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마르 1,7-11)
| ▲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
주님 세례 축일인 오늘은 세례를 통해 받게 되는 중요한 직분인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훌륭하게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사제직입니다. 사제직은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간자(사제)의 역할, 하느님의 은총과 선하심을 세상과 함께하도록 하는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오래전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바르톨로메오 데 라스 카사스(1474~1566) 신부를 소개합니다.
그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갔던 콜럼버스(1451~1506)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권을 최초로 부르짖었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와 교회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오? 그들은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까?”라고 외쳤습니다.
1515년, 소유하고 있던 쿠바의 농장을 포기하고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한 후 사제가 돼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복자들이 저지른 ‘신대륙 파괴’를 규탄했습니다. 또 많은 저서를 통해 참다운 화해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회연구소가 운영되고 있으며 페루의 해방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참다운 사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왕직은 봉사입니다. 페루의 ‘빗자루 수사’ 마르티노 데 포레스(1579~1639) 성인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흑인인 성인은 스페인 출신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많은 인종 차별을 겪었습니다.
성인은 이발사(돌팔이 의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이 이를 뽑아준 ‘환자’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러 병자가 치유되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온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를 신청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수도회 문지기로 사는 것을 겨우 허락받습니다.
그는 7년간 동물들과 함께 밥을 먹고, 청소와 온갖 잡일을 하면서 철저하게 하느님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하지만 정식 수도자는 될 수 없었습니다. 단지 수도복 착용만 허락받았습니다. 성인은 계속해서 수도회를 위해 봉사하고 가난한 리마(페루) 주민들을 치유해줬습니다. 또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며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다정한 이웃으로 살아갔습니다. 여기서 또 한 번 하느님의 신비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사는 곳 건너편에 성인보다 7살 아래인 백인 여성 로사 데 리마(1586~1617) 성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성녀는 필리핀 선교를 원했지만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미니코회 제3회원으로 열심히 살다가 세상을 떠난 후 54년 만에 남미 최초의 복자가 됩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이보다 291년 늦은 1962년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복자로 선포됩니다. 흑인들과 유색인들의 후손들이 마르티노 성인의 영성과 삶을 꾸준히 기억하고 실천했기에 이뤄진 신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언직은 정의 선포라 생각합니다. 예언직은 하느님 기준과 시각으로 세상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모든 사람의 깨달음) 운동’을 50여 년 동안 이끌어 가고 있는 아리야라트네 박사를 소개합니다. 그는 참여 불교와 간디 사상에 뿌리를 두고,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를 근간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고전적 방식을 통해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3가지 독(욕망, 성냄, 무지)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식수 설비 설치, 도로ㆍ화장실ㆍ주택ㆍ도로 건설, 에너지원 확보 등 다양한 일을 펼치며 가난한 마을의 자립을 이끌었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르보다야 운동을 통해 자립한 마을이 1만 5000여 개에 이르고, 무상 유치원도 4335개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아리야트네 박사는 “과거로부터 이어온 위대한 도덕과 원칙 속에서 내 마음이 작동하는 ‘독’을 꿰뚫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고 강조합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그리스도인의 직무인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실천한 이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세 가지 직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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