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대표하는 거대도시 뉴욕의 거리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진화한다. 그 변화의 진앙지는 다름 아닌 이 도시의 뒷골목들이다. 맨해튼에서 메트로를 이용해 서너 정거장만 가도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문화적 유혹이 이방인의 발길을 붙든다. 뉴욕의 새로운 유행은 여기서 싹튼다.
뉴욕이 변신을 꿈꾼다. 자유의 여신상, 타임스퀘어에 들르는 게 그동안 뉴욕 관광의 필수적인 코스였다. 브로드웨이에 들러 뮤지컬 한 편을 보거나 센트럴파크를 거닐다 보면 여행객도 마치 뉴요커가 된 것처럼 착각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뉴욕을 보는 눈높이는 사뭇 달라졌다. 온갖 드라마에 이 대도시가 등장하면서 골목골목까지도 안방에 비쳐진다. 이제 한국인 관광객들도 ‘뉴욕의 홍대앞’과 같은 새로운 거리를 찾아 나서길 원한다.
당장 14번가에 위치한 유니온스퀘어역 광장에만 나가 봐도 뉴요커들이 한가로이 바닥에 앉아 책을 읽거나, 벼룩시장에서 무공해 채소를 구입하거나, 체력 단련을 한답시고 발차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맨해튼 동쪽의 이스트빌리지는 링컨이 흑인해방 연설을 했던 가난한 이들의 동네였지만 최근엔 빈티지숍과 아담한 카페들이 늘어선 거리로 바뀌었다. 웨스트빌리지로 불리는 그리니치 빌리지는 아티스트, 디자이너, 작가 등 ‘진품’ 뉴요커를 두루 만날 수 있다. 창고형 미술관 거리, 게이
거리, 푸줏간에서 변신한 클럽거리가 공존하는 곳이 바로 뉴욕이다.
소호, 첼시 등 대표적인 문화 거리는 한때는 대부분 공장지대였다. 맨해튼의 소호는 몇 블록에 걸쳐 늘어선 철근 건물들이 죄다 섬유 및 의류 공장으로 쓰였던 공간이다. 제조업체들이 도심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값싼 임대료로 널찍한 공장터를 얻을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낀 예술가가 하나둘씩 찾아들었고, 파산 직전에서 동네의 재활의 수순을 밟게 된다. 요즘은 이 지역이 옷 가게, 부티크 등이 밀집된 활기 넘치는 메인스트리트로 사랑을 받는다.
‘현대미
의 아지트’로 불리는 첼시에선 문화의 변신이 더욱 발빠르게 느껴진다. 첼시는 90년대 이후 아티스트들이 새롭게 둥지를 틀기 시작한 곳이다. 허름한 창고가 밀집된 이 지역에는 20여 개의 갤러리 빌딩이 모여 있다.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품부터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까지 수천 종의 미술품을 대부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첼시 인근은 뉴욕의 게이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매년 여름이면 게이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최근 맨해튼 청춘들의 밤 문화를 책임지는 곳은 바로 미트 패킹(meat packing)이다.
미트 패킹은 말 그대로 예전에 도축업이 성했던 곳이다. 푸줏간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이 동네는 클럽문화의 새로운 아지트가 됐다. 미트 패킹에서는 주말 밤이면 맵시 있게 차려 입은 여인과 멋진 스포츠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전히 허름한 푸줏간이 영업 중인 생경한 풍경이다.
반면 매디슨 애비뉴에는 온종일 명품쇼핑에 몰두하는 ‘된장녀’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5번 애비뉴 귀퉁이만 돌아서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금요일 오후를 여유롭게 보내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뉴욕의 거리풍경은 이렇듯 예측을 뛰어넘는다.
변화의 중심지는 ‘브루클린’
뉴욕의 골목들은 맨해튼에서 이스트강 건너편 브루클린으로 넘어서며 탈바꿈을 계속한다. 이탈리아 마피아의 대부 알 카포네가 살았고 한때 범죄·마약으로 몸살을 앓던 브루클린은 오래전에는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투박한 동네였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명사 중에서도 브룩클린 출신이 많다.
변화의 중심은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다. 베드포드 거리 등 윌리엄스버그 일대는 맨해튼의 값비싼 방세를 견디지 못하던 가난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몰려들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그래피티(벽화)로 꾸며진 상가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
간판이 허름한 클럽과 빈티지숍이 다수 몰려 있는 모습은 마치 서울의 홍대앞 거리를 연상케 한다. 젊은 아티스트의 그래피티들이 계절마다 새롭게 거리를 채색하는데 이곳에서는 빵집, 술집, 약국 등의 벽면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클럽과 바들이 몰려 있는 맨해튼 로우어 이스트에서 윌리엄스버그까지는 윌리엄스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닿는다. 맨해튼에서 메트로를 이용해도 한 정거장 거리다. 젊은 아티스트들은 브루클린의 값싼 숙소에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마음이 동하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맨하튼을 제집 드나들듯 한다.
윌리엄스버그에서 서쪽으로는 덤보 지역과 이어진다. 윌리엄스버그 다리가 맨해튼과 브룩클린을 잇는 문화적 교두보라면 덤보 인근의 브루클린 브리지는 미국의 성공시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1883년 완공된 이후 13년 가까이 이스트강 위를 가로지르며 지난한 뉴욕의 성장 역사를 지켜보았다.
브루클린 브리지는 세계 최초의 강철 현수교로 길이가 486m에 이른다. 무엇보다도 이 다리에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얽혀져 있다. 현수교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20여 명의 인부와 설계자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다리 인근의 덤보 일대는 옛 브루클린을 주무대로 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의 촬영무대가 됐다.
변화의 물결에 편승한 예술가들은 역사의 현장인 덤보의 선착장까지 점령하기 시작했다. 예술가와 모델들은 을씨년스러운 돌길과 철로가 남아 있는 덤보의 작업실에 모여 강 건너에 펼쳐진 맨해튼의 야경을 감상하면서 파티를 즐기곤 한다.
브루클린 북쪽 롱아일랜드시티는 단 두 곳의 건물로 문화적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래피티의 진수를 보여주는 ‘5Pointz’와 현대미술의 새 거점인 ‘P.S.1’가 그곳인데 롱아일랜드시티에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5Pointz’는 건물 자체가 온통 그래피티로 채워진 곳으로 작가들의 작업실로 이용되고 있다. 철길 옆 건물은 건물 옥상에서 쓰레기통까지 빈틈없이 얼룩덜룩한 그림으로 뒤덮여있다. ‘P.S.1’은 뉴욕현대미술관이 수리 중일 때 그곳을 대신하던 곳으로 요즘은 자유롭고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의 미술 작품을 주로 전시한다.
100년 된 메트로에서 느껴지는 뉴욕만의 ‘고집’
유행과 문화적 변신에서 첨단을 달리지만 뉴욕 거리의 모든 것이 최신식은 아니다. 그것이 뉴욕의 또 다른 매력일지도 모른다. 지하철만 봐도 그렇다. 뉴욕 전역을 촘촘히 연결하는 메트로는 24시간 내내 운영된다. 누구나 손쉽게 메트로를 타고 이동하지만 뉴욕의 메트로는 오래되고 퀴퀴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시설이 대부분 오래돼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난 채 운행하지 않은 역도 적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어느 누구도 이런 현실에 크게 불평을 터트리지 않고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뉴욕 지하철은 그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뉴요커들과 함께 해왔다. 450개가 넘는 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가 꽃피기 시작됐고 역 주변의 공간에 시장이 들어서고 각종 문화이벤트가 열린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로 손꼽히는 건물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외관을 바꿀 때는 건물 앞면은 그대로 두고 뒷면만 다시 짓는 뉴욕만의 깐깐한 규칙을 따른다. 뉴욕이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데는 단순히 경제적 부의 집약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유럽의 도시보다 짧지만 그것을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이 한몫을 했다.
유서 깊은 교통수단은 메트로지만 이 도시의 개성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주역은 뉴욕의 택시다. 드라마 <섹스앤 더 시티>나 <프랜즈>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노란색 택시들은 뉴욕의 색깔을 개성 있게 규정짓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이처럼 뉴욕은 지켜야 할 것과 변화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화를 모색한다. 가로세로가 번듯한 거리의 뒷골목에서는 어김없이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양산해내고 있다. ‘미드’(미국 드라마의 줄임말)에 배경으로 등장했던 뉴욕
거리의 숍이나 유행은 새로운 명소와 트렌드를 낳는다. 뉴욕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방인들이 설렘으로 연결되는 메트로를 타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는 이유다.
여행메모
가는 길 뉴욕까지는 대한항공, 아시아나 등 다양한 직항편이 운항된다. 비행시간은 약 13시간. 미국 입국에 별도의 비자는 필요 없다.
현지 교통 뉴욕 시내 구경은 7일 동안 버스, 지하철을 무제한 탈 수 있는 메트로 카드를 구입하면 편리하다. 지하철은 같은
라인이라도 익스프레스(급행)와 모든 역에 정차하는 로컬(일반) 열차로 구분된다. 같은 역이라도 지하철 입구는 업타운으로 향할 때와 다운타운으로 갈 때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쾌적한 편이다.
음식 미트패킹이나 윌리엄스버그에서는 브런치를 즐기는 게 유행이다. 미트패킹의 클럽거리는 점심 때면 ‘파스티스’나 ‘벤토’ 등 브런치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들이 문을 연다. 윌리엄스버그의 ‘베이글 스토어’는 뉴요커들이 일부러 찾는다는 빵집으로 갓 구운 빵을 내어 놓는다.
기타
정보 유니온스퀘어 등 고층건물과 어우러진 도심 곳곳의 공원에서 뉴욕의 오후를 보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왔던 명소들을 둘러보는 투어나, 명품 아웃렛 매장이 밀집해 있는 우드버리를 방문하는 쇼핑투어 등 현지 테마투어를 선택해서 즐길 수도 있다.
(월간중앙 201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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