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보도연맹원A는 아무것도 모르는가(3)
최근 학술지 투고 준비를 하면서 여주유족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천에는 부자 보도연맹원이 있고 1990년 ‘말’지에 본인이 직접 보도연맹원 피해자라고 말한 보도연맹원 A가 있는데 이천에는 유족회도 없고 진화위에 신청한 유족도 없다. 특히 석사학위논문 준비를 하면서 유족에 대한 정보를 알기 어려웠고 유족에 대한 안다고 해도 거의 이천에 살지 않았다. 연락이 닿은 경우는 이천이 아닌 서울이나 안성, 부천 등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이천에 유족회가 없어서 구술받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그쳤는데 학술지 준비를 하면서 전국 유족회 명단을 어렵게 구해 전국 분포도를 보니 경기도는 김포, 강화, 여주 정도이고 서울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유족회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피학살자의 유족이다. 그렇다면 보도연맹원으로 피해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처벌을 받았을텐데 다른 지역은 왜 유족회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역자 처벌에 대한 보도연맹원 A과의 면담을 다시 보게 되었다. 부역자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람을 말한다. 결국 점령지는 부역자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9·28서울 수복 후 추석 즈음에 국민보도연맹원 A는 부역자로 경찰에게 잡혀간다. 다행히 국민보도연맹원 A는 부역자 처벌은 면했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보도연맹원A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살려면 보도연맹원 A는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이천군 장호원에서 경찰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국민보도연맹원 A는 북한 측에게도 필요한 존재였다. 북한 입장에서는 국민보도연맹원 A부자의 ‘투쟁 경력’이 주민들을 조직하고 점령지 행정과 사업을 선동하는 데 필요하였다. 그는 학생임에도 수산리에서 인민위원회와 민청 등 여러 단체가 조직되기 전부터도 여러 사업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게 역할을 하기에 우리는 이천 설성면에 전쟁 나기 바로 전에 이사를 간 거예요. 이웃 사람 이름도 몰라. 그런데 “너의 아버지가 학살을 당했으니, 네가 동네일을 봐줘야 당국이 우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그리고 “너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니깐 마을 일을 책임져 달라.” 내가 사양을 하니깐 자기들이 다 할 테니깐 이름만 빌려달라고 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민청 위원장, 인민 위원회 위원장 뭐 이런 걸 맡았지.
깊은 고민 끝에 어렵게 시작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호응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는 어렵게 맡은 직함을 책임지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눈만 뜨고 일어나면 인민위원회, 민청 등의 사업에서부터 소년단 일까지, 누구 한 사람 자원자도 나서지 않는 답답한 의용군 사업에서 심지어 면 사업의 후원을 위한 식량이요 고추장, 된장까지 거둬내야 하는 엄청난 사업이었어.
그렇게 인민군 치하에서 중책을 맡았기때문에 결국 국군이 점령한 이천에서 추석 며칠 후 총을 멘 사람들에게 끌려 지서로 갔다. 그들은 한마디 묻지도 않고 양조장 지하실에 가둬두었다. 양조장 창고에는 수사계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군복을 입은 경찰들이 들락날락했지만 심문하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인민군 패잔병과 이 지역에서 부역한 자, 그리고 불심검문에 잡혀 온 다른 지역 사람 30여 명쯤이 있었다. 양조장과 이미 폐가가 된 지서의 사택, 금당리 옛 금융조합 창고에도 수백 명 혹은 수십 명이 잡혀 있었다고 하였다. 5~6일이 지나자,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사살이 되기도 하였다. 일부는 이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러던 중에 다행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이가 사십 된 사람들이 붙잡혀 들어오더라고 그러더니 둘러보면서 “국민보도연맹원 A씨가 누구냐”고 물었어. 나라고 일어니깐 옆에 와 앉더니 “국민보도연맹원 A 이름만 들었지 첨 보는 구만. 당신은 죽음은 면했어. 자기가 붙잡혀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남 순경이 와서 경례 하고 상관에게 보고하더래. 그러면서 “국민보도연맹원 A는 전쟁서 나쁜 짓이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 그럼 C급으로 해 놔라. C급인데 설마 죽이겠소.” 그러니깐 그러더니 한 20일 양조장 지하실에 갇혀있었는데 얼마 후 나오라고 해서 40명 중 10여 명을 불러내더니 같이 가라고 했어. 그리고 그때 남은 모든 사람이 30명이 넘었는데 그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돌아오지 못했어.
그는 그 소리를 듣고 긍정적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아도 “그놈 나쁜 놈이니 죽여야 한다.”라고 나설 사람은 없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10월 24일 밤 인민 위원장과 면당 위원장, 분주 서장, 농민위원회 위원장 등 다섯 사람이 불러나갔다. 경찰은 이들을 지서 앞 둑에서 총살했다. 불과 50~60m의 거리에서 연발의 총소리가 났다. 그는 누군가 경찰에 불러나가면서 “죽으러 가는 거면 막걸리나 한 사발 들이켰으면” 하던 말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다.
보도연맹원 A는 풀려났다. 그 후 보도연맹원 A는 1950년 겨울 국민방위군으로 차출되어 입대한 후 투서 때문에 1952년 대구 육군형무소에서 이적 죄목으로 3년을 선고받았으나 인권 투쟁을 전개하여 의병 집행 정지의 계기로 1년 만에 출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