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02.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인파 보도의 시초는 1956년 대선 당시 신익희 후보의 한강 백사장 연설이 아닐까 싶다. 당시 신문은 백사장을 메운 인파 사진과 함께 '사상 최대 30만명 운집'이라 보도했다. 주먹구구가 아니라 백사장 넓이를 감안한 추정이었다고 한다. 1987년 대선 때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 정당마다 "100만을 모았다"고 주장했다.
▶ 물리학자 페르미는 핵실험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핵폭풍에 따른 종잇조각 움직임으로 핵실험 폭발력을 추정했다. 그 뒤 기초 지식만 가지고 이를 확장해 합리적 추론을 하는 것을 페르미 추정이라 했다. 한 평(3.3㎡)에 사람이 9명 정도 설 수 있다는 지식을 가지고 집회 참석자 전체를 추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11만여평 여의도광장을 사람이 가득 채우면 '100만 운집'이라 보도했다.
▶ 지난 28일 열린 서울 서초동 '조국 수호' 집회에 주최 측이 200만명이 참석했다고 했다. 그날 인파가 들어찬 반포대로·서초대로는 인도까지 포함한 면적이 1만4520평(약 4만8000㎡)이다. 9를 곱하면 약 13만명이다. 왔다 간 사람을 감안하더라도 몇십 배 부풀린 숫자다.
▶ 당시 집회 인원을 추정해볼 가장 확실한 근거가 나왔다. 당시 교통 통제로 거의 유일한 접근 수단이었던 지하철 이용자 수다. 그날 오후 서초·교대역에 내린 승객은 10만명으로 평소보다 8만명 많았다고 한다.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다음에야 이 이상의 인파는 있을 수 없다. 그나마 상당수는 같은 장소에서 열린 '서리풀 축제' 참가자였다고 한다. '퀸'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는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라이브 에이드' 콘서트 장면이 나온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그런데 그 엄청난 관객 수가 7만2000 명이었다고 한다.
▶ KBS·MBC 등은 그날 저녁 뉴스에서 "주최 측 추산 100만명이 모였다"고 보도하고 자막까지 띄웠다. 다음 날 뉴스에선 두 배로 뛰어 "200만명이 모였다"고 했다. 기자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가득 찼다" "수많은 인파가 도로를 메웠다"란 느낌을 전한 뒤 주최 측을 인용해 200만명이라 했다. MBC 보도국장은 라디오에 출연해 '느낌'으로 100만이라고 했다. 울산시 인구가 100만을 조금 넘는다. 울산에 사는 남녀노소가 어린아이까지 다 서울에 와야 100만이다. 울산과 대전 인구가 다 모여야 200만이다. 몇 배 부풀리는 것은 '과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몇십 배 부풀리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이성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chosun.com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