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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naver.com/godnjf12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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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guriever.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선생의 해월유록(海月遺錄)
Å日月眞人 明 선생님Ω
♧마지막 구세주(救世主) 황발(黃髮: 明 선생님)♧
【인천(仁川) 중앙동(中央洞) 자유공원 작은 정자 옆에 있는 큰 정자(大亭:석정루石汀樓) 黃宮 】
【 鄭道令 (明 선생님)은 1946년 병술년(丙戌年)(음력 12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 용산(龍山)에서)
해월(海月) 황 여일(黃 汝一) 선생 후손(後孫)으로 강림(降臨)하셨다 】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은 이조 영조 때에, 해월(海月) 선생의 문중(門中)에서 판각(板刻)하여 간행하였다.
그 목판(木版)을 지금까지 해월(海月) 선생의 장손(長孫)이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틀린 글자나 필사에 의한 누락(漏落)이나 오류(誤謬)가 거의 없는 것이 다행(多幸)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은 해월(海月) 선생의 사후 150여 년이 지난 후 해월(海月) 선생의 적손(適孫)인 상하(尙夏)씨가 흩어져 있던 선생의 글을 모았는데, 대부분의 많은 부분이 흩어져 잃어버렸고, 집안의 책갑 속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서 편집(編輯)을 하였는데, 이 때(이조 영조)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교정(校正)을 보았으며, 해월(海月) 선생의 위패를 모신 명계서원(明溪書院)의 주관하에, 산 속에 은거(隱居)하여 학문을 가르치시던 이형복(李亨福) 선생이, 실질적인 사무를 담당하여 목판을 새겨서 책이 인쇄되어 나온 것이다.
책 서문(序文)을 보면 영조(英祖) 50년인 1774(甲午)년 봄에 판각(板刻)을 시작하여 영조(英祖) 52년 1776(丙申)년 봄, 청명절(淸明節)에 목판(木版) 인쇄(印刷)를 끝냈다고 나와 있는 것이다.
전체가 7책 14권으로 되어 있으며,
1~4권, 까지는 시(詩)이고,
5권은, 부(賦)와 대책(對策)과 론(論)이며,
6권은, 서(書),
7권은, 소(疏), 장계(狀啓), 교(敎), 전(箋), 표(表), 송(頌), 기(記), 서(序), 발(跋),
8권은, 잡저(雜著), 제문(祭文),
9권은, 은사시(銀槎詩),
10~12권은, 은사일록(銀槎日錄),
13권은, 전(傳), 묘지(墓誌), 행장(行狀),
14권은,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월(海月) 선생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은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숙종37~정조5) 선생이 쓰셨던 것이다.
서문(序文)에는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이, 목판으로 인쇄되어 나온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상정(李象靖) 선생은 본관이 한산(漢山)이고, 호가 대산(大山) 자는 경문(景文)이며 1735(영조11)년에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1739년에는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에 연일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에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심동정도(心動靜圖), 이기휘편(理氣彙編), 경제잠집설(敬齊箴集說) 등 사상적 기초를 정립한 저술을 남겼으며, 또한 사례상변통교(四禮常變通巧), 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 그 밖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근원(根源)이 되는 이황(李滉) 선생의 사상(思想)을 계승하고 전승하는 입장에서 사상적(思想的) 터전을 마련한 분이다.
그는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고종 때 이조판서로 추증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學者)인 그는, 그의 눈으로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보고는 매우 안타까워 한 것이다.
그는 서문(序文)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서문(서문) 1장을 보면,
『海月先生 黃公 生東海上 瑰瑋之才 雄麗之文 後世 莫望焉』
해월선생 황공 생동해상 괴위지재 웅려지문 후세 막망언
해월(海月) 선생 황공(黃公)은 동해상(東海上)에서 태어난 분으로, 뛰어난 자질(瑰瑋之才)과 웅대하고 아름다운 문장(雄麗之文)은, 후세(後世)에 흠망(欽望)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라고 시작하여, 다음과 같이 글을 이었다.
『自玆以還 百有餘年之間 聲寢響寂 欲求當日 淵源授受談笑 咳唾之萬一 而不可得 漠然徒見山海之 崒嵂渺溟而已
자자이환 백유여년지간 성침향적 욕구당일 연원수수담소 해타지만일 이불가득 막연도견산해지 줄율묘명이이
有志之士 烏得不起 曠世之感 而有生晩之悲也耶』
유지지사 오득불기 광세지감 이유생만지비야야
해월(海月) 선생이 가신 지가 지금까지 다만 100여 년이 지난 사이에, 그에 대한 명망(名望)도 그치고 조용해졌으며, 선생의 평소 그 당시의 연원(淵源)과 주고 받은 말씀을 만에 하나라도 건질 수가 없으니, 어렴풋한 것이 다만 산이 높고 험한 모습과 멀리 아득하고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같을 뿐이구나.
뜻이 있는 선비라면, 어찌 광세지감(曠世之感 : 오랜 세월에 대한 감회)과 너무 늦게 태어난 비감(悲感)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글에서 대산(大山) 선생이,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보고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대산(大山) 선생은 해월(海月) 선생의 글 속에서, 다른 여러 학자(學者)들과 비교하여 볼 때, 그 내용면(內容面)에서 무엇인가 정확(正確)히 그 뜻을 알 수 없는 내용(內容)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 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만 산이 높고 험한 모습과 멀리 아득하고 어두운 바다를 보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글 속에 잘 알 수 없는 깊은 내용(內容)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살아 계시지 않으니 물어 보지도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 한 것이다.
그러니 해월(海月) 선생의 글이 일반적인 학자들의 글과는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글인 것을 알고 있는 선비로서,그러한 것을 알고서도 어찌 그의 글을 문집으로 세상에 내는데 주저하겠는가 하며, 너무 늦게 태어나서 안타깝다고 한 것이다.
다음은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서문 6~7장을 보면,
『雖其晩年 成就籍甚如此 又安知其胸中之 所存有蘊而不發者乎 聊並書之 以見公氣象之 一二云爾』
수기만년 성취적심여차 우안지기흉중지 소존유온이불발자호 료병서지 이견공기상지 일이운이
공(公: 해월 선생)이 만년(晩年)에는 이와 같이 문장(文章)으로 명성(名聲)을 떨쳤으나, 또한 해월(海月) 선생이 그 마음속에 깊이 숨겨 둔 심오(深奧)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니,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그저 아울러 기록하여 해월공(海月公)의 기상(氣像) 한두 가지 정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당대(當代)의 대학자(大學者)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께서, 공(公-海月)의 심오(深奧)한 속내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을 알고는, 후세(後世)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문집(文集)으로 엮어서 전하는데, 앞장선다고 하신 것이다.
대학자(大學者)인 그 역시도,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해월(海月) 선생의 글은 매우 심오(深奧)하고 어려워 일반 사람들은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내용이니, 세상에 널리 알려져 두루 회자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 생존(生存)시에는 문장(文章)으로 나라를 빛냈지만, 사후(死後)에는 그의 글이 다른 사람들의 글보다 일찍이 잊혀지게 된 원인(原因)은, 내용(內容)이 매우 어려워서, 그 담긴 뜻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제자(弟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령 제자(弟子)가 있었다고 하여도, 그 내용(內容)이 제대로 전(傳)해질 수 있는 내용(內容)은 아닌 것이다.
또한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의 발문(跋文)을 쓴 이세택(李世澤) 선생은, 해월(海月) 선생의 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이세택(李世澤, 1716~1777, 숙종42~정조1) 선생은 조선후기(朝鮮後期)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者)는 맹윤(孟潤), 호는 조은(釣隱), 예안 출신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8대손이다.
1753(영조 29)년에 정시문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으나,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삼사(三司) 모두가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과 병조판서 이지억(李之億)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정계(停啓)에 응할 것을 권(勸)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성격 또한 대쪽같이 곧은 품성(品性)을 지닌 분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또한 찬집당상이 되었다.
대사헌(大司憲)이신 이세택(李世澤) 선생께서는, 그 당시의 세분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백사(白沙) 이 항복(李恒福) 선생과 월사(月沙) 이 정구(李廷龜) 선생, 해월(海月) 황 여일(黃汝一)선생, 세 분이 서로 시가(詩歌)나 문장(文章)을 주고 받은 글들이 주옥(珠玉)같이 남아 있는데, 그 문장(文章)에는 그 덕(德)과 기상(氣像)이 가히 존경(尊敬)하고 숭배(崇拜)할만 하다고 하며,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兩沙遺稿 刊行已久 遍滿東國 殆家有人誦 而海月之文 尙湮晦無傳 豈非吾党之所 可慨然者耶』
양사유고 간행이구 편만동국 태가유인송 이해월지문 상인회무전 기비오당지소 가개연자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과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의 유고(遺稿)는 이미 간행(刊行)되어 우리 나라에 널리 퍼져 있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유독 해월(海月) 선생의 글만이 오히려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전(傳)해지지 않으니, 어찌 우리들이 이와 같이 편파(偏頗)적인 일을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발문(跋文)을 쓰신 것이다.
또한 발문(跋文) 속에 해월(海月)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故其發爲詞藻 文華者 潁拔特達 汗瀾不可以涯涘 詩尤精麗 爾雅駸駸 有唐宋人聲氣 諷詠遺 什於曠世之下
고기발위사조 문화자 영발특달 한란불가이애사 시우정려 이아침침 유당송인성기 풍영유 십어광세지하
猶可象想 其襟靈爽朗 器量涵泓 直與滄海明月 輝映瀅澈 同流其光影者 抑何奇也』
유가상상 기금령상랑 기량함홍 직여창해명월 휘영형철 도류기광영자 억하기야
즉 그의 시문(詩文)을 짓는 재주를 말하자면, 그의 문장(文章)은 여러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연 뛰어나서, 한 번 물결이 일면, 그 끝간 데를 알 수 없으며, 그의 시(詩)는 더욱 정묘하고 고우니(精麗), 문장이나 언어가 아름다우며(爾雅), 말(馬)이 빨리 달리는 것과 같아서(駸駸), 당송(唐宋)인의 득의(得意)한 마음이나 기개(氣槪)를 볼 수가 있으며, 지금까지 전해진 문집(文集) 속에 있는, 그의 시(詩)를 읊조려 보면, 또한 다음과 같이 상상(象想)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매우 신묘(神妙)하며 신령이 영험하고, 그의 기량(器量)은 깊고 깊어 잠겨서 밝은 모양인데, 말하자면 맑고 푸른 바다(滄海)에 밝은 달(明月)이 밝게 비추니 그 밝게 비추는 달빛과 그 맑은 바닷물이 하나가 되어(同流) 흐르는 모습. 그 물 속에 달그림자, 아! 얼마나 아름답고 기이한가?
『雖然此在公特餘事耳 其行治之懿 逈出倫類 孝悌通於神明 忠義根於性彛 才足以贊猷華國 識足以正誼明理』
수연차재공특여사이 기행치지의 형출윤류 효제통어신명 충의근어성이 재족이찬유화국 식족이정의명리
비록 그러하나 이는 공(公)에게 다만 여사(餘事 : 여가로 하는 일)일 뿐이다.
그 스스로를 다스리는 그 아름다움은 사람들 가운데 돋보이니,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를 받들어 순종한 일은 신명(神明)과 통(通)하고, 그의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떳떳한 성품에 기인하며, 그의 재주는 족히 임금을 도와 나라를 빛낼 만하고(華國), 식견(識)으로는 도리를 바르게(正誼) 하고, 이(理)를 흡족히 밝힐(明現) 만하다.
『自淬勵蔚 爲當世名儒 是不但淸文 奇氣之聳 服人觀聽而已也』
자쉬려율 위당세명유 시불단청문 기기지용 복인관청이이야
스스로 힘써 학문(學問)을 닦아 우뚝하게 당세(當世)의 이름난 선비(名儒)가 되니, 이는 그의 맑고 깨끗한 글(淸文)에는 기이(奇異)한 기운(氣運)이 높이 서려 있어(奇氣之聳), 그의 글을 보고 듣는 사람들을 삼가 두렵게 하며,또한 감복(服人)케 하는 것을 더욱 더하여 준다고 하였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은, 외진 벽지(僻地)에서 늦게 태어나서, 퇴계(退溪) 이 황(李滉)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지 못한 것을 못내 크게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해월(海月) 선생은 1583년인 선조 16년 8월, 그가 성균관 진사(進士) 시절에 우리나라에 오현(五賢)이신,
이 황(李滉), 김 굉필(金宏弼), 정 여창(鄭汝昌), 조 광조(趙光祖), 이 언적(李彦迪) 등을 문묘(文廟 : 공자를 모신 사당)에 제향할 수 있도록 청(請)하는 상소문을 올려, 공론화를 시켰는데, 조정(朝廷)에서는 의심(疑心)스러워하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에는 이루어지리라고는 믿지 않고 후일을 내다보고 하였다고 한다.
1585년 선조18년(乙酉) 10월에 별시을과(別試乙科)에 1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關) 검열이 되었으며, 1586년 선조 19년 1월에 휴가를 받아 부모님을 찾아 뵙고, 선성(宣城) 즉 지금의 안동의 예안으로 가서 퇴계(退溪) 선생 유고(遺稿)의 편집과 교정을 보았던 것이다.
1599년 선조 32년 5월에 선생께서는 중훈(中訓)대부로 올랐으며, 이 때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찾아 뵙고 가을에 도산간역소(陶山刊役所) 감독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 때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집(文集)을 간행(刊行)할 때,
물자조달(物資調達)을 하며, 일을 도왔다고 한다.
【해월유록(海月遺錄) 말씀(中)】
【上帝之子斗牛星 西洋結寃離去后 登高望遠察世間 二十世後今時當 東方出現結寃解】
【 선출기인(先出其人) 후강주(後降主) 로 무사탄금(無事彈琴) 천년세(千年歲) 】
【만사이황발(萬事已 黃髮 ) 잔생수백구(殘生隨 白鷗 )】
♧ 청림도사(靑林道士) 明(黃) 선생님 ♧
조선중기 대문장가인 해월(海月) 황 여일(黃 汝一) 선생의 시문이 들어있는 문집 목판본(7권14책)이 현재
고려대학교와 서초동 국립도서관에 있으며 필사본은 영남대학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또한 있음.
해월종택(海月軒):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으로 풍수학상 강릉 이남 최고의 명당(明堂)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해월헌길7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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