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박물관에는 삼국-고려시대부터 조선초기, 조선중기, 조선후기, 근대 명인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서예 발전과 서체의 변화를 반영하는 서예(書藝), 도화(圖畵) 등 170여 점의 유물전시회가 상시 열리고 있다.
서예박물관에 들어 서면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가 제일 먼저 눈길을 끈다.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암석(岩石)에 동물이나 물고기 등의 그림을 새긴 것을 말하며우리나라를 비롯해 시베리아, 몽고 등의 동북아시아 대륙과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 암각화로는 울산 태화강 강변의 반구대와 천진리, 고령의 양전동 등이 유명하다.
서예(書藝)는 한자(漢字) 문화권인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발달하였으며 작자의 심상(心狀)을 표현하는 예술이자 정신수양의 일환으로 애호되어 왔다. 양반계층이나 선비들이 고결한 정신과 품위를 갖추기 위해 부단히 글씨 쓰기를 연마하였고 서예는 사람의 중요한 교양으로 인격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였다.
서예(書藝)는 붓과 벼루, 먹, 종이 등이 필수 도구이며 서예의 서체는 문자형태의 발달과 변화에 따라 전서(篆書), 예서(예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로 나누어진다.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 하였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하였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에는 일본인들이 쓰는 서도(書道)라고 하였다.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에서 실시하는 미술전람회가 처음 열리는데 글씨 부분이 함께 참여하게 되어 우리의 독자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고려시대 서예
세계 문화사 속에서 글씨가 예술의 한 분야로 우대되는 것은 중국 문화권 뿐이다. 중국 문화권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자(漢字)의 뿌리는 상형문자(象形文字)라서 글자의 기본 모습이 회화성(繪畵性)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글씨와 그림의 뿌리는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原)'이란 개념도 등장했다.
한자는 그림으로 시작해 점차 기호로 변화 발전하게 되었고 중국 고대 역사가 시작되는 하(夏), 은(殷), 주(周) 나라의 서예 관련 유물을 통해 서예의 기원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서예가 시작되는 삼국시대를 비롯해 이를 발전시켜 나간 통일 신라시대와 서예의 꽃을 피운 고려시대의 다양한 서예 유물을 보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서예가 우리 문화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고려말 조선초에 여러 서체가 혼용되었지만 신진 성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송설체가 나라의 글씨체로 자리 잡아가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있었다. 안평대군은 20대에 송설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이루었다. 세종 때의 집현전 학사들과 문종(文宗)도 이를 따라 썼고 성종(成宗)에 의해 조선에 정착하게 되었다.
안평대군(1418~1453)이 쓴 「궁중행락사」
이 작품은 안평대군이 쓴 행초서를 목판에 새긴 뒤 탑본하여 첩으로 꾸민 것이다. 내용은 중국 당(唐) 나라의 시인 이백과 송(宋) 나라의 문인 왕안석 등이 지은 오언율시로 구성되어 있다. 예술 재능을 지닌 안평대군은 원(元) 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서풍을 익혀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송설체(松雪體) 대가로 평가받았다.
조선중기
조선중기에는 고려말에 들어온 송설체가 토착화되어 조선식 송설체인 촉체(蜀體)로 변모되었다. 송설체의 부드러움을 제거시키고 왕희지의 서체를 바탕으로 강하고 단정한 석봉체(石峰體)가 등장하였다. 또한 왕희지체를 완전히 소화하여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서체를 탄생시켰다.
심환지가 쓴 편지글 (沈煥之 筆 簡札)
만포(晩圃) 심환지의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휘원(輝元) 요직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심환지는 사도세자를 배척한 노론 벽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정조와는 정적 관계로 알려져 왔다. 근래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수 백통의 비밀 편지가 공개되면서 정사를 긴밀하게 논의했던 군신 관계였음이 밝혀졌다.
조선후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고증학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서법 이론을 주장하며 추사체가 등장하여 서풍이 크게 변하였다. 추사의 지인과 제자들도 추사체를 추종하였는데 정수를 체득하지는 못하였다. 구한말에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더 이상 서예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주자성리학을 지키며 망국의 울분을 달래던 유학자들에 의해 조선 선비의 서법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이하응이 쓴 「낙지론」 (李昰應 筆 樂志論)
흥선대원군 석파 (石波) 이하응이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을 행서로 쓴 병풍이다. 이하응은 추사 김정희의 서풍을 그대로 따른 제자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특유의 철필로 쓴 듯 날카로운 개인 필법을 완성하였다. 이 서예 필법을 묵란화(墨蘭畵)에도 응용시켜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 글씨는 말미에 '노석(老石)'이라 쓰여 노년에 쓴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어필(御筆)
조선시대 임금이 지은 글을 어제(御製)라 하고, 임금이 쓴 글씨를 어필(御筆)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임금은 종종 신하나 가족에게 어필을 써서 내렸고, 궁궐 전각의 현판을 썼으며 선대 임금이나 충신의 비문을 쓰는 등 다양한 필적을 남겼다. 역대 임금의 서풍은 옛 명필이나 선왕들의 서풍을 따르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고상한 품격을 지닌 조맹부의 송설체가 가장 애호되었고 왕희지의 진체 또한 이상적인 글씨로 인식되었다.
영조 어제 어필 척설험풍 징(英祖 御製 御筆 尺雪驗豊徵)
영조 (1694~1776)가 글을 짓고 쓴 〈척설험풍 징 尺雪驗豊徵. 칠십육 삼류지 七十六 三柳枝〉를 나무판에 새긴 뒤 탑본한 것이다. 이 어필을 새긴 원래의 목판은 "御製御筆 어제 어필. 朝來心有喜 조래심유희 尺雪驗豊徵 척설험풍 징 七十六 三柳枝 칠십육삼 류지, 였다. (임금이)"글을 짓고 글을 쓰니. 아침이 되어 마음에 기쁨이 있으니, 한 자나 쌓인 눈은 풍년의 징조다. 일흔여섯에 세 버들가지로"라는 뜻의 시구다.
근대명인
구한말에서 광복 이후에 활동했던 근대 명인들의 글씨에서 다양한 서풍을 살필 수 있다. 추사의 말년 제자 소치, 허련을 비롯하여 정학교, 김성근, 김가진등은 조선후기 이래의 전통적 서풍을 구사하였다. 독립운동가 조소앙이나 특유의 한글체를 창안했던 손재형등은 강한 개성을 보여주었다.
해서 대련 (楷書對聯)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이 해서체로 쓴 서예 대련이다. 이 작품은 귀국 이듬해인 1946년 서울 혜화동의 이길호(李吉鎬)라는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쓴 것이다.
도화(圖畵)
옛날에는 사진기가 없으니 종이에 붓으로 그림을 그려 기록으로 남겼다. 궁내(宮內)에는 도화사(圖畵寫)사들이 왕실의 행사를 화선지에 그렸고 어진(御眞)을 그리는 도화 사는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대표적으로 정조의 능행차나 혜경궁 홍 씨의 진찬연 그림을 볼 수 있다.
고려 때 문인들 사이에서 묵죽(墨竹) 묵매(墨梅)가 유행되었고 , 조선시대에는 사군자 그림에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이정, 유덕장, 신위는 묵죽으로 어몽룡은 묵매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묵란(墨蘭)으로 유명하다.
전시된 작품으로는 지운영(池雲英1852~1935) 작품인 어부도 등과 김규진 작품인 풍죽도(風竹圖), 김유탁 작품인 매화도(梅花圖) 난초(蘭草) 국화(菊花)등 사군자(四君字)등의 다양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지운영이; 그린 어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