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 들(6) 「보리밭」
곡우(穀雨)절기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는 말처럼
어제 밤부터 내리는 비로 인하여 우리 살림살이도 풍성해졌으면 합니다.
백곡(穀)을 봄비(雨)가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 절기인 이맘때가 되면
옛날 농촌에서는 볍씨를 담그고 보리밭 언저리에 모판을 만드는 등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됩니다.
이때가 사계절 중 가장 뛰어난 절기로 흔히 “계절의 여왕”이니
“만물이 소생하는 절기”니 하여 만춘(晩春)의 절기를 칭송해왔습니다.
황량한 산과 들이 연녹색으로 바뀌고 학교를 오가는 신작로 주변
논밭에는 새파란 보리가 패기 시작하는 육칠십년대 농촌생활을
경험한 우리들에게 보리밭하며 언뜻 생각나는 것은
보릿고개, 가난, 배고픔과 힘겨운 보리타작의 기억과
즐거운(?)보리사리(일명 보리때기), 보리피리
지금의 러브호텔과도 같은 불륜(?)남녀의 은밀한 장소 등
수많은 추억과 문둥병 환자들이 어린아이를 잡아가기 위해
숨어 지내는 곳이란 섬뜩한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농가의 보리농사는 벼농사 다음으로 중요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6.25전쟁이후 한 해 동안 수백 명이 굶어죽는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는 50년대 후반 60년대 춘궁기에는
보리농사가 생명을 연명하는 농사로 벼농사보다도 더 중요한
농사였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모(某) 일간지에는 며칠을 굶은 엄마가 두 딸과 함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마을 우물에 뛰어내려 동반 자살을 기도하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조된 사실을 “엄마 밥 달라고 않을 테니
우물에 빠트리지 마러”란 제목의 기사로 실어 게재한 사실이 말하듯
춘궁기 보리농사는 생명수와 같은 농사였다고 말하여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유년시절 잔인한 달 오월이 오면 풋풋한 보리 냄새가 진동하는
야산 언덕배기 비탈밭과 들로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보리사리(일명 보리때기)를 위해 지니고 다니던 딱성냥 알갱이로
마른 솔가지에 불을 지피고 통통하게 물이 오른 보리이삭을 돌려 구우면
불속에 떨어져 잘 익은 보리이삭을 건져내어 두 손바닥으로 비벼
검댕이가 된 입안에 틀어넣고 씹으면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씹히는
희열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보릿고개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보리농사는 대체로 가을걷이가 끝나고 시월말경 이슬이 내리면
황량한 들판에 여름 내내 삭혀온 거름을 뿌리고 쟁기질 서리질을 하고
곰베(일명 곰방메)로 흙덩이를 부수고 괭이로 골을 파서
보리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고 나면 겨우내 차가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보리가 싹을 틔웁니다.
이때부터 한파로 얼어붙은 보리이삭 뿌리가 얼어 죽지 않도록
보리밟기가 시작됩니다. 초등학교 시절 보리밟기에 동원되어
학교주변 들판으로 나가 줄을 지어 보리밭을 밟았고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리 때들이
보리이삭을 먹지 못하도록 긴 대나무 장대를 들고
오리 때를 쫓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난히 겨울에 새파랗게 자라는 보리 싹을 현대그룹 故 정주영 회장은
부산 대연동에 위치한 유엔묘지 조성공사를 발주 받아 시공하면서
겨울철에 준공식을 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푸른 잔디를 구하지 못하여
보리밭의 보리 싹을 심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이렇듯 보리는 싹을 틔우고 어린아이 키만큼 자라면
들녘은 온통 푸른 물결로 넘실대고 등하굣길 신작로 옆 보리밭은
우리들이 오며가며 꺽어 불던 보리피리로 수난을 당하고
신작로에서 떨어진 들판 가장자리 보리밭 언저리는
청춘 남녀의 사랑 놀음(?)으로 보리밭은 짓이겨졌습니다.
20여 년 전 40대쯤 김해가 고향인 가까이 지내던 또래 지인분이
어느 날 술자리에서 아들 결혼식 청첩장을 건네며 의아해하는 나에게
장가가는 아들놈이 보리밭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로
사연인즉 지인께서 사춘기 시절 사귀던 여자 친구와
어느 날 보리밭에서 벌인 불장난으로 태어난 아이가
할머니의 보살핌아래 자라나 20대 초반에 인생유전처럼
생부모와 같이 여자 친구와 불장난으로 아이를 가져
서둘러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며 술자리가 온통 보리밭 이야기로
뜨거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보리밭은 “비단옷 입고 보리밭 매러간다”는 옛말처럼
청춘남녀의 러브스토리도 담고 있으며 또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란 시에도 애절한 그리움으로 등장하고
미당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란 시에는 “해와 하늘빛이 /
문둥이는 서러워 / 보리밭에 달뜨면 / 애기 하나 먹고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라는
어릴 적 동네 어른들에게 들었던듯한 무서운 이야기로
문둥병 환자가 생명에 집착하는 모습을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당시 며칠씩 굶어가며 생명을 연명해야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보리밭은 마치 구세주와도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연을 안고 자라난 보리는 유월이면 수확을 하는데
흔히 말하는 보리타작은 선인장 가시와도 같은
보리 까끄라기(일명 깨끼)가 도리깨로 열기가 올라 땀으로 범벅된
온몸에 달라붙어 바늘로 찌르듯한 고통을 감내해야만했습니다.
그렇게 얻어낸 보리알곡은 방앗간에서 도정을 마치고 나면
껍질은 보래개떡으로 변하고 알곡은 보리쌀로 변합니다.
유월 따가운 햇살로 긴 하루가 저물면 동네우물마다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거무스레한 보리쌀을 씻고 또 씻어
가마솥에 삶아 냉장고가 없던 당시 광주리에 담아
처마밑 서가래에 매달아두고 끼니때마다 한 움큼씩 퍼내어
솥에다 깔고 그 위에 보일락 말락 쌀알을 올려 밥을 한 다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큰아들(장남)순으로 밥그릇에 밥을 담고
나머지 밥을 주걱으로 함께 섞어 담으면 엄마와 우리들 밥은
쌀 알갱이를 찾아볼 수 없는 꽁보리밥이었습니다.
어쩌다 할아버지, 아버지 밥이 남기라도 하면 서로 먹으려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흔히 보리밥은 매끄러워 입안에 맴돌다 열무김치에 쌓여
목에 넘어갔으며 정부의 혼식정책으로 점심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도시락 검사를 해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보리밭이 요즈음 보리밭 축제니 건강식 보리밥이니 하여
옛날의 추억과 아픈 상처는 까맣게 잊고 이야기되고 있어 씁쓰레합니다
이제 우리들 만이라도 그 추억과 상처를 가슴에 묻고
십 첩 반상으로 잘 차려진 보리밥집을 찾아
보리밭의 그리움에 젖어봅시다.
보릿고개를 모르는 사람은 가난을 모르고
가난을 모르는 사람은 보리밥의 진미를 모른다.
가곡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尹龍河)에게 군대 간 남동생이 찾아와
술을 한잔 대접했다.
윤용하는 술만 마시고 고기 안주는 손을 대지 않았다.
윤용하가 동생에게 "돈 좀 있니?"라며 동생에게 구걸을 하자
동생은 주머니를 털어 형에게 얼마를 건넸다.
윤용하는 손대지 않은 고기 안주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싸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965년 7월. 43세의 나이로 월셋방 단칸방에서 눈을 감았다.
[보리밭]은 가난한 사람이 지은 노래다.
피난시절 부산에서 시인 박화목이 [옛 생각]이란 시를 지어
친구 윤용하에게 건넸더니
윤용하는 [보리밭]이라는 제목을 붙여 노래를 만들었다.
보리밭은 그렇게 태어났다....(박화목의 윤용하 일대기 중)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있어
나를 멈춘다
옛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 입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놀 긴하늘만
눈에차누나
부산 자갈치시장 앞에 남항을 바라보며 세운 "보리밭" 노래비
첫댓글 보리밭 향수에 젖어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