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예)將星 넷 곧 만난다
난 은혜만 입었지, 보답을 잊고 사는 사람이다. 의도적인 자기 폄훼가 아니다. 진실이 진실을 말할 따름이라고나 하자.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나도 명색이 인간이라, ‘원수(怨讐)’가 있다. 날 피폐한 삶으로 몰아갔었던….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고복수의 ‘타향살이에 목메는 처지인데, 그 원수들은 다행히 나를 지금도 비껴 나간다. 태풍 전야의 고요를 늘 체험하며 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넘긴다. 그러나 남을 용서하라는 말은, 먼저 남에게 용서를 받으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엉망진창인 일흔다섯 평생을 보내고 보니 할 말도 많을 수밖에.
다시 ‘은혜’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은인(恩人) 곁이나 고향 근처에서 죽는 건 우연인지, 아니면 섭리인지….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한다. 더구나 나는 만고의 죄인 아닌가?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에, 은인과 고향을 본 것이다. 아둔하기 짝 없지만, 그런 오묘함엔 온 몸이 전율할 때도 있다. 살아 있다는 증거다.
병 주고 약 준다 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잃게 하시더니, 나를 모부대(母部隊)에 지척에 데려다 놓으셨다. 그분 덕분이다. 내가 엄마와 고향 내음을 거기서 맡으면서 이제 스스로, 상실의 충격을 상쇄시켜 나가게 된 것은! 그래 차라리 불가사의라 하자. 내가 고고의 소릴 냈었던 밀양시 단장면보다, 26사단이 주둔한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가 더 그리운 걸 어쩌랴. 사흘이 머다 하고 발길을 그리로 옮기는 데도 그러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그분의 은혜(은총)를 강조하지 않고서 어찌 은인이며 고향을 입에 올릴 수는 없다.
군(軍)! 다시는 이런 얘길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 고백한다. 반세기 전, 군에서 죽을 만큼 힘들게 생활했었다. 아니 죽을 뻔했었다. 엄마 영혼이 와서 지켜 주었기 때문에 극복이 가능했고말고. 제대복으로 갈아입는 순간 나는, 모든 고통과 시련이 내 자산이란 걸 깨달았다.
그로부터 15년 후, 나는 공군 제5672부대(현재 3875부대)와 인연을 맺게 된다. 궁극적으로 보면 실패로 끝날지 모를 내 인생에 큰 변곡점을 찍어 준 게 바로 그 부대, 다시 말해 3875부대(5전투비행단)이었다. 누가 봐도 과정이야 화려했겠지. 나는 비행단장 넷과 친교를 가졌으니까. 이젠 맘 놓고 이름을 밝히련다. 김진삼/ 김부곤/ 김영곤/ 주창성 준장이다. 다리는 내 노인 학교였음은 두말 하나마나. 그들은 이랬었다. 내가 처음 노인학교 제자 87명을 인솔해서, 대북에 4박5일 여행을 떠날 때 공항까지 왕복으로 부대 버스를 내 주었다. 부산일보 대강당에서 120명이 졸업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 석 대다. 그날 비록 임의 단체이긴 하지만, 강상길 중사가 이끄는 군악대가 내내 연주로 축하해 줬고. 심지어는 군견 훈련 모습을 어린이들에게 견학 시키고 싶다고 했더니, 단장은그 소원도 들어 주었다. 녀석들이 엄청나게 좋아할 수밖에. 거무튀튀한 엄청나게 큰 옹벽을 벽화로 장식해야겠다는 내 얘길 듣고, 단장은 며칠 동안 준위를 책임자로 병력을 보내 준다. 20년 묵은 떼를 벗겨내고 기초 페인트칠을 해 줌으로써 위대한 탄생은 그렇게 이뤄졌다. 아무리 얘기해 봤자, 끝이 없다. 하나만 더! 걸핏하면 제초 작업에까지 병사들을 보내 줬다.(새내기들은 그게 되레 부대에 근무하는 것보다 낫다더라.)
나야 뭐 수당 받고 호국 문예 심사위원장을 10년 정도 한 게 전부라고 할까? 아니 참, 그 무렵 부대 도서관에 책을 좀 보낸 게 있긴 하다. 그건 당시 양하윤 부사관 덕분이다. 그의 제안에 따랐다는 의미다. 박철백 동양화가로부터 대형 무궁화 그림 한 점 받아, 단장실 올라가는 계단 벽에 걸게 한 것도 있지 않느냐고? 사실이긴 해도, 표구는 부대 예산으로 했으니, 부끄럽다. 뒷날 공군을 빛낸 인물로 선정된 양하윤 원사가 큰 구실을 했다.
그리고 헤어졌다. 나는 소용돌이며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렸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타관 땅에 누워 있더라. 정신을 차린 곳이-물리적으로-26사단. 거기서 나는 은인 둘의 전화번호를 알게 된다. 26사단장 덕분이다. 위의 네 장군이 아닌, 전 군수사령부 행정과장 김재옥 대령과 군악대장 이인화 소령이 그 둘이다. 큰 징계를 받을 만한 사건에서 그 둘이 나를 건져 주었던 것이다. 사족 하나. 만약 그때 잘못되었더라명? 난 식물인간이었으니까, 결과는 뻔하다.
하지만 여기 올라 와서도 이 네 장군의 근황을 알 수 없었다. 그게 안타까울 수밖에.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이 아니라, 추억에의 여행에 동참을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창성 단장은 향군 일도 보고 했으니, 상대적으로 찾기 쉬웠다(아직 연락한 건 아니고). 셋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난 나의 ‘육군 26사단’에 거의 정신을 앗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아는 동년배 예비역 공군 장성을 만난 것이다. 아침에 큰손자에게 뭘 전하려고 이미 닫힌 후문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제복-스쿨 폴리스?-을 입은 예순 살 중반의 남자가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는 열쇠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 뒤에 다시 몇 마디 말이 오간 뒤에 나는 그의 전직(?)을 알았다. 공군 예비역 장성이라는 것! 위 네 장군의 이름을 들먹였더니, 그중 검지를 세워 흔든다. 셋은 안다는 뜻이다. 우리 둘은 ‘공군가’를 불렀다. 하늘을 달리는 우리 꿈을 보아라…
아들이 30개월 몸담았었던 공군이다. 녀석은 지금 이승에 없다. 내일이면, 공군과의 인연이 실린 졸저를 들고 학교에 들른다. 장군에게 증정하려고. 그러고 보니, 뼈를 묻을 이 근처에 은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19년 전 나를 소설가로 등단시켜 준 구인환 교수도 만나야 한다. 여생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찾을 만큼 찾는다. 83년에 나를 수필가로 추천해 준 조경희 회장의 묘소 참배도 당연지사. 다 적지 말자. ‘하늘’로 시작되는 ‘공군가’를 다시 부르게 해 주신 ‘그분’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게 내 임무다.
15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믿음이 약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오늘 당신께서 만나게 해 주신 전우 덕분에 공군가를 다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하늘 당신께서 창조하셨으니, '공군가'를 통해 더 당신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소리 높여 불러 보겠습니다. 저희 기도로 받아 주시렵니까?
하늘을 달리는 우리 꿈을 보아라/ 하늘을 지키는 우리 힘을 믿으라/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가슴 속 젊은 피를 저 하늘에 뿌린다/ 하늘은 우르의 일터요 싸움터/ 하늘은 우리의 고향이요 또 무덤/ 살아도 되살아도 정의와 자유/ 넋이야 있고 없고 저 하늘을 지킨다(최용덕 작사/ 김성태 작곡)
최용덕(1898-1969)
초대국방부 차관/ 공군사관학교장/공군참모총장 역임
1916경 :중국육군군관학교 졸업-동교 교관-중국공군지휘부참모장
1940-46 : 광복군 총사령부총무처장 사령관
1948 : 대한민국 육군소위-대위 특진
1950 : 공군 준장
1952 :공군참모총장(중장)
육군 공군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 육군 소위로 임관/ 넉 달 뒤 대위 특진, 다시 2년 만에 공군 준장, 같은 ㄱ간이 흐른 뒤 공군 중장!
그의 '공군가'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공군 정신이 담겨 있다. 공군가! 불러 볼 만한 군가다.
첫댓글 +평화를 비니다.!
이원우 작가님 반갑습니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관심있게 찾아 보았습니다.
앞으로 서로 교루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