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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소산성
2024년 05월 20일(일요일)
산행코스 : 주차장(10:25) - 삼충사(10:35) - 영일루(10:50) - 군창지(11:00) - 반월루(11:10) - 태자골 숲길 - 사자루(11:20) - 고란사(12:00) - 낙화암(12:15) - 관북리유적 - 부소산성주차장(12:45)
산행거리 : 6.7km
부여왕릉원
부소산성 들머리
부소산성(사적 제5호)
부소산성은 백제시대의 중심을 이룬 산성으로 도성을 방어하는 핵심시설이며,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백제 성황 16년(538)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습니다.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띠를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홥된 복합식 산성입니다. 포고식 산성만이 백제시대의 것이고 나머지 두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대부분 흙으로 다진 토성으로 평상시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이용되었으며 유사시에 도성의 방어거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부소산문(扶蘇山門) 편액은 부여 출신의 서예가 무림 김영기(霧林 金榮基)의 글씨입니다.
안쪽 사비문(泗泚門) 편액
의열문(義烈門)
삼충사중건사적비
충의문
충의문(忠義門) 편액
삼충사(문화재자료)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1957년에 건립하였으며 1981년에 다시 지었습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때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에쓰다가 옥중에서 단식으로 죽은 충신입니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의 공격(660)에 맞서 백제의 요충지인 백강, 탄현을 방어하고자 한 충식이나 귀족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계백장군은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논산시 연산면)에서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백제의 명장입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9~10월 개최되는 백제문화재 때 세 충신에게 올리는 "삼충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삼충사(三忠祠) 편액
중앙 흥수, 좌측 성충, 우측 계백장군입니다.
남문지
남문지는 문지건물과 출입계단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문지건물에서는 기둥자리 4개소가 확인되었습니다. 출입계단은 건물유구 남측으로 바로 이어지며 전체5단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문지와 성벽의 연접부는 커다란 석재로 마감하였습니다. 문지는 추후 동편으로 확장되어습니다.
부소산성 성벽
영일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영일루(迎日樓)는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누각으로 백제 시대의 영일대가 있던 곳입니다. 지금의 건물은 1871년(고종8)에 세운 흥산 관아의 성문인 집흥루를 196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운 뒤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이곳은 사비도성 전역을 볼 수 있는 장소로서 지금은 메워졌지만 해와 달을 비추던 월함지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을 뿐만 아리라 동쪽으로 청마산성과 나성을 살필 수 있어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부소산 서북쪽 봉우리에 달이 지는 모습을 보던 송월대와 동남쪽 봉우리에서 해를 맞이하던 영일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제인의 서정적인 멋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일루(迎日樓) 편액은 부여 흥산 출신의 서예가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 1909~2000)의 글씨입니다.
인빈출일(寅賓出日) 편액은 청양 정산 출신 서예가 정향 조병호(1914~2005)의 글씨입니다.
군창지 유적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군창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9호)
군창지는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부소산성의 군사용 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입니다.
이곳에서 1915년에 불에 탄 곡식(쌀, 보리, 콩)이 발견되어 창고 터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두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불에 탄 쌀이 다량으로 수습되었으며,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에 건물을 배치한 백제시대 'ㅁ'자형 대형 창고 건물의 기단부가 발견되었습니다. 각 건물터에서 백제시대에 가공된 주춧돌이 확인되었으며, 토기 및 기와 조각등이 수습되어 백제 시대 군창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조각이 출토되어 후대까지 부소산성이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소산성군창지 표지석
반월루(半月樓)
반월루는 부소산 서남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누강입니다. 이곳에서는 부여읍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수루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오래전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었는데, 이 자리에 1972년에 반월루를 세웠습니다.
반원루는 부소산성의 옛 이름인 반월성(半月城)에서 따온 이름으로 반월은 멀리 흐르는 백마강의 모습이 마치 달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반월루(半月樓) 편액은 부여 출신의 국무총리 김종필(1926~2018)의 글씨입니다.
반월루에서 바라본 부여군
태자골 숲길
사자루( (泗泚樓)
사자루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送月臺)에 있는 누각입니다. 조선 시대의 임천의 관아 정문(개산루皆山樓)을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사자루라 하였습니다. 건물 앞면에는 대한제국 고종으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李堈 : 1877~1955) 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건물을 옮겨 세울때 '정지원'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백제 시대의 '금동정지원명석' 여래삼존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사자루(泗泚樓)의 편액은 1919년 5월에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李堈)의 글씨입니다.
백마장강(白馬長江) 편액은 조선말기의 명필인 해강 김규진( 海岡 金圭鎭 1868~1933)의 글씨입니다.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마강
고란사로 내려갑니다.
고란사
고란사는 부소산의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입니다.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백제 아신와(?~405)때 혜인대사가 세웠다는 설과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타사암)에서 떨어져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 때 세웠다는 설이 전하는데 자세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선 시대의 산수도인 이윤영의 '고산산도(1748)'를 통해 옛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 고란사가 세워지기 전에는 아름다운 주위 경관을 볼 수 있는 백제 왕의 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고란사 극락보전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
고란사(皐蘭寺) 편액은 조선말기의 명필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의 글씨입니다.
고란사 내부
아미타삼존불(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8호)
극락보전에는 아미타 부처님과 대세지 보살님, 백의 관음보살님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고란사의 목조아미타여래 좌상 및 보살 좌상은 양어깨가 모두 덮이도록 옷과 편삼을 걸치고 옷자락을 둥글고 투박하게 늘어뜨린 모습은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입니다.
영종각(靈鐘閣)
보통 다른 사찰에서는 범종이라고 하지만 백마강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타종하는 거라 영종이라고 합니다. 영종은 관람객 누구나 한번씩 쳐 볼 수 있습니다.
고란사 삼성각(三聖閣)
삼성각 내부
고란정(皐蘭井)
고란약수
약수를 한잔 마시면 3년이나 젊어진다는 고란약수
뒤돌아본 고란사
백화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백화정 (百花亭) 은 낙화암(타사암) 위에 있는 정자입니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될 때 이곳에서 목숨을 버린 궁인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세운 것으로 전합니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 소도아가 혜주에 귀향을 갔을 때 성 밖의 호수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射百花州)'라는 시에서 유래합니다. 이곳을 감싸고 도는 백마강과 주변의 산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경이 펼쳐져 부여를 찾는 관광객이면 반드시 들리는 명소입니다.
백화정(白花亭) 편액은 석정 안종원(石丁 安鍾元. 1874 ~ 1951)의 글씨입니다.
낙화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큰 바위입니다. 바위는 50m 정도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강물에 이르러 한 번 꺾인 단이 있습니다.
이 단을 이룬 암벽에 송시열이 '낙화암(洛花岩)'이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때 궁인들이 화를 피하지 못할 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부여성 북쪽 모퉁이 큰 바위에 올라 몸을 던져 순절하여 '타사암( 墮死巖)'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훗날 사람들이 궁인을 꽃에 비유하여 이곳을 낙화암으로 불렀습니다.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방향 파노라마
서복사지(충청남도 기념물 제181호)
부여 부소산성 서복사지는 목탑지 기단 심초석에서 금동제과판의 출토됨에 따라 왕실의 기원사찰로 여겨지는 백제시대 사찰터입니다. 이 절터는 중문지, 탑지, 금당지가 남북일직선상에 배치한 방식으로 주위에는 금당지의 좌우에 있는 동서회랑과 중문지에 연결되는 남회랑이 구획된 형태입니다. 이곳에서는 소조불상, 연화문 수막새, 벽화편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관북리 유적
산성 앞의 너른 땅은 왕궁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입니다.
건물은 없고 기단이었던 돌만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부소산성과 더불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아직까지 왕궁터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가 확인되지 않아 계속 발굴해 가고 있습니다.
부여객사
부여 객사는 부여현의 숙소로 조선 시대 관아 건물 중 하나입니다. 객사는 고려시대부터 각 고을에 설치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사신이 머물 수 있게 만든 숙소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부여 객사는 부풍관(扶風館)이라고 하며, 1869년(고종6)에 전형적인 솟을대문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한때 국립부여박물관의 진열실로 사용하면서 내부가 조금 변형되었으나 기본 구조는 그대로입니다. 이곳을 관람하면서 조선 시대 숙소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볼수 있습니다.
부여 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부여 동헌은 현감이 공무를 보던 조선 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입니다. 1869년(고종6)에 새로 지었고, 1985년에 수리하였습니다.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화려한 팔자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초연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곳은 '도강영당"입니다. 조선 말 부여현의 내야 건물로 해방 후 귀속재산인 가옥을 수리한 곳으로 1971년 국가의 보조를 받아서 9평의 영당을 신축하고 홍가신, 허목, 채제공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도강영당
'부여 내동헌'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
부여왕릉원(사적 제14호)
부여왕릉원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의 백제왕릉입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군은 중앙의 왕릉군 7기입니다. 이들 고분은 모두 왕과 왕족들의 분묘로 생각되며 백제 후기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입니다. 석실의 천장구조는 초기에는 아치형에서 정갈한 육각형 또는 사각형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동하총의 네벽에는 사신도가, 천장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는 벽화분으로 중요한 학습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7기의 왕릉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의자왕단
백제국의자대왕단비
능산리사지
능산리사지는 567년(위덕왕13년) 백제 위덕왕이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백제 왕실의 기원 사찰입니다.
1992~2011년까지 1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을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한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시대 가람 형식에 해당함이 밝혀졌습니다. 이외에 사지 내에서 확인된 목교와 석교 등을 통해 당시 백제의 우수한 건축기술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1993년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어 백제인의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술과 예술 역량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은 절이 세원진 연대와 공양자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능산리사지 좌측으로 나성이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나성은 사적 제58호, 삼국중에서 최초로 축성되었으며 백제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8km를 쌓은 외곽방호시설입니다.
부여 숭목전
백제는 온조왕이 건국한 이래 모두 31명의 왕이 통치하였던 나라입니다. 도읍의 위치와 시기에 따라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로 구분됩니다. 이중 사비백제는 성왕이 도읍을 부여로 한 538년부터 660년까지이며, 마지막 왕은 의자왕입니다.
숭목전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비롯하여 사비백제의 성와,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장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거행하는 공간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비백제 왕족의 무덤인 능산리고분군(왕릉원)에서 매년 대왕제를 거행함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제례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이에 문화유산의 품격을 드높이며 더불어 찬란한 백제문화를 이룩한 사비백제 왕조의 덕을 기리고자 이곳에 숭목전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숭목전은 문화유산관광자원개발사업으로 2016년부터 각고의 노력 끝에 2019년에 준공하였으며, 향후 매년 부여군민을 비롯한 백제의 후예가 한마음으로 모여 백제문화제 기간에 제례를 거행하고 덕을 기리고자 합니다.
숭목전
첫댓글 역사 공부 많이 하고오섰네요 남긴 추억 즐감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멋진사진 잘보았구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