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종열)
여름의 마지막 숨결, 계절을 읽는 조상의 지혜
— 처서와 백로 사이에서
뜨거웠던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나면, 하늘은 어느새 손에 닿을 듯 높고 푸르게 멀어집니다. 뙤약볕 아래 숨 가쁘게 달려온 땅 위의 모든 생명은 절기의 미세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다음 계절을 준비합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절기마다 내려오는 속담 속에 자연의 법칙과 삶의 지혜를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그중에서도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첫 문턱을 이어주는 ‘처서’와 ‘백로’의 이야기는 유독 정그럽고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양력 8월 23일무렵 찾아오는
**처서(處暑)**는 말 그대로 '더위가 머물러 멈추는 시기'입니다. 아무리 맹렬했던 폭염도 처서라는 절기의 이름 앞에서는 기세가 꺾이기 마련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시기를 두고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고 했습니다. 밤이 되면 피부 끝에 닿는 공기가 서늘해지면서 무더위의 상징이던 모기마저 기운을 잃고 자취를 감춘다는, 재치 넘치는 비유입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말은 스쳐 가는 바람 하나에도 수수한 시정(詩情)이 깃들어 있습니다. 한여름 사방을 덮으며 기세등등하게 자라나던 잡초조차 서늘해진 바람 앞에서 성장을 멈추고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들판을 메우던 초록의 거친 함성이 가라앉고, 비로소 대지가 아침저녁으로 정돈된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서를 지나 양력 9월 7~8일경에 도달하는 **백로(白露)**는 맑고 투명한 가을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하얀 이슬’이라는 이름처럼, 밤 기온이 내려가 이슬점 아래로 떨어지면 풀잎마다 보석 같은 이슬방울이 동그랗게 맺힙니다. 조상들은 *“백로에 이슬이 내리면 찬바람이 분다”*고 말하며, 비로소 본격적인 가을의 문이 열렸음을 직감했습니다.
처서에 입이 비뚤어지며 주춤하던 모기는 백로 무렵이 되면 마침내 서리를 맞이하듯 완연히 활동을 멈춥니다. 모기의 소멸은 단순한 계절성 곤충의 부재가 아니라, 한 해 동안 지칠 줄 모르고 타오르던 여름의 열기가 완전히 소멸했음을 알리는 자연의 단호한 선언입니다.
나뭇잎 끝에 매달린 영롱한 이슬 한 방울 속에는 이제 서늘한 가을 바람과 넉넉한 결실의 기운이 한가득 담겨 있습니다.
처서에서 백로로 이어지는 길목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이기도 합니다. 지독했던 더위를견뎌낸 들판이 마침내 무르익고, 기승을 부리던 잡초와 모기조차 가을의 순리에 고개를 숙입니다.
스치는 바람에 가을 향기가 묻어나는 요즘, 옛 속담이 전하는 계절의 순리와 단단한 지혜를 가만히 읊조려 봅니다. 우리네 삶 역시 뜨거운 여름을 지나, 풀잎 끝에 영롱하게 맺히는 백로의 이슬처럼 더욱 깊고 우아하게 익어가기를 소망해 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