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2월 28일 첫아이가 세상 밖으로 태동하던 날, 창밖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보기 드문 귀한 손님이다. 길조였을까, 정화수 한 사발 떠다 놓고 무병장수를 비는 지어미의 심정으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간이침대에 누워 힘찬 발길질에 아픔을 감내하는 일그러진 표정들이다.
아내는 분만실에서 출산 중이었다. 아들일까, 딸일까, 누굴 닮았을까. 궁금증이 발동을 한다. 여삼추 같은 시간 속에 혹여 난산이면 어떡하지, 하는 조바심에 심장이 요동친다. 드디어 분만실 문이 열린다. 아내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는다. “아들 이라예.” 가슴 벅찬 환희의, 샤우팅이다. 이마에는 산고에 지친 땀방울이 송송하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우고 교육, 시킨 그 아들이 마흔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않는다. 결혼 때문에 해외 파견근무도 계속 미루어 왔었는데 이젠 한계점에 도달했다. 4년 동안의 계속 이스탄불 해외 파견근무 발령을 이상은 연기할 수가 없다. 먼 곳으로 훌쩍 가버리면 혼기를 놓칠 것 같아 똥줄이 탄다. 인연의 끈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행운의 여신이 찾아올, 줄이야.
가을맞이 제주도 여행 중이었다. 서귀포 이중섭 올레길을 걷고 있는데 교육자인 친구 부인한테서 소개팅이 들어왔다. 직장동료의 큰 따님이 서울에 있으니 한 번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귀가 번쩍 띄었다. 곧바로 청주한씨 가문의 규수와 만남이 주선되었다.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전력투구하라.”
만난 지 삼 개월 만에 혼사가 성사되었다. 다급한 마음에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의 화살을 쏘아 올린 쾌거였다. 혼기가 꽉 찬 만혼이어서 후손이 늦어지면 어쩌나 했는데 결혼 후 곧바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금쪽같은 손자가 태어났다. 천하를 얻는다고 하여도 이다지도 기쁠까.
손자가 보고 싶어 아들 가족이 살고 있는 이스탄불로 날아갔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징검다리인 터키의 이스탄불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적 도시였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비잔틴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수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인 비잔틴 제국의 최고의 걸작품, 아야소피아의 화려하고 고고한 예술적 장식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신이 만든 예술의 경지 카파도키아의 동국호텔에서 1박을 하고 열기구를 탔다. 오색찬란한 수많은, 열기구들의 아슬아슬한 고공 유영, 상상을 초월한 황홀감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카파도키아의 비경은 일체의 가공을 허용치 않은 자연 그대로의 신비로움이었다. 이스탄불을 두고 나폴레옹은 그랬다. “자연의 축복을 받은 신의 선물이다.”라고
시간을 쪼개어 터키의 이웃 도시 예루살렘을 유람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인 통곡의 벽을 마주하니 육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죽어간 슬픈 역사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경제 노벨상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우수 민족의 성전 앞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다. 세계 곳곳에 살아남아 치열하게 쌓아 올린 그들의 업적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리라.
아들 가족과 함께한 이스탄불과 예루살렘의 여행은 한평생 두고두고 잊지 못할 꿈같은 시간이었다. 특히나 일흔한 살 늦은 나이에 보게 된 손자의 손을 꼭 잡고 터키와 예루살렘 곳곳을 다녔던 다붓한 사랑은 영원토록 가슴속에 품고 가리라.
아들 가족이 4년 동안의 이스탄불 해외 근무를 마치고 귀국 인사차 집으로 왔다. 갓난아이였던 손자가 다섯 살이 되어 품에 안긴다. 거실 마루가 들썩이고 방이 그득하다. 손자의 일거수일투족이 웃음꽃이다. 오랜만에 실컷 웃어본다. 사는 맛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 왕국’을 예매하였으니 같이 자가고, 한다. 아무리 모험과 판타지가 있는 인기 영화라고 해도 왠지 졸 것만, 같아 “너희들끼리 갔다 오렴.” 하고 사양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같이 가요.” 하는 손자의 말 한마디에 두말없이 따라나선다. 예고편이 한참을 흐른 후에 본영화가 시작된다. 십여 분이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눈꺼풀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팝콘을 깨어 먹으며 눈꺼풀을 밀어 올려도 소용이 없다. 비몽사몽 간에 영화의 스토리는 온데간데없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손자와 눈이 마주쳤다. 말똥한 눈망울로 “할아버지 재미없어요”. 한다. 팝콘으로 달래 보았지만 막무가내다. “그만 나갈래요.” 하며 울음보를 터뜨리고 만다. 영화관이 술렁인다. 나올 수밖에. 화면에는 엘사와 안나가 마법의 숲속을 헤매 이는데.
〈겨울 왕국〉은 손자에게도 나에게도 아주 먼 나라의 얘기가 되고 말았다. 두 번 다시 손자와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를 다시 볼 날이 있을까. 비록 손자의 응석으로 영화를 끝까지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손자와 함께 본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 왕국〉은 나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는 ‘명화’로 기억될 것 같다.
겨울 왕국, 그곳에 칠십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와 다섯 살 난 손자가 함께 있었다. 머잖은 세월, 할아버지는 먼길을 떠나고 없을 테니 훗날 손자가 자라나 오늘의 이 시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 옛날 할아버지와 함께 겨울 왕국을 보러 갔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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