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9장
1. 겸손의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1-17)
오늘 본문에는 여러 나라가 등장합니다. 하드락 땅과 다메섹이 나오고, 하맛과 두로와 시몬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스글론과 가사와 에그론, 아스돗이라는 나라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이방 나라가 언급되면서, 동일하게 멸망에 대한 경고가 주어집니다.
이방 나라이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단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멸망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이방 나라이기 때문에 멸망을 받는다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이냐라는 기준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방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은, 하나님이 택한 자 외의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이라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다니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이라는 뜻도 아니란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이런 기준으로 구분 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구원은 민족에 대한 구원이 될 것이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 대한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의 길은 이스라엘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교회를 다니는 것에 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기독교라 이름하기 위한 명분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이방인의 의미는 삶의 방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두로와 시돈을 언급하면서, 그들을 매우 지혜롭다고 합니다. 두로와 시돈의 지혜는 3절에서 언급한 대로, 자기를 위해 요새를 건축하는 것이고,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아 놓는 것입니다.
요새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울타리입니다. 은과 금 또한 세상에서는 강력한 힘으로 여김 받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지혜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고, 힘이 되는 은과 금을 확보하여,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이방인의 삶의 방식이고, 따라서 누구든 이러한 삶의 방식을 따라간다면, 그가 바로 이방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길은, 이방인과 다르다는 뜻이 됩니다. 이방인과 다른 그 길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 길에 대해서는 9절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여기서 언급한 왕이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잘 알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을 통해서, 선지자가 예언한 왕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고 배척하며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고 기다리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왕은 강력한 능력을 가진, 용사와 같은 왕이었습니다. 로마를 짓누르고 자신들이 원하는, 강력한 국가를 세울 왕을 기다린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유다가 고대하는 힘과는 상관없는 분으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힘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자로 오셨습니다.
유대인이 볼 때 그러한 예수가, 자신들을 위해 해줄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 그동안 소망과 희망으로 붙들면서 고통을 참고 견디며 기다려온,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유대를 향하여, 왕이 임할 것을 예언하면서 왕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왕이 오심에 대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의 오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이 생각하고 바라고 기다리는, 그런 메시야로 오신 예수가 아닙니다. 세상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분으로, 또한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한 길을 가신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자의 길입니다.
두로와 시돈처럼 요새를 쌓고, 은을 티끌처럼, 금을 진흙처럼 쌓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지혜라 여기는 사고방식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기뻐하고 환영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물론 힘없는 나약한 길이든, 죽는 길이든, 고난의 길이든, 예수님이 홀로 가시고, 대신 예수를 믿는 나에게는 세상의 부로 채워준다면, 누구하나 불평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곧 세상과는 전혀 다른 지혜로,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구분되는 기준입니다.
어떤 방식의 삶을 추구하느냐는 것입니다. 요새를 쌓고 은과 금을 쌓아 놓음으로써, 그것으로 자신을 지킬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힘으로 여기고 신뢰하는 것이, 이방인의 지혜고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 곧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이방인인 것입니다.
10절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병거의 말과 전쟁하는 활이 끊어진다는 것은, 전쟁을 할 수 없는 힘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나귀 새끼를 타신 왕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방인이라면 누구도 이런 나라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나라에 속한다면, 결국 짓밟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힘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거와 활을 끊으심으로써,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나약한 자가 되게 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새가 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시는 요새로 함께 하시는 것이지, 세상에서 우리를 강한 자로 세워주시는 요새가 아닙니다.
힘은 참으로 매력이 있습니다. 힘을 가지면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힘도 죄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를 심판에서 건져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만 있으면 안전하다는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나를 살리는 참된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있는 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힘을 신뢰하는 사람은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힘이 없으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면서 살았다고 해도, 마지막에 영원히 빛나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예수님의 나라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성도는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성도로 모인 것이 교회라면, 교회는 당연히 힘과는 상관이 없는 모임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세상의 힘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는 하나님의 존귀한 선물임을 증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