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딤전 2:4~6
제목: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시다
●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보자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except through me)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본질의 하나님이시지만 위격들은 구별됩니다. 성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하게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독생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성자 예수님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택정하셨습니다.
사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NASB: My Servant),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그가 이방에 정의(새: 공의)를 베풀리라 벧전1: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공동: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eternal life)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현대: 중재자도 한 분뿐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예수님에 대하여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고, 그 다음은 성자의 위격 안에 신성(참 하나님)과 인성(참 사람)이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연합(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자의 위격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 곧 그리스도이신데요. 구약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직책은 선지자, 왕과 제사장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감 상 익숙하지만 딤전2:5는 그리스도(호 크리스토스)의 직분 명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로 표기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3중직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행3: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NIV: you must listen to everything he tells you) 히5:5.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직분을 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눅1:31.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never end)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지만 현실적으로 좁혀서 말하면 유일한 중보자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참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현: 몸인 교회의 구주가 되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는 위격 들 간의 관계에서 성부의 독생 성자이시고, 성부가 성자를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창조자이셨으며 만물의 상속자이십니다.
| 히1:2.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
성자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히8:1에도 나옵니다.
| 히8: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
히8:1은 중보자께서 대제사장이심을 강조하고 히1:3은 중보자의 위엄과 영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삼위일체 교리를 잘 나타내고 있지요.
개역개정)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공동번역) 그 아들은 …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
성부와 성자는 동일 본질(호모 우시아)이시고 성자는 성부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십니다(공동번역). 이 빛은 유일하신 중보자가 뿜어내시는 구원의 빛이신데, 생명을 얻도록 창세 전에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the Light)을 얻으리라 |
중보자란 두 당사자 사이에 불화가 있을 때 그 사이에 개입해 화해를 주선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상 무한한 괴리가 있었지만(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아담의 타락 이전에 두 당사자 사이에 불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첫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하고,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관계상 분리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불쌍한 인간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관계를 회복해야 했지만 그럴 능력은 전무(全無)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책을 대신 감당하고 화해의 근거를 마련해 줄 중보자가 필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직임과 사역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되었습니다.
●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왕, 선지자와 제사장과 같이 평민보다 우월적인 지위에만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낮아지시고 심지어는 속죄와 화목의 제물로 예수님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는데, 사랑은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어 희생시킴으로 확증됐습니다.
| 요일4: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NIV: atoning sacrifice, NASB: propitiation)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예수님께서 중보자와 화목제물로서 죄인에 불과하고 비천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복음은 로마서 5장에 특히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 롬5: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화목하게 하신 중보자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구원을 받는 진리의 핵심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입니다.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화목케 하는 자로 역사하신 확실한 증거는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던” 것(딤전2:6)입니다. 주님은 최대의 양보와 최저의 낮아지심과 최대의 희생을 해주신 중보자입니다. 그 은혜로 인해서 우리는 회개하고 감격하며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첫댓글 즐거운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이 포스팅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 본 구절은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본절을 두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 구원론적 해석은 타당치 않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Earle). 그래서 칼빈(Calvin)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받으며'의 헬라어 '소데나이'(* )가 수동형으로서 구원의 주체는 오직 '우리구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일 때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에서 지지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Lenski).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진리에 대한 지식은 구원의 뿌리요, 열매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의 자의적(自意的)인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마 16:17 ; 딤후 2:25).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겔 33:11)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 바울이 이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며,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은 개역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본문에 나오는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가 앞절 내용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가르'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하고 받으실 만한 기도(1-3절)가 구원의 소망을 확고히 해준다는 점을 나타낸다(Calvin).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중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시테스'(* )는 원래 '화친이나 계약을 맺기 위해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mediator, NIV, JB).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로 인해 깨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다. 바울 사도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Guthrie). 한편 바울이 '사람이신'이라는 말을 부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성을 소유하심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신격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구원주를 하늘 저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사 우리의 친구되신 예수(요 15:13, 14)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Calvin).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의속전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속전'의 헬라어 '안틸뤼트론'(* )은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 노예나 죄수의'몸값'을 나타내는 '뤼트론'(* )과 '대신'을 뜻하는 헬라어 '안티'(* )가 합성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값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지만, 그의 속전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죄의 멍에로부터 풀려나게 된다(롬 10:10-13).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다 - 본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그리스도의 구속은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사실이다(Hendriksen). (2)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르러 일어났다(Guthrie, JB). 본 구절의 '기약이 이르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이스 이디오디스'(* )가 문자적으로 '그 자신의 때에'를 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두번째 견해가 타당하다(Earle).
본문과 함께 잘 읽었는데요. 크게 충돌하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칼빈의 견해도 반영되었군요.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로마서>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 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 , 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 , 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 , '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 )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5:9
본절은 6절과 8절 내용의 연속이나 좀더 자세하고 진일보한 면을 갖는다. 즉 6절에서는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였다. 이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 )은 주로 '그런즉' 또는 '그러므로'라고 개역 성경에
번역되었다(1절;4:9, 10, 16, 22). 본절에서는 앞절의 설명과 연결짓기 위해 유도된 접속사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은 앞에서 말한 바에서 한층 논리가 진전됨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4:25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칭의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나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代贖)에 대한 설명이다. 즉 4:25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 칭의의 근원이라는 진술이며,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이 칭의의 근거라는 진술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피를 인하여'라는 표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문구는 헬라어로 '엔 토 하이마티 아우투'( )이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의 피 안에서'이다. 여기서 바울이나 전치사 '디아'( )를 사용하지 않고 '엔'( )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아'는 '....을 통하여'(throught)라는 방법, 수단의 의미를 지니나 '엔'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상태, 조건'을 나타내는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주 안에서'( , 엔퀴리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등의 독특한 표현을 사용할 때 '디아'를 썼다. 본절에서 '디아'의 사용은,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대속적 능력이 있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한번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계속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함축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능력의 작용을 받아 계속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1절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표현과 비교가 된다. 두 구절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1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어 인간 편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었고 본절에서는 의인(義認)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대속적 피흘림이 강조된 것이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칭의를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칭의'는 재판관에 의해 무죄 선고를 받아 벌을 면하게 되는
법정적인 차원의 '의'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죄인된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 되셨다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한편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폴로 말론'( )으로서 비교법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즉 본절에서 '폴로 말론'은 단순히 '더욱'이란 의미가 아니라 '훨씬 더', '더욱더'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이 칭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다.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 이 표현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6절), 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8절)란 의미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형성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을 이루는 단어 '원수'( , 에크드로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Lightfoot)와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가 있다(Murray, Harrison). 두 가지 견해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주장한다면 다른 일면을 소홀히 하는 자가 당착(自家 撞着)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성의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놓쳐버리게 되며, 또한 '원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하심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견해를 모두 포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수하였을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이 온테스'( )의 '온테스'가 능동이나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분사로서 다만 어떤 상태나 조건을 나타낼 따름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이 화목(和睦)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칭의'이다. '칭의'가 없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있을 수 없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신다. 바울이 이처럼 화목을 강조하는 것은 '화목' 자체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후 5:18에서 언급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에, 이 직책이란 물론 죄악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사장적 직분(벧전 2:9)이지만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하는 직책'이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는 (1)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2)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 조에)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화목된'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각각 '카탈라겐테스'( )와 '소데소메다'( )이며 이 둘은 모두 1인칭 복수 수동태이다. 이는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3:25-28).
=====5:11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화목을 얻게 하신'이란 표현은 지금까지 바울 자신이 설명했던 '칭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여기서의 '즐거워하다'( , 카우코메노이)란 말은 2, 3절에서 언급된 동사인 '카우코메다'( )의 분사형에 대한 해석이다. 본절에서도 이 동사는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exalt, MB). 그러면 본절에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인가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이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이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되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다.
자세하고 은혜로운 설명에 공감합니다!
그리스도의 3중직 곧 왕, 선지자, 제사장이 평민들보다 우월한 지위지만 자신을 희생시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말씀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되네요.
그리스도야 말로 진정한 주권으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신 왕이셨습니다. 다윗 왕을 비롯한 인간 왕은 그 주권이 반란이나 전쟁을 통해 언제든 폐해질 수 있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로 말할 것 같으면 인간 선지자는 말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전했고 언제든 예언이 끊어질 수 있는 한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부의 말씀이 곧 성자의 말씀이었고, 자신이 말씀 자체였습니다. 언제나 진리만을 말씀하셨으며 말씀이 곧 생명이었습니다.
또 제사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인간 제사장은 제물을 매일 바쳐도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될 수 없어 짐승과 곡물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온전한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그리스도의 3중직은 곧 하나님이 아들을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는 완전하고도 최고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본문과 성경구절을 통해서 눈이 밝아진 것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이야말로 성부를 향한, 그리고 인간을 향한 최고의 사랑이었던 거군요. 과연 그리스도는 최고의 중보자이십니다.
우리 성도들도 화평케 하는 아들의 본분을 잘 수행해 나가야겠다고 느끼며 좋은 묵상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적절한 요약과 깊고 풍성한 분별을 추가한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네, 매우 공감합니다22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종합적인 설명을 하고 화목 제물로 스스로를 희생하신 사랑에 대하여 잘 깨닫게 해주는 좋은 묵상입니다. 공감하고 또한 공부합니다.
공감합니다^^
중보자가 왕, 선지자, 제사장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신 그 은혜에 깊은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아멘!
좋은 내용이 많이 담긴 묵상입니다. 교리 공부도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