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8월에 시작하여 1918년 11월에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최초 프랑스 침공계획이 였던 '슐리펜계획'의 실패로 전선은 고착되어 참호전으로 변해 버렸으며 단순돌격으로 전선을 돌파하려는 무모한 전술이 실행되었다. 섬멸전 사상과 소모전 사상이 유럽을 뒤 덮었다.
그러나 이것을 지속적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과 싸워야 하는 서부전선과 러시아와 싸워야 하는 동부전선을 동시에 지탱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독일은 우선 프랑스를 단기간 내에 격파해야 했으며 그 후에 러시아와 전쟁을 해야만 했다. 독일은 19세기말 10년 간 정치적인 변화와 함께 양면전쟁의 위험에 빠져들 게 되었다. 양면전쟁은 힘의 분산을 의미하므로 독일로서는 절대적으로 피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이 빠져들어가기 싫어 했던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가장 나쁜 시나리오로 진행되었다.
1914년 독일은 육군병력을 761,000명을 보유했었으며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478,000명을 보유하여 총 병력은 1,239,000명이었다.
프랑스는 927,000명 러시아 1,445,000명등 모두 2,372,000명 이었다. 모든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육군병력은 2:1로서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에 불리했다.
해군의 경우 독일은 제국주의 시대의 군비확장 경쟁에 적극적인 열성도 보이지 않아 1913년 독일제국은 함대병력 개인당 6.92마르크를 지출했으나 영국은 20.54마르크를 프랑스는 10.82마르크를 지출했다. 독일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독일의 정치적인 상황과 군부내부의 상황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으며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수적인 열세의 상황에서 두 개의 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이러한 열세의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풍부한 창의력으로 주도권을 잡고서 작전의 중심을 조직하여 지속적으로 이를 추구하여야 가능한 것이었다. 양면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참모총장이었던 슐리펜이 세운 계획이 제1차 세계대전초기 실행했던 '슐리펜계획'이다.
'슐리펜계획'은 독일과 프랑스국경, 룩셈부르크에서는 약한 병력으로 프랑스의 공격을 방어하고 주력부대는 프랑스 요새의 북단에서 프랑스군을 회피하면서 영국군을 포위하여 격파하려고 하였다.
전쟁은 기동성을 요구하였으며 이것은 프러시아 이 후 독일제국까지 내려온 특징이었다. 러시아에는 1개 군정도의 약한 병력이 배치되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초기에는 '슐리펜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프랑스군을 벨기에를 통한 신속한 공격으로 주력부대에게 여유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예비부대의 부족으로 결국 '슐리펜계획'은 실패로 돌아가 버렸으며 독일은 두려워 했던 지루한 양면전쟁을 체험하게 되었다.
독일은 뛰어난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상급사령부의 신념의 부족으로 적절한 결심수립과 통일된 작전이 불가능하였다.
독일이 수행하려고 했던 '슐리펜계획'의 실패는 연합국에게 '마르느의 기적'으로 불리었다.
'슐리펜계획'이 매우 우수하였으므로 이 것이 성공하였다면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격파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에게 실패로 돌아간 이 계획은 다음과 같은 실수에 그 원인이 있었다.
첫째 5개 군으로 편성된 우익은 베르덩 동쪽에 위치한 회전축을 중심으로 프랑스영토를 돌아가야 했으나 담당한 우익부대가 실패함으로서 계획은 실패하였다.
슐리펜은 최초 우익에 전병력의 7/8정도를 배치하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실제로는 3/4만이 배치되었다. 공격이 개시된 후 2개 군단이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버렸다.
둘째 통신수단이 정상작동을 하지 못했다. 총참모본부에서 모든 작전을 수립, 수행하였으나 7개군을 움직이는데 통신망이 불충분했다. 따라서 오보와 지연이 이어져 결국에는 신속성과 정확성을 잃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질서정연한 행군 때문에 전방으로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우익을 담당했던 제1군과 제2군은 통제가 불가능하였다. 마르느강을 통과하여 파리로 진격하려고 우익은 너무 빨리 방향을 틀어 버렸다. 따라서 독일군 주력의 방호를 받지 못하여 스스로 멈추려고 하였을 땐 이미 주력과의 간격이 너무 멀어져 버렸다.
이때 프랑스와 영국이 역습을 시도하였다. 마르느강 북쪽으로 지향하여 독일군 제1군과 제2군의 간격을 목표로 하였다. 몰트케(소 몰트케)는 위험을 알았으나 때는 늦었다. 의사결정은 지연되었고 판단은 어려웠다. 이때 헨취중령을 파견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중대한 실수로 나타나게 된다. 단순한 목적이었으나 유능한 중령은 소심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권한은 불분명했다. 따라서 헨취중령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퇴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철수를 할 필요는 없었다. 1926년 제1차 세계대전 독일 공신사에서는 "독일은 우익의 승리를 해 놓은 상태에서 철수를 해 버렸다."라고 적고 있다. 후퇴를 함으로서 적에게 재편성의 기회를 제공해 버렸다. 따라서 독일군에게 기동성과 신속한 작전을 박탈한 결과를 초래했다.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한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하였다. "대령님, 부대원들이 지휘에 대한 신뢰를 잃었음을 정중히 보고들입니다." 이렇게 서부전선의 공격은 실패하였다. 독일은 최초의 계획이 이미 마련된 '슐리펜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통신망의 부실로 지휘부는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도 없었다.
또한 상황판단의 미숙으로 절호의 기회를 잃어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제1차 세계대전의 실수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반복 하지는 않았다. 독일은 예상외로 빨리 프랑스를 격파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서부전선과는 다르게 동부전선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서부전선에 비교적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는 비교적 약한 힘을 배치하였다. 그러므로 예견된 러시아의 공격으로 독일을 방어해야 했다. 약한 전투력으로 공세적인 전방 방어가 필요했다. 이것은 현지에서 이미 실시된 훈련에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전투개시 후에 승전보가 도착하였으나 후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사령관과 참모장이 교체되었다. 이것은 독일에 행운 있었다. 힌덴부르크(Hindenburg)와 루덴도르프(Ludendorff)가 새롭게 동부전선을 맞아서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러시아군을 첫 전투에서 전멸시켰고 그 후에 러시아군을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탄넨베르크(Tannenburg) 전투에서는 독일로서는 엄청난 기동력을 가지고서 완벽하게 수행한 전투였다. 러시아의 사령관 삼소노프는 자결하였다. 그 후 러시아군 렌넨캄프가 지휘하는 니에멘군을 마주리아(Masure)에서 대파하여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전쟁은 동부전선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최초의 계획에서도 서부전선(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승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전선은 오판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버렸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제1차 세계대전당시 서부전선을 묘사하고 있으며 독일군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참고로 '아라비아 로렌스'의 일대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당시의 아프리카지역의 독일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경우 독일군이 후퇴를 하면서도 질서가 있었으며 후퇴 중에도 반격을 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것은 일부분이었고 모든 전선에 걸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교착은 독일에게는 패전을 의미했다. 독일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를 상대할 힘이 없었다. 양면전쟁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독일은 버텼다. 그것은 프랑스나 영국의 지휘부의 무모함도 보탬이 되었다. 동맹국 오스트리아의 항복에 이어서 킬 군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로서 독일은 자국의 영토를 단 1cm도 잃지 않은 전쟁에서 항복했다. 당시 독일은 러시아의 땅과 프랑스의 땅에서 전투를 행하였다. 그리고 무제한 잠수작전으로 미국이 참전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독일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물량공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같은 효과를 발휘하였다.
독일은 항복했다. 1818년 11월 독일은 항복하고 불평등 조약 '베르사이유 조약'은 체결되었다.
모든 책임은 독일에게 주어 졌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해체되었다. 전쟁배상금으로 독일은 고난을 겪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경제공항이 몰아쳤다. 독일은 공항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독일에게 '베르사이유 조약'은 너무나 가혹했다.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이라는 슬로건아래 치루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또다른 전쟁을 마련하는 전초전에 불과하였다.
패전한 독일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고만 것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잃었던 프러시아의 영토를 침공함으로서 시작하였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과거의 영토와 그에게 치욕적으로 생각되었던 프랑스와 구 러시아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과오는 그 전보다도 더 큰 전쟁을 예고했다. 독일은 불과 20년만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