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88) 상상력 개발 유형학습 - ① 마이너스 상상력/ 시인, 순천대학교 명예교수 송수권
시 쓰기란 결국 ‘발상과 표현’의 문제다. 발상은 상상력의 영역이고, 표현은 언어의 영역이다. 앞 장에서 상상력이란 과거 체험했던 사물의 이미지를 언어로 장악하는 힘, 즉 재생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상상력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 알아보고 실제로 응용할 수 있도록 상상력 속에서 떠오르는 세계, 즉 그 정신에 의한 유형학습으로 들어가보자.
콜리지(S. T. Coleridge)는 상상력을 제1 상상력과 제2 상상력으로 나누고, 제1 상상력은 한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 의식 수준이며, 제2 상상력은 개인의 독창적인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의미 창조를 뜻한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상상력이란 제2 상상력을 말함은 물론이다. 그것은 관습에 물들지 않고 유통언어, 즉 소비언어나 상업성 또는 선정성이나 천박한 자본주의의 광고언어에 물들지 않은 독창적인 상상력이다. 발상(감수성)이 신선하다거나 새롭다거나 때 묻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① 마이너스 상상력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竹篇) Ⅰ―여행〉 전문
앞의 시는 5행으로 된 짧은 시이지만 단 한 군데도 유통언어나 소비적인 언어로 물든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동시에 절제된 언어로 상상력을 숨겨둠으로써 독자를 낯설게 하기도 하며 즐겁게도 하고 당혹하게도 하며 현대시를 읽는 고급 독자를 겨냥해 재미와 사유의 깊이를 만끽하게 한다.
따라서 소비성의 천박한 언어에 길들은 대다수의 독자층에게는 재미없는 시가 될 것이다. 그 대신 현대시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바탕을 갖춘 고급 독자는 상상력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어차피 ‘지적(知的) 수준에 의한 고급 오락’이란 엘리엇의 말도 있다. 이를 심도 있게 분석해보면 자본주의의 일회적 삶이나 소비재로 떨어진 시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독서와 서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어느 시대에나 문학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이 두 형태는 아무런 관계없이 각기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는 참된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문학이다. 그것은 학문을 위해 또는 시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영위되고 조용히 엄숙하게 걸어간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주 느려서 한 세기 동안에 유럽에서 겨우 한 다스의 작품이 나올까 말까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그대로 지속된다.
가짜 문학 역시 학문 혹은 시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에 의해 영위되어 질주한다. 그 당사자들은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그들은 매년 수천이 넘는 작품을 시장에 내보낸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대체 그 작품은 어디로 갔느냐고. 그렇게 일찍부터 떠들썩하던 그 명성은 어디로 갔느냐고. 그러므로 이런 문학은 흘러가는 문학이라 부르고, 참된 문학은 머물러 있는 문학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이 말을 축소하여 시, 즉 상상력에 대입해본다면 때 묻고 낡은 상상력(감수성)으로 씌어진 시는 절대로 고전화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잠시 말이 비끌렸지만 다시 〈죽편(竹篇) Ⅰ―여행〉으로 돌아가보면, 이 작품은 대중의 소비성에 의해 조작된 가짜 시가 아니라 참된 상상력에서 나온 ‘머물러 있는 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로트만(Y. Lotman)이 말한 숨겨진 상상력 속에 들어 있는 인생론적 비의(秘義)는 고독과 염결의 시간 속에 삶의 의지를 세워두려는 인식의 무한성에서 온 상상력의 ‘시’라는 뜻이다. 원관념(T)인 수직성의 대(竹)를 수평으로 달리는 기차(V)로 띄워 여행을 하는 즐거움의 상상력으로서 시인의 정신세계인 이데아(고향)를 찾는 데서 감수성의 통일이 이루어져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고 있다. 더구나 전혀 이질적인 “대”라는 식물성 이미지와 딱딱한 광물성 이미지인 “기차”의 병치는 정서를 환기시키면서 시적 효과를 십분 고조시킨다.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인 ‘곡선의 상법(想法)’으로서, 노자의 ‘곡즉전(曲卽全)’이라는 코드가 꽂혀 있는 것이다. 동시에 노자(老子) 류(類)의 시가 범하기 쉬운 도학적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강점을 지니고 있다. “대꽃이 피는 마을”은 시인의 생 체험에 들어 있는 고향, 즉 회감(懷感)의 정서로 읽힌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유형에서 보면 재생적 상상력에 해당된다.
다시 말하면 대의 옹이진 마디와 마디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의 공간으로서 ‘푸른 기차의 칸칸’으로 비유되는, 백 년까지 걸리는 견인의 여행이면서 시간이다.
‘가까운 길도 돌아가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스노비즘(snobbism, 속물주의 근성)의 경구가 아니라 곡선이야말로 신(神)이 만든 선(線)이고, 직선이야말로 악마가 만든 선(線)이며 죄악(분리파)이라는 시적 주제를 교묘히 감추어둔 것이다. 그러므로 푸른 기차를 타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여행이야말로 백 년이 걸리는 ‘느리게 사는 삶’이며 완전한 즐거움의 삶이다.
따라서 다섯 줄의 짧은 시에서 분석해낼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기상천외하다 할 것이며, 노자의 《도덕경》을 무색하게 하는 상상력인 곡즉선(곡선이야말로 완전하다는 뜻)이라는 코드(시인의 정신)가 꽂혀 있어 이 시는 우리에게 이 시대를 건져주는 구원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 ‘상상력 개발을 위한 유형학습, 시 창작 실기론(송수권, 문학사상, 2017)’에서 옮겨 적음. (2020.10.15.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