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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늘은 우리 전 민족이 세계 무대로 발을 들여놓는 그런 시기를 맞았습니다. (중략) 대한 독립 만세!"
1946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육성 연설 中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광복 후에는 1세대 민족주의 중도 우파의 1세대 정치인으로 보수파의 대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몇 번이나 해산위기를 겪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낸 큰 공로가 있으며. 그 덕분에 안창호, 이승만, 여운형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동학군의 병사로서 처음 민족운동에 뛰어들었고, 동학전쟁의 패전 이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교육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에는 중화민국령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임시정부의 항일전시내각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자신의 이념보다 민족을 중시하는 성향 때문에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는 반대하면서 단일조국을 형성하자는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알 수 없는 배후를 둔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해산될 뻔했던 위기를 모두 견뎌내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내면서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행적과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유력 후보였던 만큼 압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백범 선생은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삼의사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가장 존경받는 독립운동가로 꼽히는데, 의거를 실행한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를 막후에서 지시한 지도자라는 명성과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독립전쟁을 이끈 '임시정부 주석'으로서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정치가로서의 인상이 강해서 설문조사마다 삼의사(중에서도 특히 안중근 의사)보다 순위가 밀리는 경우가 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을 불러보라면 상당수는 김구 선생을 이야기한다. 즉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에서는 국민 전반에게 고루 존경받는 편이다. 그를 높이는 표현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독립 조국의 문지기가 돼 뜰을 쓸고 창을 닦아주고 싶다'는 연설이나 백범일지 등에서의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무력이 아닌 문화다(일명 문화강국론)', '내 나라가 식민 지배 당한 아픔을 알기에 내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길 원치 않는다' 등 그가 남긴 명언이나 거사를 앞둔 윤봉길과의 시계 교환 등 여러 드라마틱한 일화들도 지금까지 많은 이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다만 부정적인 여론도 적지 않게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반공주의자로서 김립 피살 사건을 포함한 공산주의계를 주살한 사건과 무고한 일본인 상인을 행색이 수상하고 도검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엮였다고 생각해 살해한 치하포 사건이 이유로 거론되며, 임정법통론에 회의적인 일부는 안창호 계열 국민당원 옥관빈 피살사건을 집권을 위한 정치적 행보로 임시정부를 이끈 공적 또한 지적하기도 한다. 김구를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에 반박하는 측은 김구가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활동 당시 친일파가 많았던 한민당 쪽으로부터 적극적인 자금 지원을 받은 것에 불만을 가지기도 한다.
이런 논란과 격하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임시정부를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처지나 이념 혹은 필요에 따라서 임시정부를 해산하려고 시도하거나 떠난 후에 나중에 돌아온 것에 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켜낸 독립운동가였기에 그 자체로 정통성이 매우 높고 조금 과장하면 임시정부 정통성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우파든 좌파든 근대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인정받는다. 이름 있는 정치인이자 비극적인 죽음,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광복 이후에는 반탁 운동 및 남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는 확고하다.
2. 일생
조선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출신이다. 구 안동 김씨 익원공파로, 집안은 약 300년 전 김자점 역모 사건 이후 몰락했다. 김구는 어려운 가운데도 글 공부를 했지만 과거 시험에 낙방해 떨어졌고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 자체가 폐지되어 사라졌다. 김구는 원래 이름은 아니었다. 원래 이름은 김창암(金昌巖)이었는데, 1893년(18세) 동학에 입교하면서 김창수(金昌洙)로 바꿨고, 1912년(37세)에 김구(金龜)로 개명했다. '구' 자도 임시정부 시절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꿨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반기를 이끌던 지도자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가 모두 이탈, 독자세력화 하면서 규모와 정통성이 공히 크게 약화된 임정을 이끌었고, 과감한 항일 활동으로 세계에 존재감을 알렸다. 광복 이후에는 귀국해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김일성 등과 대립하였으며, 우익의 주도권을 놓고 이승만과 라이벌 관계를 이뤘다.
3. 사상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백범일지 민족국가 편 中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백범일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편 中
광복 후에 출판된 백범일지의 부록 "나의 소원"에서 이념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피력하여 친좌익적인 인물로 비추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나, 실제 김구는 광복개조파와 창조파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임정 시절부터 우파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김구의 정치 노선은 좌우합작운동 전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는데, 좌우합작운동 전인 일제강점기 당시 김구는 김립 피살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을 굉장히 경계했고, 광복 후에도 김규식, 안재홍과 같은 중도우파들과는 달리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활동하였다.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독립한 후 남북통일정부를 공동으로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해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합의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승만과는 달리, 김구는 좌우합작 7원칙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며 지지하고 나섰고, 좌우합작이 결렬되자 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를 이끌기도 했다. 한마디로 좌우합작운동 이후 김구는 오히려 김규식과 다를 바 없는 중도우파 비슷한 컨셉으로 활동한 것이다. 결론은 김구를 극우파 또는 중도우파로 명백하게 콕 집어서 분류할 수는 없고,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타협적인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고 말할 순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김구는 소련을 추종해 공산당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의 활동을 임정 주류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곱게 보지 않았다. 공산주의 활동을 독립의 수단으로 받아들였느냐(여운형, 조봉암, 이동휘), 실제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민족을 넘어선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주장했느냐(박헌영) 그런 구분없이 걍 다 부정적으로 본 것. 김구는 일단 민족이 있어야 인민 혁명이든 뭐든 한다며 민족을 떠나 노동자끼리 뭉친다는 식의 사회주의 개념에 동의할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던 그의 면모가 보이는 부분.
또한 광복 이후 우익세력(한민당)이 임시정부의 봉대를 주장했던 것에 반해, 당시 중국에서 임정에 합류한 사회주의 세력과 별개로, 조선 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국내 사회주의 세력들은 그들과 접점이 닿지 않는 임정봉대에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구는 이들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적으로 보고 우익 세력과 합작해 배척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당대 명성을 날리던 민족변호사 허헌은 다른 독립운동 세력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임시정부의 법통만을 내세우는 김구를 극딜하기도 했다.
법통(法統)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 허헌
한편, 이승만도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동시에 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물론 이승만 본인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탄핵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정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기도 했다. 이 민국 연호는 단군기원과 함께, 4.19로 이승만이 하야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3.1. 종교
백범 사상의 뿌리는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교 등 동양 사상을 망라한 위에 그리스도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 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
— 백범 기념관 설명문 '백범 사상의 뿌리'(조동걸)
위키백과에서는 김구의 종교를 동학 - 불교(법명: 원종) - 개신교(감리회)로 나열하여 개종을 2번이나 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외에도 임종 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고, 광복 직후 전재동포 구호 사업으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원불교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교류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불교의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한 기록이 있는 등, 국민지도자로서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고자 했다.
백범이 생애 대부분을 개신교인으로 살았던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다. 김삼웅의 ≪백범 김구 평전≫(2004)에는 사망 전 천주교 영세를 받은 내용은 없으나, 젊은 시절 개신교로 개종한 사건은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초기 17세까지는 한학을 배웠으나 황해도 출신에 잔반이라 당연히(?) 과거에 떨어지고 백범의 아버님의 권유로 풍수와 관상학 공부를 공부했는데, 관상학 책 ≪마의상서≫를 석달 정도 볼 정도로 매우 심취했으나 자신의 관상에 부(富)나 귀(貴)는 하나도 없고, 천(賤)하고 빈(貧), 흉(凶)만 찾아서 실망하고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은 게 마음 좋음만 못하다는 격언을 떠올리고 마음 좋은 사람만 되자란 결심을 했고, 병서를 보기 시작해서 ≪손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으면서 1년여간 마을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마침 19세 때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 접주가 되어 700여 명을 지휘했다고 한다. 동학 운동 이후 도피 중에 유학자 후조 고능성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년여간 불교에 귀의하여 법명을 수계받고 출가하기도 했다. 김구가 개신교인 감리교에 귀의한 것은 아버지의 3년상이 끝나고, 약혼자가 급사한 1903년경인데, 1896년 수감생활 중에 신문과 도서로 서양문물에 관심이 생긴 영향도 있었다. 1902년경 동학 접주 시절 종사였던 우종서를 만나 개신교를 소개 받았고, 1903년 11월 감리회 소속 헌트 목사가 황해도 지역을 방문했을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1903년 말 2주간 평양에서 교리와 성경공부를 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 결혼할 뻔하다가 무산되고 11세 연하 최준례와 결혼하는데 이때 혼인 예식은 미국인 목사 군예빈이 주례하여 개신교식으로 치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반 이후부터의 삶 대부분은 개신교인이었다. 백범 김구의 개신교 개종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국권 회복을 위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개신교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3.1.1. 암살 당시
김구는 암살 사건 당일 절명을 전후하여 천주교식 세례성사와 종부성사를 받기도 했다. 위키에서는 마지막 종교를 감리회로 서술했는데 이는 그가 당시 의식불명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며 죽음에 임박한 자에게 세례성사를 주는 것이 천주교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하며 생전에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던 김구는 당시 며느리 안미생과 명동성모병원 간호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지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했다고 하며, 1946년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서울 명동성모병원장 박병래 신부는 곧바로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성사를 주었다고 하고, 사망이 확인된 뒤에는 간호수녀들이 시신을 염하였다.
그런데 당일 김구의 수행비서 선우진이 암살범 안두희를 김구의 방으로 안내한 것이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고, 안내 후 2~3분이 채 못 되어 3층에서 총소리가 울렸으며, 총소리에 놀라 당시 비서였던 이풍식, 이국태가 뛰어 올라갔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음 사람인 박동엽(독립운동가이자 대광고 교장)과 경비원 2명이 따라 올라갔을 때는 12시 40분경이었는데 김구가 이미 사망한 뒤였다고 한다. 따라서 영세 당시 김구가 생존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는 김구에게 암살 당일 세례를 준 것이 본인의 진의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백범이 과거 입교 의사를 밝혔다"는 관련자의 증언 뿐이다.
김구가 받은 세례는 임종세례이자 조건부세례인데,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죽음에 임박한 자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며 이때 영세자의 의식을 확인할 수 없거나 의사의 사망선고가 있었더라도 "영세자가 영세를 원하였던 것이 분명하고 아직 완전히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조건으로" 세례를 준다. 즉 세례가 유효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하여 과연 김구가 생전에 천주교 영세를 원했느냐가 문제되는데, 김구가 명동성모병원 입원시 천주교 입교를 언약했다는 증언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증언을 교차 검증할 자료는 없고, 그가 생전에 성당에 출석했다는 자료도 없다. 노기남 대주교의 기념 화보집에 한국 천주교회 주요 행사에 김구가 배석한 모습이 등장한 사진이 있는 것을 보면 천주교계와 친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친분과 개종은 분명 다른 문제다. 한국은 다종교 사회로 현재도 정치인들은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3대 종교지도자들(불교, 원불교, 천주교)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려 한다.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1940년대 한국 정계의 중심이였고 그런 그가 천주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과 그가 천주교 입교의지가 있었느냐는 다른 문제다. 다만, 암살 사건 직후 다른 곳도 아닌 명동성당에 곧바로 피살 소식이 알려지고, 천주교 측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백범의 주거지에 찾아가 사후 예식을 순조롭게 거행한 것을 보면, 백범의 생전 입교 의사표시나 이에 대한 유족들의 용인이 아예 없었다고 성급히 단정하기는 또 어려운 측면도 있다.
백범이 암살 사건 직후 천주교 임종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이나, 이때에는 총격으로 의식불명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세례를 주는 것이 천주교의 종교적 전통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다만 그러한 전통은 그런 방식으로 영세한 사람을 천주교회 밖에서 볼 때에도 사회적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신자로 분류할 수 있는지와는 별개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백범의 천주교 개종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보아 본 문서에서도 위키백과와 같이 그의 최종 종교를 감리회로 기술한다.
4. 외모와 신체
흔히 알려진 말년의 한복 입은 온화한 지식인의 이미지와 앞으로의 조국의 길을 군사, 경제적 강국이 아닌 문화적 강국으로 제시하는 모습 탓에 지식인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생전의 활동은 투사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
학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키 또한 생각보다 큰 편이다. 키가 180cm 전후로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위에 나오는 김구는 70대였다. 칠순임에도 불구하고 백범은 180cm에 달하는 신장이었다. 이로 보아 20~30대 때의 김구는 못해도 182cm정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인 지금만 하더라도 한국인 180cm 이상이면 상위 11%에 속할 정도로 큰 키인데, 김구는 21세기로부터 약 100여 년 전 사람이다. 이 정도면 당시로서는 정말로 거인 수준. 심지어 서양인들 중에도 그 당시나 지금이나 180cm 이상인 경우가 의외로 그닥 많지 않다. 게다가 동학운동 당시 거친 농민군 사이에서 소년이었음에도 접주 역할을 했다는 점, 치하포 사건 당시 칼을 숨겨놓은 성인 남성을 제압하여 살해했을 정도였음을 보면 키만큼 완력도 세고 좋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온화한 노년의 모습과 달리 중년 시절의 사진을 보면 같은 김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굳세고 단단한 강골의 이미지를 가진 얼굴이었다.
이승만과 비교하면 김구가 머리 반 개는 더 큰 위의 짤이 약간 퍼져있는 편인데 이는 구도상의 왜곡 문제로 실제로는 저 정도 차이까지는 아니다. 위 짤에서는 이승만의 키가 거의 김구의 눈 언저리지만 같이 찍은 다른 정면 사진을 보면 이마에는 닿아았다. 손기정과 찍은 사진을 봐도 대충 이마 언저리인데 손기정과 이승만의 키가 같다.
이승만의 키는 약 170cm 정도로 알려졌는데, 사진 속 이승만과 비교해 보면 김구는 180cm를 훌쩍 넘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언급하였듯 살짝 왜곡된 구도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작을 것이다. 위에 업로드된 다른 사진인 지청천의 키는 178cm라고 하니 대략 180cm 정도인 게 맞아 보인다. 180cm 정도의 키는 지금 기준으로도 큰 키지만 일제강점기 20대 한국 남성 평균 키는 약 163cm였다. 현재 20대 남성 평균키가 174cm이니 현대와 비교하면 190cm 정도는 되는 거구였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투쟁 활동은 이러한 큰 체격이 뒷받침해준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저 사진은 김구가 나이 70세가 다 되어 찍은 사진으로, 젊을 땐 더 컸을 것이다.
또한 원래부터 큰 키에 다리도 긴 편인데다 티가 별로 나진 않지만 어깨깡패라서 덩치가 키 큰 것 때문에 더욱 커보인다.
복장 자체의 경우 노년기의 동그란 안경에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 잘 알려져 있지만 양복 차림의 모습도 많이 남아 있다. 초창기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을 보면 안경을 쓰지 않고 카이저 수염을 기른 모습도 있다.
노년기의 이미지와 드라마 등에서 나오는 김구 역의 연기자들이 대부분 굵고 무게감 있는 톤으로 목소리 연기를 하다 보니 실제 김구의 목소리도 이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연설이나 대화할 때의 육성을 들어보면 톤이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느릿느릿 차분하게 정확한 딕션을 구사하면서 논리와 감성에 모두 호소하는 연설 스타일. 1946년 광복 1주년 행사 때의 서울 중앙청 연설 영상, 연설 영상 2. 연설 영상 3
5. '항일 테러' 표현 혐오 논란과 반박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해프닝이다.
김구는 일본 상인을 살해하였고 복역중 탈출하였다….(중략)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후략)
—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129쪽
2008년 뉴라이트 성향의 교과서포럼에서 출판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에는 '일본에 대한 테러 활동을 수행하였다'고 서술되었는데 이 내용이 알려지자 "백범을 테러리스트로 취급하다니!"라면서 여론이 폭발, 해당 교과서를 집필한 뉴라이트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외수와 진중권 등 일부 지식인들도 이 교과서의 표현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 인식이 형편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론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하포 사건은 이미 민간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에 대한 살해로 역사적 교차 검증이 끝난 상태이다. 김구 관련 재판 문서나 외교 문서에는 스치다의 신분이 모두 ‘상인’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국내 역사학자들 대부분의 연구결과이다. 당시 일본 기록이 신빙성이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이, 김구에 대한 처벌을 강력하게 원했던 총독부 입장에서는 오히려 김구의 주장처럼 일본 군인임을 적시하는 것이 재판을 위해서 더 유리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견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테러 대신 '항일 의열 투쟁', '무장 독립운동'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의열활동과 테러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테러가 다수의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 데 비해 의열투쟁은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중요인사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지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이전부터 다른 논문이나 책, 교과서에서 해왔던 것이다. 다른 서술도 아닌 백범일지에 이 표현이 나온다.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下, 돌베게
테러 전술이라고 판단한 김구는 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비밀리에 결사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항일의거를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를 만나 한중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야기, 윤희진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도왜실기(屠倭實記)》는 원래 김구 선생이 1932년에 주도한 일련의 대(對)일본 폭탄테러 활동의 진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쓴 책이다.
— 도왜실기 - 범우문고 86, 출판사 서문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함께 테러 활동을 많이 한 남화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맹렬히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서중석
윤봉길은 6월 21일,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윤봉길의 폭탄 테러로 독립군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더더욱 불안에 떨었습니다.
— (어린이용) 헐레벌떡 어제 오늘 근대 이야기 딱 22장면, 한정영
김구는 임시정부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의열단에서 벌이는 테러의 방법을 써서라도 침체된 항일의 기세를 높이고자 했다.
— 한국사 이야기 21 - 해방 그 날이 오면, 이이화
목숨을 걸었던 윤봉길의 폭탄 테러는 독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 초등학생이 가장 궁금해 하는 한국사 100장면, 오주영
독립운동 선상에서 테러는 무정부주의자나 급진과격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과거 테러활동의 용사들이 노선전환을 한 이후인 1930년대 초반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외곽에 애국단을 조직하여 세상을 진동시킨 두 차례의 테러활동을 감행했다.
— 대한민국 사(史)2, 한홍구
이봉창 의사의 개인적 테러는 단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이끄는 산하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 중딩고딩을 위한 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 김슬옹
김구 선생이 해방 이전에 일제에 대해 테러를 쓴 것은 구국의 혈성이 담긴 애국 행위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테러를 정치활동의 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문제연구소
위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김구의 항일활동을 테러 활동이라고 기술한 것은 위의 수많은 인용구에서 알 수 있듯 금성출판사 교과서 뿐만 아니라 진보나 자유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많은 저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이었으며 오히려 그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그런데 이외수나 진중권과 같은 지식인들이나 언론들이 저렇게 언급한 매체들을 비판한 적은 별로 없다.
결국 진영논리가 어느정도 겹쳐진 결과라는 것. 사실 김구의 요인 암살 행위 자체는 사전적 의미의 테러 행위가 맞고, 사회적 의미에서 따지자면 광복 이전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와 광복 이후 국내 정치인을 상대로 한 테러에 대한 관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광복 이전에 김산과 같은 인물은 테러리스트라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서술하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이 테러로 죽어가면서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의 경우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싫어했는데, 여기서 조봉암이 말한 테러리스트란 비난엔 "어떻게 동포를 살해하느냐"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김구의 경우에도 일본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에도 우익 진영에 몸담아 좌익, 우익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를 벌였으며, 자신과 정치적인 입장이 같지 않는 인물을 대상으로도 백색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단, 진보진영 측에서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백의사의 활동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좌익보다 우익인사들이 더 많이 희생되었다. 자세한건 백의사 항목 참조. 물론 우익 진영내에서도 배신자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 관점에서 보자면 얼마든지 테러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마냥 이상할건 없다. 당장 안창호계 온건 우파 국민당원이던 옥관빈 역시 비슷한 이유로 피살당했다. 다만 그런 것을 다 떠나 김구가 백의사와 접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직접 이들을 지휘하고 지시를 내렸다는 명확한 근거는 별로 없다.
이 논란은 학술적으로 연구된 김구라는 인물과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거두로서 존중받는 대중적 김구 사이의 이미지 괴리가 컸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도 볼 수 있다. 김구에 대한 평전이나 연구자료는 그의 행동을 '테러리즘'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별 거리낌이 없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대중들에게 각인된 그의 위상은 그러한 용어를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고 이 간극이 이슈화 되면서 용어 사용 논쟁으로 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6. 가족 관계
생전에 부인 최준례와의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지만 딸인 장녀(이름 미상), 김화경, 김은경은 둘 다 유년기에 요절해 사망했다. 나중에 태어난 아들 둘은 딸들에 비해 오래 살았지만, 장남 김인도 1945년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자녀들 중 그의 만년까지 생존한 유일한 차남 김신은 김구 생전에 아버지를 도와 크게 활약했고 이후로도 6대 공군참모총장으로 대한민국 공군의 창건에 기여를 하였으나 5.16 군사쿠데타에 협조를 한 전적이 있어 분명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 다만 당시 나라가 워낙 시궁창이었고 5.16이 사상자가 없었단 점에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크게 반대하지 않긴 했다. 이 때문에 현재 김구의 자손은 장남 김인이 남긴 유일한 딸이자 김구의 장손녀인 김효자 쪽을 제외하면 전부 김신의 가계다. 구체적인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증조부: 김영원(金榮元, 생몰년 미상)
조부: 김만묵(金萬默, ?~1888) - 조모: 장씨(생몰년 미상)
아버지: 김순영(金淳永, 1848~1901년 2월) -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1858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아내: 최준례(崔遵禮, 1889년 ~ 1924년 1월 1일)
장녀: 미상(1906년 ~ 1907년)
차녀: 김화경(金化慶, 1910년 ~ 1915년)
삼녀: 김은경(金恩慶, 1916년 ~ 1917년 2월)
장남: 입언 김인(立言 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장교, 중화민국 국민정부 국민혁명군 소교 역임. /큰며느리: 안미생(安美生, 1919년 ~ 2008년, 안중근의 조카)
손녀: 김효자(金孝子, 1943년 ~ ), 장남 김인의 딸.
외증손녀 : Janet
차남: 서언 김신(瑞言 金信, 1922년 9월 21일 ~ 2016년 5월 19일) 대한민국 공군 6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주 중화민국(대만) 대사,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백범기념관 관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역임. /작은며느리: 임윤연(林胤嬿,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독립운동가 임학준의 딸, 위암으로 사망.
손자: 김진(金振, 1949년 10월 30일 ~ )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 역임, (현) 광복회 자문위원장.
손자: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 주 상하이 총영사, 국가보훈처장 역임. /손자며느리: 이정희(1959년 ~ )
증손자: 김용만(金容萬, 1986년 8월 14일 ~) 제22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 하남시 을)
손자: 김휘(金揮, 1955년 ~ ) 나라기획 이사, 에이블리 대표 역임.
손녀: 김미(金美, 1956년~ ) /손녀사위: 김호연(金昊淵, 1955년~ ) 기업인 겸 전 국회의원, 빙그레 회장 역임.
사돈: 이후락(李厚洛, 1924년 2월 23일 ~ 2009년 10월 31일) 정치인,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現 국정원장),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 제10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역임.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기업인, 한화그룹 회장.
7. 어록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소련식 민주주의가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그르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진실로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남북의 친선을 촉진하면서, 우리 삼천만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원할 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8. 대중매체에서
1950년대만 해도 이승만 정부였기에 김구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작품은 금기시됐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퇴진한 후부터 활발해졌다.
8.1. 단독 작품
아아 백범 김구선생(1960): 중앙문화영화 및 태백영화 제작. 최금동 각본 / 전창근(1908~1973) 감독 작품으로, 전창근 감독 본인이 직접 백범 역을 맡았으며 김희조 작곡가가 음악 제작에 참여했다. 임화수가 자기 이미지 세탁을 위해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1973): 한립물산 제작. 조긍하 감독이 각본까지 맡은 작품으로, 원작은 TBC 장편 라디오 다큐멘터리극 <광복 20년>의 전반부이며 이영신 작가도 참여했다. 당대 대배우 박암이 백범을, 일반인 최용한이 본인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이승만을 각각 연기해 화제를 모았다.
백범일지(1989): MBC 특집드라마로, 김기팔 각본 / 고석만 연출 작품이며 한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중국 로케이션 촬영을 했던 작품이다.
김구(1995): 광복 50주년 기념 KBS 기획드라마.
백범김구와 상해임시정부(1999): 이동훈 작곡가가 만든 오페라며, 대본은 이종헌, 공동대본 겸 연출은 장수동, 합창지휘는 김진택 등이 각각 맡았다.
백범 김구(2010): 임진택 명창이 만든 판소리 작품.
8.2. 담당 배우/캐릭터
김구를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인 1960년 작 《아아 백범 김구선생》에선 감독 전창근이 직접 김구를 연기하였다. 전창근은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1968년 TBC 드라마 《조선총독부》와 1972년 KBS 《개화백경》, 1973년 《실화극장: 북위 38도》 등지에서도 백범이 등장했으나,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담당 배우는 불명이다.
1969년작 조긍하 감독 작품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배우 정민이 연기했다.
1970년대 당시 백범 역할로 임팩트를 선보인 배우가 박암인데, 1973년 조긍하 감독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서 김구 역으로 나왔다.
(박암이 김구 역으로 출연한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1979년 10월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선 배우 안병경이, 1980년 1월 '승자와 패자(3부작)' 편에선 황범식이 각각 연기했다.
2021년 기준으로 김구를 가장 많이 연기한 배우는 이영후다.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을 비롯해 1982년작 《거부실록》 '백산 안희제' 및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 1986년작 《그의 아내》, 1990년 KBS 실록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 2009년 국권피탈 10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자유인 이회영》 등지에서 각각 백범을 연기했다. 특히 《제1공화국》에선 백범의 말년을 다룬 파트에서 단시간 내에 그의 이미지를 창출했고, 담당 연출자 측은 신선함을 위해 덜 대중적이면서도 보다 닮은 사람으로 그를 찍었다고 한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백범을 맡을 당시의 이영후)
이영후에 버금가는 백범 전문 배우로는 이치우가 있다. 그는 국립극단원 시절 TBC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에서 백범의 젊은 시절 목소리를 맡기 시작하여 1985년 이전까지 연극 《이승만과 백범》, KBS1 8.15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1982)》 등지에 총 9번 나왔고, 이후 1985년작 KBS1 대하드라마 《새벽》과 국군의 날 37주년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 1994년 《다큐멘터리극장》 등지에서 동일 배역을 맡았다. 특히 《새벽》에선 실제 백범의 곰보자국을 활용해서 캐스팅했으나 단순한 외형만으로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다.
1984년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 1화에선 동학군 접주 시절의 모습이 나오는데, 배우 안대용이 연기했다.
1986년작 창극 《윤봉길 의사》에선 명창 조통달이 연기했다.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와 1990년작 《반민특위》에선 배우 김진태가 각각 맡았다. 그가 맡은 백범은 무한한 파워와 직설적인 부분을 강조했으며 이영후 본인이 '좋은 후배에게 물려주었다'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낙점되었지만 그리 자주 맡진 못했다. 결국 전술한 《여명의 그날》에서는 이영후가 복귀했다.
1992년작 MBC 특집드라마 《매헌 윤봉길》에선 원로배우 정욱이 맡기도 했다. 그때까지의 덩치가 있는 김구 역과는 달리 호리호리한 느낌이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1994년작 애니메이션 《초롱이의 옛날여행》에선 성우 홍시호가 목소리 연기를 했다.
1995년작 KBS 광복 50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청년 시절의 김구 역을 배우 김상중이 맡았고, 9회부터 장~노년의 김구 역은 조상건이 맡았다. 이후 그는 1998년작 연극 《천년의 수인》, 2008년작 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출연했다.
1998년작 연극 《아!정정화》에서는 배우 유영환이 연기했다.
1999년작 오페라 《백범김구와 상해임시정부》에선 성악가 김성길과 류현승, 김진섭이 각각 백범 역을 맡았다.
이응준 작가의 소설 《국가의 사생활》에선 너무 순수해서 이승만에게 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아나키스트》에서도 잠깐 등장하는데, 중국인 배우 리다오준이 연기했다. 주인공인 의열단원들과 우연찮게 어느 식당에서 마주친다. 그가 있는 줄도 모른 채 대놓고 임정 뒷담화를 늘어놓는 주인공들을 등지고 있던 김구는 결국 아주 불편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다 말고 문을 나선다. 나중에서야 큰형님 격인 한명곤이 "아까 나가신 양반이 백범이다."라고 조용히 알려주자 나머지 주인공들이 벙 찐 표정을 짓는 것이 백미.이후 창문에 돌을 던져 주인공들에게 일본군의 습격을 미리 알려준 뒤 퇴장.
2001년작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선 백범을 본뜬 '김대성'이란 가상인물이 있는데, 배우 조상건이 연기했다.
2004년 창작 뮤지컬 《청년 장준하》에선 배우 임동진이 연기했다.
2008년 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에서 배우 조상건이 백범을 모티브한 '김 선생'으로 나온다.
2010년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에선 왕기석 명창이 청년 시절을, 장년은 왕기철, 노년은 임진택이 각각 맡았다.
2012년작 KBS 특별기획 드라마 《각시탈》에 나오는 양백도 백범을 모티브로 했는데, 배우 김명곤이 연기했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는 김홍파가 맡았다.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에서는 조진웅이 김창수(김구) 역할을 맡았다. 치하포 사건 당시 김구의 살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내용이 있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9년작 MBC 특별기획 드라마 《이몽》에선 배우 유하복이 맡았고, 같은 해 방영된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에선 박훈이 연기했다.
- 이하 참고 자료: 《한국 TV 드라마의 성격 분장에 관한 연구》 - 김봉천 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 2001. p60~61.
8.3. 대체역사 소설에서
리첼렌의 대체역사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두 개의 태양'편에서, 미국 사절단의 배가 인천 부두에서 멀어져가는걸 바라보는 소년으로 등장한다. 신문에서 본 '인본', '자유', '민주'라는 낱말들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대한제국도 미국과 같은 강국이 되는 걸 꿈꾸게 된다. 후에 국익에 큰 손실을 입히고 공공의 적이 되어 해외로 도망치려는 이완용을 알아보고 뒤를 밟아 철길에서 밀어 처단한다. 직후 바로 경찰에 자수하고 체포되는데 이를 두고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논란이 일지만, 어차피 김구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대세인지라 법관들도 여론을 의식해 무거운 처벌을 내리기 어렵다는 걸 예상한 고종이 쿨하게 법대로 하라는 말만 하고 넘어간다. 이 세계에서는 현실의 박기서와 비슷한 평가를 받을 듯한데, 박기서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를 사적으로 처단한 사람이라 기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같은 작가가 다른 설정으로 쓴 대체역사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히틀러, 스탈린 뺨치는 냉혹한 독재자의 지배 하에서 만주를 지배하는 패권국 한국의 국가안보국 국장이 되어 만주인들에 대한 세뇌교육, 반체제 인사 암살, 중국인 대상으로 대량살상무기를 실험하는 731부대스러운 비밀 실험시설 운영 등을 전담하는 한국의 예조프가 되어 있다. 김구의 행적이 21세기 들어 소상히 알려지면서 젊은 층에서 늘어난 김구에 대한 반감을 반영한 듯.
역시 같은 작가가 새로 연재하는 대체역사소설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후 사쿠라다몬 의거가 벌어지기 이전으로 회귀, 미래에 자신의 고집으로 모처럼 독립한 조국이 두동강나는 꼴을 실시간으로 본 탓에 성격이 조금 유해져서 좌익과도 필요하다면 손을 잡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물론 여전히 자신은 바뀌지 않았다며, 좌익에게 자신을 의심하려면 얼마든지 의심하라고 선포하기까지. 하지만 이 덕분에 이 세계선의 역사가 크게 바뀌어 조선은 단순한 식민지에서 자치권을 지닌 자치령으로 사실상의 독립 직전 상태를 되찾게 된다. 게다가 독립으로 이어지는 독소조항까지 한일 대타협 조항에 숨겨놓으면서 독립의 준비까지 마친 상황.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이승만과 정치코드가 일치하여 이승만의 부하로 나오며 박헌영을 암살하고 해방후에 경찰청장이 되어 서울의 깡패들을 잡아들이며 극좌파들이 여운형을 암살하려 하고 봉기를 일으켰을 때 체포작전을 진두지휘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김창수로 나오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지않은 덕에 한국군에 입대하여 안중근, 안창호와 가까워져서 좌익과 우익을 절충한 코포라티즘 정치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공산주의의 행태를 보고는 보수화되어서 안창호보다 이승만하고 더 가까워진다.원산 노동쟁의가 대한 민본주의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생각해서 사건이 일어난 달인 9월을 상징해서 구(九)로 개명해서 원 역사와 의미는 다르지만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김창암으로 나오며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반상의 구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니 반드시 양반이 되어라"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상경하여 같은 황해도 해주 출신의 안인수 댁에서 식객으로 있으면서 고시를 준비한 끝에 당당히 형조 좌랑이 됐다. 안인수댁에서 머무는 동안 또래 안중근과 절친한 사이가 됐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옌시산과 함께 발터 모델과 만난다. 모델은 자신보다 훨씬 큰 키에 우람한 체격을 가진 것을 보고 정치인보다는 군이나 조직의 수장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후 연합군의 한반도 진공 때 함께 들어와 1943년 8월 15일 광복군 인사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광복을 선언한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전후 이시영 대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취임한다. 히틀러의 군국주의적 정책과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히틀러의 방한은 긍정적으로 여긴다. 이승만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8.4. 게임에서
2차대전 게임 Hearts of Iron IV의 대체역사 모드들
협상국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Kaiserreich에서는 미국의 몰락 이전부터 한국 독립에 관심없던 미국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이승만은 미국에 망명했다. 대신 독일제국의 지원을 받는 임정의 한국 독립당 지도자로 등장, 한국이 독립하면 첫 등장하는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나온다. 한국을 해방한 국가가 민주국가면 조병옥, 조소앙, 여운형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고 독재국가가 해방했다면 원래역사의 이승만 마냥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다.
레드플러드에서는 자유보수주의-고전적 자유주의지도자로 등장한다. 물론 실제 김구는 유교적이였고 민족보수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별 관련은 없다.
하츠오브코리아에서는 이승만을 대신해 민주주의 지도자로 세울 수 있다. 민주주의 루트는 김구 루트와 이승만 루트로 나뉘는데 이승만선이라는 요새를 짓고 짱박혀있다가 연합국에 가입하는게 전부인 이승만 루트와 달리 만주선제타격, 아시아 연합 창설 등 김구 루트는 활발한 외부 팽창이 가능하기에 더 선호된다.
9. 관련 단체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0. 여담
김구가 일본 순사 시험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일부 극우 세력의 날조가 있다. 이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1919년 안창호에게 임시정부 경무국장직을 제안받은 김구가 예전에 순사 시험 문제를 우연히 보고 답안지를 써냈으나 불합격했다는 일화를 말하며 자신은 경무국장을 맡을 자질이 부족하다고 사양한 것이다. 당연히 진짜 순사가 될 생각으로 시험에 응시한 게 아니다.
김구 선생이 조선족? 도넘는 중국의 한국 빼앗기 위키피디아 중문판에서 김구가 '조선족'이리고 표기됐다는 이유로, 중국이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시도했는데, 실제와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중국에선 현재 'Korean'을 조선족(朝鲜族)이라고 표기하고,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있는 조선족을 중국조선족(中国朝鲜族)이라고 부른다.조선족 페이지 위 중문판 문서는 중국 국적의 조선족만이 아니라 소위 'Korean'의 전반을 다루는 문서이고 사진으로 등장한 인물에는 먼 과거의 인물(세종대왕 등)도 있다. 따라서 위의 설명은 중국에 대한 억까에 가깝고, 그냥 해당 언론이 혐중 여론에 편승하여 내용을 왜곡해 기사를 쓴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아들 김신이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후손들은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손녀사위인 김호연 역시 공군 장교 출신이다. 여담으로 김신에게 '미래의 전쟁은 항공 전력이 우선'이라며 공군사관학교의 전신 격인 공군 군관학교 입학을 권유한 게 바로 김구다.
현행 화폐의 모델이 된 적이 있다. 1995년 발행된 광복 50주년 기념주화가 그것. 5000원화는 백범, 1만원화는 안중근 의사의 초상이 모델이 되었다.
고액권 예상 도안 출처
2007년 한국은행에서 오만원권 지폐와 함께 발행할 10만원 지폐의 모델로 백범을 선정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발행이 취소되면서 지폐 모델은 백지화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부 정책이나 한국은행 관례상 10만 원권이 발행되더라도 지폐 모델 선정작업을 재차 진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990년대 어느 코미디 프로에서 영화 넘버 3의 유명 장면을 패러디하면서 송강호 역할의 두목이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은 백범 선생님이다 얼마나 범죄를 많이 했으면 100범씩이나 되셨겠냐"고 하자 부하가 "그분은 전과자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입니다"라고 하자 내가 그리 말하면 그런거라고 대사를 하여 시청자들에게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물론 해당 드립 자체는 오래 전부터 농담으로 이어져 오던 것이긴 하다.
가명은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 초명은 창암·창수·구(龜)였다.
학생부터 노년층까지 전 연령대 막론하고 인지도가 굉장히 높은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백범일지> 1부 말미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에 감염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구의 생일은 양력 8월 29일로 경술국치와 날짜가 같다.
2000년대 이후 한류가 국제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각광받으면서 백범일지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가 주목을 받고 김구가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한류는 김구가 주장하는 '문화의 힘', 즉 소프트파워를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형태의 한류가 유행한다는 게시물 마다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 라는 드립이 댓글로 달리고 있는데, 이것의 변형으로 2024년 에는 잘자요 아가씨 같은 한류라고 하기 무엇한 컨텐츠에 대하여 김구 선생님 눈감으십시오 라는 드립도 유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최고의 권위를 가진 노벨상의 주인공으로 한국의 한강(소설가)이 아시아 여성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쾌거가 일어났다.
위인전이 존재하고 초등학생 부터 배워서 온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세종대왕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 등등 정도로 현세에 많은 대중들이 존경하는 유명 위인들 중 안경을 낀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라 할수 있다. 현대 에는 알이 동글동글하며주먹크기 만큼 큼직하게 커다랗고 태가 굶은 뿔태 안경을 김구 안경이라고도 부른다.
장경순의 증언에 따르면 김구의 할아버지가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강홍모의 할아버지의 머슴을 지냈었다고 한다. 한번은 김구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홍모의 할아버지의 소를 몰래 팔았는데 김구의 할아버지가 강홍모의 할아버지에게 소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강홍모의 할아버지가 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용서를 했다고 한다. 훗날 김구는 이 일을 기억하고 강홍모를 중국 중앙 군관학교에 추천을 해주었고, 육군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홍모는 김구의 아들인 김신의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장형 선생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가까워서 대학을 설립한다고 하자 임정 요인이 모두 모여서 지원하고 단국대학교라는 이름도 김구 선생이 직접 지어줄만큼 단국대와 인연이 깊다. 현재도 단국대는 백범통일연구소를 필두로 백범 관련 연구를 하고 있으며 내부에 김구 선생 동상이 있고 자녀들과도 긴밀하게 교류 중이다.
1946년 3월에 손양원 목사를 방문했다. 조선 후기 문인 이양연(李亮淵,1771~1853)의 <야설(野雪)>을 써주어 친필 휘호를 남겼다. 이후 1949년 4월 17자 <서울신문>에 손양원 목사의 선행과 대인배적 면모를 알리는 글을 게시했다.
"(전략) … 여수 교회의 손양원 목사의 사적을 듣고서 나는 그 분의 종교가다운 온정과 자비심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했다.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목사이다. 그는 무고한 동포들을 학살한 좌익 소아병자를 완전히 고쳐서 선량한 인간이 되게 하였다.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학살한 좌익 학생에게 온정과 원호의 손을 쥐어주면서 회유시킴으로써 다수의 좌익 사람들로 하여금 잔인한 파괴 행동을 버리고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도 손목사와 같은 아량과 포용성과 수완이 있다면 공산주의도 이길 수 있고 남북통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감정을 삼가고 이지를 발휘해야 한다."
랭킹스쿨에서 탈북자에게 던진 열 한 번째 질문은 '북한에서 가르치는 독립운동가'였는데, 질문 받은 이는 '위대한 품'(1986)이라는 영화를 이야기했다: 이 영화는 김구가 “황해도 신천에 과수원이나 하나 마련해주면 여생을 장군님에게 의탁하여 살겠다.”고 읍소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등 김구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마를 상당히 좋아하였다고한다. 거의 매주 신설동경마장에 왔다고 한다.
11. 관련 자료
KBS 일요스페셜: 백범 서거 50년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 1999. KBS1.
백범 김구 평전 - 김삼웅 저. 시대의창. 2004.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백범 김구(총 2편) - 2012. KBS1.
12. 관련 문서
백범일지
치하포 사건
고종황제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암살 사건
안두희
이승만
피 묻은 적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