 것이고 그 결과 존경과 두려움으로 범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동료들의 면전에서는 어느 정도 자숙했을 것입니다.
이런 우매에서 깨어나도록 시인은 자연 질서로부터 논증을 끌어냅니다.
시인의 추론은 곧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께 받은 기능들로 보고 들을 수 있다면 눈과 귀를 지으신 하나님은 가장 완전한 관찰력을 갖고 계시지 않겠는가 입니다.
3. 본문 10절은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 하지 아니하시랴” 입니다.
시편기자는 보다 큰 것에서 보다 작은 것으로 논증을 끌어갑니다.
하나님이 전체 나라들도 아끼지 않고 그들의 죄악을 형벌로 갚으실진대 저들은 하나님이 개개인의 사소한 죄악들은 벌하지 않고 넘어가실 것으로 생각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도된 것은 아마도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조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방인들을 아주 엄중히 징벌하셨을진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의 교훈에 익숙해졌던 자기들은 이방인들보다 훨씬 더 예리한 징치를 받을 것이며 하나님이 친히 관장하기 위해 택하신 그 나라, 곧 자기들의 나라에서 그의 공의를 가장 엄중히 나타내실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저자에게는 전자의 의미가 본 절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전체 백성에게 공적 형벌 내리시는 것을 보면서도 개인적으로 직접 형벌을 받지 않았다고 우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 하늘로서 내린 불로 소돔성이 멸망한 사건(창19장)과 홍수로 온 인류가 멸망한 사건(창7장)에서와 같이 성경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드러지면서도 기억에 남는 예들에 국한되는 암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다 단순한 의미가 최상의 의미입니다.
시편 94 편
곧 나라들이 망할 때라도 자기 만큼은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개인들에게 있어서 더없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 라는 말을 덧붙임 일 때 시편기자는 저들이 예리하고 주도면밀한 점에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신들을 과시하는 등의 자신만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자기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교활한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해 화를 선언하고 있음을 봅니다(사29:15).
그것은 아직도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하나의 질병입니다.
우리는 조정의 신하들과 율법학자들이 기회를 타서 파렴치하게 하나님을 조롱하고 숨는 그들의 피난처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편기자가 “너희가 너희의 예리한 분별력을 통해서 갖고 있는 자신감으로 하나님을 교묘히 피할 것으로 생각하고 감히 하나님의 지식을 논박하나 사실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은 다함이 없는 그의 충만에서 떨어진 한 방울 물에 불과하니라”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 94 편
시94:11-13 여호와께서
11절의 뜻은 하나님은 열방(列邦)을 징계하시어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니 만큼 하나님에게는 사람들을 판단하시며 벌하실 능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허망한 악한 사상도 아실 것은 확실합니다.
12-13절은 성도가 악한 자들에게서 박해를 받는 의의(意義)에 관한 말씀입니다.
박해는 징계와 교훈의 의의를 가지니 그것을 받는 성도는 복됩니다(히12:5-13).
그러므로 성도는 박해 받는 중에 오히려 평안한 심사(心思)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뜻은 징계의 환난을 받는 신자는 그 환난이 떠나는 때, 곧 그 박해자가 망하게 되는 때까지 평안한 마음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 신자가 그 환난을 받는 동안 심령에 화평이 있다는 말입니다.
1. 본문 11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입니다.
시인은 다시금 자신을 어둠으로 감싸 하나님의 면전에서 숨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합니다. 저희가 헛된 구실들을 가지고 우쭐대지 못하도록 시인은 저희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게 될 때는 저희 망상의 안개들이 즉시 사라질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저희의 가장 깊은 도모들을 다 헛된 것으로 선언하시는 한 아무것도 쓸모가 없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저들을 만유의 심판자 앞에 불러 모은 의도는 저들로 자신들의 마음을 철저히 살피고 시험해 보도록 하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옳고 그른 것 사이의 모든 구분을 묵살하고 가능한 한 모든 감정들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기를 힘쓰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 같은 수법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저들의 마음을 무마시키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저들에게 하나님은 그 모든 잔꾀들을 비웃으셨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명백하고 잘 알려져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그냥 무심코 지나친 한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마땅한 사실은 곧 악인들이 교묘한 피난처들 아래에 숨고자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스스로 속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저들, 곧 악인들 자신이 헛된 존재임을 아시느니라’ 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 번역입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양자에서 번역될 수 있는 표현 형식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 입니다.
시편 94 편
2. 본문 12절은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이제 비난하는 말을 그치고 위로의 말로 들어갑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얼마동안 괴로움을 당하도록 허용하셨으나 그가 자기 백성의 참 유익과 안전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는 사실로 자신의 위안을 삼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을 위로합니다. 우리 일생의 어느 한 순간도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계속되는 싸움에 부름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연약을 고려하여 중간에 잠시 휴식을 허락하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로 갖가지 재난이나 역경에 부딪치게 하실 것입니다.
악인들이 자행하는 오만무례한 월권행위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연단하신 자들이 복된 백성이라는 사실에서 얻어지는 위안이 없었다면 우리의 처지는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사 진리와 의를 서로 장려하는데서 복된 평안을 얻도록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구별하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주 법이라는 구실 하에 폭군들에게 잔혹하게 압제를 당합니다.
시편 기자가 본 시편에서 한탄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가 그 나라 안에서 심판자들로 자처하는 자국내의 원수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상황 하에서는 육신적인 판단으로 볼 때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게셨다면 하나님이 결코 이들이 그같이 극악무도한 죄악을 범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같은 오해를 막기 위해 시편 기자는 우리 자신의 사리판단을 의지하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시편 저자는 본 구절이 우리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인내함으로 기다리는 자세를 가지며 고난의 압박 아래서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학교에서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봅니다.
시편 기자는 오래 계속되는 고난 아래에서도 내적인 평안과 용기로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 줄 지혜는 우리 중 누구에게도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야만 한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의 인내에 익숙케 하시고 그의 성령의 은밀한 지원과 위로로 역경 아래서도 주저앉지 않게 하신 자들이 참으로 복된 자들이라고 외칩니다.
2) 본 절의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은 틀림없이 십자가의 연단과 체험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또한 내적인 조명의 은사도 포함합니다.
시편 94 편
이 말씀 다음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전해 주신 이 지혜는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 알려지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시편 기자는 기록된 말씀을 사용하는 일을 존중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디서 우리의 인내를 이끌어 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우리의 슬픔을 덜어주는 소망으로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인내의 발판으로 삼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의미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신자들은 우선 인내하도록 권면 받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신자들은 십자가 밑에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유순히 구원을 바라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음에 신자들은 이 은혜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고난이 결국에는 구원을 가져다 줄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위로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연히 절망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소망은 모두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풍부한 위안의 근거를 제공해 주며 그것을 바로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절망과 낙담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시편 기자의 간증을 대합니다.
주께서 거짓 제자와 참 제자를 구별하시는 한 가지 표는 십자가를 지고 조바심이나 초조한 기색이 없이 고요한 중에 주의 구원을 기다릴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는가 입니다.
참 인내는 악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을 하는 데에 있거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나 금욕주의자들에게 덕으로 통하는 양보할 줄 모르는 옹고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에 기초를 두는 하나님에 대한 즐거운 복종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시편기자가 현재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이 같은 박해는 마지막에 가서 원수들이 그들의 악을 다 저지르고 난 다음에 복된 안식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근본 진리로 주장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내함으로 십자가를 지는 법을 배운 자들이 참으로 복된 자들이라는 말로 만족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이 보다 쉽게 하나님의 뜻에 기쁜 마음으로 묵묵히 따르도록 시편 기자는 저들 심령의 슬픔을 덜어줄 위로의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이 눈물이나 한숨짓는 일이 없이 자기 시련을 참아내되 우울한 절망 가운데 입에 물린 재갈을 으득으득 물어 뜯는다면, 단지 ‘우리는 죽을 운명의 피조물들이다’,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등의 원리들만 붙잡고 있다면 그것은 인내라기보다 차라리 고집이나 억지입니다.
또 용기라는 구실로 역경을 경멸하는 데는 하나님께 대한 숨겨진 반발이 있습니다.
시편 94 편
하나님께서 우리로 박해에 처하게 하시는 데에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사실만이 우리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유순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예비된 안식과 저들이 세상과 함께 망하지 않도록 저들이 당하는 고난의 열기와 소동가운데 제공된 원기회복에 대한 확신이 지배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이것이 현재 당하는 어떤 괴로움도 충분히 덜어주고 남을 것입니다.
3. 본문 13절은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악한 날들 혹은 악의 날들 - 칼빈)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입니다.
이 말로 시인은 악인들, 곧 불신자들을 기다리는 영원한 멸망을 뜻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일정한 유예기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시인이 시련 중에도 마음의 평안과 침착을 잃지 않는 자가 복있음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역경 속에서도 신자들이 누리는 내적인 평안이 될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악의 공격을 마음의 평안과 침착한 태도로 이겨내는 데에 이제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익을 얻은 자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가 본 절의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장의 두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 반대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이 멸망에서 구원하시고 마침내는 복된 결과를 가져다 주실 목적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지혜를 권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가 악인들이 승리하는 것을 볼 때, 또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으시는 것을 볼 때, 우리 마음은 가장 통렬한 슬픔에 잠기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위안의 근거를 말해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악인들은 마치 침상에 뻗쳐 있는 시체처럼 그 무덤이 파질 때까지 땅위에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적절히 상기시킴으로서 시험에 대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려 한다면 하박국(합2:1)이 말하는 것과 같이 망대를 세우고 멀리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계해야만 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세상 재미에 도취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그 이상 더 철저히 경계하지 않는다면 인내하는 일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만 겉으로 보기에는 산자들에게 어울리는 이 집들이 사실상 죽은 자들에게 그들의 무덤이 파질 때까지 허락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또 저희 악인들이 비록 땅위에 남아 있다 할지라도 저희는 이미 멸망받기로 작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슬픔은 경감될 것입니다.
시편 94 편
시94:14-15 여호와께서는
본문은 징벌을 받는 성도가 받는 복에 관한 말씀 중 일부입니다(12-23).
(1) 이는 그들이 징벌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신령한 교훈을 받기 때문입니다(12절).
(2) 성도들이 징벌이나 핍박을 받는 동안 심령의 평안을 얻습니다(13절).
성도들이 평안을 얻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내리는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15절).
시인은 의로운 판단이 임하는 사실을 그의 과거 경험에서 결론합니다(16-19).
1. 본문 14절은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기업으로 삼으시려고 택하신 자기 백성을 버릴 수 없으시다고 함으로서 그가 위에서 말한 동일한 진리를 더 분명한 술어로 강조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값없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으며 자기 기업인 것처럼 자신의 교회를 세밀히 보살피시기로 약속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안전에 대하여 가장 친밀하고 자상한 관심을 가지실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이 생각을 우리의 피할 성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육신적인 생각들의 소동이 우리 심령 위에 비취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지식으로 진압되지 않으면 우리의 인내는 곧 무너져 수포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가르침 받습니다.
2. 본문 15절은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좇으리로다”입니다.
어두운 역경의 때에는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이 여전히 그의 자녀들에게 대하여 품고 계시는 은밀한 사랑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또 하나의 위안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결국에는 그의 백성을 당황케 하는 혼란 상태를 종식시키시고 질서를 회복시키시리라는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가 사용하는 표현 형식은 약간 모호합니다.
이점이 어떤 이들로 본 절의 전반부를 마치 그것이 두 개의 구별되는 절들을 포함하는 것처럼 ‘공의가 끝에 돌아갈 것이요’, 또 ‘심판이 돌아가리니’ 로 번역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문맥에서 심히 이탈된 억지 해석입니다.
우리는 시인이 심판이 공의에 일치, 혹 준하리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시편 94 편
여기서 심판이란 다른 여러 경우에서처럼 통치 혹은 공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만연된 혼란은 통치상의 결함 혹은 행정상의 불의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결국에는 그것이 잘 되리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무모한 압제를 자행하는 자들이 공평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본 절에 함축되었습니다.
보다 깊은 의미는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처지를 회복시키는 일에 개입하실 때는 그동안 숨겨왔던 하나님의 공의를 공공연히 밝히 드러내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중에 가장 엄격한 공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사람 보기에 그의 의를 드러낼 조화와 질서가 항상 유지되지 않을 뿐입니다.
이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을 여기서 통치의 공의로 부릅니다.
태양의 광선이 밤에나 혹은 구름이 낄 때는 가려지듯이 악인들이 의인들을 박해하고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불법을 자행할 때는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 사이에 끼어 있는 구름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가려지며 어떤 면에서 심판이 공의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그 본 상태로 귀정될 때는 공의와 통치가 그 효력이 미치는 균등한 상태로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상황이 암담하고 무질서할 때도 우리로 하나님의 공의를 분별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본 구절은 현실적으로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실제적인 관찰을 언급합니다.
또 평온을 되찾아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화창한 하늘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찬란히 비취리라 단언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좋으리라” 를 어떤 이들은 ‘그것을 좇으리라’, 곧 ‘의를 좋으리라’ 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의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보응을 내리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이루어지게 될 균형과 조화를 갖춘 통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해석은 문맥에 적합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 말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계 대명사는 선행사를 갖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하나님이 언급될 때는 그 이름 대신 관계 대명사가 사용되는 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 절 하반부는 하나님께서 세계 질서를 회복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이 훨씬 더 민첩하게 그를 좇을 용기를 얻게 될 것을 뜻합니다.
십자가를 지도록 부름을 받을 때도 그들은 고난과 역경 중에 그를 사모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 같이 볼 수 있게, 그의 손을 펼치시는 것을 보고 그의 구원을 실감나게 체험할 때 이 같은 고난은 오히려 그들로 더욱더 밀접하게 그를 섬기도록 연결시켜 줄 것입니다.
시편 94 편
시94:16-19 누가 나를 위하여
본문은 박해받는 성도의 구원자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설(力說)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이것을 말함에 있어서 자기 옛 지식을 그 이유로 합니다.
옛 구원 지식은 현재와 미래에 환난의 어둠을 뚫고 구원 소망을 주는 조명등 입니다.
1. 본문 16-17절은 “(16)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를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서서 죄악행하는 자를 칠꼬
(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 다” 입니다.
시인은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가 얼마나 사람들의 도움을 못 받았던가를 말합니다.
위험의 순간에 직면해 있듯이 그는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라고 외칩니다.
누가 나의 원수들을 칠꼬? 이렇게 묻고 난 시인은 즉시 하나님께서 그를 돕지 않으셨다면 그가 안전을 포기하였을 것이 틀림없다고 답변합니다.
온 세상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이처럼 이적적으로 사망에서 구원함을 받았다고 선언함에 있어서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더욱 찬양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도울 때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의 은혜의 방편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서 어떤 부수적인 도움을 얻게 될 때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치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다”(17절)라고 말합니다.
이는 죽은 자는 느낌도 힘도 없이 무덤에 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지체 없이 간섭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자기의 목숨이 보존될 수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2. 본문 18-19절은 “(18)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넘어진다 -칼빈)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에 언급된 바는 앞 절 내용을 밝혀 줍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찬양하는 일에 더불어 시편 기자는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보통 위험에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당장 죽을 위험에서였다고 주장합니다.
시편 94 편
그 말은 곧 사망이 너무 확실하게 그 앞에 닥쳐왔으므로 자포자기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처지가 절망적이었을 때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고, 또 살 소망까지 끊어졌었다고 말합니다(고후1:9).
시편 기자가 꼭 죽는 줄로만 알았다가 구원받게 된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간섭하심 더욱 더 분명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나의 발이 넘어진다’ 고 말한 시편 기자의 표현을 일시적인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다면 시편기자가 절망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이 세상에서 그들의 생명을 얼마간 더 연장하여 주심으로 그들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시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시편 기자는 이것이 감각적인 의미였음을 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편기자는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편 기자가 아직도 다소 희망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다음 절은 그 이상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 이유는 여기서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그의 고난에는 항상 어떤 위안이 동반되었다는 말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 이라는 말로 시편 기자는 위로부터 자기에게 위안이 내리지 않았다면 자기를 압도하고 말았을 불안하고 당황케 하는 근심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고난에 처하게 하시되 그 시련과 고통의 정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다가 필요할 즈음에 자기 백성을 위해 간섭을 하신다는 말씀에서 이 진리를 배웁니다.
우리의 역경이 심할수록 우리는 그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를 위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강력하게 나타나리라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시4:1, 98:5).
우리가 비록 육신의 연약함으로 근심 걱정에 억눌려 초조하고 괴로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시편 기자가 여기서 그처럼 고상한 말로 언급하는 하나님의 위안에 만족하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자들은 판이한 두 가지 마음의 상태를 의식합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여러 가지 두려움과 근심으로 번민하고 괴로워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부터 오는 은밀한 기쁨으로 즐거워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위안은 그들이 필요로 할 즈음에 위로부터 임하여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역경에 삼키운 바 되지 않도록 그들을 보전해 줍니다.
시편 94 편
시94:20-23 율례를 빙자하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성품상으로 불의한 악인들과 사귀시거나 그들을 용납하실 수 없으니 만큼(20절), 그들을 그대로 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성도를 박해하는 자들은 필경 주님과 교제할 수 없고 멸절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필경 구원을 받습니다(20-23).
하나님은 신실한 성도의 산성(山城)이시며 반석이십니다.
1. 본문 20절은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악한 재판장이(불법의 보좌가 - 칼빈)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 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금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신뢰에 관한 논증을 이끌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호의를 보이시거나 그들의 악한 생각들을 인정해 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치실진대 그들이 어찌 멸망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본 절은 질문 형식을 취함으로서 보다 강하게 강조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죄악이 하나님의 본질에 얼마나 철저히 반대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보좌’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현재 고발당하는 자들이 보통의 강도나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은 자들로 인정을 받는 암살단이 아니라 율례를 핑계삼아 주의 백성을 박해하는 폭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신성한 보좌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범죄로 그 보좌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는 하나님과의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본 절에서 ‘율례를 훼방하는 자’로 선언되었습니다.
히브리어 חק(호크)는 ‘법규례’ 혹은 ‘법령’ “율례”를 뜻합니다.
그들은 불법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율례를 훼방하였고 그같이 하여 하나님과는 완전히 사이가 난 자들이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타락한 재판장들이 그들의 직무를 엄격히 수행하는 체하면서 극악무도한 범죄를 자행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방자한 성품의 재판장들은 성실하고 흠이 없다는 평판을 유지시키려는 생각으로 그들의 악명 높은 압제를 변호하기 위한 온갖 구실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시편 94 편
곧 그 이름만을 생각할 때 그 보좌가 아무리 명예롭다 할지라도 악인들에 의해서 더럽혀질 때는 하나님께 있어서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죄악은 결코 하나님의 찬동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1절은 “저희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입니다.
히브리어 גדד (가닷) 혹은 גוד(구드)가 세력을 모으는 것, 또는 한 떼의 사람을 모으는 것을 뜻하므로 시편 기자는 분명히 단지 민간의 신분에 있는 자들이 아닌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들의 압제를 견뎌 내야 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말은 또한 그를 박해한 자가 한 두 개인에 그쳤거나 그들이 주의 백성 중에 속한 어떤 자들이 아니라 하나의 공공의회였다는 사실도 역시 함축합니다.
악인들이 합법적인 총회를 지배할 때는 상황이 침울하고 어두웠을 것이고 재판장단 혹은 배심원단을 구성하는 자들은 강도의 무리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죄한 압제의 희생자들이 피해를 입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인격에 낙인이 찍힐 때는 그 상황이 배나 더 괴로운 것이 됩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완전한 법적 절차를 밟는다는 것이 선량하고 무죄한 자들에게 대하여 부정한 음모를 덮어 씌우는 처사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예는 우리로 그와 비슷한 상황에 대처하도록 준비시켜 줍니다.
만일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악인들이 일어나 재판 자리를 베풀고 율례를 구실로 정직하고 의로운 자들에게 파멸을 선고하는 일이 허용될 경우 우리도 시편 기자의 상황을 귀감으로 삼아 그에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혀 무죄한 사람이 그것도 재판장들의 손에 잔인한 박해를 당하여 치욕을 맛보는 것이 처음에는 견딜 수 없는 일로 여겨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다른 때에도 이같이 이중적인 압제로 자기 백성을 연단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즉 우리는 불의한 폭력에 대해서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극도로 손상시키며 가장 부당한 혐의를 받는 일에 대해서도 유순히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3. 본문 22-23절은 “(22)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오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 시라 (23) 저희 죄악을 저희에게 돌리시며 저희의 악을 인하여 저희를 꾾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리로다” 입니다.
시편 94 편
시편 기자는 자기가 당했던 곤경이 막중한 것이긴 하였으나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 중에 충분한 도우심을 얻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새 찬양을 드립니다.
그처럼 도와 주는 자 없이 외로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은 시편 기자의 수많은 원수들의 모든 세력과 광포를 진압시키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나의 요새이셨다는 사실 그 이상을 뜻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요새에 안전히 숨을 수 있었고,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감사하고 난 시인은 이제 원수들에게 멸망을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시인의 원수들이 자기 백성에게 대하여 자행한 악을 그들의 머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권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그들의 시도를 꺾어서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스러울 만큼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판 구덩이에 빠지고 그들이 무죄한 자들에게 사용하였던 교활한 술책들이 그들의 꾀에 무너지고 그들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의 칼에 스스로 쓰러지게 될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훨씬 더 놀랍게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그 결과가 되리라는 사실을 더디 믿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악을 인하여 저희를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리로다” 하고 두 번 거듭하여 그 사실이 강조됩니다.
또 시인이 “우리의 하나님” 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가 앞서 말한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줌으로 하나님이 자기 기업, 곧 그가 자기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끌어 들이신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리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