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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현실과 문학적 현실
- <수필춘추> 여름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1.
철학과 문학은 많은 연관성이 있다. 철학을 전공한 문인들이 철학수필을 이야기해도 크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정치가들이 문학을 하면 이상하게도 순수함 속에 이물질이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하여 정치와 문학에 관한 한 우리는 모호한 상식 하에서 문학 속의 정치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구체적 양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정치와 문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신념과 ‘예술의 독자성’에 관한 이론이다. 이들은 ‘정치란 불순한 것’이라는 통념과 더불어 오늘날 상당수의 문학인들과 독자들이 지지하는 견해로 되어 있다. 60년대 소개된 신비평은 여기에 이론적 무장을 제공하였다.
과연 정치적 현실과 문학적 현실이 별개의 것일까?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라는 말의 개념 규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정치’라는 말은 협의의 관점에서 전통적으로는 특정한 국가 조직과 법률에 의해 형성되는 별개의 영역에서의 전문적 활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광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정치 현상’이라는 것을 고정적이고 정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보다 확대되고 다양화된 시각에서 인식할 수 있다고 하다고 하겠다. M. G. 스미스는 G. 발란디어의 ‘정치’ 개념에 주목하여 정치란 특정한 사회 단위나 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 생황의 한 양상’임을 지적하였다.
위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란 어떤 특정 영역이나 기구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정치 권력의 형성과 행사에만 관련된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그 본래적 의미에 있어, 불순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너’ ‘나’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성립되는 모종의 행동이며 관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은 정치적 동물임은 곧 인간 생활의 정치적 관련이 불가피함을 뜻한다. 개인들, 집단들 속에 일어나는 권력 관계의 형성, 조직, 유지, 변경 등에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정치적 행동이라 본다면, 정치는 곧 삶의 본질적 양상의 하나라 하겠다. 이번 호 계간평의 관점은 문학 속의 정치적 현실이다.
2.
문학작품은 탄약을 잰 권총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대상을 정조준해야 한다.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 작가라면 잘못된 기존의 관념에 반항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다’의 눈을 통한 신선한 반항은 모든 문학 작품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 할 밑거름으로서 문학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다. 반항의 대상에 대해 권총을 겨누는 일은 인식의 출발이며, 정치의식의 발로다. 여기에 더하여 모든 수필문학 작품이 지녀야 할 공통적 요건 중에 휴머니티가 추가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현실이 작품에 녹아들어도 수필가의 가슴에 흥건한 정이 배어 있어야 가슴을 움직이는 수필미학이 완성된다.
서정범의 <개, 도둑이 수작을 떠는 시대>라는 연재수필은 삶 속의 정치적 양상을 수필의 모습으로 잘 드러낸 작품이라 하겠다. 작가는 국어학자답게 ‘개’에 관련된 속담이나 욕에 얽힌 이야기를 정치적 사건과 잘 결부시켜 수필적으로 풀어내어 독자들에게 시원한 눈맛을 안겨주고 있다. 수필의 참 맛은 이런 현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숨겨진 진실을 작가가 풍자적으로 잘 드러낸 데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수필가가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현실 정치에 그것도 최고 권력자가 관계된 비상한 사안에 대해 글로 써서 비판을 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지만 좁은 의미의 정치적 행위를 문학가가 서슴없이 한다는 것은 사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수필의 정치 참여 또는 현실 개입이 잘못되면, 설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필가들이 민감한 정치적 문제를 소재로 수용하길 꺼려하는 게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수필가는 마치 현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여기지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편견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지성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현실인식으로 우리의 답답한 정치 현실을 문학적 수법에 의해 풍자하고 있다. 맛있는 수필이다.
“도박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다 이야기’가 문제되자 대통령이 ‘도둑을 맞으려니까 개도 짖지 않는다’라는 속담으로 심경을 토로했다. 이 속담은 ‘운수가 사나워 일이 안 되려면 평상시에는 제대로 되던 일도 되지 않는다’는 속뜻을 지니고 있다. 평상시에는 제대로 일이 되었다는 말인데, 일이 제대로 되었다면 ‘바다 이야기’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을까.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도박심리는 증폭되는데 ‘도박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는 인용 예문에는 작가의 예리한 현실 비판인식과 정치의식이 녹아 있다. 인용 예문 뒤를 잇는 보조 단락은 기가 막힌다. 대통령이 말한 속담 속에 나오는 ‘개’와 ‘도둑’에 대한 작가의 추리가 손맛에다 ‘눈맛’까지 안겨다 준다. 우리는 이런 수필을 일러 ‘맛있는 수필’이라고 한다. “도박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는 말과 “그렇다면 도둑과 짖는 개들을 못 짖게 한 우두머리는 누구일까”라는 말에 담겨있는 풍자적이고 은유적인 현실 비판에 대한 문학적 처리는 과연 대가답다고 하겠다. 문장에서 지성이 독주하면, 명제는 빛나고 주제의식은 분명해질지 모르나, 독자와의 대우적 관계를 유지해주는 정서의 흐름은 막히고 끊길 위험이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문학의 교시성을 극복하기 위해 지성을 정서화하는 수법을 사용하여 수필의 대우적 속성을 잘 드러내어 문학성을 우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박천서의 <한글전용 우민화 정책 벗어날 때다>라는 작품은 문학 장르 개념 외의 것으로 의식 개혁을 촉구하는 정치적 의지가 담겨 있는 칼럼이다. ‘베이컨적 수필’로 분류하는 게 좋겠다. 국한문 혼용이냐 한글 전용이냐라는 이슈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이러한 정치적 문제를 수필로 형상화할 때는 무엇보다도 작가는 수필의 본질적 특성을 고려하여 주장을 문학적 수법으로 형상화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수필의 외면에 주제의식이 그대로 노출되면 이미 그것은 수필일 수가 없고 칼럼이 된다. 주장이 외면화되고, 그 주장이 근거에 의해 논증으로 뒷받침되면 논술문이거나 논설문이다. 이번호 계간평의 관점은 앞서 서론에서 밝혔듯이 수필 속의 정치적 현실이다. 평자가 분석의 대상 작품으로 이 글을 넣은 이유는 내용적 측면에서 이 작품 역시 정치적 민감 사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교과서적인 장르론으로 보면, ‘교술’에 속하는 것이지만, ‘교술’로 보기보다는 ‘주제적 양식’으로 파악하는 게 훨씬 더 수필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필이란 글은 작품 속에 주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수필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다. 수필의 주제가 외면화되었느냐 내면화되었느냐에 따라 작문이냐 수필이냐로 나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제목에 있다. 이 칼럼처럼 ‘한글전용 우민화 정책 벗어날 때다’라는 명제가 제목으로 앉아 있으면 아무리 내용이 수필적이라 해도 고급독자는 끌어들이지 못한다. 독자들은 제목을 보면 무슨 내용인지 다 알기 때문에 굳이 내용까지 확인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수필에서 제목 짓기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 칼럼은 발단부터 정치적 현실을 담고 있다. 문제 제기로 서두를 연 것부터 이 글이 논리적 설득을 염두에 두고 써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한글 전용이 추진되던 70년대, 학문적 양심과 우국충정에서 이를 반대한 학자가 많았으나, 당국은 그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교직까지 박탈했다. 이때 정부가 마음을 열고 학자들의 반대의견에도 귀를 기울였다면 우리 국어정책은 한글 전용 대신 한글 애용이 되고, 문자 기계화는 ‘한국어’에서 ‘한글로 된 문서’로 되었을지도 모른다.”로 시작되는 서두는 정부의 근시안적인 문자 개혁이 폐단과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3공화국 정부의 한글전용정책이 결국 국민을 우민화했고, 그는 이런 정책을 반헌법적이고 비문화정책이라고 신랄히 비판한다. 이 글은 논리적인 에세이다. 왜냐 하면, 발단부는 문제제기로 시작되고, 전개 부분은 결론부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채택하고 있고, 결론부는 ‘한글전용 정책에서 벗어나서 우리나라 법체제와 문화에 맞고 시대에 맞는 질 본위의 국어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국한문 혼용 정책이 되면, 대한민국이 선진민주 경제문화 대국이 되리라는 전망으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의 요체는 어떻게 주제를 간접화하느냐다. 이런 중요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글이 수필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목적에 유의해야 한다. 수필이라는 장르의식보다 메시지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독자를 설득시킬까에 염두를 두다 보니 전반적인 글의 짜임새가 논리적으로 흘러 ‘소통성’에 승부를 건 듯한 느낌을 주었다. 수필이 설리에 급급하면 건조하기 쉽고, 비평에 날카로우면 화기가 번진다고 했다. 좋은 내용이고 공감이 가는 주장이라 눈맛이 나지만, 편안한 마음의 여유로움으로 문장에 상큼한 멋과 문학적 향기를 불어 넣었으면 좋겠다.
유세진의 수필 <항아리 닦는 여인>에도 정치적인 현실이 투영되어 있다. 위 두 글에 비하면 이 글은 훨씬 더 수필적이다. 은근하게 자신의 메시지를 문학적 수법을 동원하여 간접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아리’라는 명사는 전통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것으로 쓰였고, ‘닦는다’라는 동사는 전통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평화로운 가정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전제되어 있다. ‘여인’은 분명 여기서 어감이 드센 ‘여자’나 ‘여성’과는 다르다. 사십 대 이후의 중년 부인을 의미하며, 내용적으로는 ‘현모양처’ 쯤으로 여겨진다. 우리 전통적 가치를 지켜냄으로써 평화로운 가정을 지킬 수 있다는 논지를 펴는 이 작가는 보수적인 여성인 듯 보인다. ‘꽃이 지고 피는 이치에서 순리와 질서, 희생도 배웠으리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분의 세계관은 다분히 유교적이다. 자연의 이법에서 진리를 찾고 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성은 양육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데서 여성의 억압이 싹튼다는 관점이 페미니즘 시각이다. ‘장을 담그는 등의 수고와 노력이 가족들의 건강으로 되돌아오고, 며칠간의 노고로 일 년이 여유로우니 마음 또한 그득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이런 작은 일들이 살아가는 행복이 아닐까 하고 현대 여성들에게 조심스럽게 되묻고 있다. 물론 작가의 물음에 대한 신세대 여성들의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그러나 어딘 듯 헌신과 희생 지향의 순박한 우리네 여인의 순박한 마음 같은 것이 은연 중 암유로 드리우고 있어 평화의 이미지를 안겨준다. 수필이 대상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를 사색함으로써 비롯되는 글이라 볼 때, 이 수필은 수필적인 조형성을 갖는다.
작가의 서구화에 대한 경계는 지나칠 정도다. ‘허영심’ ‘개인주의’ ‘편리함’ ‘여인문화의 퇴색’ 등의 어휘만 모아 보아도, 작가가 얼마나 서양문화에 거부감을 가지며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수필의 묘미는 ‘지구촌이라는 명제 앞에 우리 것이라는 단어는 촌스럽게 되었다’고 진단하면서도 작가가 그 정도에서 머물지 않고 ‘외국 사람들도 앞 다투어 우리 것을 배우려고 한다. 이런 때에 우리 것을 보다 발전시켜 우리 것으로 세계화하는 것은 어떨까’하고 한류를 전통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로 삼자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우리 여성이 세계화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나서보자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부의 진술에 문제는 없는 걸까. “사회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자신만의 일에서 얻는 성취감도 값진 일이지만 가족이 쉴 수 있는 가정을 다독이는 것도 값지고 행복한 일이다. 건전한 사회는 평화로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니 말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나친 모성원리가 유교적 가치관을 옹호하거나 가부장제적 모순을 묻어버리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 분은 대단히 보수적이다. ‘보수적’이라고 해서 그르다고는 볼 수 없다. 첨예한 신념의 대립각이 갈등을 낳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균형 감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이 수필을 읽고 나니 ‘배려가 있는 주장이 아름답다’는 취지의 공익광고가 가슴에 와 닿는다. 모두가 자기를 실현하겠다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이때, 조용히 가정을 지키는 것도 보람되고 행복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헌신적인 한국 여인이 있기에 한편으로 마음이 든든해지는 건 왜일까.
정명수의 <소록도>는 소록도에 살게 된 한센병 환자에 얽힌 이야기를 내용으로 해서 직조한 휴먼 수필이다. 흔히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필 <소록도>는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투명하게 드러나 있어 향기가 진동한다. 천형의 섬인 소록도에서 상실된 삶의 비애를 느끼며 한평생을 살아가는 문둥병 환자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연민이 너무 인간적이라 훈훈한 감동도 준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한 세상 살다가 죽어간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등진 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애잔하여 눈물겹다’는 작가의 마음이 아름답다. 아무리 인간이 선한 존재라 해도 천형의 문둥병 환자들을 위한 노래를 수필로 써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역할이든 봉사에는 희생과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결미에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 간호사, 목사, 신부, 수녀, 공무원들에게 작가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고 있다. 이 부분은 사족에 불과하지만 작가 역시 가슴 속에 목련을 피워낼 수 있는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가 여겨진다. 그들의 슬픈 역사를 알고 조금이나마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이 글은 그 가치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애의 향기를 흘려 천형의 사람들을 우리 이웃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데서 이 글은 일단 성공적이다.
이 수필에도 정치적 현실은 곳곳에 산재한다. 작가가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일제의 만행과 우리 정부의 선행이 극명한 대조를 이뤄 민족애를 고조시킨 대목도 돋보인다. “나환자인 경북 상주 사람 이춘상은 수호사마도가 ‘보은 감사의 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차에서 연단으로 가고 있을 때 오른쪽 가슴을 칼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이춘상은 총독부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이 집행되어 숨을 거두었다. 지금은 독립유공자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수호마사도가 죽은 자리에는 나병환자를 구원한다는 희색의 구라탑이 세워져 있는데 날개 달린 ‘천사탑’이다. 탑의 기단에는 ”나병은 낫는다“라는 비문을 새겨놓고 가엾게 살아가는 나병환자들의 삶을 위로하고 격려해 준다.”는 삽화 한 토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인용 예문에 이어진 나환자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인용한 것은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도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늘진 삶을 가엽게 살고 있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삶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인간이해라는 한 필의 비단을 짜고 있는 행위야말로 인간적인 정치행위가 아닐까. 건조한 현대적 인간 관계를 사랑의 빛깔로 채색하면서 그 위에 신록의 향유를 발라 부드럽게 하는 그의 성자적 삶의 태도는 마땅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우쭐거려도 현학적인 언변으로 뽐내도 안 된다. 마음을 열고 천형의 문둥병 환자들을 위한 노래를 삽화로 엮어 그려가는 정 스민 글들이 가장 정치적인 작품인 것이다.
심상석의 <새벽의 노숙자들>이란 수필 역시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회 수필로서 ‘노숙자’ 문제에 대한 작가의 해법이 놓여 있어 정치적인 관점이 요구되는 수필이다. 수필의 생명은 인생의 무게를 담는 중후함에 있다. 경박스럽거나 허둥대는 모습이 아닌, 진지함에 그 가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수필은 정치적 현실을 담고 있는 좋은 수필이다. 삶을 희생적 안목으로 응시하고, 정을 흘리면서 사는 작가의 자세는 이 수필이 건강한 생명력을 지니게 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런 부랑끼는 타고난 것이 아니다. 원인이야 어떠하든 예방적 차원에서 가족의 해체를 최소화시킴은 물론, 지역 중심의 사회복지 서비스가 체계화되어 정신 건강의 회복과 자활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대목에서 작가이기에 자신을 위요한 세계에 대한 관심과 느낌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삶을 둘러싼 일에 방관자적인 사람은 수필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수필의 존재 가치는 현실에 대한 관심과 신선한 안목에서 나온다.
위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주변을 스치는 사람을 예사로 보지 않는다. 무심히 지나쳐버릴 수 있는 일상사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세심한 응집력은 수필의 신선한 소재로 다가선다. 이번에 그와 마주친 사람은 술판을 벌이고 있는 노숙자들이다. 사회적 약자다. 이는 마음을 열고 세상의 보이지 않는 단절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작가의 열린 가슴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다. 이 작가의 언어에는 현란한 수식도 분식도 없다. 문학작품이 주어야 할 교훈성은 수필 속에 나오는 ‘법구경’ 이나 ‘노자’의 말을 옮겨 놓음으로써 가볍게 해결한다. 고전의 인용은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돕기 위해서다. 삽화의 적절한 활용은 그 자체가 수필적 삶의 원형이다. 맛을 내는 천년 조미료가 아닐 수 없다. 영등포역에서 만나게 된 노숙자의 현실을 수필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어두운 음지 현실의 한 단면과 이를 극복해내고자 의지를 투입하는 양지의 따뜻한 시선이 작품의 밑그림으로 잔잔히 그려져 있어 인간적이다. 가슴을 열고 어렵고 힘든 이웃을 껴안으려는 자세가 돋보이기에 이 수필은 촉촉한 감동을 선사해 준다. 생활 주변의 조그마한 이야기도 잘만 꿰매면 좋은 수필이 된다. 어려움에 처한 노숙자에 대한 이해도를 보니, 이분은 삶의 탄탄한 깊이를 구축하고 있는 것 같다.
3.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삶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우리의 생활은 원하든 원하지 안 든 간에 늘 정치적 관련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공기를 호흡하며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신문을 읽거나, 직업을 택하거나, 새 구두를 싣거나, 투표를 하거나, 어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거나 외면하거나 간에 항상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이며, 그 선택과 결단은 나와 남의 관계, 나의 소속 집단과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 대한 정치적 행동 양상을 띠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와 절연된 삶이나 사회적 활동이란 그 자체가 자기 모순이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간에 공동체적 삶의 장에 속해 있는 한 그 내부의 권력 관계에 참여, 기권, 소외 등 갖가지 양상으로 관련될 수는 있지만 정치와 절연된 삶은 없다.
물론 이런 관점과 입장에 배치되는 문학 이론도 존재한다. ‘문학 작품은 현실에의 연장을 가지지 않는다’는 신비평의 명제다. 이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하다. 작품 속의 인물은 현실 세계로 ‘걸어 나올’ 수 없으며, 작품이 포괄하는 내용 이외의 아무런 과거도 미래도 가지지 않는다. 우리의 실제 삶은 시시콜콜한 일상사가 어우러진 연속체이지만, 하나의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선택적 조직체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문학 작품이 현실에의 연장을 가지지 않는다는 이론에 아무런 의문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특수한 의미로 해석되어질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성을 가진다. 대다수 신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바, 문학 작품은 그 자체 안에 필요 충분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특정 시대나 상황과의 관련을 떠나 독립 자존하는 자족적 세계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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