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늙은 아내>
내 늙은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 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
<밀어>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채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무등(無等)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문둥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질마재의 노래>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하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추석>
대추 물 들이는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 떠나올 때
가슴에 끄리고 왔던 눈썹.
열두 자루 匕首 밑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匕首를 다 녹슬어
시궁장에
버리던 날,
삼시 세끼 굶는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
박아 넣어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었다가
그 눈썹 꺼내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
<추천사>
-춘향의 말 하나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베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 밀어 올려다오 !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서정주 시를 보시려면, 권하고 싶은 책>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미당 서정주 대표시 100선
지음 서정주 | 엮음 윤재웅
브랜드 은행나무 | 발행일 2014년 3월 27일 | ISBN 9788956607597
사양 변형판 134x196 · 248쪽 | 가격 12,000원
분야 국내시집
책소개
한 권으로 읽는 미당 서정주 시의 생애 70년
한국의 대표 서정시인 미당 서정주의 15권의 시집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시 100편을, 미당의 제자이자 미당 연구자인 동국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윤재웅 교수가 엄선하여 엮고 해설을 더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가 출간되었다(은행나무 刊). 미당 탄생 100주년인 2015년을 앞두고, 독자들로 하여금 서정주의 시 세계를 시 선집 한 권으로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하고자 기획되었다.
이 시 선집은 『화사집』(남만서고, 1941), 『귀촉도』(선문사, 1948) 등을 비롯한 15권의 서정주 시집의 각 초판본을 저본으로, 원문의 표기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띄어쓰기는 현대 표기법에 따르기는 했으나, 시어의 의미와 소리에 관한 시인의 최초 의도를 해치지 않기 위해 현대식 표기로 시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싣는 데 중점을 뒀다. 이는 모국어의 ‘소리의 묘미’에 대한 미당의 선험적인 감각을 살리기 위해서이며, 또한 방언에서 온 시어들이 서정주 시의 미적 성취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서정주만큼 “말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심리의 효과를 자신의 고유한 미적 장치로 활용한 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서정주의 시를 읽는 일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