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명- 한국사 특강
저- 설민석
출-휴먼큐브(문학동네)2017.3.15. 409쪽
독정-2019년 2월 17일
· 단군에는 제사장,, 무당이라는 듯이 있고, 왕검은 정치 지도자, 무리 우두머리라는 뜻이 있어 단군왕검은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는 지도자를 가리킨다. 대통령이 정치를 하다가 주일에 교회나 절에 가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형태다.
중국선국신화는 거인이 1만 8000년 동안 자고 일어나 세상을 쭉 밀어내면서 윗부분은 하늘, 아래는 땅이 된다. 그 거리가 9만 리. 거인이 죽으면서 한숨을 쉬는ㅁ에 그 한숨이 바람, 구름이 되고 죽을 때 지른 비명은 벼락, 두 눈은 태양과 달, 몸의 뼈는 산맥, 혈관은 하천, 머리카락은 초목. 하늘을 받치면서 흘린 땀이 비와 이슬이 되었다.
· 삼천 궁녀란 숫자로 굉장히 많다는 상징이다. 낙화암 궁터는 궁년 3000명이 살 터가 없고 협소하다. 또 궁녀라면 궁에 살아야지. 궁녀 수가 최대 600명이라 전하는데 성군을 폭도도 아닌 황음무도한 군주로 둔갑시킨 거다.
·사자성어로 兎(토)死(사)拘(구)烹(팽)이란 말- 사냥 갈 때 데려간 개, 사냥 끝나면 필요 없어 개를 삶아 먹어버린다는 뜻. 왕이 될 때 중추역할하건 사람일수록 왕이 되고 나면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라며 심복 한신을 처단했던 일화에서 나왔다.
·일본 인물 세 사람 비교-울지 않는 새를 본
오다 노부나가는 “새를 죽여버려라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는 처단하는 성격
도쿠가와 이에야스-새가 울 때까지 기다려라-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때를 기다리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 새를 울게 하라고 했을 거다.
왕건의 아내응 스룸 아홉명.-버들잎을 물 바가지에 띄워주는 여인 말-마시다 체할까봐 그랬다. 이에 감동한 왕건이 나주 호족의 딸인 그녀와 결혼한다.
· 극비리에 진행된 한글 창제 프로젝트
세종은 비밀리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최만리가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한 상소문
① 중국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 다른 이질적 소리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 에 부끄러운 일이다.
②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민족은 몽골, 여진, 왜 등 하나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③ 한글은 이두보다 더 비속하고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표현된 중국 높은 학문과 멀어져 우리 문화 수준을 떨어뜨릴 것이다.
④ 훈민정음이 억울한 송사에 휘말리는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
이런 반대 때문에 세종은 1437년 각종 대소사를 결정하는 서무 결재권까지 아들 세자에게 넘여 왕의 업무를 대폭 줄인다. 신하가 궁금해 묻자 몸이 아파서라고 한다. 실제 세종은 당시 당뇨를 앓고 있긴 했으나 나이는 마흔 정도. 결론은 한글 창제를 단독으로 했고 본격적로 집중한 시기는 1437년 직후부터라 여겨진다. 그 이후 ‘ㅅㅎ세종실로’을 보면 세종이 언어와 관련한 자료를 모았다는 내용이 있다.
‘주자소에 명하여 ’국어‘’음의‘를 펴내게 하다.-세종실록 29권. 22년 6월 26일.
다수 백성이 알지 못하는 한자를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이 양반들에게는 권위로 작용했다. 양반들은 이런 상황에서 백성이 글을 알게 되면 서적을 접하게 될 것이고 지식이 깊어 함께 뜻을 나눈다면 힘이 커질 것을 우려. 양반층의 특권이 사라질 걸 두려워한 거다. 세종은 글을 알고 모름에 따라 백성이 억압받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한글을 창제,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적극지지 인물은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 집현전 7학사다.
·윤봉길 의사의 유서
고향에 계신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와 내 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선택했습니다.
100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죽음을 택한 단 한 번의 기회, 바로 조국을 위한 순간이었다. 분연히 일어섰던 삶을 떨쳐버린 용기와 결의!
·혁명과 쿠데타의 차이
혁명- 민중 다수가 원하는 변화로 민중이나 국민이 주도하는 아래에서의 변화
쿠데타-무력에 의한 정권 교체
1388 정변의 시작-이성계 마흔 두 사 ㄹ 때 고려 공민왕이 죽고 그의 아들 우왕이 왕위에 올랐다.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몰락하고 한족이 중심이 된 명나라가 세력을 키우는 과정에 명나라에 의해 권력을 잃을세라 고려 권문세족들이 고려를 방문한 명나라 사신을 죽였다. 이에 분노한 명나라는 고려 영토의 일부를 내놓으라는 요구. 명나라가 원한 곳은 철령이북 지역. 이곳은 원래 고려 영초가 아니었다가 공민왕 대에 원나라가 고려를 통치하기 위해 성치한 기관인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탈환하고 차지한 땅이었다. 명나라는 이 지역이 본래 원나라 영토였고, 원나라 세력을 약화한 것이 자신들이니 이 땅 역시 ㅊ파지할 명분이 있다고 주장.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국정을 잡은 최영은 명나라 요구를 거절.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자고 왕에게 건의. 최영과 달리 이성계는 현실적 전력 차이를 들어 반대. 그 당시 고려 총 병력은 5만 명 내외로 중국 대륙 공략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 하지만 상관 실세 최영을 거스를 수 없어 이성계는 출정하나 요동지역 압록강 지역에 도착. 장마철이라 폭우에 강물이 불어 군대가 건널 수 없자 압록강 하류 위화도 섬 앞에서 군댈ㄹ 멈추고 우왕에게 편지를 쓴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사불가론 적어 보낸 것
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② 농본기인 여름에 출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③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허를 노릴 염려가 있다
④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전염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편지를 본 최영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① 명나라 역시 작게 시작한 나라이며 처음부터 큰 국가로 성립된 나라는 없다. 당시 명나라는 신흥국으로 아직 내부 정돈이 되지 않았고 아무리 무너진 원나라라 하나 몽골 대초원엔 아직 그 세력이 건재한 채 명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명은 요동에 군사를 보낼 여력이 엀을 거라 승산이 있다.
② 여름의 불리함은 명나라나 고려 모두 동일 작용이며 요동은 땅이 기름진 군랸 등을 확보하기 어렵지 않다.
③ 왜구의 약탈에 대해선 당시 전국시대였던 일본은 자기들끼리 싸우기 바쁘고 약탈이 일어나더라도 소규모로 해안 대대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최영 자신이 나서서 남쪽에 주둔하는 병력으로 막으면 충분하다
④활을 무기로 쓸 수 없는 건 명나라도 같고 오히려 중국군은 예로부터 장마철 전투를 싫어해 우리가 진격하면 수월한 싸움이 가능하다
그에 이성계는 최영 무리를 몰아내고정권을 뒤집자는 생각으로 위화도회군을 한다. 최영을 부정축재 죄목으로 귀양 보냈다가 두 달 만에 죽인다.
“만약 내가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성계는 최영 무덤에 관리까지 두어 열심히 풀을 심었으나 풀이 자라지 않았다. 풀이 족족 말라 죽고 흙으로만 벌겋게 덮였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회장이 나서 경기도 고양 최영 무덥 주변에 조경을 해서 차차 풀이 무성해졌다. 이제 그의 한이 풀렸는 걸까?
·조선조에는 음향오행설에 기초한 왕씨들을 불안하게 했던 소문이 있다. 세상을 이루는 기초 원소인 흙, 나무, 물, 불, 쇠는 서로 상극 관계다. 흙은 나무에 양분을 빼앗기는 형국이지만 물을 흡수. 그런데 물은 불을 끄므로 물보다는 강하나 불은 쇠를 녹인다. 쇠는 도기를 만들어 나무를 치므로 나무를 이긴다. 이렇게 어느 한 원소가 절대 강하지 않고 서로 물린다는 이론이 음향오행설이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방법이 금씨 발음을 김씨로 바꾸는 것이고 오늘날에 이어진다. 한자 영향권 아래 있던 조선이 건국 초기 민감하게 겪었던 우여곡절이다. 정권을 쟁취할 때는 누구보다 큰 신뢰를 받지만 쟁취 후에는 최고 권력자 못지않은 위세를 지니기에 비극 최후를 맞는다. 무학대사는 정도전만큼 큰 공을 세웠으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조선이 유교 국가의 길을 걸으며 불교를 배척해도 반대하지 않았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를 갈아엎은 조선은 불교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 이념이 필요했고. 그 중심에 유교가 있었다. 그런 정황을 ㅈ벙확히 파악하고 받아들인 이가 무학대사다. 조선 건설에 노년을 바친 대사는 추후 조용히 물러나 수행에 전념한 유일 개국공신이다. 금강산에서 78세로 평화롭게 입적했다.
· 임진왜란 후 명나라 군인이 술을 먹고 가다 길 가운데 구토하면 굶주린 백성이 한꺼번에 달려와 머리를 땅에 박고 핥아먹었는데 약해서 힘이 없는 사람은 밀려나 눈물을 흘렸다. -조경남 <난중잡록>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를 먹으며 서로 잡아먹었단다.
일본 병사들은 베언ㄴ 조선인의 코를 담아 피투성이가 된 바구니를 허리춤에 달고 싸웠다. 왜군 부대장은 이를 모아 썩지 않게 소금, 식초에 절여 나무통에 1000개씩 넣어 일본으로 보냈다. 베어진 코가 일본에 도착하면 히데요시는 그 수를 확인하여 코 영수증을 발금해 무사들에게 보냈다.-강항<간양록> ㅈ비금도 일본 교토에는 耳(이)塚(총)-코무덤이라 하여 임진왜란 다시 조선에서 배어 간 코와 귀를 묻은 무덤이 있다. 원래 코무덤이라했으니 지나치게 야만적이라 하여 귀 무덤이라 불린다. 무덤 안내문에는 “조선국 남녀의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묻었다.”고 쓰여 있다.
만세운동의 배경
일제에 국권이 빼앗긴 지 10년째 되던 해. 1918년 1차세계대전이 ㄲ릍나고 승전국들은 또다 시 벌어질 전쟁을 방지할 새 국제 질서를 고민하고 있었다. 1919년 1ᅟᅯᆯ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 대통령 월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1차대전 원인이 강대국들이 무분별하게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이었음을 지적, 이런 식민주의를 버리고 약소민족이 자립할 수 있게 유럽 열강으로부터 해방하자는 거였다. 이 약소민족에 우리 한민족이 포함되었다. 이 흐름을 타고 1919년 2월 8일 동경 YMCA 화관에서 와세다 대학을 중심으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만세 운동을 벌인다. 이 운동은 나중에ㅔ2.8 독립선언이라고 명명된다. 이 선언문을 쓴 사람이 이광수다. 만세운동 이전인 1월 중순 송계백학생이 <2.8독립선언문>초안을 숨겨 조선에 들어온다. 당시 온몸 수색 검문에 비단 수건을 돌돌 말아 학생이 쓰던 사각모 챙 속에 숨겨 들어왔다. 송계백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 중앙학교 교사로 있던 현상윤을 찾아가 초안을 보이며 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린다. 이에 감동한 현상윤은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친구 최남선에게 알려 최린을 찾아간다. 최린이 최종적으로 동학의 제 3대 교주이자 민족대표였던 손병희에게 전달한다. 이를 본 손병희는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에서도 어린 학생들이 저렇게 독립운동을 준비하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하며 국네 독립운동을 논한다. 결국 손병희와 최남선 등이 뜻을 모아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쓰고, 당시 보성중학교 교내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선언문과 태극기를 인쇄해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 평화 시위로 조선이 독립하고자 하는 걸 전 세계에 보이기 위함이었다. 일본의 무단통치 시대라 세 명만 모여도 헌병이 잡아가고 집회, 결사의 ㅂ자유가 없었기에 모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유일하게 합법적인 모임은 학교와 교회뿐.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생과 종교인이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중심 천도교 15명. 이승훈 중심 기독교 16명, 한용운과 백용성 2명이 참석한 불교 지도가 까지 합쳐 총 33명이다.
3월 1일자로 정해진 것은 민족 대표 33인 회의 결과다. 1919년 1월 21일 조선의 임금이었던 고종이 사람. 황제의 장례를 치르기 윟 전국 단위로 사람이 몰려들었다. 3월 3일, 안식을을 거삿날로 잡자는 의견에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 주장으로 3월 2일로 정하려는데 일요일이었던지라 안식일을 피해야 한다는 기곡교계의 주장이 있어 3월 1일 토요일로 정했고 장소는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종로의 탑골공원으로 정했다. 3월 1일 정오에 대표들은 탑골공원으로 가다가 방향을 돌려 인근 고급 요리주점 태화관으로 간다. 일행 중 한 사람인 최린이 태화관 사장 안순환을 시켜 총독부에 전화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독립선언식을 한후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한다. 일종의 자수다. 일본 경찰이 즉각 80여 명의 경찰대를 파견해 독립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후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스스로 일본 경찰에 연행된다. 엉뚱한 행동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시작도 못하고 무산될 위기에 학생들이 주도하여 상인과 노동자가 합류하면서 중소 도시로 번지고 뒤이어 농민들까지 가세하여 무장투쟁으로 발전한다. 당시 추정 인구 1700만 명 중 총 200만 여 며이 일본 군경에 살해당한 사람은 7500여 명, 부상자 1만 6000여명. 체포 4만 7천 명, 헐리고 불탄 민가 720여 호, 교회가 50여 개소, 학교가 2개소다. 이후 국내 뿐 아니라 일본, 만주, 연해주, 미주 등 해외 곳곳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4월 15일 일몬 군경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에서 마을 사람 30여 명을 교회로 불러 집중 사격을 퍼부어 집중 살해했다.
3.1운동에 충격 받은 일본은 힘으로 조선을 통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민족정신을 현혹하는 문화통치로 방향을 바꾼다. 또한 3.1 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이나 국외 무장투쟁 활성화에 직간접 영향을 끼쳤고 나라 바깥으로 당시 일본의 위협을 느끼던 중국, 영국 신민 지배에 있던 인도까지 그 정신이 전해진다. 중국의 5.4운동이나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은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사건이다. 이런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는 어린 학생들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다. 3.1운동이 폭발하던 그 순간에 민족대표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이제까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2.8독립선어,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 항일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감당해온 건 모두 학생이었다. 젊은이의 힘이 우리나라 역사를 이끌어온 것이다. 그들이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를 광복으로 이끌고 민주화를 이뤄낸 것이다. 그들의 나이가 아니라 스스로를 조국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민족을 위해 몸을 던져 뛰어들 수 있었던 열정이었다. 나이가 어린다거나 너무 많다는 이유로, 그것은 어른들이, 아니면 젊은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회피하고 눈감아버린 적은 없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이라면 주저 말고 용기를 내자. 모두가 망설일 때 단상 위로 띄어올라가 ‘독립선언서’를 읽던 그 이름 모를 학생말이다.
·북한이 호전적인 이유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김신조 일당이 넘어왔을 때 겨울이라 눈 위에 발자국이 남을 것을 생각해 일렬로 이동하면서 맨 뒤 두 명이 소나무 가지로 계속 발자국을 지우면서 이동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치명적 실수는 우씨 형제라는 나무꾼을 만난다. 북한군은 남한 군복을 입고 말투를 배우긴 했지만 어색한 느낌. 이들 형제를 반나절 붙잡아 두지만 시체를 묻기 어려워서고 또 홀어머니를 모신다는 말에 동정심에 북한군이 마음이 약해졌다. 우씨 형제가 풀려나 가족 의논 끝에 경찰에 신고했고 우리 군은 철통같은 경비 태세로 돌아선다. 막판에 이들은 북악산의 청와대로 가야하는 길을 북한산으로 가 청와대 공격 날자가 바뀌고 도로로 내려온다. 특수부대는 결국 사복으로 갈아입고 청와대까지 걸어가려다 세검정깨 지하문에서 검문에 걸려 방첩대로 한다. 종로경찰서장이 직접 나타나 검문하며 귀대중인 방첩대라는 말에 “나를 모르는 방첩대원이 어디 있느냐.” 추궁에 경찰서장 최규식을 사살하고 총격전을 벌인다. 지나가던 버가 수류탄을 맞아 시민들이 죽고 다친다. 이 전추에서 서른 한 명의 특수부대는 스물 여덟 명이 죽고 두 명은 북으로 도주, 나머지 한 명이 김신조로 항복. 1.2사태의 세세 과정이 모두 밝혀진 것도 김신조의 증언 덕. 김두환이 당시 서울을 방어하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인데 청와대 주변 경비가 허술하다고 판단,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에 박격포를 설치한 몇 개월 뒤에 북한 특수부대가 잠입했다. 그는 특수부대가 검문에 걸려 총격전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이 박격포로 조명탄을 쏘아 터뜨린다. 조명탄은 밤새도록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밝혀 북한군을 소탕하는 데 일조. 혼비백산하여 김신조가 “조명탄이 터져서 포위된 줄 알고, 저항하거나 도망갈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문세광이라는 간첩에게 권총 저격을 받지만 육영수 여사가 맞는다. 서거 날 하늘이 짙은 노을로 그 슬픔이 하늘까지 번졌다.
2차 핵 위기, 조시부시는 취임하며 북한 김정일을 못된 아이 라하자 김정일은 부시를 몹쓸 자식이라며 2001년 9월 11 테러 벌어진다. 북한은 인공위성을 띄운다는 핑계로 미사일 실험을 계속. 남북이 대치하는 긴장 관계가 깨어지면 군비 경쟁이 사라지면서 세계 최대의 군수물자 수춝국인 미국은 손해를 본다고 생각. 주변 아시아 국가들은 남북이 통일되어 강대국으로 발전하면 여러모로 자신들이 국력에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측할거니까. 북한이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거 식량난까지 겪고 있다. 핵 없는 북한은 아무 힘도 없고 어떤 영향력도 옶다. 특히 많은 불안 요인에 노출되어 있는 김정은 입장으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않으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 북한을 어떻게 살펴야 할까? 북한을 악당이라 이름 붙이면 악당이 되고 파트너로 부르면 파트너가 된다. 같은 민족으로 동반 성장하며 대등한 관계로 자리 잡아야 한다. 하나가 되려면 서로 자주 보고 만나며 익숙해져야 한다. 무조건 적으로 규정할 때 전쟁 위기가 고조된다. 조이고 풀어주는 탄력적 대처가 필수다. 남북 관계란 머나먼 역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현실에서 마주하는 당면 과제다. 넓은 마음으로 멀리 내다보는 관점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힘써야 한다.-남희와 북돌이, 친구 스윗, 핵과자
·불상의 표정은 모나리자의 표정만큼이나 보는 이에게 묘한 느낌을 준다. 석굴암 본존불은 어깨 깡패 모습이다.
알렉산드로스가 대제국을 건설할 당시 정복한 도시에 그리스인을 이주시켜 그리스 문하를 전파하는데 이때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된다. 이로 인해 인도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와 인도 불교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미술 양식이 간다라 미술이 된다. 간다라미술은 대승불교와 함께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으로까지 전해진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자나 뱀이 죽음의 전령을 의미한다. 우리의 절임 배추가 일본에서 들어온 고춧가루를 만나 한국 대표 음식 김치를 만들 듯 신라 자기 기술ㅇ에 중국 송나라의 자기 기술이 더해 고려청자가 탄생한다. 우리 전통 문화유산 속에는 과거 문화 교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불상이 목에 십자가를 단 중국 훈춘에서 출토된 발해 삼존불이다.
·최초의 불상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하는데 삼국시대에 불교, 도교, 유교가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는 왕실과 귀족 중심이었다. 불교를 왕즉불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내세우며 불교를 신분제와 연결. 평민이 이승에서 덕을 쌓아 죽은 후 환생 하면 귀족이 되고 덕 땋은 귀족은 다음 생에 왕이 된다는 식이었다. 삼국시대 불상은 부처나 보살이 은은한 미소를 짓거나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많다. 서산미마애삼존불, 경주 배리 석불입상은 미소- 미륵보살반가상은 생각에 잠겼다.
·오래된 절이나 박물관에 가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지어진 탑을 만난다. 토속 신에게 비는 백성이 쌓아올린 돌탑도 있고 유서 깊은 탑이라 하면 불공드리거나 법력 높은 스님의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불탑인 승탑이 있다. 불교에선 홀수 층의 탑만 만드는데, 10은 불교적 관점에서 홀수로 인식해 십층 탑도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아버지 문무왕으로부터 통일신라를 물려받은 신문왕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로 지었다. 김대성은 전생을 기억해 과거 부모를 알고 후일 신라 재상이 되어 벼슬에 물려난 뒤 재산을 시주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짓는다. 다보탑은 10원짜리 동정 그림. 탑 아랫부분에 사자상이 네 마리 있다 한 마리는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나머지는 종적 감춤. 일본 어딘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남은 한 마리 역시 안면부가 훼손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데 이 상처 덕분에 자리를 지키고 있어 다행이다.
학은 500원 동전-천연기념물 학은 장수와 평화 상징. 1998년엔 동전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어 귀한 동전이다.
팔만 대장경-
소품종 대량생산이 목판인쇄의 특징.
만드는 데 동원된 인원이 왕족부터 평면 합쳐 50만명. 당시 고려 인구의 20%. 16년 동안 만듦. 모두 일는데 하루 8시간씩 읽어도 30년이 걸린다. 대장경이란 석가가 45년 동안 설법한 말씀 새긴 불경이다.
·역사는 과거를 알려줌으로써 미래를 판단할 수 있게 한다.
·어른들이 세배하는 아랫사람에게 덕담을 건네는데 반드시 과거 시제로 말해야 한다. “올해 합격을 축하한다.” 등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말하며 한해의 축복을 빌어주는 멋들어진 풍속이다.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민중은 문화생활을 누릴 여유가 생겨 <춘향전>같은 한글소설이 유행, 큰 시장을 중심으로 양반을 비판, 조롱하는 산대놀이 문화도 발할. 그림도 기존에 양반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미술이 서민 계층으로 옮겨와 서님의 삶을 담아내는 작품이 시작됨.
·김홍도는 훤칠하고 풍채가 아름다우며 마음 씀씀이도 크고 넓어 속세 사람 같지 않아 신선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홍도<점심> 그림에는 아무 것도 안 먹고 있는 두 존재가 있다. 개와 젖먹이는 어머니다. 식사가 끝나면 개는 먹거리가 생길 터인데 어머니는 남들이 다 밥을 먹을 때에도 아이에게 젖만 물리고 있다. 어머니란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주는 마음 울컥해지는 그림이다. 김홍도 그림에는 배경이 없는 게 특징이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삶에 집중.
신윤복 그림 <단오풍정> 가체라고 하여 남의 머리를 가져다 붙이는 양반집 여자들의 헤어스타일이 있는데가 가체가 크면 클수록 위세가 큰 것으로 인정받았다.
· 기린- 봉황처럼 수컷이 기, 암컷이 린이라서 기린이다. 용이 암컷 말고 교미해 낳은 동물이다. <기린도>를 보면 용 머리와 말 몸통이 합쳐진 느낌이다. 머리 위엔 긴 뿔이 나있다. 마치 서양 전설 유니콘같다. 유니콘이 사자 사냥하는 무서운 존재라면 기린은 온순하다. 기린은 사람을 해히지 않는 덕이 있다 하여 인수라 부른다. 촉망받는 젊은이를 유망주-기린아라 부른 것이 여기서 유래했다.
·해치- 무시무시한 뿔 달리고 송곳니가 날카롭게 돋았고 온몸은 동전 모양의 비늘로 덮여 있고 다리네 불꽃 모양의갈기가 있다. 선악을 구별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능력이 있다 하여 법과 정의를 상징한다. 해치는 분란이 생긴 현장을 보면 어긋난 행동을 한 사람을 골라내 뿔로 들이받고 뿔로 공격한 후 먹어치워 버린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의 상징으로 세워져 있었고 판관들도 해치 무늬 수놓은 관복을 입고 두건을 머리에 썼다. 오늘날도 국회의사당과 대검찰청 앞에 해치상이 있다. 석상은 사람을 노려보기 위해서 약간 고개를 돌려 있다. 해치는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잘잘못을 판단하는 동물로 탐관오리나 나쁜 괸리 들이 뜨끔하도록 의도적으로 노려보게끔 만들었다.
· 경복궁 광화문 앞에 해치 서 있는 이유
해치는 물에 살기 때문에 불을 막아준다 믿는다. 화재 막는 의미로 부엌에도 걸어두었다. 화재 잦았던 경복궁의 경우, 해치의 기운을 빌리기 위해 궁궐 앞에 해치상을 세워두기도 했다. 조선 건국 때 관악산이 화기를 받는다는 반대 의견이 있어 관악산을 마주하는 정남쪽으로 큰문을 세워 화기에 정면으로 대응하게 했는데 그게 숭례문(남대문)이다. 조선시대 현판은 가로로 제작했는데 숭례문 현판만 세로이다. 세로 현판이 관악산 화기를 내리찍듯이 눌러 먹아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숭례문 옆에 연못을 파 화기 진압하려 했고 청계천 물길을 터서 물의 기운을 확충했다. 청계천에서 광화문 오는 직선 길을 우회하여 굽어지게 냈는데 불기운이 곧장 오지 못하게 하려고서다. 경복궁 입구인 광화문에 해치상을 두었다.
<오리가 있는 연화도> 오리는 한쪽이 죽어도 절대 다른 짝을 만나지 않아 영원한 인연을 상징한다. 새끼를 잘 돌보는 특징이 있어 가정의 평화를 의기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