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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태: 33. 요한. 요1:1-14
사람들은 저마다 불리워 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보다 더 많이 불리워 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별명이라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우리는 선생님들을 부를 땐 으레껏 별명을 부르면서 울분을 달랬지 않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 체육선생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 그리고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별명이 왕왕 이었습니다. 고함을 지르면 왕왕 또 짖는다라고 마구 놀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33) - 요한
우리는 마치 친구들의 별명을 부르는 것처럼, 우리들만이 통하는 또 다른 언어인 것처럼 즐거워하며 별명을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들이 저를 부를 땐 늘 "밥풀"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니며 자취를 할 때는 설거지하는 것을 밥하는 것 보다 좋아했고 또 제가 밥을 먹을 때 더러 밥풀을 얼굴에 붙이곤 했으니 그것이 별명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별명으로 불렸습니까? 아마도 여러분들을 지칭하던 그 별명을 지금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가 아니면 학창시절의 친구가 세상살이를 하느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던 그 옛날의 별명을 불러준다면 아마도 지나간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성경에도 별명이 붙여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호세아를 우리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의 길을 벗어나 잘못 행할 때 그는 그 백성을 위해서 눈물로 호소하고 경고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아모스를 "정의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불법과 타락이 넘치던 이스라엘 사회 속에 하나님은 공의로움으로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을 축복하실 것이고 결국엔 그 악인들을 징벌하실 것l라고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안드레의 형제 시몬에게는 별명을 붙여 주시는데 그것은베드로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즉 이는 반석이라는 뜻인데 그가 늘 듬직했고 또 장차 교회 안에서 반석과 같은 인물이 되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기록한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강조를 하였고 또 그의 인자한 성품과 다른 사람을 향한 따뜻한 배려의 마음이 어는 누구보다 뛰어 났기에 그렇게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원래부터 사랑의 사도라고 불림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매우 과격하고 급하고 충동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요한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실로 많은 부분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막3:17절에 보시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뢰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한 여름에 비가 올 때 면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을 말합니다. 우르릉 꽝! 우르릉 꽝! 엄청난 소리를 내면 즉시 억수 같은 소낙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뢰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뢰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한 징계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삼상12:17,18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우뢰를 보내사 그들을 징계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와 요한을 주님께서는 우뢰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의 별명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성격이 급하고 충동적이라는 이유에서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눅9:51- 보시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의 한 촌으로 지나가시려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요한이 주님!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저 사람들을 불로 멸망을 시켜버립시다 라는 아주 극단적인 말입니다. 이런 불같은 성격이기에 주님은 그들 형제를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성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는 사랑의 사도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나는 죽고 주님이 살아 계시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주안에서 성숙의 단계를 벗어나 숙성의 단계로 접어들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주님에게는 늘 함께 하였던 세 사람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늘 동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변화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특별히 불러내셔서 함께 기도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이 세 사람을 주님은 유독 가까이 하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편애를 하셔서 그들만 사랑하셨나?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이유는 이 세 사람의 성격이 모두 급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그는 익히 알려진 대로 매우 급한 사람이고 저돌적인 사람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그들도 역시 성격이 충동적이고 급한 성격의 사람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그런 불 같은 성격의 사람들이었기에 주님은 그들을 가까이 하신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해 봅니다.
아뭍튼 이 요한은 그런 충동적이고 급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의 성격이 바뀌었는데 너무나도 아름답고 영롱한 영혼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비밀을 보여 주시는데 그것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이론이며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말세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쉽게 깨달을 수 없는 귀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지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요3:16절이 해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요절입니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던 요한이 이제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것을 기록한 가장 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런 제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런 제자가 되기 위해서 참으로 먼 믿음의 길을 달려왔고 많은 인내로 기다려왔습니다. 주님은 이 요한을 무척 사랑하였습니다. 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러면 편애를 하셨다는 말씀인가? 사실 주님은 요한을 편애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되 특별히 더 사랑하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 없이 삼남매가 외롭게 살던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즐겨 찾으셨고 그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주님께서 친히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을 지칭할 때는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사로나 요한이 왜 주님께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뭐 특별난 것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더 주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을 더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왜 김 집사만 축복하시나? 왜 박 집사만 축복하시나?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 보다 주님을 더 철저히 믿고 신뢰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가 기록한 요한 복음을 통해서 믿음이라는 말을 98회나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요한복음의 결론을 19:35절에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 인줄 알고 너희도 믿게 하려 함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형편을 너무나도 환히 아는 사람이 어느 날 보니 나와는 상대가 안 되는 엄청난 신분의 사람이었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를 많은 성경학자들이 자매간이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이 사실이 맞는 것이라면 예수님과 요한은 사촌형제입니다. 여러분! 같은 동네에서 함께 뒹굴며 놀던 사촌 형이 어느 날 세례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어린양" 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 사실을 금방 인정하고 아! 당신은 정말 주님이십니다.어릴 때 함께 놀 때부터 당신은 무엇인가 달았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금방 주님으로 믿고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요한은 그것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처음이나 나중이나 똑같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주님에게 사랑을 받을 수가 있었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요한에게 십자가의 그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요19:26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는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 주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요한이 그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인들 왜 수많은 군중들이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던 요한의 성격입니다. 그는 한번 옳다고 믿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믿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어머니를 부탁 받을 수 있던 조건이었습니다. 요한에 관한 전설로 그가 에베소 교회를 목회 하는데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어서 기동을 못할 정도가 되었는데 설교를 부탁 받으면 그는 늘 똑 같은 설교 즉 "형제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를 하였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아니 왜 늘 똑같은 설교를 합니까? 라고 하면 그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것을 행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화평케 합니다. 이런 사랑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책을 많이 본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경험을 한다고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눈빛으로 이루어집니다.
아프리카의 주푸레 마을이라는 곳에서는 12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는데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한답니다. 그것은 12세가 된 남자아이들을 아버지들이 데리고 깊은 밀림 속으로 들어간답니다. 도저히 혼자서는 찾아 올 수 없는 깊고 깊은 밀림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한밤을 밀림 속에서 지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맹수들이 우르릉거리고 자칫 한발을 옮기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깜깜한 밤에 어린 아들들만 두고서 아버지들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의지하며 서로 용기를 주며 그 두려움을 참고 그 밤을 견딘답니다. 그 밤을 그들이 견디지 못하면 그는 그 부족에서는 용사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밤을 그 어린아이들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지내고 아침에 훤히 태양이 솟아오르면 그 어린아이들은 깜짝 놀란답니다. 왜 놀라는지 아십니까? 어젯밤에 자기들을 그 곳에 데려다 놓고 집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던 아버지들이 자기들을 중심으로 그 주위 나무에 올라가서 밤새껏 자기들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며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이 책을 많이 본다고 이루어집니까? 이런 사랑이 사회생활을 많이 한다고 이루어집니까?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러 나와야 합니다. 마음으로 통하는 감정이 있을 때 에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13:34절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리라" 하였습니다. 요한은 이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을 마음깊이 새겨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을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명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신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함. 바로 이것이 요한의 믿음을 성장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믿음이 적습니까? 우리는 왜 그토록 신앙생활에 힘이 없습니까? 왜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고 구약성경을 읽고 있지만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할 틈도 가지지 못한 채 세상살이에 매여 허둥지둥 바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리는 매일 기도하는 척은 하고 있지만 어쩌면 실제로는 기도 따로, 삶 따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나는 무슨 관계입니까?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요한은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요한은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머리로 이해되진 않습니다. 눈으로 깨달아지진 않습니다.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심령 깊은 곳에서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소아시아 여러 곳을 다니며 그는 전도를 하였고 노후에는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였는데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 때 밧모 섬에 귀양을 가서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으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인 폴리갑, 파피아스, 이그나티우스가 요한에게서 성경을 배웠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요한 처럼 성격이 급하고 무엇이든지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하고 정죄하고 판단을 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은혜로 변화되어야합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나눌 수 있는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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