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원시 시대는 존재했을까?
사람과 동물이 서로 어울려 평화를 읊고, 손만 벌리면 꿀과 과일을 손쉽게 얻어 배부르게 향유할 수 있던, 게으름이 필요에 따라 공유되는 그런 시절 말이다.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적잖은 사람들이 뒤틀려진 거울상 이미지로 반사적으로 차용하곤 하는 황금의 원시 시대, 폭력이 일지 않은 평화의 땅, 서광으로 반짝이는 아담과 이브의 에덴.
그 풍경을 다소나마 유지하고 있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 그리고 현재도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는 뉴기니 원주민들을 쉽게 떠올릴 게다. 누군가 뉴기니에서 총으로 새를 하나 잡았다면 뉴기니 원주민의 이와 같은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게다.
"당분간(1주일 동안) 새를 잡지 못한다우. 우리는 1주일 후에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나 새를 한 마리 잡을 수 있소."
새의 개체수을 해치지 않은 채 삶을 공유하려는 뉴기니 원주민의 생태 철학의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게다.
또 사람들은 환경친화적인 생태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오리 족을 보며, 뉴질랜드를 침입해 마오리 족의 삶을 어지럽힌 백인들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내내 그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행복의 결정을 유지하며 살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적어도 서구의 동물학자들이 1830년대 뉴질랜드에서 거대한 새의 뼈조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이 유효했을 것이다. 뉴질랜드 곳곳에 남겨져 있는 거대한 새의 뼈들은 그 새의 키가 2~3m에 육박하며 몸무게가 200kg을 넘나드는 거대 동물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동물학자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새를 발견할 수도 있을 거라는 흥분에 금새 휩싸였다. 마오리 족 사람들도 이 거대한 조류, 모아새에 대한 전설과 목격담을 덧붙여서 학자들의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하지만 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학자들은 백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한 18세기 이전에 이 모아새가 이미 멸종되었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모아새의 흔적만 즐비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체 이토록 거대한 조류가 어찌해서 멸종되었을까? 학자들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처음에 학자들은 모종의 기후 변화 때문에 모아새가 절멸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아새 화석에 박혀 있는 창날이 발견된 이래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천 년 전 뉴질랜드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또한 육식을 하는 포유 동물도 거의 살고 있지 않았다. 대신 12종의 모아새, 키위 등의 날지 못하는 새들이 뉴질랜드의 광활한 벌판에서 살고 있었다. 자신을 위협하는 육식 동물이 없어, 모아새는 나는 기능이 점차 퇴화했고, 어떤 동물에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육식 동물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대부분, 사람이 접근해도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 위협에 대한 자기 보호 본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진화되지 않는다.

(모아새 모형)
그러다 천 년 전쯤 일단의 폴리네시안이 뉴질랜드에 첫 발을 내딛였다. 마오리 족 전설에 의하면 마타호우루아(Mata-hourua)라는 최초의 카누를 타고 도착한 사람은 타히티 출신 선장 쿠페(Kupe)였다. 그의 아내가 이 땅을 아오테아로아, 즉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선조들이 하와이이키(Hawaiiki)라는 곳을 떠나 많은 카누선을 타고 북섬의 북동쪽 해안에 처음 도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도착한 일단의 인간 무리들은 접근해도 도망가지 않는 모아새가 훌륭한 식량이라는 사실을 쉽게 깨달았다. 이후 돌이킬 수 없이 잔인한 모아새 학살이 일어났다. 빠른 시간 내에 모아새를 비롯한 거대 동물들이 뉴질랜드에서 절멸하게 된 데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평화 속에서 진화된 동물들의 속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인류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뉴질랜드의 키위 새. 뉴질랜드의 마스코트이기도 하다)
또 일단의 폴리네시안 사냥꾼들이 뉴질랜드에 가지고 온 건 모아새에 대한 불길한 절멸 예고장 뿐만이 아니었다. 사냥꾼들의 배에 실려온 쥐는 급속히 번식해서, 사람들이 모아새를 사냥해서 거대한 고기 파티를 여는 동안, 맹금류 따위의 위협 없는 평화로운 삶 속에서 진화해온 키위 등의 작은 새들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창을 들고 접근해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호기심에 들떠 순진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거대한 새, 모아새. 하지만 인간들에게 당한 거대 동물들의 비통한 운명은 모아새에 국한되지 않는다.
평화의 땅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은 어땠을까? 그곳에서 살고 있던 거대 포유 동물인 맘모스는 대체 어떻게 그리 빠르게 절멸될 수 있었을까? 대략 1만 1천 년 전 알래스카를 거쳐 아메리카 땅에 당도한 아시아계 이주자들은, 빙하기 기후 때문에 맘모스가 절멸했으리라는 순진한 인류학자들의 분석을 조롱이나 하듯, 도처에 대량 학살 흔적을 남기며 남미까지 순식간에 남하했다. 아메리카에 서식하고 있던 맘모스, 그리고 대형 포유 동물들은 바로 인간들에 의해 잡혀먹혔던 것이다. ('제 3의 침팬지', 제레드 다이아몬드)
그럼 인디어들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개체수를 염려하는 이 평화주의자 뉴기니 원주민들의 조상은 어땠을까? 지금껏 보고된 바에 따르면, 뉴기니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그곳엔 몇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늘보, 상당히 큰 키의 거대한 캥거루 등의 대형 동물이 살았다. 수백 만 년, 아니 수천 만 년 그곳에서 평화롭게 생을 누렸을 거대한 동물들이 모조리 절멸되는 데는 수십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창을 들고 닥치는 대로 사냥감을 찾아 나섰던 인류의 조상들의 식탐 앞에서, 그리고 인간이 가져온 전염병 앞에서 세대 번식이 꽤 느린 그들은 종의 절멸이라는 비운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 끔찍한 과거에 당면해, 어쩌면 콘라드 로렌츠처럼 절망할지도 모른다. 로렌츠는 '공격성에 대하여(1963)'에서 이미 인간의 공격성은 진화 과정부터 내재화되어 있었고, 2차 세계 대전도 바로 인간들의 포악한 공격성 때문에 일어났다는 음울한 묵시론을 우리에게 읊은 적이 있었다.
또 우리에게 '침팬지 보호'라는 당면한 지구적 과제를 감동적으로 웅변한 제인 구달 역시 탄자니아 국립공원에서 40여 년 동안 침팬지를 관찰하다가 두 번에 걸친 침팬치들의 대량 학살을 목도하고, 어쩌면 이 같은 폭력성은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 전반에 걸쳐 내재화된 원초적 속성일지도 모른다고 개탄했다.
일견 우리 세계는 로렌츠의 묵시론을 진실로 반영하는 참혹한 야만 상태일지도 모르며, 현대의 우리들은 우리 조상의 더러운 공격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버젓이 며칠 밤만에 수천 명이 학살당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더러운 야만의 시대가 바로 지금이 아니던가? 하루에도 수십 종의 생명이 종의 운명을 달리해도 눈 앞에 이익만 좇는 인간들이 아니던가? 아직도 비밀에 휩싸여 있을 정도로 신비롭게 인간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며 눈을 깜빡이는 코끼리, 돌고래, 아메리카 버팔로를 향해 스포츠 경기처럼 총을 난사하고 작살을 던지는 파렴치한들이 아니던가? 또한 백경의 신음을 문학적 성취로 가증스럽게 위장하는 족속이 아니던가?
마빈 해리스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의 증언은 기껏, 인기 없는 고고학 서적과 박물관에 감금한 채 여전히 자연에 대한 착취와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착취를 일삼는 우리들은, 은유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한다면, '지구의 종양'이다. 게다가 가진 건 자존심 밖에 없어, 개체수 증가의 압력을 받으면 과감히 떼를 지어 생태적 자살을 하는 아메리카 쥐와 같은 용기도 발휘하지 못한다. 인구 증가 압력을 받은 고대 인간들이 행한 요식은 여자 아이 살해의 제도화와 여성에 대한 조직적 억압인 반면, 근대의 요식은 제노사이드(인종 대량 학살)와 전쟁이다.
요컨대, 죽지 않는 지구의 암 세포가 바로 인간들인 것이다. 인간들에 대한 암의 보복은 서서히 운명의 끝장을 맞이하는 지구의 자연이 인간이란 더러운 족속에게 던지는 야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세지는 충분히 경청할만 하다. 속죄의 기도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디언들의 삶, 마오리 족의 삶, 뉴기니 원주민들의 생태적 철학이 그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환경 파괴와 인구 증가 압력이 지구를 휩쓸었고, 그들은 당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가지로 터득했다.
"당분간(1주일 동안) 새를 잡지 못한다우. 우리는 1주일 후에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나 새를 한 마리 잡을 수 있소."
그것이 그들의 대답이다. 풀 하나에도 우주적 생명력이 있고, 내가 지금 너를 먹지만 내 육체가 땅과 섞여져 너희 자손을 돌볼 것이라는 약속과 신뢰가 곧 그들의 대답이며, 후손들에게 던지는 교훈인 셈이다. 모아새를 학살한 이후 속죄한 인간들의 참회록인 것이다.
200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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