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 빛깔의 보름
손톱을 깎았다
아버지 기일 날 묻어뒀던 꽃술을 꺼냈다
손가락에 동여매 주던 봉숭아꽃 같은 빛깔의
보름,
그때, 손가락마다 보름달이 뜰 거라고, 달이 뜨면 희소식이 올 거라고
아버지 술 냄새가 여름밤의 은하수처럼 엄마의 빈 자리마다 꽉 차 있었다
골목에 아이들이 흩어지고 내가 가리키던 북극성은 손끝에서 지고
손톱 속 보름달이 뜨기도 전에 보름
보름은 가고
화단에 봉숭아꽃 돌아와 피었다
빈집 가득, 저녁노을이 꽃술 냄새처럼 내려 앉았다
바람 멈춘 여름밤이면 뒤척임이 길어
봉숭아 꽃물 손끝에 물들 때까지,
삼베 이불 한 귀퉁이에 봉숭아 꽃물이 들었다
엄마 없이 찾아온 첫 달거리처럼
한 그루의 집
푸른 잎들이 입으로 진화하는 식물성의 수다
목에서 시작된 나는 목을 벗어날 수 없는 영어다
물만으로 응집할 수 없는
작은 알갱이 같은 물음이 가득한 잎
1할의 흔들림을 반복하여 쌓아 올린 입들
무로 돌아간 당신처럼
목에서 몫까지 뻗고 뻗으며 날마다 수런거림은 커지고
바람이나 바램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진짜 거짓말처럼 답 없는
나는
타다 남은 숯이거나 여타의 먼지로 흩어진대도
시작과 끝과 이설이 한 몸이라는 소문처럼
목에서 유래한 1할의 몫이다
나는,
목에서 목을 이어 서까래를 올리듯
다섯 개의 목을 기둥으로 세운 한 그루의 집
포도를 먹다
한 번의 입맞춤으론 미흡하지
쉽게 끝낼 수 없는 관계야
쪼옥 빨아 살짝 깨물어 봐!
입 안 가득 번지는
가끔은 굴꺽 삼키고 싶은
네 입술 네 혀
통째로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릴 수 없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너
손에 벌겋게 묻어나는 핏물
네 상처였어
내 허물이었어
함부로 뱉어내
바닥에 흩어진 씨앗들
입술이 부르트도록
진한 연애를 할까
서툰 결혼을 할까
김혁분
충남 보령 출생
2007년 <<애지>>로 등단
시집<<목욕탕에는 국어사전이 없다>>
*시의 일부에서 "꽃물, 입들, 핏물"로 파생되는 여성성을 통해
얼룩진 여성의 생애를 조밀하게 추적해낸다.
"드라이 플라워,토네이도, 천 일 동안 비가 내렸다" 등의 작품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