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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일본 어민과의 어업권 갈등과, 경남어민들의 생존권 투쟁 문건>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구한말(19세기 후반~20세기 초) 일본 어민의 조선 진출에 따른 어업권 갈등을 둘러싼 분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보고서와, 경남 연안으로 파견 나온 관원이 거짓말로 어장을 탈취하려는 횡포에 맞서 생존권 투쟁을 한 어민들의 소장(訴狀) 등 2건의 문서를 소개하겠다.
첫 번째 ①「1899년 11월8일 일본과 조선 어민 사이의 어업권 갈등 보고서(報告書)」는 거제군수 유과환(兪果煥)이 동래감리(東萊監理)에게 올린 ‘보고서 제3호’로, 거제도에서 발생한 일본과 조선 어민 사이의 어업권 갈등과 더불어 거제군수의 해명을 담고 있다. 일본인들은 연안에서 자유로운 어업을 주장하며 조선 어민들의 조업방해를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거제군수는 일본 어민들이 촘촘한 그물을 사용해서 수산자원을 고갈시킨다고 항변하며 ‘3리 이내 어업 금지’를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 어민들이 그들의 조업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 어민이 총을 쏴서 위협했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반박했다. 결국 이 문서는 대한제국기 일본 어민들의 불법적인 어로 활동과 그로 인한 외교적 마찰,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지방관의 고충을 보여주는 사료다.
두 번째 ②「1906년 11월 관리의 횡포에 맞선 경남 어민들의 생존권 투쟁 소장(訴狀)」은 경남 어민들이 경리원에 제출한 소장(訴狀)과 지령(답변)으로, 관리의 횡포에 맞선 어민들의 저항과 생존권 투쟁을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적 문건이다. 경리원 소속 파견관원 김봉수(金鳳洙)가 무뢰배 수십 명을 동원해 협박하고 또 거짓말로 어민들의 어장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상경하여 소장(訴狀)을 제출했다. 다시 지령이 내려와, 거제·웅천 지역 두 곳은 이미 의친왕궁 소속으로 확정되었으므로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매매 증서(문권)가 확실한 민간 어장은 해당 어민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결국 이 문건은 대한제국 말기, 왕실 재산을 확충하려는 정책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관리들의 부패,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고 문서(문권)를 근거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던 경상도 어민들의 능동적인 대응을 잘 보여준다.
○ 구한말 경남 연안 어민들의 어장 침탈 문제는 일본 어선들의 무분별한 조업과 이에 미온적으로 대처했거나, 때로는 영세 어민들의 권리를 무시한 부패한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나타났다. 일본 어민의 조선 진출은 강화도 조약(1876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고 식민지화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일본 어민의 진출은 주요 항구에 이주 어촌을 형성하고, 연안을 장악하는 방식의 식민지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어민과의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다. 일본 어민들은 어업 허가 없이 조선의 영해 내로 들어와 남획을 일삼았고 선진 어업 기술(기선 저인망 등)을 갖춘 일본 어민들이 주요 어장을 차지하면서, 영세한 조선 어민들은 어장을 잃고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또 일본은 조약을 통해 조선 내 어업권을 정식으로 요구하거나, 러일전쟁 등을 틈타 조선의 수산자원을 무차별적으로 수탈했다. 또한 일제는 어업뿐만 아니라, 수산물 유통까지 상권을 장악해 나갔다.
게다가 이러한 외부적 위협 속에서 부패한 지방 관리들의 수탈도 종종 발생했다. 일부 지방 관리들은 어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어업권을 빌미로 세금을 걷거나 부당한 금품을 요구하는 등 수탈을 자행했다. 이는 어민들의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일본 어선과 부패 관리들의 이중적인 수탈에 맞서 경남 지역 어민들은 생존을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했으며, 이는 때때로 의병 활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 어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든 것은, 한 명의 특정 관리보다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봉건적인 수탈 구조가 맞물린 ‘시대적 배경’이 한몫을 했다.
결국 일제는 수산업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조선의 어업자원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어업권 갈등은 단순한 경제적 이권 다툼을 넘어, 일제가 조선의 영해와 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고 식민지화를 가속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1) 「1899년 11월8일 일본과 조선 어민 사이의 어업권 갈등 보고서(報告書)」
이 자료는 1899년(광무 3년) 11월 8일, 거제군수 유과환(兪果煥)이 동래감리(東萊監理)에게 올린 <보고서 제3호>다. 당시 거제도 지역에서 발생한 일본 어민과 현지 조선 어민 사이의 어업권 갈등과 이에 대한 일본 측의 항의, 그리고 거제군수의 해명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1899년(광무 3년) 거제군수 유과환이 일본 어민과의 분쟁에 대해 해명하며 보고한 내용으로, 이 문서의 핵심은 일본이 자유로운 어업을 주장하며 군수를 압박하자, 군수가 일본 어민의 불법 어구 사용과 총기 위협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하며 현지 어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방어하고 있다.
*사건의 배경 및 일본 영사의 항의 : 일본 어민(스와 와사부로 등)들이 거제도 구항포(舊項浦, 구조라)와 지세포에서 어업을 하려 했으나, 현지 어민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돌을 던지며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또 일본 측은 거제군수가 "3리 이내에서는 어업을 허가하지 않으니 속히 떠나라"고 명령하며 현지 어민들의 폭행을 방조하거나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또한 '조일통어장정'에 따라 3리 이내 어업이 가능함에도 이를 막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거제군수의 반박 및 해명 : 일본 어민들이 '광폭밀고(촘촘한 그물)'를 사용하여 조선 어민들이 세금을 내고 운영하는 어장(어기) 근처를 장악하여 생계를 위협했다고 지적했다. 군수는 "3리 이내 어업 금지"를 말한 적이 없으며, 다만 장정에 규정된 '지방의 금제(규정)를 어기지 말고 어족 자원을 방해하지 말라'는 원칙을 강조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일본 순사와 조선 순검이 직접 현지 어민들과 대조해 본 결과, 어민들이 돌을 던졌다는 등의 일본 측 주장은 근거가 없음(落空)이 드러났다. 오히려 일본 어민이 조선 어민과 시비가 붙었을 때 총을 쏴서 위협(放銃肆威)했다는 증거가 나왔다. 이로부터 거제군수는 다시 한번 구조라와 지세포의 책임자들에게 분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훈계하고 단속했음을 보고하며 글을 마쳤다. 결국 이 문서는 대한제국기 일본 어민들의 불법적인 어로 활동과 그로 인한 외교적 마찰,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지방관의 고충을 잘 보여주는 사료다.
* 덧붙여 이번 「1899년 11월8일 일본과 조선 어민 사이의 어업권 갈등 보고서(報告書)」는 발신자가 거제군수(巨濟郡守) 유과환(兪果煥)이고 수신자는 동래감리(東萊監理)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감리각면서보고서(東萊監理各面署報告書)』이다.
*「1899년 11월8일 일본과 조선 어민 사이의 어업권 갈등 보고서(報告書)」*
보고서 제3호. 주홍콩 일본 영사의 조회(照會) 근거와 서(署, 동래감리서)의 훈령 내용에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항포(舊項浦, 구조라)의 일본 어민 스와 와사부로(須脅又三郞) 등이 해당 포구 어민들과 고기잡이 문제로 분쟁이 생겨 금지당하고 저지받았습니다. 이에 여러 차례 군수와 교섭하여 깨우쳐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어민들은 '군수의 명령이니, 3리 이내에서는 어업을 허가하지 않는다. 속히 떠나라'고 말하며, 결국 어업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해당 포구를 옮겨 지세포(知世浦)로 가서 고기를 잡으려 하니, 그곳 어민들의 방해 또한 구항포 때와 같았습니다. 무리를 지어 몰려와 기와와 돌을 던져 고기잡이를 못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지역 군수는 이 어민들을 방임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부추기는 듯한 모습이 있어 어업권을 보호받을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어민들이 '통어규칙(通漁規則)'을 분명히 안다면 거의 이런 분쟁은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통어약장(通漁約章)'을 조사해 보니, 본래 해안 3리 이내에서는 균등하게 통어(어업)할 수 있습니다. 다만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고래(鯨鯢) 등의 물고기는 잡을 수 없습니다. 또한 "지방의 금령(禁制)을 위반하지 말고 어족 자원을 방해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 '3리 내에서 어업을 불허한다'는 말은 어찌 그리 살피지 못함이 심한 것입니까? 또한 포구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저지했다는 말은 더욱 답답하고 탄식할 노릇입니다. 이 내용을 포구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함께 고기잡이를 하는 데 분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훈령을 받았습니다.
*[거제군수의 해명] 구항포는 본 군의 경계인 '구조라항리(舊助羅項里)'라 불리는 포구입니다. 그 포구에는 공적으로 세금을 내는 어장(漁基)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어민들이 폭이 넓고 그물코가 촘촘한 그물(廣幅密罟)을 공세 어장의 아주 가까운 요지에 설치하여, 해당 포구 어민들이 생업을 잇지 못하게 하고 많은 공적 어장이 장차 폐지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여러 번 민원이 들어왔기에, "장정(章程)에 의거하여 지방의 금령을 어기지 말고 어족 자원을 방해하는 규칙을 어기지 말라"는 뜻으로 별도로 엄히 명령을 내리고 순교(巡校) 한 명을 파견해 보냈습니다.
이어서 지세포 백성들도 구조라 백성들의 호소와 같은 내용으로 와서 호소하기에, 역시 순교를 보내 위와 같이 타이르도록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3리 내외'를 논한 적이 있으며, 또한 어찌 방임하거나 부추긴 단서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일본 순사와 본 감리서의 순검이 일본 어민을 데리고 와서 해당 포구 백성들과 대질하며 담판하는 자리에서, 군수가 '3리설'을 내세웠다는 말과 포구 백성들이 무리 지어 돌을 던졌다는 일은 모두 근거 없는 허위(落空)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일본 어민이 포구 백성들과 서로 시비를 가릴 때, 총을 쏘며 위세를 부린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이미 국경을 넘어온 일이라 더는 캐묻지 않았으나, 다시금 구조라 및 지세포 등 포구의 임장(任掌)과 백성들에게 별도로 등사하여 훈계함으로써 혹시라도 소란이나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기에 이에 연유를 갖추어 보고합니다. 광무 3년(1899년) 11월 8일. 거제군수 유과환(兪果煥). 동래감리서 각하 귀하.
[報告書第三號. 駐港日領事照會據, 署訓令內槪에, 舊項浦日漁民須脅又三郞等, 與該浦漁民等漁採事, 惹紛禁遏, 故數次與郡守交涉曉諭。然該漁民等稱云, 郡守之令, 三里以內, 不許漁採, 則速去可也。竟至不得漁業之境, 故移該浦往知世浦漁採, 則該漁民之妨害, 亦如舊項浦聚黨來集, 投之瓦礫, 不得漁採, 而同地郡守, 非但該漁民之放任, 似有慫慂彼等模樣, 萬無保護漁權之望。若使漁民, 明知通漁規則, 庶幾無此等紛爭等因, 準此査通漁約章, 自是海濱三里以內, 均可通漁, 而但若非特準, 則不準捕獲鯨。鯢等魚。且云勿違地方禁制, 以用妨害魚介, 而今此三里內, 不許漁採等語, 是何不察之甚也? 至若浦民輩之聚黨沮戲云者, 尤屬悶歎。將此佈諭于浦民等, 與同漁採에 無至滋端事訓令이시온바, 舊項浦난 卽本郡境舊助羅項里爲號之浦也。而該浦에 多有公納稅錢之漁基이온듸, 日漁民等이 以廣幅密罟之網으로 布設於公稅漁基之逼近要處야 致使該浦漁民, 不得遂業하며, 許多公基, 將至陳廢하것고 屢有民訴옵긔, 以依章程勿違地方禁制, 妨害魚介規則之意로 另申令示야 差送巡校一人하잇쌉고, 繼又有知世浦民等이 如舊助羅浦民之訴而來訴者故로, 亦送巡校하야 諭以如右而已온즉, 曷嘗有三里內外之論이며, 且豈有放任慫慂之端乎잇가? 今於日巡査與署巡檢이 領來日漁民하야 質對該浦民而談辦之席에 郡守令示以三里之說과 該浦民黨投瓦礫之事가皆歸落空하옵고, 反有日漁人이 當其與浦民相詰之際에 放銃肆威之證擧이오되, 旣屬過境이라 不復採辦하옵고, 更另謄示訓飭於舊助〈羅〉及知世等浦任掌民人等處하야 毋或紛擾滋端케하오며, 緣由玆陳報告홈. 光武三年十一月八日. 巨濟郡守兪果煥, 東萊監理署閣下]
2) 「1906년 11월 관리의 횡포에 맞선 경남 어민들의 생존권 투쟁 소장(訴狀)」
이 자료는 1906년(광무 10년) 11월, 경상남도 연안 어민들이 경리원(經理院,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관청)에 제출한 소장(訴狀, 청원서)과 그에 대한 지령(답변)이다. 당시 왕실 재산 관리 체계의 혼란 속에서 관리의 횡포에 맞선 어민들의 저항과 생존권 투쟁을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적 문건이다. 이 문건은 관리의 탐학(부당한 착취)과 이에 맞서 법적 근거(문권)를 가지고 저항한 당시 어민들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사건의 배경과 경과] 원래 민간 소유였던 어장(民私條)이 왕실로 넘어갔다가, 지난해(1905년) 황제의 뜻에 따라 다시 어민들에게 돌려주라는 문권(문서)이 발급되었다.
그런데 경리원 소속 파원(현지 관리)인 김봉수(金鳳洙)가 "올해 수입은 국가(관청)로 귀속시키라는 전갈이 왔다"고 속이며 어민들의 어장을 다시 빼앗으려 했다. 이에 어민들은 이미 큰 비용을 들여 어구(어살 등)를 설치하고 고기잡이를 준비했는데, 김봉수가 무뢰배 수십 명을 동원해 협박하고 업을 방해하자 다시 한번 상경하여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민들의 요구사항과 경리원의 답변(지령)] 이미 "어장을 민간에 돌려주라"는 명령의 먹물도 마르기 전인데, 김봉수가 이를 어기고 사욕을 채우려 하니 그를 엄중히 처벌하고 방해 행위를 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지령이 내려오길, 거제·웅천 지역 두 곳은 이미 의친왕궁(義親王宮) 소속으로 확정되었으므로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지 말 것. 또한 그 외 지역은 실제로 매매 증서(문권)가 확실한 민간 어장은 해당 어민에게 돌려주라고 이미 경상남도 관찰부로 명령을 내렸으니, 본도로 가서 절차를 밟을 것.
이 문건은 대한제국 말기, 왕실 재산을 확충하려는 내장원·경리원의 정책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관리들의 부패,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고 문서(문권)를 근거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던 경상도 어민들의 능동적인 대응을 잘 보여준다.
* 덧붙여 이번 「1906년 11월 관리의 횡포에 맞선 어민들의 생존권 투쟁 소장(訴狀)」는 발신자가 연해(沿海)어민 양치호(梁致浩), 김성칠(金成七), 오한주(吳漢柱)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6년 11월 관리의 횡포에 맞선 경남 어민들의 생존권 투쟁 소장(訴狀)」*
경상남도 연안 각 군 어민들의 청원서. 광무 10년(1906년) 11월 일. 호소인 : 경상남도 연안 각 군 어민 등.
*[사실 관계] 지난해 궁내부로부터 황제의 뜻(지의)을 받들어 발급해주신 '민간 소유 어장 문권(有文券民私條)'에 대하여, 올해 본원(경리원)에서 파견된 관리 김봉수(金鳳洙)가 이를 "관청으로 환수해야 할 공물"이라 칭하며 억지로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포구 마을 어민들이 살길이 막막해져 여러 차례 서울로 올라와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지난 음력 8월에 특별히 "문권을 대조하여 다시 내어주라"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에 본도(경상남도) 관찰부에서 훈령에 따라 조사하여 문권을 돌려주었고, 현재 어구(종, 綜)를 설치하고 고기를 잡으며 "하늘의 해가 다시 비추는 듯한" 은혜에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내용] 그런데 파견 관리 김봉수가 끝없는 탐욕으로 교묘한 계책을 내어, "민간 소유 어장이라 할지라도 내년에는 주인에게 주겠지만, 올해는 관청에 귀속시키라는 본원의 전보 지시가 내려왔다"고 거짓 공고를 냈습니다. 그는 수십 명의 무뢰배를 거느리고 각 군의 포구 마을을 횡행하며 어민들을 위협하고 어업 활동을 갖은 방법으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문권을 대조해 돌려주라" 하신 조정의 명령(원훈)이 채 마르기도 전에, 어찌 전보로 다시 빼앗으라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김봉수가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소란을 피워, 먼 곳의 어민들로 하여금 다시는 생업을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만 번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거액의 자금을 들여 어구와 물자를 준비하고 고기잡이 시설(綜)을 설치했는데, 이제 와서 관청 귀속을 운운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전보를 핑계로 협박하는 것을 더는 견딜 수 없어 다시 발을 싸매고 올라와 함께 호소합니다.
*[요구 사항] 본도와 각 부·군에 다시 조사하여 훈령을 내려주시고, 김봉수의 방해 폐단을 엄격히 금지해주십시오. 어업으로 살아가는 수천 명의 백성이 원통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해주시길 엎드려 빕니다. (앞서 제출한 관련 서류 뭉치는 현재 본도 관찰부에서 조사 중이라 첨부하지 못함.) 광무 10년 11월 일. 연명: 양치호, 김성칠, 오한주, 이춘화, 김성중, 한병호, 정성종 등.
*[경리원 답변 요약 및 지령] 경리원경(經理院卿) 각하 앞 요약 : 연안 각 군 어민들의 청원임. 민간 소유 어장을 해당 어민에게 돌려주라는 처분을 받아 어구를 설치하려는데, 파견 관리가 관청 귀속을 핑계 대니 조치를 바란다는 내용.
*[지령(답변)] 거제(巨濟)와 웅천(熊川) 두 군은 이미 의친왕궁(義親王宮)에 소속되었으므로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지 마라. 그 외의 각 군에 있는 어장 중, 전매 문권이 확실한 민간 소유 어장은 해당 어민에게 돌려주라고 이미 본도(경상남도)에 지시하였으니, 이 내용을 가지고 본도에 가서 신청하라. 광무 10년 11월 28일.
[光武十年十一月 日. 訴求. 慶尙南道沿海各郡漁民等狀.
事實은 昨年에 自宮內府로 奉旨意出給신 有文券民私條을 今年本院派員金鳳洙가 謂之還付公리라고 期欲擢奪에 浦村漁民이 無以聊生와 累次上京呼訴야 去陰八月分에 特蒙考文券之還出給之處分하와 自本道觀察府로 依訓令調査出給야 現方設綜捉魚에 感頌天日之復照覆盆矣러니, 派員金鳳洙가 以不奪不厭[不奪不饜]之壑慾으로 妄生狡計야 謂之民私條을 來年은 出給該條主고 今年則付公之意로 本院電訓이 下來라고 告示於各浦고 與數十無賴輩로 橫行於府郡浦村야 威脅漁民에 沮戲多端이은바, 考券出給라신 院訓之墨痕이 未乾, 必無電奪之理, 而金鳳洙之不遵院飭고 一直沮擾야 使此遐鄕浦民으로 復不得營業保生온니 豈不萬萬抑鬱乎잇가? 今當費巨款備物種設綜之後에 有此付公之說, 萬無是理이온나 其所憑電脅迫을 不可堪耐와 玆又裹足齊籲오니, 査照訓飭於本道府郡시와 金鳳洙沮戲之弊을 嚴加禁斷야 使此漁業保生之數千生靈으로 毋至茹冤之地, 伏祝。前後文軸은 自本道觀察府로 方今調査이옵기 未付홈. 光武十年十一月 日.
後, 梁致浩, 金成七, 吳漢柱, 李春華, 金聖中, 韓秉滸, 鄭聖宗等. 經理院卿閣下.
摘槩, 沿海各郡漁民請願, 民私條還給該民之意, 蒙處分方欲設綜, 而該派員藉托付公, 訓飭事. 指令, 巨濟, 熊川兩郡은 旣屬于義親王宮, 則不須架論이오 其外各郡所在中, 轉賣文券確有之民私條 還給該民事로 業已訓飭本道니 往呈于本道 事. 光武十年十一月廿八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