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현대사 - 제국주의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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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1.08. 03:11조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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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등장
1. 교과서 속 주개념
1) 19세기 후반의 세계
19세기 후반 이후 독점·금융 자본주의와 변질된 민족주의의 결합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후진 지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하는 정책이나 주의를 제국주의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상품시장과 원료 획득 및 잉여 자본의 투자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획득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등장하였다. 특히 이탈리아, 독일은 통일 이후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배타적, 침략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상적 배경은 사회 진화론을 이용하여 적자생존,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를 식민지 침략에 적용하였다. 이후 제국주의 열강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2) 동아시아의 근대화와 반제국주의 운동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청(淸)과 일본(日本)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대응을 하게 되었다.
청의 양무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개혁을 진행하였으나 청·일 전쟁의 패배로 한계를 노출하였다. 반면, 일본은 문명 개화론을 바탕으로 한 메이지유신(明治 維新)으로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2. 확장 개념
1) 중국의 양무 운동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근대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하지만, 청·일 전쟁의 패배로 한계를 노출하고 이후 변법 자강 운동(무술 변법 1898)으로 이어졌다.
신(이홍장)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양식 소총·대포를 사들이고, 국(局)을 설치하고 유산탄을 주조하여 적군을 섬멸하는 데 쓰고 보니, 과연 위력이 있었습니다.··· 신이 뜻을 다해 말씀드리는 것은 서양의 기계가 농경, 기계, 인쇄, 도공 등의 용구를 모두 제조할 수 있고 민생의 일상 생활에 이익이 되는 것이지 오로지 군사 무기만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홍장 상소문]
2)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일본은 막부 타도, 왕정 복고로 국왕 중심의 새 정부를 수립하고 서양 제도를 적극 도입하여 입헌군주제, 신분제 철폐, 토지제도 개혁 등을 실시하여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문명에는 밖으로 드러나는 사물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의 구별이 있는데, 밖으로 드러나는 문명은 취하기가 쉽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문명은 찾아내기 어렵다.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는 어려운 쪽을 먼저 하고 쉬운 쪽을 나중에 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3. 관련 지식
1) 제국주의
다른 나라를 정복·지배하려는 일체의 침략주의적 경향. 제국주의의 어원이 된 임페리움(imperium)은 원래 로마공화정 시대에는 명령과 권력, 특히 법에 의한 명령을 뜻하는 일반 명사였지만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로마에 의한 타민족 지배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일반화된 것은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보도한 영국의 신문 《데일리뉴스》에 의해서였다. 《데일리뉴스》의 1870년 6월 8일자 신문은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을 제국주의라고 지칭하여 전제 정치와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77년 이후이다. 즉, 영국의 총리 B. 디즈레일리는 77년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고 하자 이에 대해 무력행사도 불사한다는 대외 강경책을 구사하여 소위 징고이즘(jingoism)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제국주의는 열광적인 주전론(主戰論), 혹은 배타적 대외 강경책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말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격이 자유 경쟁 단계의 산업자본에서 독점·금융자본으로 변화함으로써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인 대립과 분쟁을 가리키게 되었다.
2) 중국의 반제국주의 근대화 노력의 특징과 한계
중국 전통사회의 내·외적 위기상황에 대한 근대 지향적 변화를 위한 시도는 양무운동에서 변법운동, 혁명 운동의 단계로 전개되었다. 아편전쟁에서의 외부적 충격과 태평 천국으로 나타난 내부적 위기의 표출을 배경으로 양무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청일 전쟁으로 실패가 드러나게 되었다.
양무 운동에 대한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한계를 비판하고, 체제 자체의 변혁까지 지향하는 변법 운동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변법운동 역시 서태후를 위시한 보수파의 반발과 광범위한 민중에 기반을 두지 못한 상황 속에서 소수 변법파 만의 개혁 시도는 또 한번 좌초하게 되었다. 이후 보수세력만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상황 하에서 시대의 변화에 긴밀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청 정부는 무력함을 드러내게 된다. 이 속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청조는 의화단 사건을 이용하여 제국주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지만, 서양 세력에 의해 의화단이 진압되고, 중국은 열강에 의해 과분(瓜分)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더 이상 청조에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의해 야기된 20C초 중국에서는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여 독립, 자주적이고 부강한 새로운 국가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는 광범위한 국민적 각성 위에 신해 혁명이 추진되었다. 과정상 1894년 손문 등의 혁명파가 '흥중회'를 조직하고 '청조 타도와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혁명운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손문·송교인·황흥·진천화 등에 의해 '중국(혁명) 동맹회'가 결성, 손문을 총리로 선출하고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선택한 것을 혁명운동의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 이후 1911년 10월 무창봉기는 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11월 하순 지방의 24성 중 14개 성이 청조 지배로부터 이탈하고, 혁명세력이 남경을 점령하였다. 이후 17성 대표가 모여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원세개가 혁명정부에 가담함으로 결정적으로 청조가 멸망하고 1912. 2. 12 선통제가 퇴위함으로 공화제로 전환된 역사적 과정을 신해혁명이라 부른다.
하지만 '반만(反滿)'의 구호는 단순히 청조 타도와 공화제 수립이라는 차원에 머물렀을 뿐 혁명의 궁극적 목표인 혁명세력에 의한 권력 장악과 그것에 의한 새로운 권력 구조의 창출이라는 전망에 대해 아주 막연하거나 애매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중국 사회의 전통적인 사회 경제 체제와 그에 수반된 가치 구조의 개혁이라는 반봉건(反封建)의 과제 또한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반제(反帝)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열강에 의한 과분의 위기에서 출발하였지만 반제의 과제를 일단 당면 목표에서 배제하고 반만 혁명의 문제를 우선시한 점 등이 한계로 지적되는 것이다. 결국 신해혁명은 원세개의 권력 장악과 열강에 이권을 계속 양보하게 되는 상황을 빚었으며, 이후 군벌 시대가 전개되게 되었다. [안병학, 동양사 정리자료 중]
[네이버 지식백과] 제국주의의 등장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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