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 산 (368) / 스페인
메리다 고고 유적군(Archaeological Ensemble of Merida; 1993)
에스트레마두라 자치 지방[Autonomous Community of Extremadura], 바다호스 주[Province of Badajoz]에 위치한 메리다는 스페인 전쟁 말인 기원전 25년 무렵에 ‘에메리타 아우구스타(Emerita Augusta)’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로마 제국의 식민지 루시타니아(Lusitania) 속주의 수도였다. 이 오랜 역사 도시에 잘 보존된 유적으로는 과디아나(Guadiana) 다리, 원형 경기장, 극장, 원형 곡예장, 우수한 급수 체계를 들 수 있다. 메리다는 로마 제국 점령기와 그 후 몇 년 동안 해당 지역을 대표하는 로마 식민지의 수도의 훌륭한 사례이다.
메리다는 도시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지역이 로마화 되어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탁월한 로마식 도시 설계의 예로 여겨지는 중요한 요소들을 고루 갖춘 유적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식 상하수 관리의 많은 요소들과 수로(水路) 또한 완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식민 도시 에메리타(Emerita)는 스페인 전쟁이 끝나고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서기 14)가 건립했다. 처음 거주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군대에서 복무하고 전역한 군인들이었다. 건립 3년 후에 새로운 로마 식민지인 루시타니아의 수도가 되었고,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 북서 지역을 점령하는 전초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은 주요 도로가 과디아나 강을 가로지르는 전형적인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단기간에 아주 중요한 행정・상업・통신 중심지로 입지를 굳혀 가기 시작했다. 도시는 로마 도시화 양식의 패러다임을 따랐는데 바둑판 모양의 도시 배치, 공공건물들, 효율적인 배수 체계, 정교한 급수 체계 등을 특징으로 한다. 스페인의 황제인 트라이아누스(Trajanus), 아드리아누스(Hadrianus),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이곳을 다스리는 동안 호화로운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다. 3세기 후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행정 개혁에 따라 스페인의 디오세스(Diocese) 지역을 책임지는 대주교가 에메리타에 배치되면서 권력과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에 기독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곳에 대주교가 파견되었다. 409년 이후 이방인들의 침략에도 큰 고통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422년에 수에비(Suebi)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457년 이후 서고트 족이 반도를 평정하면서 6개 지방 중 한 곳의 수도로 번성했고, 문화 중심지로서의 특별한 역할을 했다. 711년 서고트 군대는 과다레트(Guadalete) 전투에서 무어 인에게 패했으며, 잔여 병력은 메리다로 피신했지만 1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평화적으로 항복했다. 메리다는 항상 무어 인의 지배에 저항해 왔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압데라만 2세(Abderrahman Ⅱ; 822~852)가 834년에 과디아나 다리를 방어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도록 명령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서서히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1230년에는 기독교 세력의 군대가 메리다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나 교구가 산티아고(Santiago)로 자리를 옮긴 이후였다. ‘가톨릭 부부왕[Los Reyes Catolicos]’의 통치 아래 있던 15세기 말에는 잠시 동안 부흥했지만 포르투갈(Portuguese)과 카탈루냐[Cataluna; 카탈로니아(Catalonia)] 사람들이 필립 2세(Philip II)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킨 시기에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고갈에 시달렸다. 18세기 초와 19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과 반도 전쟁(1807)으로 가난이 더욱 심해졌다. 최근에 와서야 서서히 경제가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이곳의 주요 세계유산은 대리석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거대한 물살을 가르는 커다란 부두와 연결된 2개의 아치부로 이루어진 과디아나 다리, 기원전 8세기에 지은 최초의 도시 계획의 일부로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 아그리파에 의해 개관이 선언되고 낮은 언덕에 지은 전통적인 비투루비우스(Vitruvian) 양식의 극장, 1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6세기에 주거지로 바뀐 일렬의 둥근 기둥으로 둘러싸인 6주식 건물인 다이애나(Diana) 신전, 초기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이거나 다이애나 신전의 성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트라이아누스 아치[Arches of Trajan]’, 그리고 식민 도시의 토대를 만든 동시대에 로마 제국에서 가장 컸을 것으로 짐작되는 원형 곡예장이 있다. 다른 유적지로는 2개의 콜룸바리(columbarii; 가족 무덤), 3개의 댐과 잘 보존된 지하수로, 그리고 상당한 수로의 흔적을 포함한 에메리타 지역으로의 급수 체계[프로세르피나(Proserpina) 댐과 코르나보(Cornalvo) 댐은 여전히 기능을 하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로마 수도 관리 체계의 현저한 사례이다], 북아프리카 양식으로 유명한 2중 애프스(apse) 좌석과 양쪽의 통로를 갖춘 팔레오-크리스천(palaeo-Christian) 바실리카인 ‘카사 에레라(Casa Herrera) 대성당’, 산타 에우라리아 마티르 교회[Martyr Church of Santa Eulalia;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순교자인 산타 에우라리아에 봉헌한 초기 교회의 유적], 비잔틴 양식의 특징 중 일부를 보여 주는 알카자바(Alcazaba)를 들 수 있다. 이 유적지의 거대한 벽에는 25인의 수호성인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다. 내부에는 영구적인 동시대의 건물들이 없지만 건축을 위해 철거한 로마 양식의 주택과 도로의 흔적이 상당수 남아 있다. |
첫댓글 2000년 전의 로마의 유적이 남아 있다니 어떻게 보존이 될지 궁금해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