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위씨 독립유공자(공훈록)
• 성 명- 위계룡(魏啓龍)
생몰년도- 1921. 5.17 ~ 미상
출신지- 전남 담양
운동계열- 국내항일
훈격(연도)- 애족장 (90)
공적내용-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일찍이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고 있던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단말마적 발악을 계속하던 1944년 1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학 중 일본 희로(姬路) 제54부대에 을종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펼 것을 결심하고 미군(美軍)이 일본에 상륙할 때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미군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도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인 학도병 1명과 동포 1명을 동지로 포섭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45년 3월 일본 군법회의에서 소위 국체변혁에 관한 죄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45. 3. 31 중부군관구군법령의)
• 성 명- 위계후(魏啓厚)
생몰년도- 1884.11.15 ~ 1944. 6.22
출신지- 전남 담양
운동계열- 국내항일
훈격(연도)- 애족장 (90)
공적내용-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1914∼1919년 영광보통학교(靈光普通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였고 1919년 3월 서울 탑골공원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영광(靈光)의 독립만세시위운동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교사직에서 강제 해임당하였다고 한다. 1922년 3월∼1925년 3월 후세교육을 위해 영광학원(靈光學院)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인 영광중학교(靈光中學校)로 발전시켰으나 경영난으로 폐교되었으며 1934년 영광청년회(靈光靑年會) 회장으로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면서 특히 인근 4개군(郡)인 영광·고창(高敞)·장성(長城)·정읍(井邑)의 체육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의식 고양과 청년들의 단결심을 고취하였다. 그는 1937년 9월 영광지역의 민족지도자를 검거하기 위해 일경이 조작한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되어 미결상태로 1년 4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면소처분을 받아 출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執行原簿(1939. 2. 4 光州地方法院 木浦支廳) ·옥골당의 傳統文化(靈光郡守發行, 1983. 8. 15) 55∼161面
• 성 명- 위석규(魏錫奎)
생몰년도- 1878. 3. 2 ~ 1913. 4.27
출신지- 전남 장흥
운동계열- 만주방면
훈격(연도)- 애족장 (90)
공적내용-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7년 청국(淸國) 원세개(袁世凱)의 구원을 얻어 일본을 타도하려고 하였으나, 그 국력이 일본을 구축하는 데에는 미약함을 느끼고,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여 해삼위(海蔘威)를 거점으로 박태문(朴泰文)·강명운(姜明雲)·국사성(鞠思成)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3년 4월 이역에서 요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호남절의록 71면 ·덕암유고 2권 ·비문(1957. 10월 건립)
• 성 명- 위송실(魏松實)
생몰년도- 1872 ~ 미상
출신지- 충북 영동
운동계열- 의병
훈격(연도)- 애족장 (2013)
공적내용-
충북 영동(永同) 출신으로 1909년 8월 충북 영동에서 조석우의진(趙錫祐義陣)에 소속되어 일본인 및 친일 한인의 처단, 철도 및 정거장의 파괴, 선전물 배포등을 목적으로 동지를 모집하고 군량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1909년 유력한 의병장들의 전사와 일본군경의 탄압으로 의병부대의 활동은점차 위축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북 운봉(雲峯) 출신의 조석우는 1909년8월 23일 충북 영동군 양내면(陽內面) 영국사(寧國寺)에서 장군선(張君先)·조덕장(趙德章)·권덕원(權德元) 등과 모임을 가지고 삼남대장(三南大將)이라 하여총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장군선·조덕장·권덕원은 부장(副將)이 되고, 방치경(方致京) 등은 병졸(兵卒)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본인을 전부 처단하고 철도정거장 등 일제의 침략 거점을 파괴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격문을 띄우는 한편, 장정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양남면(陽南面)일대에서 군사를 모집하면서 거사를 준비했다.위송실은 총대장 조석우의 명을 받고 식량을 조달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등의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위송실은 소위 내란죄(內亂罪)로 기소되어 1909년 9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청주지부에서 유형 2년을 받았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判決文(公州地方裁判所淸州支部:1909. 9. 23)·朝鮮總督府官報(1910. 9. 6)
• 성 명- 위승환(魏承煥)
생몰년도- (1881) ~ 미상
출신지- 함남 함흥
운동계열- 의병
훈격(연도)- 애족장 (95)
공적내용-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홍태영(洪泰英) 의진에 가담하여 황해도, 경기도 일원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이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우리 민족의 무력을 말살하는 등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하여 갔다. 이에 분격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에 본격적으로 저항하고,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들을 처단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위승환은 이 같은 시기인 1908년 2월 홍태영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홍태영 의병장의지휘에 따라 황해도 서흥군(瑞興郡)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차례 교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른손을 상실하여 불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계속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의병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09년 9월 서울 종로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수하였다. 또한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고란대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9년 11월 9일 경성지방재판소를 거쳐 같은 달 29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을 공훈을 기리어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316, 317면
• 성 명- 위제하(魏濟河)
생몰년도- 1920. 4. 3 ~ 2017. 1. 23
출신지- 평북 정주
운동계열- 국내항일
훈격(연도)- 대통령표창 (2010)
공적내용-
위제하는 1934년 10월 27일경 평북 정주군 갈산면(葛山面) 애도동(艾島洞) 자택에서 광조소년회(光朝少年會)를 조직하였다. 광조소년회는 또래 친구 30명과 함께 조선의 역사를 배우고 독립정신을 키우는 책을 돌려보며 독립의지를 고양하던 독서클럽이었다. 광조소년회는 1938년경 겨울에 애도야학소년회로 명칭을 변경하기도 하였다. 위제하는 1940년 3월까지 이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 및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1940년 8, 9월경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註 · 思想에 關한 情報(12) (坡州警察署長:1940. 8. 17)
· 思想에 關한 情報(12) (京畿道警察部長:1940. 8. 26)
· 思想에 關한 情報(12) (京畿道警察部長:1940. 10. 26)
• 성 명- 위종관(魏鍾琯)
생몰년도- 1909. 8.10 ~ 미상
출신지- 전남 장흥
운동계열- 국내항일
훈격(연도) -애족장 (90)
공적내용-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1933년 10월 전남 장흥군(長興郡) 관산면(冠山面) 옥당리(玉堂里) 일대에서 유재성(劉載星)·정진수(丁瑨壽) 등과 함께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농민조합을 조직하고 각 부락 농민조합내에 청년반·농민반을 두게 하여 노농운동(勞農運動)을 전개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무죄를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불복으로 공소가 제기되어 1937년 7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判決文(1936. 12. 28 光州地方法院 木浦支廳) ·判決文(1937. 7. 19 大邱覆審法院)
• 성 명- 위희정(魏希禎)
생몰년도- 미상 ~ 1922
출신지- 평북 강계
운동계열- 만주방면
훈격(연도)- 애국장 (99)
공적내용-
평북 강계(江界) 사람이다. 만주지역의 독립군 단체인 참의부(參議府)에서 활동하였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이념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통의부 의용군내 제1, 2, 3, 5중대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한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는 독립운동단체이다. 참의부는 중앙의회를 가지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는 단체였다. 참의부는 활발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제1중대장 백광운과 제2중대장 최석순에 의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백광운이 피살된 후에는 최석순이 참의장 겸 제2중대장으로 있으면서 군사활동을 주도하였다. 참의부의 군사활동은 국내진격전으로 대표된다. 참의부는 압록강유역과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상은「독립신문」에 자세하게 보도된 바 있다. 위희정은 참의부(參議府) 제1중대 부사(副士)로 집안현(輯安縣) 이도구(二道溝)에 출장갔다가 토군의 습격으로 피체된 후 일경에게 인계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477面 ·抗日殉國義烈士傳(吳在植, 1958) 337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473面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96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29面 ·東亞日報(1927. 5. 14)
출처: 보훈처
첫댓글 공훈록에 기록된 우리 문중 8분의 독립지사군요.
애국애족정신이 뛰어난 문중이군요.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