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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90. [역경의 열매] 호용한 (1-25) “목사님, 가족 위해 쓰세요” 봉투 열어보니 2000만원이…
담임목사 부임 후 한 교인이 수표 건네… 강렬한 유혹 뿌리치고 장학금으로 쾌척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지난 4일 교회 목양실에서 자신의 삶과 목회를 소개하고 있다.
황금의 유혹은 강렬했다. 난생처음 만져보는 큰돈에 미소가 쉬 사라지지 않았다. 2001년 옥수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넉 달쯤 됐을 때의 일이다. 한 권사님의 팔순 감사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권사님의 아들이 감사 인사와 함께 “한국에서는 아이들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드니 정착금으로 쓰시라”며 봉투 하나를 건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봉투를 열어 보곤 눈이 번쩍 뜨였다. 수표 두 장. 그것도 1000만원짜리였다. 나와 가족을 위해 쓰라고 준 돈이고 내가 어떻게 사용하든 누구 하나 뭐라 할 이는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조용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옥수중앙교회에 부르시고, 몇 달 안 돼 이렇게 큰 물질을 주신 것엔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닐까.’ 기도하며 조용히 묵상한 끝에 어렴풋하게 주님의 생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며칠 뒤 그 돈은 장학금이란 이름으로 옥수중앙교회 공동체의 소유가 됐다. 이는 교회가 지난 20여년간 해온 수많은 구제와 장학 사업의 마중물이었다.
옥수중앙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해 쉼 없이 손 내밀 수 있었던 건 주위에 가난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교인들 역시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동네가 됐지만, 부임 당시 서울 성동구 옥수동과 금호동은 말 그대로 달동네였다. 자동차 한 대 지나기 어려울 만큼 좁고 비탈진 골목길이 많았고, 주민들 대부분이 고단하고 팍팍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우리 교인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교인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가사도우미, 식당 종업원, 일용직 노동자, 택배기사, 택시기사 등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한 달에 채 100만원을 못 버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나 역시 피난민의 자녀로 태어나 가난이 어릴 적부터 몸에 뱄다. 사정이 그랬기에 나와 우리 교인들은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들의 눈물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2001년 그해, 옥수중앙교회는 새로 부임한 목사가 대심방을 다닐 때마다 어려운 교인들이 도서비로 전해준 1500만원까지 합쳐 3500만원을 ‘위로’란 이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냈다. 어린이와 중고생 급식비, 대학생 장학금, 독거노인 전기세 등 여기저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나눴다. 각종 절기에는 쌀과 라면을 전했다. 겨울이면 김장김치를 담가 겨울 찬거리를 걱정하는 노인과 장애인 가정의 시름을 달랬다. 달동네 교회였지만, 하나님은 옥수중앙교회를 귀하게 사용하셨고 우리는 그 인도하심에 묵묵히 순종했다.
2003년부터는 독거노인들의 영양 섭취를 돕기 위해 우유 배달 사역을 시작했다. 이후 ‘고독사 방지’란 목적이 더해지고 사역이 확장돼 지금은 서울 시내 16개 구에 사는 독거노인 2000가정에 매일 아침 신선한 우유를 배달한다.
얼마 전 성동구에서 독거노인 한 분이 숨진 지 사흘 만에 발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역경의 열매’ 게재 요청을 받았다. 성경에서 배운 것을 그저 행했을 뿐이데 무슨 이야깃거리가 될까도 싶고, 괜히 교만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도 든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걸어온 길을 찬찬히 되짚어 보려 한다. 연약한 자를 어르고 달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내의 이야기다.
약력=총신대, 총신대 신대원 졸업. ‘생명의 삶’ 편집장 역임. 현 어르신의안부를묻는우유배달 이사장, 서울 한영대 겸임 교수.
* [역경의 열매] 호용한 (1) "목사님, 가족 위해 쓰세요" 봉투 열어보니 2000만원이…
* [역경의 열매] 호용한 (2) 엄마의 기도소리, 세월 흐를수록 가슴에 사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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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호용한 (2) 엄마의 기도소리, 세월 흐를수록 가슴에 사무쳐
자식 배곯지 않게 하려 수모·설움 견디며 아픈 다리로 어려운 살림 이끌어온 어머니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의 5세 시절 모습.
나는 1957년 경기도 평택 송탄에서 가난한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해도 은율에서 5남매를 낳아 기르시던 부모님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나마 자식들을 다 데리고 내려올 수 없어 아들 하나와 딸 둘은 할머니에게 잠시 맡긴 채 여덟 살짜리 맏아들과 젖먹이 막내딸만 데리고 월남했다. 그리고 송탄 미군부대 앞에 터를 잡고 나를 포함해 자식 셋을 더 낳으셨다.
믿음이 좋으셨던 아버지는 은율에 사실 때 교회 영수(領袖)로 섬기셨다. 피난 내려와 송탄의 작은 움막집에 살 때도 피난민들과 함께 우리 집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작은 가정교회였지만, 부모님은 토요일이면 온종일 집안을 쓸고 닦았고 어머니는 주일예배 후에 국수를 한 소쿠리 삶아 교인들을 대접했다. 우리 집에서 시작한 그 교회가 현재 송탄제일교회의 모태가 됐다.
6·25전쟁 직후 너나없이 가난했지만, 피난민인 우리 집은 유난히 더 가난했다. 아버지는 미군부대에서 퇴직하신 후 목수 일을 하셨는데 큰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감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겨울이면 특히 고역이었다. 행여나 일감이 있을까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다반사였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집을 나섰고 쌀가게에 가서 수십 번 머리를 조아려 한 말에 200원 하는 쌀을 외상으로 얻어오곤 했다. 외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쌀을 꾸는 것이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배가 고파 퀭한 눈을 한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갈 생각을 하며 어머니는 온갖 수모와 설움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집에서는 배가 고파도 견딜 만했지만, 학교에서 배를 곯는 일은 눈물 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입에 들어갈 밥은 없어도 점심 도시락만은 꼬박꼬박 싸주시려 애를 썼다. 그러나 밥은 겨우겨우 싸가도 반찬은 못 싸갈 때가 많았다. 그나마 또래 친구들 역시 대부분 가난한 처지라 스스럼이 덜했고 나는 내가 싸 온 꽁보리밥에 다른 아이들이 싸 온 반찬을 얻어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 가장 먹고 싶었던 건 부잣집 아이들이 싸 온 계란 프라이였다. 밥 위에 올라가 있는 노릇노릇한 계란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내가 어른이 되면 꼭 하루에 하나씩 계란을 먹어야지 결심했다. 교회에 갈 때면 나도 맘껏 계란을 먹고 싶다는 원망과 눈물 섞인 기도를 하곤 했다. 어릴 적 나는 엄마와 같이 다니는 걸 몹시도 싫어했다. 친구들과 놀다 멀리서 엄마가 보이기라도 하면 일부러 길을 돌아갈 때도 많았다. 우리 엄마는 멀리서도 얼른 눈에 띄었다. 어릴 적 다친 다리로 평생을 심하게 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그지없다. 엄마는 나를 위해 하루도 쉼 없이 믿음으로 평생 기도해 주셨다.
겨울철 길이 미끄러워 새벽 기도를 못 갈 때는 냉기가 올라오는 작은 방으로 건너가 스티로폼을 깔고 그 위에서 기도하셨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판하는 기도가 아니었다. 온기라곤 전혀 없는 작은 방에서 엄마는 기도 때마다 많이도 우셨고 그 울음은 잠자는 중에도 내 귀에 아련하게 들렸다.
어머니께서 천국에 가신 지 15년이 지났다. 얼마 전 산소에 찾아가 “엄마, 미안해. 내가 너무 몰랐어”하며 무덤 속에 침묵하고 계신 엄마에게 눈물로 나의 잘못을 고백했다. 엄마의 기도 소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내게 왜 그렇게 크게 들려오는지, 내 가슴을 왜 그리도 후려치고 있는지….
***[역경의 열매] 호용한 (3) 중학시절 내내 신문배달… 고달픔에 하나님 원망
등록금 마련하려 시작… 지국 총무 성화에 수금하러 나섰다가 온갖 욕설 다 듣고 서러움 북받쳐 눈물
호용한 목사(왼쪽 첫번째)가 중학생이던 1972년 봄 경기도 송탄 외곽에서 야외예배를 드리고 있다.
피난민 일곱 식구가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살다 보니 학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한 달에 100원하는 기성회비를 한 번도 못 내보고 졸업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중학교 3년 내내 신문 배달을 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등록금을 내야 했다.
당시 석간신문 한 달 구독료는 280원이었다. 처음 배달을 시작할 때는 신문 70부를 돌렸는데 두 달 만에 140부로 늘었다. 신문 한 부가 늘어날 때마다 50원씩을 더 받았다. 신문사 총무는 “용한이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며 칭찬해줬다. 칭찬 듣는 것도 좋았는데 돈 버는 재미도 여간 쏠쏠하지 않았다.
수입은 늘었지만, 신문 부수가 느는 만큼 몸은 고됐다. 70부는 혼자 할 수 있는 분량이었지만 140부는 혼자선 감당이 안 됐다. 학교를 마치면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신문사 지국으로 달려갔다. 신문 140부를 받아 그중 40부를 네 살 아래 남동생에게 맡겼다. 동생에게 집 가까운 곳 배달을 맡기고 나는 신문 100부를 겨드랑이에 끼고 이 집 저 집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렇게 배달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저녁 8시 무렵이 됐다. 추운 겨울, 꽁꽁 얼어버린 고구마에 뭇국, 허연 김치로 배를 채우고 나면 금방 곯아떨어지곤 했다.
신문 배달은 배달로만 끝나지 않는다. 배달한 집을 찾아다니며 수금도 해야 했다. 한번은 철도 건널목 너머에 있는 이발소로 수금을 갔다. 여섯 달째 신문값을 내지 않아 여간 골칫거리가 아닌 고객이었다. 그날도 수금을 해오라는 신문지국 총무의 성화에 못 이겨 이발소를 찾아갔다. 오늘만은 꼭 수금하리라 마음을 다잡고 이발소 문을 열었다. 마침 주인이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크게 숨을 내쉬고 입을 뗐다. “아저씨, 밀린 신문값 주세요.” 주인은 힐끗 쳐다볼 뿐 아무 대꾸도 없이 이발에 집중했다. “신문값 달라니까요.” 제법 큰 소리로 말했더니 그제야 주인은 “내일 와. 지금 바빠”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시 “오늘 꼭 받아오라고 했어요”라고 말했고 주인은 “내일 와”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 같은 말이 오갔는데 어느 순간 주인이 노발대발하더니 욕을 퍼부었다. 그깟 몇 푼 안 되는 신문값 떼먹겠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놀라서 아무 소리 못 하고 그 욕을 다 듣고만 있었다.
“이놈 봐라. 조그만 놈이 말도 안 듣네.” 온갖 욕이 주인 입에서 쏟아졌다. 까무잡잡한 까까머리 중학생이 호통을 당하는 게 불쌍했던지 머리를 깎고 있던 손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예끼, 추운 겨울 어린애가 신문까지 돌리며 공부하려고 하는데 잘 달래 보내지 왜 소리를 쳐요.” 손님의 말을 들은 나는 설움에 복받쳐 눈물이 터졌고 그 자리에 선 채 엉엉 울었다. 울면서도 “내일은 꼭 신문값을 줘야 한다”며 몇 번이고 주인에게 부탁했다.
한번 터진 눈물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쉬이 멈추질 않았다.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신문 배달을 해야 하는지’ 부모님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해 힘든 수금까지 해야 하는 신문 배달의 고달픔, 이발소 주인에 대한 미움까지 뒤섞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원망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시냐고 원망하며 어두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4) 얼굴도 모르는 북한 형제가 족쇄… 파일럿의 꿈 날아가
어려운 형편 탓 대학 포기 공무원 선택… 주경야독하며 등록금 없는 공사 합격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왼쪽)가 고등학교 졸업식 후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중학생 시절 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우리 집은 송탄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명문 수원고에 입학했다. 덕분에 신문을 배달하는 대신 고교 1학년 때부터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사는 초등학생 다섯 명을 모아 과외를 했는데 한 명당 한 달 과외비가 2000원씩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3개월 등록비가 1만 5000원가량이어서 나는 과외비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고교 3학년에 올라가서는 우등반에 배치됐다. 3학년이 총 360명이었는데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1등에서 60등까지 모은 특별반이었다. 대학에 꼭 가고 싶었지만, 우리 집 형편에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대학을 못 가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입시철이 가까워졌을 때 용기를 냈다. “아버지, 저 대학에 가고 싶어요.”
아버지는 한참 뜸을 들이시더니 등을 돌리시며 “네 마음대로 해”라는 한마디를 던지셨다. “가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공부 잘하고,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차마 가지 말라는 말을 못 하셨을 뿐이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할 용기는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용기는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 집에 대학등록금 낼 돈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해 우등반에서 대학에 가지 못한 학생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대학 대신 선택한 건 말단 공무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개월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근무지는 집 근처에 있는 원예시험장이었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서 좋기는 했지만,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날마다 나를 괴롭혔다.
끝끝내 대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대안으로 사관학교 진학을 꿈꿨다.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공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다. 이유 역시 간단했다. 공군 파일럿이 다른 장교보다 수당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공군사관학교 진학의 꿈을 품고 6개월가량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했다. 낮에는 공무원으로 살았고 저녁엔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그해 가을 나는 공군사관학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때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다. 벌써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군사관학교 입학의 마지막 절차였던 신원조회에서 ‘지원자 호용한’에 대한 판정은 합격에서 불합격으로 바뀌었다. 우리 가족 호적등본에 ‘미수복지 거주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난 온 아버지는 호적등본에 이북에 두고 온 아들딸 3명의 이름을 모두 다 올려놓았고 아들딸이 행정상 미수복지 거주자로 분류된 것조차 모를 정도로 힘든 생활을 했다. 이북에 가족을 둔 사람은 사관학교 입학을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그때만 해도 연좌제는 끊을 수 없는 무거운 족쇄였다.
청천벽력 같은 불합격 소식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도, 대한민국도, 얼굴도 모르는 북한 땅의 형과 누나들도 그리고 하나님도 원망스러웠다. 가난하게 자라게 하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앞길까지 막으시냐고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자리마저 잃었다. 사관학교에 합격한 줄 알고 공무원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5) “신학대학에 가거라 너는 목사가 될 사람이다”
평소 봉사하는 모습 지켜 본 김학수 장로 총신대 추천하며 입학금 30만원도 내줘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중학교 시절 교회에서 특송하고 있다.
공군사관학교에 떨어져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하루는 내가 다니던 수원북부교회 김학수 장로님이 따로 부르셨다. 나처럼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분이셨다.
“용한이, 앞으로 뭐 할 거냐.” “….”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장로님은 내 마음을 다 아신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신학대학에 가거라. 너는 목사가 될 사람이다.”
장로님은 총신대를 추천해 주시며 입학금 30만원도 대주셨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찬양대 지휘도 하는 등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그 모습을 좋게 보셨던 모양이다. 그런 내가 공군사관학교에 떨어지고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것이 마음이 아파 기도 끝에 내게 손을 내미셨던 것이다.
장로님의 권유에 나는 순종했다. 그렇게 또래보다 3년 늦게 총신대에 입학했다. 총신대에 들어간 것은 당시 내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간절함이 없었지만, 그렇게 하나님은 내 앞에 목회자의 길을 내셨다.
대학생이 됐다고 집안 형편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수원에서 서울 사당동 총신대까지 통학을 하다 몇 개월 안 돼 서울 약수동에서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통학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학비를 벌어야 대학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주 과외를 한 집은 2층 양옥집이었고 마당부터 현관까지 대리석이 깔린 으리으리한 부잣집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매일 저녁 그 집의 중학생 아들을 가르쳤다. 한 달 월급은 6만원. 그 돈을 모으면 30만원가량 했던 한 학기 등록금을 감당할 수 있었다.
입주 과외를 하는 동안 부수입도 생겼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내가 믿을만했던지 종종 집세 받아오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심부름을 다녀오면 수고비로 500~1000원을 주곤 했다. 여간 쏠쏠한 용돈 벌이가 아니었다.
그 시절 총신대 학생들은 돈이 없어 점심을 거르는 일이 많았다. 나도 그랬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과외 사례비 외에 점심값으로 매일 아침 500원씩을 줬는데 나는 그 돈으로 점심을 먹는 대신 책을 샀다. 사흘 치 점심값을 모아 책 한 권을 살 때면 배가 부른 듯했다. 그때 사서 읽고 모아 놓았던 누런 책들을 가끔 바라보노라면 새로운 기쁨과 희망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받곤 한다.
책을 사서 읽는 게 좋았지만, 배고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아침밥을 많이 먹고 학교에 가도 점심을 거른 탓에 오후 4시쯤 집에 돌아오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 시간에 밥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꼼짝없이 방에 틀어박혀 저녁밥 먹을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배가 너무 고플 때면 냉장고에 있는 물을 꺼내 마셨다. 부잣집답게 그 집 냉장고에는 늘 먹을 것이 넘쳤다. 그러나 입주 과외선생 신분이라 감히 음식에는 손을 못 대고 고작 물을 꺼내 먹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가정부 아주머니 방이 부엌에 붙어 있어 냉장고를 자주 열 수도 없었다.
2년 동안 입주 과외 선생으로 살았던 약수동은 지금 시무하고 있는 옥수중앙교회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밖에 안 떨어져 있다. 배고프고 가난했던 신학대학생 시절, 버스로 오가던 동네에 다시 돌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목회를 한다는 것이 지금도 이따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6) ‘생명의 삶’ 편집장 맡으며 시작된 문서선교 사역
부목사 부임 뒤엔 교회일에만 전념… 출판 경력 안 왕성교회서 사역 부탁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1987년 서울 용산구 두란노서원 편집실에서 동료 직원들과 작업 중 사진을 찍었다.
신대원 시절, 한 달에 10만∼20만원 하는 교육전도사 사례비로는 도저히 생활이 안 됐다.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에 두란노서원에서 성경 묵상집 ‘생명의 삶’ 편집장을 뽑는다는 걸 알게 됐다.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갔더니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님이 계셨다. 하 목사님은 면접을 마치고 작은 영어책을 하나 주며 번역을 해보라고 하셨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진 못했지만, 정성껏 책을 번역했다. 결과물이 맘에 드셨던지 하 목사님은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생명의 삶’ 편집장으로 두란노서원에서 만 5년간 일했다. 신대원생이 월간지 편집장을 맡은 건 당시로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내가 일을 시작할 무렵 2만부가량 발행되던 ‘생명의 삶’은 꾸준히 부수가 늘어나 5년 후에는 10만부가 됐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편집장 직함은 목사 안수를 받고 청와대 앞 옥인교회 부목사로 부임하면서 내려놨다. 부목사로 전임 사역을 하면서 다른 파트타임 업무를 할 심적 여유나 시간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옥인교회 김영철 목사님의 사랑이 컸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옥인교회를 섬기고 싶었다.
부목사 면접을 치를 당시 우리 식구는 나와 만삭인 아내, 부모님 이렇게 네 식구였다. 당시 옥인교회 부목사 사택은 청운동 13평 아파트로 공동화장실을 사용했다. 김 목사님과 면접을 치르는 자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김 목사님은 잠시 고민하시곤 당회에서 논의해 보겠다고 하셨다.
일주일 후 연락이 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있게 교회 근처에 25평짜리 전셋집을 마련해주겠네.” 얼마든지 다른 부목사를 선택할 수 있었겠지만, 파격에 가까운 배려를 해주신 것이다. 그렇게 옥인교회를 섬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교회신문을 만들려고 하는데 출판 경력자인 내가 부목사로 와서 그 일을 맡아줬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왕성교회는 뜨겁게 부흥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나는 길 목사님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흥하는 교회에서 문서선교사로 경력을 쌓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옥인교회 김 목사님의 배려를 생각할 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길 목사님께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교회를 옮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길 목사님은 간곡히 다시 요청하셨다. 부목사 사역이 힘들면 월요일에 파트타임이라도 괜찮으니 도와달라고 하셨다. 길 목사님의 요청이 하도 간곡해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기도 끝에 김 목사님을 뵙고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김 목사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할 생각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김 목사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곤, “도와줄 수 있으면 돕는 게 좋겠다”며 너그럽게 허락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3년 동안 월요일마다 파트타임으로 왕성교회 교회신문 만드는 일을 했다. 왕성교회 신문은 전도용으로 많이 이용됐고 매주 5만부를 찍어낼 만큼 호응을 얻었다. 그렇게 두 분 어르신 목사님들의 배려와 인도로 나는 문서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금 옥수중앙교회가 발간하는 월간 소식지 ‘옥수중앙뉴스’도 35년 전 시작된 내 문서선교 사역의 연장이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7) 두 번째 만남서 “하나님 영광 위해 결혼하자” 프로포즈
평소 기도해왔던 배우자상과 꼭 맞아… 아내 집안의 극심한 반대 눈물로 설득
1987년 3월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와 임현숙 사모의 결혼식 모습.
1986년 12월 27일 토요일 오후 4시 이화여대 후문 레스토랑에서 한 자매를 만났다. 아담한 키에 인상이 참하고 푸근한 아가씨였다. 7남매 중 넷째로 가정에서 혼자만 교회를 다닌다고 했다. 더 특별했던 점은 그 자매가 연세대 출신 직장인이었다는 점이다.
‘생명의 삶’ 편집장으로 일할 당시 두란노서원 사무실은 연세대 맞은편에 있었다. 점심시간에 연세대 뒷산으로 산책하러 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여유롭게 대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부러웠고 막연하게 이 학교 출신 자매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또 하나는 배우자가 직업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 싶었다. 솔직히 돈 버는 일과는 거리가 먼 목회자로 살아가며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소개받은 자매가 그동안 기도했던 배우자상과 꼭 맞는다는 사실에 제법 놀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 자매가 툭 하고 고백을 했다.
“전 연애할 사람이 아니라 결혼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자매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너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물음에 ‘주님의 도구가 되는 일’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곤 내가 월요일 낮 12시까지 전화를 해서 다시 만나자고 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정녕 인도하심이었을까. 나는 운명처럼 월요일 오전 11시 59분에 아내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고 그로부터 75일이 지난 후 자매는 지금의 내 아내가 됐다.
그러나 결혼은 우리 두 사람만 좋다고 성사될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집은 가난한 피난민 집안이었던 반면, 아내는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아버지에 형제자매 모두 대학을 나온 집안이었다. 아내의 집에서 반대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나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아내 집안에선 일절 관심도 없는 목사 후보생 신분이었다.
아내 집에서는 어떻게든 나와 떼어놓을 심산으로 아내에게 유학을 종용했다. 그러나 아내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눈물로 가족들을 설득했다. 하루는 아내의 둘째 오빠가 집안의 특사 자격으로 나와 아내를 만나러 나왔다. 이 결혼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통보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결국 특사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아내와 나의 간곡한 설득에 오빠는 결혼에 동의해줬고 우리를 대신해 가족을 설득해 주기까지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의 온누리교회 서빙고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가건물에서 결혼했다. 하용조 목사님이 친히 주례를 맡아주셨다. 아내는 과거 목사님이 인도하던 성경공부반에서 성경을 배우던 당시부터 하 목사님을 존경해왔다. 그런 하 목사님이 주례를 해주신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온누리교회 가건물에서 올린 첫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예배였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8) “다른 목회의 길” 기도에 ‘독일 이민 목회’로 응답
옥인교회 설교자로 독일서 오신 옛 스승, 후임으로 독일 한인교회 목회 제안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앞줄 가운데)가 1994년 독일 뮌헨한독교회에서 사역할 때 한국인 및 독일인 성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5년쯤 후에는 제게 또 다른 목회의 길을 보여주세요.’
옥인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다. 하루는 독일에서 목회하시는 한 목사님이 오후예배 설교자로 왔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 나를 가르쳐주셨던 중고등부 전도사님이었다. 예배 후 목사님과 내 고등학생 시절, 공군사관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신학을 공부하게 된 과정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그런데 목사님이 갑자기 진지해지시더니 한마디 툭 던지셨다. “호 목사, 독일 가본 적 있어?”
무슨 소린가 싶었다. 목사님은 나를 여기서 만난 게 하나님의 인도하심 같다며 내게 독일 한인교회 목회를 제안하셨다. 자신은 귀국하려던 차였고 누군가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를 맡아줬으면 했는데 이왕이면 자신이 가르친 제자라면 더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이민 목회가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냐. 목회를 하면서 신학 공부도 할 수 있어.” “기도해 보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반 이상 마음의 결정을 한 상태였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유학에 대한 꿈이 있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더 깊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며 아이들 공부며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같았다.
아내는 내 이야기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겠지요”라며 동의해줬다. 그동안 다닌 좋은 직장도 그만둬야 하고 타국 생활이 쉬울 리 없었지만, 묵묵히 나를 신뢰하고 지지해줬다. 옥인교회 부목사로 섬긴 지 4년 10개월 되던 때였다.
1993년 가족과 함께 독일 이민 목회 길에 올랐다. 부임한 곳은 뮌헨한독교회. 한국인과 독일인 등 80명 정도가 모이는 건강한 교회였다. 교인 대부분은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었고 나머지는 예전에 간호사나 광부로 건너와 독일인과 가정을 이룬 분들이었다.
뮌헨에 도착한 첫날부터 며칠 동안 우리가 사는 사택에는 교인들이 끊이질 않았다. 교인들은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했고 한 달가량 담임목사가 공석이었던 터라 신앙적 갈급함도 컸다. 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도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집에 쌀이 똑 떨어졌다. 내가 부임하는 때에 맞춰 교인들이 10㎏짜리 쌀을 한 포대 준비해 줬는데 며칠 만에 쌀이 동난 것이었다.
쌀이 떨어졌다는 아내의 말이 그날은 새롭게 들렸다. 한국에서도 여러 번 들어왔고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타국 생활 며칠 만에 듣는 “쌀이 떨어졌다”는 말은 단순히 쌀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순간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시는 작은 시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쌀은 사지 맙시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잖아요. 우리 한 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살아봅시다.”
나는 제법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고 아내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9) 쌀 떨어져 국수로 떼운 날 집사님이 쌀 포대 들고와
우리 가정 향한 주님의 사랑 확인…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쌀 나누기 시작
호용한 목사가 1994년 독일 뮌헨한독교회에서 목회할 때 가족들과 함께 뮌헨 근교 슈타인베르그 호숫가를 방문해서 사진을 찍었다.
아내에게 호기롭게 “쌀을 사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기다리자”고 말한 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시고 어린 시절 나의 꿈을 잊지 않으시고 독일까지 인도하셨으니 온전히 책임져 달라는 기도였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국수를 삶아 먹었다. 아이들은 집에 쌀이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오랜만에 국수를 먹어서 좋다고 조잘댔다. 밤 9시쯤 됐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독일에서는 사전 연락 없이 다른 집을 방문하는 게 드물기에 누가 왔을까 싶었다. 문 앞엔 찬양대 지휘자이신 서명정 집사님이 10kg짜리 쌀 네 포대를 들고 서 있었다.
“기도하는데 자꾸 목사님 댁에 쌀을 가져다드리라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늦은 시간이라 내일 올까 하다가 그래도 생각난 김에 가자 싶었어요.”
집사님은 자동차가 없어 택시를 타고 쌀을 가져오신 참이었다. 차 한 잔 드시고 가라는 말에 집사님은 늦은 시간에 찾아와 죄송하다며 서둘러 나섰다. 쌀 포대를 창고로 옮기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나를 주목하고 계시구나 싶었다. 새로운 담임목사 굶을세라 그 추운 겨울밤에 택시까지 타고 쌀을 가져온 집사님의 사랑도 절절히 느껴졌다. 아내 역시 소파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국수로 허기진 밤이었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니 한없이 배가 불렀다.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또 다른 사랑으로 흘러가게 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주신 쌀을 누군가에게 나누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나눌까 살펴보던 중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으레 유학생들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알지만, 독일에 온 유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학비가 필요치 않은 대신 생활비가 많이 들어갔다. 그래서 유학생 중에는 밥을 굶는 이들이 적잖았다.
쌀 네 포대로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쌀을 나누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약속이나 한 듯이 교인들이 우리 집을 방문할 때마다 쌀을 가져왔다. 나는 교인들이 쌀을 가져오는 족족 가난한 유학생들을 먹였다.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더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쌀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집 쌀 곳간이 열리자 교인들도 하나둘 쌀 나눔에 동참했다. 저마다 재정적으로 여유로운 형편은 아니었지만,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인들은 자기들보다 더 어려운 유학생들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독일에서 만 5년을 살았다. 처음에 독일에 갈 때는 유학과 목회를 동시에 꿈꿨지만, 실상 목회를 하면서 학위 공부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또 내가 살던 뮌헨은 보수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나와는 거리가 먼 자유주의 신학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차선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후 총신대 대학원에서 미국 개량들 신학대(RTS)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과정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든 삶의 길을 인도해 주셨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0) “새로 온 담임목사가 삯꾼…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독일서 귀국 청빙된 수원의 교회 가보니 교인들 둘로 갈라져 나에게까지 불똥이…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3년 전 이웃을 위한 사랑의 쌀나눔 행사 당시 쌀포대를 든 채 웃고 있다.
1998년 독일 교회 목회를 마치고 수원에 있는 한 교회에서 청빙을 받아 돌아왔다. 그 교회는 상처가 많은 교회였다. 전임 목사 시절 다툼이 있어 교회가 한 번 갈라지고 남아있는 교인들 역시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곳이었다. 300명가량 됐던 교인은 내가 부임했을 때 70명 정도만 남아 있었다.
그간의 갈등과 상처는 내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한번은 그 교회를 다니다 다른 교회로 옮긴 성도의 아들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내겐 전 성도의 가정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한 장로님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식에 다녀온 후 새벽기도회 때였다.
“담임목사가 삯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속히 나가게 해주십시오.”
개인기도 시간에 그 장로님이 내가 들으라는 듯 기도했다. 교회의 분열로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강퍅해진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한편으로 이렇게 상처 많은 교인들을 내가 과연 잘 돌볼 수 있을까 염려가 됐지만, 묵묵히 목회에만 열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고 말씀을 잘 준비해 설교하는 일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교인들의 마음을 조금씩 만져주셨다. 용서와 화해 사랑의 마음을 주셨다. 어느 기도회 날에는 그동안 지었던 죄들을 함께 통회하며 나도 울고 교인들도 울었다. 독일에서 했던 쌀 나누기도 시작했다. 재정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구제야말로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이웃에게 쌀을 나눴다.
교회신문도 만들어 전도용으로 사용했다. 어느 날 한 중년 신사가 교회신문을 보고 왔다며 등록했다. 산부인과 의사였는데 신문에 실린 구제사역이 감동이 됐다며 자기도 동참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집사님의 헌신으로 교회는 더 많은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교인들의 마음이 치유되고 구제 사역에 힘쓰는 사이에 교인도 하나둘 늘기 시작해 2년 6개월 만에 교회가 갈라지기 이전인 300명 수준으로 늘었다.
2001년 옥수중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옥수중앙교회로 올 때 어느 정도 기대가 있었다. 달동네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래도 서울이니 수원보다는 목회환경적으로 여러 면에서 나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그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옥수중앙교회는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지은 빚이 10억원이나 됐다. 부임 전에는 전혀 몰랐다. 교인 150여명이 출석하는 가난한 달동네교회 형편에 10억원은 너무 큰 부담이었다. 하나님께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가끔 강 건너 압구정 거리를 지날 때는 나도 이렇게 부유한 동네에서 목회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적어도 압구정에 있는 교회 담임목사는 돈 걱정은 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런 부질없는 욕심은 곧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하나님 앞에 온 인생을 드려야 할 목사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자책이 되고 부끄러움에 눈물이 쏟아졌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1) 강남 위장전입 고민하다 아내의 충고에 정신 차려
아들 고교 진학 앞두고 잠시 시험에 빠져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와 가족들이 2013년 8월 아들의 대학 학위수여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딸은 2학년이었다. 타국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건 좋았지만 고국에서 감내해야 할 것도 많았다. 첫 번째가 한국어였다. 유년기 5년을 독일에서 보냈던 터라 한국말이 서툴렀다. 성적도 최하위권이었다.
아들은 학교에서 ‘비행청소년’이란 말뜻을 몰라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비행청소년을 ‘비행기 타는 청소년’이냐고 물었다가 된통 놀림을 당한 것이다. 낯선 학교생활, 또래 문화 등으로 주눅이 들 때가 많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말도 늘고 공부에도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아들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고민에 빠졌다. 강남으로 위장전입을 하느냐 마느냐였다. 옥수동과 강 건너 압구정동은 동호대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났다. 압구정동이 있는 강남은 소위 잘나간다는 고등학교가 즐비했다. 때문에 아들이 다니던 중학교 학생들은 절반 넘게 강남으로 위장전입을 하곤 했다. 그렇게 하는 게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현명한 선택이라 인정받고 있었다.
“친구들 말이 강남으로 안 가면 좋은 대학 가는 거는 포기해야 한대. 나 어떻게 해.”
아들의 말이 잔잔했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강남에는 처남이 살고 있어서 아들 주민등록지를 강남으로 옮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등하교도 강남이 훨씬 수월했다. 압구정동은 옥수역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됐지만, 옥수동 근방에 있는 고등학교들은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주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중에는 적잖은 고민거리가 됐다. 내 눈치가 심상치 않았던지 하루는 아내가 나와 아들이 있는 자리에서 위장전입 얘길 꺼냈다.
“옥수동에 사는 것 때문에 좋은 대학 못가면 어때. 설령 대학을 못 들어가도 괜찮아. 대학 못 가면 트럭 사서 나랑 채소 장사 하자.”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나를 향한 꾸지람이기도 했다. 목사라는 사람이 불법인 줄 뻔히 알면서도 위장전입을 고민했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더라도 기독교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 내겐 위장전입이 가지 말아야 할 길 중의 하나였다.
정신을 차린 나는 아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자”고 말했다. 기운이 쑥 빠진 듯 보였지만 아들은 고맙게도 나와 아내의 말에 순종했다. 3년 후 아들과 우리 가정에 하나님은 놀라운 선물을 안겨주셨다. 아들은 집에서 꽤 먼 중구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과외 한 번 받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우리나라 최고 대학 경영학부에 합격했다.
합격 통지를 받던 날 아들은 “아빠 말대로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다”고 말했다. 나의 고백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바라시고, 믿음으로 걷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2) 심방 다니며 달동네 사람들의 고단한 삶 체감
목사님 심방 온다고 휴가 낸 미싱사 집사님 배 깎는 손에 난 상처·굳은살에 눈물이 왈칵
옥수중앙교회의 사역을 지켜 보던 한 지역 주민이 교회의 선한 사역에 감명받아 2014년 그려 준 옥수동과 교회 전경.
높다란 아파트 단지들이 많이 들어서긴 했지만, 옥수동과 금호동에는 아직도 가난한 이들이 많다. 과거 달동네의 흔적들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2001년 옥수중앙교회에 부임한 이후 달동네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첫 심방 때의 일이다. 여전도사, 교인 몇 명과 함께 30대 여집사님의 집을 심방했다. 가파르고 좁은 골목 끝에 낡은 2층 연립주택이 있었는데 슬래브 지붕 위에 있는 옥탑방이었다. 가파른 철제 계단을 타고 지붕에 오르니 금호동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집사님은 미싱사였다. 평소 같으면 열심히 일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담임목사가 심방을 온다고 휴가까지 내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배와 차를 내왔는데 언뜻 보기에도 제법 값이 나갈 것 같았다. 집사님의 삶은 시골에서 올라와 늦은 나이에 남편을 만난 이야기에 둘 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 고생한 기억들, 회사 택시를 모는 남편이 사납금 스트레스에 요즘 술을 더 마신다는 걱정, 지금 사는 옥탑방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사연 등 어느 하나 고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느 순간 배를 깎던 집사님의 손가락에 난 상처와 굳은살들이 보였다. 미싱일을 하다 생긴 것들이 분명했다. 손가락마다 두 개씩은 넘는 듯했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담임목사가 심방을 온다고 큰맘 먹고 비싼 배를 골랐으리라.
심방예배를 시작하려고 기도하는데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철제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참았던 눈물이었다. 나라는 나날이 부유해진다는데 왜 이 옥탑방 부부는 이다지도 힘들게 살아갈까 싶었다.
기억에 남는 집이 또 하나 있다. 그 집은 연립주택 반지하방이었는데 집 설계를 잘못해 수챗구멍이 출입문 앞에 나 있었다. 하루는 심방을 가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눈앞으로 휙 지나갔다.
“이놈의 쥐새끼가 목사님 계신데…”
집사님은 어지간히 난처했던지 기도 중에 벌컥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런 일이 있나 싶어 제법 놀랐는데 같이 간 교인들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그 시절 옥수동과 금호동에는 반지하방에 쥐가 드나드는 게 예삿일이었다.
심방을 다니면서 ‘비닐침대’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달동네 주민 중에는 병에 걸렸거나 연세가 들어 대소변 가리기 힘든 이들이 많았는데, 그런 가정은 으레 비닐침대를 썼다. 침대나 요를 비닐로 감싸 비닐침대를 만들면 오물이 생겨도 걸레로 쓱 닦아낼 수 있어서 이불빨래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가 밀물처럼 들어서고도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달동네 원주민들은 높은 분양가를 내고 임대아파트에 들어갔는데 같은 단지 안에서도 일반 분양아파트와 많은 것이 달랐다. 상대적으로 작은 평수에 출입구와 관리사무소가 구별되는 것은 물론이고 주민들 간 교류는 엄두조차 못 냈다. 임대아파트는 단지 내에서 동떨어진 섬이었다. 달동네 때는 그나마 모두가 가난해서 덜했지만,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후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더 느끼고 있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3) 매주 토요일 짜장면 잔치… “후식 싸드릴 테니 어서 드세요”
교회 구제사역 소문 들은 중국집 운영 장로, 친구 김관선 목사 통해 짜장면 봉사 제의
동네 주민들이 2011년 옥수중앙교회 식당에서 열린 짜장면 잔치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다.
옥수중앙교회에 부임하고 몇 년 안 됐을 때였다. 하루는 친구인 김관선(산정현교회) 목사에게 전화가 왔다. “호 목사, 짜장면 좋아해?”
웬 싱거운 농담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군대에서 만난 분 중에 압구정동에서 중국집을 하는 장로님이 있는데 우리 교회가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2001년부터 매년 구제와 장학에 1억원 이상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돕고 싶어 한다고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하고말고. 열 그릇도 먹을 수 있어.”
그다음 주부터 우리 교회에선 매주 토요일 짜장면 잔치가 벌어졌다. 장로님은 아이스박스에 100그릇 치면, 커다란 솥에 짜장 소스를 담아오셨다. 손님은 교회 근방에 사는 어르신들이었고 교인들이 잔치 도우미로 나섰다.
낮 12시부터 시작했는데 성격이 급한 어르신들은 한 시간 전부터 교회에 오셨다. 식탁 가운데는 후식으로 함께 드실 수 있게 바나나 귤 같은 과일을 놓아 드렸다. 어르신들이 맛있게 짜장면을 드실 때면 장로님은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셨다. 장로님은 “돈 벌 때보다 몇 배는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매주 짜장면을 대접하는 일이 돈도 들고 몸도 고단한 일일 텐데 한결같은 마음으로 어르신들을 섬겼다.
그렇게 잔치를 하는 사이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있었다. 어르신들이 후식으로 내놓은 과일을 드시지 않고 약속이나 한 듯이 주섬주섬 호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짜장면을 드시고 배가 불러서 나중에 드시려나 싶었다.
궁금하던 차에 하루는 한 할머니께 “여기서 드시지 그러세요. 나중에 드시려고요”하고 넌지시 여쭸다. 할머니의 대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우리 영감님한테 미안해서…. 집에 누워계신데 이거라도 가져다 드려야지.”
적잖이 놀랐다. 나름 어르신들의 마음을 알고 애써 잘 섬겨드린다고 생각했지만, 갈 길이 멀구나 싶었다. 어르신 대부분은 가족들 생각에 과일을 못 드셨다. 병환으로 누워 있는 남편 생각에 할머니는 과일을 먹지 못했고 어린 손주를 키우는 할아버지는 자기보다 손주 입에 과일 들어가는 게 더 행복했다.
다음 주 토요일부터는 과일을 다르게 내놓았다. 귤은 껍질을 까서 접시에 담고 바나나는 먹기 좋게 잘라서 내놓았다. 자장면 한 그릇 드시러 힘들게 교회까지 오신 어르신들에게 과일 한 조각이나마 드시게 하고 싶었다.
“나중에 가실 때 바나나 하나씩 드릴 테니까 어서들 드세요.”
어르신들은 그제야 과일을 입에 넣으셨다. 문득 어릴 적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잔칫집에 다녀오실 때면 늘 떡이나 전, 고기를 종이에 둘둘 말아 품에 안고 오셨다. 그리고 당신은 잔칫집에서 배불리 먹었다며 잔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자식들 옆에서 물에 식은 밥을 말아 드셨다. 어르신들은 그렇게 과일 한 조각에 행복했고 그 모습이 우리 엄마인 양 나도 행복했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4) 독거노인에 우유배달… 건강 지키고 고독사도 예방
고독사 문제 신문·TV에서 접한 후 혼자 사는 어르신들 염려돼 시작… 손위 처남 도움으로 우윳값 해결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2016년 12월 교회 인근 장애인 어르신 댁을 찾아가 인사를 나눈 뒤 손을 잡아주고 있다.
2003년 무렵 옥수동과 금호동에는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과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 집이 대다수였다. 홀로 살거나, 손주들과 사는 조손가정 어르신들은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폐지를 주우러 다녔다. 등이 굽고 초라한 옷차림으로 쓰레기더미를 뒤적이는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끼니나 제대로 챙겨 드시는지 염려가 됐다.
그 무렵 고독사 뉴스도 종종 신문이나 TV에서 흘러나왔다. 혼자 사는 탓에 집에서 돌아가신지 아무도 몰랐고, 몇 달 만에 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우리 동네라고 예외일 수는 없겠다 싶었다.
하루는 새벽기도회에 가기 위해 차를 몰고 교회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우유 배달 오토바이였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다가 순간 ‘이거다’ 싶었다. 우유에는 칼슘이 많아 골다공증으로 힘들어하는 어르신들에게 도움이 되고, 배달원이 매일 아침 우유를 배달하면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고독사도 체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실행은 쉽지 않았다. 재정이 문제였다. 당시 우리 교회는 전체 경상비의 30%가량을 구제와 장학에 사용하고 있었던 터라 별도로 우유 배달에 재정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독거노인 문제를 모른 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릴없이 고민만 거듭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몇 개월 후 길이 열렸다.
포항에서 큰 처남의 해군 소장 이취임식 행사를 마치고 바로 손위 처남과 같은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올 때였다. 처남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였는데 명절에 잠깐 만나 안부를 나눌 뿐 나와는 그리 살가운 관계가 아니었다. 처남이 그날은 문득 교회에 도울 일이 없는지 물어왔다.
“옥수동이 달동네잖아. 어렵게 사시는 분들 많을 텐데 도울 일 없어?”
지금까지 한 번도 매제가 하는 일을 도와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며 이번 기회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옳거니 싶어 그동안 해왔던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독거노인들에게 우유 배달을 하고 싶은데 좀 도와주시면 어떨지.”
처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다시 물었다. 순간 당황했다. 우유 배달을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지, 얼마만 한 규모로 해야 할지 정하질 않았던 것이다. 당시 200ml짜리 한 달치 우윳값은 2만원 가량이었다. 너무 많이 부르면 지레 겁을 먹을 것도 같고 그렇다고 너무 작게 부르자니 좋은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짧은 순간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이윽고 내가 내린 결론은 100가정이었다.
“한 달에 200만원 정도요.” 처남은 조금 부담이 됐던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곤 계속은 못 하고 3년만 하겠다고 덧붙였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솔직히 1년도 감사한데 3년이면 더할 나위 없는 지원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처남에게 독거노인들에게 우유 배달이 왜 필요한지 고독사 예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5) 우유 배달에… 어르신들 “교회가 자식보다 낫다” 반겨
매일 문안인사 받는 것 같아 좋다는 분도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교회 3층에 마련된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사무실 앞에서 우유를 든 채 미소짓고 있다.
처남이 우유 배달을 후원하겠다고 해서 지체 않고 옥수동과 금호동 주민센터를 찾았다. 우유 배달을 어느 어르신들께 해드리면 좋을지는 우리보다 주민센터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 고독사도 방지하고 영양도 챙겨드릴 목적으로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우유를 배달해드리고 싶다고 하자 주민센터 직원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교회가 지역 주민들을 위해 여러 가지 선행에 앞장섰는데 우유 배달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며 기꺼이 홀몸노인과 우유 배달이 필요한 주민들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다음으로 우유보급소를 찾았다. 보급소로서는 한꺼번에 우유 배달할 집이 늘어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우유 배달은 단순히 우유 배달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우유가 두 개 이상 쌓이면 반드시 옥수중앙교회나 주민센터로 연락해 주세요. 그리고 공짜로 잡수신다고 날짜 지나면 절대 안 됩니다.”
우유보급소 직원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다행히도 그 두 가지 약속은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우유 개수만 체크하던 우유 배달원들이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아이디어를 냈다. 전날 우유가 그대로 있으면 스티커를 하나 붙이고 다음 날에도 변화가 없으면 다른 색깔의 스티커를 붙이는 방법이었다. 사흘째에도 변화가 없으면 어르신의 신변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로 알고 교회나 주민센터로 연락했다.
그렇게 옥수동과 금호동 100가구 어르신들에게 매일 아침 우유를 배달하기 시작했다. 어르신 중에는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어 두유나 유산균 음료를 배달해 드렸다.
우유를 받아든 어르신들은 하나 같이 의아해하다가도 “교회가 자식보다 낫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간혹 우유 배달을 마다하는 분들도 있었다. 종교가 달라서 받고 싶지 않다는 분도 있었고 무료로 우유를 받아먹을 정도로 가난하지 않다며 거절하는 분도 있었다. 그럴 때면 다른 분을 추천받아 우유를 배달해 드렸다.
하루는 길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시곤 “우유를 배달해줘 고맙기는 한데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교회에서 선물을 한 번 받은 적이 있는데 교회에 나오라고 하도 조르는 통에 여간 난처하지 않았다며 이번에도 우유 먹고 옥수중앙교회에 나오라는 말 아닌가 싶어 부담된다고 했다.
“예수님 믿는 건 좋은 일이지만, 꼭 교회 오시라고 우유 드리는 건 아니에요.” 교회가 전도를 하기 위해 이웃을 돕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간곡히 설명했더니 어르신은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작은 임대아파트에 사시는 한 할머니는 나를 만날 때마다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받는 것 같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며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는 하반신이 불편해 일상생활이 여간 힘들지 않았는데 아침마다 방에서 현관까지 우유를 가지러 갈 때면 5분가량을 배로 기어가야 했다. 그런데도 홀로 쓸쓸히 살아가는 할머니는 매일 아침 우유를 배달해 주는 것이 문안인사를 받는 것처럼 반가웠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6) 달동네 목회의 원동력은 구제 사역에 헌신한 교인들
급하게 간이식이 필요한 신생아 수술비… 교인들, 가난한 형편에도 십시일반 도와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2018년 3월 교인들과 함께 김제 금산교회로 성지순례를 가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옥수중앙교회가 구제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교인들의 헌신 덕분이다. 자신이 가난했기에 가난한 이들의 사연에 더 가슴 아파했고 하나님은 그 마음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셨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교회에 큰 기도제목이 생겼다. 한 신혼부부가 아기를 낳았는데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검사 결과 선천성 담도폐쇄로 인한 간경화였다. 간 이식이 유일한 치료법이었는데 다행히 아버지 간을 이식해 줄 수 있었다. 문제는 2500만원이나 되는 수술비였다. 신혼부부는 갓 서울로 올라와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바쁜 형편이었다. 수술을 마냥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가 아기를 살립시다. 우리가 주머니를 열면 살릴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아기 소식을 알리고 간곡히 광고를 했다. 당시 교회 교인은 350명가량, 대부분이 가난한 형편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기적같이 수술비의 절반인 1250만원이 모였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으로 이어졌다. 주민센터에서 나머지 절반을 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주민센터는 우리 교인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1250만원을 헌금했다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아기는 그 돈으로 무사히 간 이식 수술을 받아 건강을 회복했다. 지금은 우리교회의 어엿한 고등부 성도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기도제목이 생겼다. 추석 전날 한 집사님의 옥탑방 집에 불이 났다. 내가 처음 심방을 가서 눈물을 쏟았던 그 집이었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세간을 모두 태워 꼼짝없이 거리에 나앉을 상황이었다.
주일예배 때 화재 소식을 전하고 또 한 번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교인들은 다시 주머니를 열었고 그 결과 850만원이 모였다. 집사님 가족은 그 돈으로 옥탑방보다 더 나은 집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교인들은 헌금 외에도 그릇이며 이불, 온갖 세간살이를 집사님 댁에 갖다 줬다. 더 감사한 것은 신앙이 없었던 집사님의 남편도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꾸준히 이웃을 도울 수 있었던 데는 장로님들의 역할도 컸다. 장로님들은 구제에 앞장서는 것은 물론 내가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나와 다른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나이도 어리고 부족한 것도 많은 목회자를 한결같이 이해해주고 지지해 주셨다.
개인택시를 하시던 한 장로님은 10여년 동안 교회에 오실 때마다 껌을 한두 통씩 사서 내게 주곤 하셨다. “좋은 건 못 드리고, 껌이라도 드리고 싶어서 사온다”는 말이 그렇게 정겨울 수 없었다. 장로님의 아내 되는 권사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방배동으로 가사도우미 일을 다니셨는데 명절 때면 막냇동생뻘 되는 목사에게 꼭 선물을 챙겨주셨다.
교회에 올 때마다 가게에 들러 껌을 골랐을 장로님, 애써 번 돈으로 선물을 마련했을 권사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 사랑들이 달동네 목회의 원동력이었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7) 처남이 해오던 우유 배달 후원, 교인들이 이어가
처남 사업 힘들어져 후원 연장 어렵게 돼 주일예배 때 교인들에게 도와달라 호소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오른쪽)가 2015년 12월 교회 인근에 거주하는 어르신께 우유를 전하며 활짝 웃고 있다.
2006년이 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처남이 후원을 약속한 3년이 다 됐기 때문이다. 처남은 우유 배달을 시작할 수 있게 첫 단추를 잘 끼워줬을 뿐만 아니라, 3년 동안 꾸준히 ‘매달 200만원 후원’이란 약속을 지켰다.
이렇다 할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교회 재정으로 우유 배달을 계속할까도 생각됐지만 이미 없는 재정을 아껴가며 구제와 장학 사업을 하는 상황에서 매달 200만원을 따로 책정하기는 불가능했다.
고민 중에 처남에게 후원을 더 부탁해 볼 요량으로 아내에게 요즘 처남 사업이 어떤지 넌지시 물어봤다. 염치없는 일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내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나를 맥 빠지게 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풀이 죽어 있는 내게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 주실 거라며 격려했다.
하루는 금호동에 혼자 살고 계시는 할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는 3년 전부터 우유를 잘 받아먹고 있다고 인사를 하곤 어렵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일산에 있는 아들 집으로 가게 됐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일산에 가서도 우유를 받고 싶어서요.”
처음 있는 일이라 금방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내가 주저하는 것을 아셨는지 할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와 금호동에서 처음 셋집을 얻은 이야기며, 먹고 살려고 안 해본 일이 없다는 이야기, 가난한 탓에 자식들의 공부를 제대로 못 시켜 미안하다는 이야기 등 눈물까지 흘리시며 고달팠던 삶을 털어놨다.
할머니께 “일산에 가셔도 우유를 배달해 드리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잘못 말했나 싶기도 했다. 우유 배달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한데 괜한 약속을 했나 싶었고 고독사를 막자고 우유 배달을 시작한 건데 원래 취지와 안 맞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한 약속을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우유 배달을 하길 잘했고 멈추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200ml짜리 작은 우유 한 팩을 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받는 사람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돌아오는 주일예배 때 교인들 앞에서 광고를 했다. “처남이 해 오던 우유 배달 후원이 이제 끊기게 됐습니다. 저를 포함해 우리 교인들 25명이 한 달에 10만원씩만 내면 우유 배달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세 가정이 후원 의사를 밝혔고 문자로도 후원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25명이 채워지기까지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한 교인은 “목사님, 우리 동네만큼은 고독사가 없어야죠. 정기적으로 후원은 못 하지만 힘닿는 데로 돕겠습니다”라고 연락해왔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홀몸어르신들을 위해 지갑을 열었다. 처남에 이어 교인들의 후원은 우유 배달을 이어가게 한 귀중한 마중물이 됐다. 하나님은 우리 교인들의 헌금을 과부의 두 렙돈처럼 기뻐하셨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8) “구제사업에 보태라”… 불교신자까지 후원 동참
유유 배달 등 교회 사역 언론에 소개되자 물품·재능 기부 등 곳곳서 도움의 손길
옥수중앙교회 성도들이 2016년 12월 옥수동·금호동 이웃 사랑의 김장나눔을 위해 교회에 모여 김장을 하고 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2011년 무렵부터 옥수중앙교회의 사역은 종종 언론에 소개됐다. 고독사 방지를 위한 우유 배달, 가난한 달동네 교회가 1년에 1억원 넘게 구제와 장학 사업을 벌인다는 이야기에 응원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도움의 손길도 이어졌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후원금을 보내왔다.
하루는 70대 어르신이 찾아왔다. 인사를 하더니 불쑥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3만원이 들어있었다. 어르신은 동대문에 사는 친구가 우유를 받아먹고 있는데 거동이 불편해 대신 봉투를 전해주러 왔다고 했다. 친구를 대신해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지만, 용돈을 아껴 후원금을 전해준 어르신도, 봉투를 전해주러 먼 길을 오신 친구 어르신에게도 감격스러울 만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자주 가는 교회 앞 카페 주인은 구제 사업에 보태라며 때마다 50만~100만원씩 후원하곤 한다. 그분은 독실한 불교 신자다. “절에 다니는 분이 교회에 돈 내도 되냐”고 농담하면 그는 “좋은 일에 종교가 무슨 상관이냐”고 답한다. 이웃을 돕는 일은 종교를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
물품이나 재능기부로 후원하는 분들도 많다. 인천의 한 기관에서는 종종 수십kg의 수입 고기를 보내온다. 고기를 나누는 일은 다른 일에 비해 일손이 많이 들지만, 고기를 받아 들고 좋아하는 이웃들을 보면 여간 기쁘지가 않다.
몇 년 전엔 우유 배달을 후원하는 한 회사의 도움으로 독거노인 3000가구에 해충기피제를 전달했다. 그해 여름은 유독 무덥고 모기가 많아서 어르신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 회사는 해충기피제가 어르신들에게 인기라는 소식에 바퀴벌레 살충제와 손소독제를 더 보내줬다.
내가 주일학교 시절 가르치던 한 학생은 치과의사가 돼서 어르신들에게 무료 틀니 시술을 해주고 있다. 기사에서 우리 교회 이야기를 보고 재능 기부에 나선 것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봉사가 곧 삶이었던 치과의사였다. 그는 “아버지가 목사님 소식을 듣고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며 자기도 기회가 되는대로 열심히 돕고 싶다고 말했다.
강북삼성병원은 2017년부터 우유 배달을 받아 드시는 은평구 관내 어르신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매월 은평구청으로부터 노인 관련 중증질환을 앓는 어르신 2명을 추천받아 검사비부터 제반 치료비용을 제공한다.
우리 교회가 매년 연말에 하는 ‘사랑의 김장 나누기’도 외부 후원이나 마찬가지다. 국민일보와 농협이 해마다 몇몇 교회에서 무료 김장 나누기 행사를 하는데 우리 교회가 추천받았다. 김장 나누기 행사를 할 때면 교인 수십 명이 자원봉사로 참여해 주최 측에서 마련한 배추와 양념으로 맛있는 김장김치를 담근다. 그렇게 만든 김치 수천 포기는 옥수동과 금호동에 사는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외국인 근로자 가정 등에 전달돼 겨우내 주민들의 식탁을 든든하게 책임진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19) ‘배민’ 만든 김봉진 “앞으로 우유 배달 후원은 제가…”
여유 생길 때 하라는 만류에도 사업 성공 전 어려운 가운데 후원 앞장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운데)가 2015년 4월 서울 배달의민족 사무실에서 이 회사 김봉진 대표(오른쪽), 펜타브리드 박태희 대표와 함께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후원협약식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사업을 시작하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개업예배를 자주 드리게 된다. 옥수중앙교회 성도 중에 유달리 개업예배를 여러 번 인도했던 청년이 있었다. 내가 결혼식 주례까지 섰던 청년이었다. 사업이 제대로 안 됐는지 사무실을 자주 이전했는데 그때마다 내게 예배 인도를 부탁했다. 개업예배를 자주 하다 보니 ‘이번에는 어떤 설교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도 했다.
2012년 12월쯤. 그 청년의 사무실 확장 감사예배를 인도했는데 예배가 끝나자 그가 불쑥 말을 건넸다. “목사님, 앞으로 우유 배달 후원금은 제가 내겠습니다.”
당시 그의 회사는 그다지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뜻은 고맙지만,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했는데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목사님이 전에 설교하시면서 여러분 가운데 반드시 우유 배달을 책임질 사람이 나올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때 말씀이 꼭 제게 하시는 말씀 같았어요.”
그때부터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우유 배달 후원에 앞장섰다. 처음 1년간은 매달 300만원을 후원하다 1년 후부턴 500만원씩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의 후원 덕분에 우유 배달을 받는 어르신도 100명 넘게 늘어 200명의 어르신을 살필 수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김봉진.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 ‘배달의 민족’을 만든 ‘우아한형제들’의 대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가난한 이들의 아픔과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만큼 그들을 돕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20년 전 그의 집에 처음 심방을 갔던 때가 눈에 선하다. 서울 중구 광희동에 다락방이 하나 딸린 작고 오래된 일본식 집이었다.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일곱 명이 한 집에서 다 잘 수 없어서 방에서는 할머니가, 네 아들은 다락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작은 식당을 하던 부모님의 잠자리는 식당에 딸린 쪽방이었다.
2016년엔 자동차 광고 촬영을 했다며 모델료 전액을 후원금으로 가져왔다. 매달 후원해주는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말렸지만, 그는 기어이 봉투를 내밀었다. 사업차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우유 배달 이야기를 했고 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많은 사업가들이 우유 배달 후원자가 됐다. 지금 우유 배달을 후원하는 기업들 대부분은 그를 통해 연결된 회사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많은 눈물을 뿌린 권사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신앙생활을 착실히 해오던 그는 2017년 우리 교회 안수집사로 장립을 받으며 든든한 동역자로 내 곁을 지키고 있다.
그의 사무실에서 개업예배를 드릴 때 나는 종종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을 주제로 설교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역경의 열매] 호용한 (20) “목사님, 골드만삭스가 우유배달 후원한대요!”
김봉진 대표 회사에 투자하는 과정서 교회의 어르신 섬기는 이야기 듣곤 감명 큰돈 쾌척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왼쪽 세 번째)가 2017년 10월 서울시청에서 진행된 ‘서울시 시민봉사상 시상식’에서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활동으로 대상을 수상한 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네 번째), 이재현 골드만삭스 전무(첫 번째)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늘 우리의 계획보다 앞선다. 그의 광대하신 은혜를 우리는 짐작조차 못 한다. 2015년 5월쯤이었다. 우유 배달을 후원하던 김봉진 집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마 전 한 대형투자회사에서 투자를 받았는데 그 회사 관계자와 며칠 후에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그러라고 하고는 어떤 회사냐고 물었다.
“골드만삭스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나 보던 세계적 투자회사가 아닌가. “골드만삭스가 왜 우리 교회에 온다는 거야.” “우리 회사가 우유 배달 후원하잖아요. 목사님도 뵙고 겸사겸사 우유 배달 이야기도 듣고 싶대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골드만삭스가 우리 교회를 방문한 건 감사를 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골드만삭스가 김 집사 회사에 거액을 투자하는 과정에서 우리 교회에 매달 500만원씩 후원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후원이 실제로 잘 이뤄지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며칠 후 김 집사는 골드만삭스 상무이사와 함께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금융권 전문가답게 재정 부분을 냉철한 눈으로 들여다 봤다. 김 집사 회사에서 언제부터 후원받았는지, 후원금 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잔액은 없는지 등 후원과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을 차분하면서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난 숨길 게 없던 터라 묻는 말에 그대로 답했다. 자연스레 옥수동과 금호동이 과거에 얼마나 가난한 동네였는지, 지금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동네 곳곳에 외롭고 소외된 어르신들이 얼마나 많이 살고 계시는지, 교회가 재정을 아껴가며 이웃들을 어떻게 섬겨왔는지까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상무이사는 어느 순간부터 질문하지 않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며칠 후 다시 김 집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법 흥분한 목소리였다.
“목사님, 놀라지 마세요. 골드만삭스가 우유 배달을 후원할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골드만삭스가 후원을 왜.”
“목사님 이야기에 감동받았나 봐요. 아무 데나 후원하는 곳이 아닌데 자기네들끼리 논의했던 것 같아요.”
김 집사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 기도하면서 기다려보자고 했다. 마치 자기가 후원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김 집사의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흥분이 됐다. 3개월 후 골드만삭스는 정말 우유 배달을 후원하겠다고 연락해왔다. 약속한 후원금은 기대 이상으로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2016년 우유 배달을 서울 시내 여섯 개 구로 확대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계적인 기업을 움직여 우유 배달을 돕게 하셨다.
최근에도 골드만삭스는 우유 배달에 10만 달러를 후원하기로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구호의 일환으로 전 세계 병원이나 자선단체를 후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 배달’과 삼성서울병원 단 2곳만 지원 대상이 됐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21) 고국의 가난한 이웃 위해 국경 뛰어넘은 나눔 손길
신문에 난 우리교회 장학·구제 사업 듣고 바다 건너 미국·캐나다서도 후원 동참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오른쪽)가 2018년 11월 배달의민족 사무실에서 열린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후원의 밤’ 행사에서 임현숙 사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랑은 국경을 뛰어넘는다는 말처럼 구제도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옥수중앙교회가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다는 이야기에 바다 건너에서도 후원자들이 생겼다. 10여년 전 캐나다에서 국제우편을 한 통 받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심상철 강성옥 어르신이었다. 지금은 80대가 된 부부는 일찍이 캐나다로 이민 가 식품점을 하며 일가를 이뤘다. 신문에 난 우리 교회 이야기를 듣고 정성스럽게 쓴 손편지를 보내주셨다.
‘옥수동에 있는 작은 교회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매번 장학금을 준다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어요. 고국에 이런 교회가 있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용기 잃지 말고 귀한 사역 감당해가세요.’
편지 봉투 안에는 100달러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부부는 그 후로 매달 100달러씩 장학금을 보내오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시는 김종주 장로님 부부도 잊을 수 없다. 10여년 전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교회로 전화를 주셨다. 약속 장소에 나가 김 장로님 부부를 처음 뵀다. 장로님은 “요즘 세상에도 이런 교회가 있나 싶었다”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러면서 봉투 하나를 내미셨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교회의 구제 사역에 보탬이 되면 좋겠습니다.” 안에는 1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식사를 나누며 교회가 장학과 구제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고, 지금은 어떻게 이웃들을 돕고 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부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곤 연신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식사를 마칠 때쯤 장로님은 후원을 좀 더 하고 싶다며 은행계좌를 알려달라고 했다. 이미 전해주신 후원금도 너무 큰 돈이어서 사양했지만, 장로님은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그날 오후 교회 통장엔 500만원이 추가로 입금됐다.
1년쯤 지났을까. 김 장로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앞으로 매년 3000달러씩을 보낼 테니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유용하게 써 주세요.’ 매년 8월이면 김 장로님의 이름이 찍힌 3000달러가 통장 한 줄을 채운다. 고국을 생각하며 잊지 않고 마음을 써주시는 장로님을 생각하면 두고두고 감사할 따름이다.
여러 후원자의 도움으로 교회는 매년 1억원 가량을 장학과 구제 사업에 사용할 수 있었다. 2015년에는 김봉진 집사를 비롯해 몇몇 후원자들과 함께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을 설립했다. 후원자들에게 소득공제 혜택을 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교회 재정과 분리해 더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도 사단법인 설립이 좋겠다 싶었다.
사무실을 여는 날 벽 한쪽에 서울시 지도 한 장을 붙였다. 지도 위에 우유 배달 개수를 구별로 기록했다. 우유 개수와 지역은 계속 늘어나 지난해 12월부터는 서울 시내 16개구 2000가구 홀몸노인들에게 매일 아침 우유가 배달된다. 서울 시내를 넘어 전국에 계신 외로운 어르신들에게 매일 아침 우유로 안부를 전하는 날은 언제쯤 올까.
***[역경의 열매] 호용한 (22) 교회 규모 비해 큰 구제 사업에 “헌금 많겠지” 오해
사무원·관리집사 없이 교역자들 1인 2역 재정 아끼는 데 한뜻… 가난한 이웃들 섬기는 데 사용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지난해 8월 목양실 책상에 앉아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옥수중앙교회 목양실 가구들은 뭔가 어색하다. 탁자만 봐도 약간 아귀가 안 맞고 높이도 그렇다. 제 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인 중에 사무실 가구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집사님이 있는데 그분을 통해 얻어 온 가구들이다. 집사님은 “버리는 가구가 있으면 가져다 달라”는 내 말을 처음에는 무슨 말이냐며 목사님 방에는 새 가구를 놔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가 “돈 아끼고 좋은 일이다. 중고도 괜찮으니 가져다 달라”고 거듭 당부하자 부탁을 들어주셨다. 가구들은 높이도 너비도 다르고 색깔도 각양각색이지만 업무를 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 명품들이었다. 재정을 아꼈으니 그것으로 감사할 뿐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크지도 않은 규모의 교회가 매년 1억원 가량의 돈을 구제와 장학 사업에 쓰는 모습을 보고 ‘헌금이 많이 들어오겠지’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사정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내가 부임할 때 교회엔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 이들이 많았고, 대부분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제와 장학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면 방법은 한 가지, 재정을 아끼는 수밖에 없었다.
교회 사무원과 관리집사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부터 예배 후에 예배당을 정리하고 화장실의 미끈미끈한 물때를 청소하고 정수기 물을 갈았다. 담임목사가 팔을 걷어붙이자 다른 교역자들도 손을 보탰다. 예배당 전등 관리부터, 손님 접대, 난방 관리 등 모두 1인 2역을 감당하고 있다.
교역자들과 함께하는 점심 역시 7000원을 넘지 말자고 원칙을 세웠다. 가끔 교역자들에게 비싸고 좋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교역자들이 먼저 재정을 아끼는 모습을 보일 때 교회의 다른 재정도 아낄 수 있겠다 싶었다.
장로님들 역시 교회 재정을 아끼는 일에 마음을 같이 한다.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정 기간 당회가 사용할 수 있는 재정을 책정하는데 나와 장로님들은 그 재정까지도 가능한 한 아끼려 한다. 심방을 갈 때면 당회 재정을 사용하는 대신 장로님들이 번갈아 가며 끼니를 챙겨 주신다.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 교회는 1년에 5000만원 가량을 아낄 수 있었다. 조금 불편하고 소박한 길을 택했더니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렇게 아낀 돈을 고스란히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데 사용했다.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에서도 절약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사단법인을 만들면서 사무실을 우리 교회 안에 두고 사무실 관리도 최근까지 나와 교역자들이 함께 맡았다. 자연스레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은 행정비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전체 후원금 중 행정비로 들어가는 비율이 5퍼센트 이하다. 앞으로도 가능한 절약 원칙을 지켜 가려 한다. 조금만 더 수고하면 어르신 한 분께 우유 한 개를 더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23) 구제 사각지대 찾아 ‘6만원의 사랑 나누기’
교회 출석 할 수 없는 장애 어르신들께 기도와 함께 매달 필요한 생필품 전달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2018년 11월 배달의민족 사무실에서 열린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후원의 밤’ 행사에 참석했다.
운전할 때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사각지대’를 잘 살피는 것이다. 구제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최대한 많은 이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나름 신경을 쓰지만, 구제의 사각지대는 늘 발생한다.
교회에 출석하거나 걸어서 교회를 찾아올 수 있는 분들은 그나마 절기마다 하는 행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마저 어려운 이들은 도움을 받을 기회마저 잃고 만다.
한 달에 한 번 주민센터에서 추천한 지역 내 장애인 어르신들을 교인들과 함께 찾아가 기도하고 손을 잡아준다. 역경과 고난이 일상화돼 그저 무덤덤해진 오늘이 더 가슴 아픈 현장이다. 의료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30여년째 누워 있다가 얼마 전 돌아가신 윤명자(가명) 할머니도 그중 하나다. 금남시장 뒤편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내가 찾아갈 때마다 “못난 사람을 찾아주니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할머니는 왜소증을 앓는 3남매와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도 그렇지만 딸 역시 가엽긴 마찬가지다. 아들들은 이렇다 할 사회생활을 못하고 있어 딸은 수십 년째 거동 못 하는 어머니와 거동 안 하는 두 오빠를 둔 가장으로 살았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유성훈(가명) 할아버지는 30여년 전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잘라냈다. 할아버지는 그 몸으로 척추병을 20년 앓아온 아내의 욕창과 대소변을 받아냈고 10여년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다. 할아버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정신질환을 앓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고생 끝에 낙이라도 오면 좋을 텐데 할아버지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하반신 마비에 당뇨합병증으로 발이 썩어들어 가는 60대 박씨 할머니, 척추를 다쳐 누워 지내는 40대 황씨, 뇌병변 딸을 둔 불자 신씨 등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은 꿈도 못 꾼 채 하루하루 눈물 속에 사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기도 외에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생필품을 전달하기로 했다. 매달 어느 가정에 어떤 물건을 가져다 드렸는지 기록해 때마다 필요한 물건이 공급되도록 애쓰고 있다. 처음에는 생필품 5만원어치를 구입하다 최근엔 6만원으로 늘였다. 이름하여 ‘6만원의 사랑 나누기’다.
사랑나누기에는 교인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한다. 봉사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파트에 사는 30~40대 여집사님들이다. 옥수동과 금호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후에 이사 온 사람들로 과거 달동네 사람들과는 사고나 생활방식, 경제수준이 여러모로 다르다.
처음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봉사에 나섰던 이들이 한두 번 6만원의 사랑 나누기에 참여하면서부터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많이 바뀌는 것을 본다. 의무감이 아니라 이제는 자원하는 마음과 진심 어린 긍휼의 마음으로 가난하고 병들어 힘들어하는 이웃의 손을 잡고 기도해준다.
“아직도 제게 버려야 할 게 많네요. 건강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해요.” 사랑나눔에 참여하는 이들의 고백이다. 결국 구제는 남을 살리는 일인 동시에 나를 살리는 일이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24)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의 명령… 주님은 더 크게 갚아주셔
권사 한 분이 쾌척한 2000만원이 마중물… 2001년 이후 20억원 이상 구제사역에 써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오른쪽 두 번째)가 지난 3일 교회 인근 쌈지공원에서 부목사들과 함께 산책하고 있다.
구제의 핵심은, 뭔가에 대한 바람이 그 본질을 가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웃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명령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구제할 때 그것을 기억하시고 갚아주신다.
하나님은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셨다. 교인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헌금과 후원자들이 보내준 후원금을 모아 물 위에 떡을 던졌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날 후에 우리에게 떡을 돌려주셨다.
2001년 내 손에 들어온 2000만원을 교회 앞에 흘려보냈다. 고 한승호 권사님이 교회 정착금으로 쓰라며 주신 돈이었다. 그러자 교인들이 마음을 보탰고 그렇게 그해 장학금과 구제 사역으로 1억원을 흘려보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후 4년 만에 교회가 은행 빚 10억원을 갚았다는 것이다. 가난한 달동네 교회였지만, 우리가 떡을 흘려보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것으로 갚아 주셨다.
2001년 이후 교회는 20억원 이상을 가난한 이웃에게 흘려보냈다. 권사님이 주신 2000만원이 20억원의 종자돈이 된 것이다. 내가 2000만원을 장학금으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던 한 권사님은 3년 전 96세 나이로 소천하셨다.
“권사님께서 얼마나 귀한 일을 하셨는지 몰라요. 권사님 감사해요.”
세상을 떠나시기 전, 권사님의 손을 잡고 조용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권사님의 아들은 권사님 이름으로 장학금 5000만원을 다시 기탁하며 “어머니의 정성이 100배의 열매를 맺게 돼 감사하다”고 했다.
하나님은 교인들도 보내주셨다. 내가 부임하기 전 교회는 내부 갈등으로 몇 차례 큰 어려움이 있었고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떠난 교인들 가운데는 수십 명씩 모여 작은 교회를 세운 이들도 있었다.
교회를 떠난 이들에게 모(母)교회의 새로운 담임목사 소식은 제법 신선한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갓 부임한 젊은 목사가 선뜻 장학헌금을 내놓고 이를 계기로 교인들이 힘을 보탰다는 이야기는 모교회를 향한 그리움이 됐다. 그렇게 모교회의 달라진 모습에 교회를 떠났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떠났던 때와 마찬가지로 수십 명씩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돌아온 이들 역시 이웃을 위해 주머니를 열었다.
주변 환경도 많이 좋아졌다. 교회가 위치한 금호동4가 1528번지는 재개발이 안 된 곳 중 하나다. 도로 환경이나 치안이 좋지 않았는데 이제는 구청에서 가로등과 방범카메라를 달아주는 등 앞장 서 환경을 개선해주고 있다.
몇 년 전엔 교인과 주민들이 힘을 합쳐 교회 옆에 있는 쌈지공원을 새롭게 단장했다.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는 공원은 옥수동과 금호동 주민들이 즐겨 찾는 사랑방이자 주일이면 교인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쓰레기가 가득하던 이름뿐이던 공원이 하루아침에 소담한 공원으로 바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역경의 열매] 호용한 (25·끝) 이웃 섬김과 주일학교 살리는 것이 나의 꿈
통일 되면 북한 땅에도 우유 배달하고 청년들 위해 주일학교 교육 강화에 힘 쏟을 것
호용한 옥수중앙교회 목사가 최근 교회 목양실 서가 옆에서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로고 현판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처음 우유 배달을 시작한 곳은 서울 성동구 옥수동과 금호동이었다. 이제는 서울시 16개 구에 사는 홀몸노인 2000가정으로 늘어났다. 우유 배달이 늘면서 꿈도 조금씩 커졌다. 서울시 25개 구 전체에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를 배달하고 싶다. 나중엔 서울뿐 아니라 전국으로 꿈이 커질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문득 한마디를 던지셨다.
“통일되면 북한 땅에도 우유 배달을 해 주거라.”
짧은 한마디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다. 아버지의 말씀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나와 피를 나눈 형님 누님께 우유를 전해줘라’는 명령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통일이 되면 북한 땅에도 우유를 배달하고 싶다. 이름 모를 어르신들에게 우유를 배달하며 지금껏 못한 문안 인사를 하고 싶다.
또 하나 꿈이 있다. 주일학교를 살리는 것이다. 옥수중앙교회는 몇 년 전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느냐, 교육관을 마련하느냐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교회 근방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 새 예배당 건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요즘 추세에 맞게 예배당을 번듯하게 신축하고 주차장도 넓혀야 한다는 말은 일견 타당했다. 젊은 층이 늘어나면서 주일학교를 위한 교육관도 필요했다. 예배당 공간만으로는 늘어나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여유가 있어 예배당과 교육관을 모두 지으면 좋겠지만, 교회 형편이 녹록지 않았다.
기도 끝에 예배당은 리모델링하기로 하고 교육관을 구입하기로 했다. 결론은 단순명료했다. 우리 세대보단 다음세대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얼마 전엔 예배당 꼭대기 층에 있는 청년부실을 스타벅스처럼 리모델링했다. 금호역 근처 스타벅스 매장에 가끔 가곤 하는데 그 공간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었다. 청년들에게 스타벅스는 단순히 만나서 교제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문화였다.
청년들에게 ‘의무감으로 오는 교회’가 아니라 ‘찾아오고픈 교회’로 만들고 싶었다. 스타벅스에서 쓰는 탁자와 의자를 구입하고 가구 배치 역시 카페처럼 꾸몄다. 결과는 기대한 대로였다. 청년들은 주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교회에 찾아와 새로운 청년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올봄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교회 내 여러 사역이 위축됐지만, 12주 과정의 교사대학을 진행했다. 교사 역량 강화가 주일학교 교육의 밑거름이자 시작점이란 생각이었다. 올해 옥수중앙교회는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새로운 50년을 맞아 교회는 이웃 섬김과 더불어 주일학교 강화에 힘을 쏟을 예정이다. 주일학교 교육이야말로 개인을 살리는 일이자 한국교회 미래를 책임지는 일이다. 이것이 옥수중앙교회의 꿈이자 나의 꿈이다.
주어진 환경이 누군가에겐 축복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역경과 고난이 된다. 고민하고 선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적 요인도, 내가 선택하기만 하면 그에 상응한 결과물을 얻을 것 같은 요인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주신 도구다. 도구로서의 삶과 사역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