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삿 20:1-11
1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3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4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7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8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9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11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삿 20:1-11 / [이스라엘이 기브아를 징벌]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 성소에 모여들었다. 북쪽의 단에서부터 남쪽의 브엘세바까지, 그리고 동쪽의 길르앗에 사는 사람들까지 전국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 이스라엘 온 지파의 우두머리들뿐만 아니라 온 공동체가 함께 모인 것이다. 이렇게 무장하고 모여든 보병이 모두 40만명이나 되었다. 3) 이때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여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의를 하였다. `이러한 만행을 우리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그대는 이러한 못된 짓이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는지 사건의 전말을 우리 앞에서 설명하시오' 그러자 4) 아내 잃은 그 레위인이 나서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예, 본인이 제 아내를 데리고 베냐민 지역에 있는 기브아에 이르러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어 가려고 하였습니다. 5) 그런데 그 밤에 기브아 사람들이 우리가 묵고 있던 집에 들이닥쳐 그 집을 에워싸고는 나를 죽이려 하였지요. 그러더니 결국 내 아내에게 이렇게 차마 하지 못할 짓을 하여 죽게 한 것입니다. 6) 그래서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내 아내의 시신을 조각내어 온 이스라엘 땅에 보내게 된 것입니다. 기브아 녀석들이 얼마나 여인을 탐하여 못된 짓을 저질렀는지를 꼭 알리고 싶었습니다. 7) 어르신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이신 동족들이여! 이 억울한 사정을 좀 돌아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한을 풀 수가 있는지 상의해 봅시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지 말씀 좀 해주십시오.' 8)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소리 질렀다 `우리가 한 사람이라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자. 한 사람이라도 발걸음을 집으로 옮기지 말라. 9) 기브아 녀석들을 완전히 징벌할 때까지는 돌아가지 말자. 자, 제비를 뽑아 누가 기브아로 쳐들어 올라갈지 결정하도록 하자. 10) 우리 이스라엘 온 지파 가운데에서 백 명에 열 명씩, 천 명에 백 명씩, 만 명에 천 명씩 싸우러 갈 군대를 조직하기로 하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싸우러 갈 군인들이 먹을 식량을 마련하기로 하자. 그 군인들이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로 올라가 지파 공동체 일원으로서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못된 짓을 한 그 녀석들을 징벌해야 할 것이 아니냐?' 11) [도전하는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기브아를 치러 올라가려고 결의하였다.
요단 동편의 길르앗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가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체가 모였던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 기능을 했던 장소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1-7) 레위인에게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서 자초지종을 듣게 됩니다.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레위인의 설명과 이스라엘의 대응에 대해 단지 레위인의 억울함과 분노에 공감하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다가 레위인은 아내가 아닌 첩을 두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첩은 왜 레위인을 떠났던 것인가? 그리고 기브아의 불량배들의 끔찍한 요구에 레위인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하나로 모아지는 답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소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의로운 분노로 모였던 것이 아닙니다. 일벌백계, 자신들 가운데 벌어진 비행과 악행에 대해 본보기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기록된 내용 가운데 레위인과 그곳에 모인 이스라엘 40만 명의 장정들에게서 수치심이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들은 이미 세상과 구별된 말씀 그리고 언약의 공동체가 아닌 세상과 같은 이익공동체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을 치려 제비를 뽑다(8-11) 성소인 미스바에 모인 것과 제비를 뽑는 것 그리고 그들이 기브아인의 악행에 대해 징계를 결단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겉으로는 신앙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 정당한 것인지 그 어떤 고민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분명히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인을 징계하기 위해서는 베냐민 지파의 책임을 물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같은 민족, 형제에게 칼을 겨눠야 하는 중차대하고 위기의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법은 구체적인 실행 동기와 명확한 실행 방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대전제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지 않는 법은 살리는 법이 되지 못하고 죽이는 잔혹함만 남는 법이 될 뿐입니다. 그들이 뽑은 것은 제비가 아니라 그런 아프고 참혹한 칼일 뿐이었습니다.
적용: 불의는 결코 묵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무엇일지 고민할 수 있어야 진정한 용서와 회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천국이 우리의 은행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나 자신의 이름으로는 천국의 은행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안에 백지수표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행에 무한한 신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내 수표 위에 그의 이름을 써서 그곳에 가도록 특권을 베풀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가지고 갈 때 내 기도는 얼마든지 지불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한다는 것은 나의 신용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신용을 근거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삶에서 버려야 할 4가지
삿 20:1-16 / 이한규목사
1. 위선과 비진실
자기 첩의 사체 훼손을 통한 레위인의 선동으로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1절). 그때 이스라엘 자손이 일의 자초지종을 묻자 레위인이 대답했다. “내가 첩과 함께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는데 기브아 사람들이 밤에 내가 묵던 집을 에워싸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죽였습니다.” 레위인은 첩을 자기 대신 내 주어서 죽은 사실은 쏙 뺀 채 그들이 욕보여 죽였다는 말만 했다. 교활한 모습이다.
그 레위인은 계속 말했다. “내가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온 땅에 보낸 것은 그들이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체를 훼손한 자신의 사악함은 외면한 채 일부 기브아 불량배들의 행위를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악행인 양 과장해 전 이스라엘의 공분을 일으켰다. 그 레위인의 위선과 비진실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다. 위선은 자기 영혼의 최대 위기도 초래하지만 공동체의 최대 위기도 초래한다.
2. 반목과 분열
레위인의 말을 듣고 전 백성이 기브아 사람들을 치자고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왕이 없어서 혼란한 사사 시대에 기브아 사건으로 전 이스라엘이 일체감을 보였다(11절).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지파 간에 반목하며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공동체가 발전하려면 구성원들의 단합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단합은 공동의 적이 있거나 공동 목표가 뚜렷하면 굳건해진다.
왜 하나님은 공동체에 큰 역경을 주시는가? 분열의 습성을 버리고 하나 됨의 습성을 배양하라는 뜻이다. ‘배타적인 자신의 벽’도 잘 깨면서 ‘배타적인 우리의 벽’은 더욱 잘 깨라. 이간질은 사탄의 가장 유용한 공격 수단임을 깨닫고 하나 됨에 힘쓰라. 다양성은 인정하되 늘 다양성 속에서 일치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라.
3. 자존심과 분노
총회 후 이스라엘 지파들은 베냐민 지파에게 사람들을 보내 말했다. “너희가 저지른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이제 기브아의 그 불량배들을 넘겨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거하게 하라.” 그때 베냐민 자손은 그 권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기브아에 모여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려고 했다(13-14절). 아마 미스바에 모인 40만 대군을 보고 분개했거나 자존심과 배타심과 적개심 때문에 그런 비이성적인 결정을 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기브아 불량배들은 사형에 처해야 했다. 그 상황을 그냥 넘기면 율법의 권위가 실추되기에 불량배들을 넘겨달라고 했지만 베냐민 자손은 자존심을 내세워 듣지 않고 오히려 베냐민 지파의 26개 성읍에서 나온 군사들이 기브아에 모여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려고 했다. 그처럼 자존심과 분노로 인한 감정적인 대응은 늘 큰 화를 부른다. 자존심 때문에 축복의 댐이 무너진 인생이 한두 명이 아니다.
4. 과신과 교만
그때 26개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26,000명이고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에 택한 자가 700명으로 전체 숫자는 26,700명이었다. 기브아 주민 중에 선택한 700명은 다 왼손잡이라서 물매로 돌을 던지면 정확히 맞히는 막강한 용사들이었다(15-16절). 그래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약 15배에 가까운 이스라엘 연합군에 대항해 과감히 전쟁을 일으켰다. 그 과신이 지파가 거의 전멸되는 비참한 결말을 낳았다.
지나친 과신은 비극을 낳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지나치게 믿어서 자랑을 일삼고 분수에 넘게 행동한다. 그러나 신앙과 신념은 다르다. ‘주님을 믿는 신앙’은 복을 예비하지만 ‘자신을 믿는 신념’은 오히려 패망으로 이르는 지름길이 된다. 좁은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신에 대한 과신을 버리고 늘 겸손하기를 힘쓰라.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
삿 20장 1~48절 / 양인국목사
1.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의 악행에 대한 레위인의 고발로 인하여 이스라엘 총회가 미스바에서 모였고, 총회가 불량배들을 징계하기도 한 결의에 대하여 베냐민 지파의 도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하여 양측에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만일 이스라엘 총회가 좀 더 지혜로운 방법으로 베냐민으로 하여금 불의를 멀리하도록 설득했더라면, 베냐민 지파가 지파 내에서 행한 불의를 인정하고 총회의 권고를 들었더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과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지혜이며 용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지혜와 용기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행으로부터 복된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을 피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또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지혜와 용기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의 전쟁으로 인하여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망자 수는 이스라엘 총회가 사만 삼십 명이고, 베냐민 지파가 오만 명으로 양측의 사망자 총수는 구만 삼십 명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온 성에 다니며 만나는 자마다 모두 죽였고 말하고 있는데 이때 죽임을 당한 수는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 전쟁은 이방인과의 전쟁도 아니고 동족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었고 또한 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전쟁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형제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켰더라면 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하나는 만일 이스라엘 총회가 좀 더 지혜로운 방법으로 베냐민으로 하여금 불의를 멀리하도록 설득했더라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냐민 지파가 지파내에서 일어난 불의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총회의 권고를 들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라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가 서로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더라면 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전쟁으로 인하여 죽임당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내용의 본문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도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전쟁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이와 같은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입게 되는 피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피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전쟁이 어째서 일어나는지 그리고 이와 같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어째서 일어나서는 안될 전쟁들이 일어나는가?” 여기 “일어나서는 안 될 전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서 형제가 형제와 싸우는 동족상쟁을 말하고 또한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못한 전쟁을 말한다. 왜냐하면 형제는 사랑으로 맺어진 특별한 관계로서 싸워서는 안 되는 관계이기 때문이고. 또한 피할 수 있는 전쟁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비극적인 일들 가운데 하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본문을 중심으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면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불의를 용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의 논리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지 불의를 용납할 때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의 불량배들은 분명히 불의를 행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총회는 그들이 행한 악행은 이스라엘 가운데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그들을 징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행한 악행에 대하여 말해 주고 그들을 총회에 내어 줌으로 징계하도록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총회의 요청은 정당한 것이었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가 총회의 권고에 따라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넘겨주었더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총회의 권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총회와 싸우기로 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총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베냐민 지파는 그릇된 “지파 주의”로 인하여 자신들 가운데 허용해서는 안 될 불의를 허용했다. 이로 인하여 베냐민 지파는 스스로를 정화(淨化)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동족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자신도 넘어졌다. 언급한 것처럼 베냐민 지파가 “지파 주의”를 떠나서 자신들 가운데 있는 불의를 인정하고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에고 이 용기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완전한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약함과 불의를 인정하고 이로 인하여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만일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행한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고 자신에 대하여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이방인의 사도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물음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믿음의 조상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이며 또한 전쟁을 피하고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힘의 논리를 가지고 이웃을 대할 때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12-14절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20:12-14)” 본문은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을 보내어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행한 악행을 알리고 그들을 이스라엘 총회에 손에 넘겨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들은 이와 같은 소식을 듣고 불량배들을 이스라엘 총회에 넘겨주기 보다는 오히려 총회와 싸우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각 성읍으로부터 기브아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기브아로 올라갔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째서 그들은 총회의 권고를 듣지 않고 불의를 행한 기브아 사람들을 돕게 위하여 총회와 싸우고자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지파주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브아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이 그들을 보호하고자 이스라엘 총회와 전쟁을 택하였다는 것이 바로 지파주의이다. 즉 불의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속하였는지 아닌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지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째서 그들은 총회의 권고를 듣지 않고 불의를 행한 기브아 사람들을 돕게 위하여 총회와 싸우고자 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또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지파에 대하여 강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 그들의 반감을 산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는 한 지파가 가지고 있는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 지파에 대하여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려는 태도보다는 결정 사항을 통보하고 그대로 행할 것을 강요했을 수도 있다. 동일한 일일지라도 협조를 구하는 것과 강요하는 것에 대한 반응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언제나 힘을 사용하는 곳에는 그 힘에 대한 반작용도 따른다. 그러므로 만일 총회가 베냐민 지파에 대하여 설득하거나 협조를 구하지 않고 통보하고 강요하였다면 여기에는 반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반감은 지파주의를 강화함으로 결국 총회의 권고를 듣기 보다는 그들과 싸우도록 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 총회도 “피할 수 있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한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전쟁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야 말로 전쟁의 상황에서 피할 수 있는 길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고, 서로를 신뢰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전쟁의 상황에서 피할 수 있는 길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가 자기 지파 사람들이 행한 불의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총회의 권고를 들었더라면 구만명 이상의 생명을 살렸을 것이고 또한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의 사정을 듣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불의에서 떠나도록 기회를 주었더라면 동일하게 전쟁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전쟁과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것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심으로 자신과 이웃 모두가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샬롬의 도구로 사용되게 해 주옵소서. 아멘!
전쟁과 여성의 피해
사사기 20:1-11 / 이상호목사
우리 사회에는 ‘인종차별(racism)’과 ‘성차별(sexism)’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나 동남아, 중앙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성차별에서도, 지난 대선 때 젊은 남성과 여성의 ‘갈라치기’보다 더 나쁜 ‘바꿔치기’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청년 남성을 대변한다는 정치인이 대한민국 징집을 군 인권과 ‘남성 간 차별’이 아닌 성차별 문제로 호도하는 것을 갈라치기라 합니다. 그리고 국회의원, 검사 등 고위 공직자는 물론 각 분야 고위직·고소득자의 ‘신의 아들’이 온갖 ‘기술’로 빠져나간 그 자리를 ‘보통의 아들’이 꾸역꾸역 메워 온, 징집에 관한 대한민국 ‘남성 계급 차별’의 흑역사를 ‘성차별’로 바꾼 것이 ‘바꿔치기’입니다.
결국 여성의 인권과 생명, 곧 성차별은 여전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침공과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라는 것을 볼 때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의 몫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전쟁 속 여성의 피해를 사사기 19~20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 이야기와 불필요한 보복전쟁을 통한 특별한 역사를 더듬어보려고 합니다.
1. 레위인의 첩 이야기
사사기 본문의 등장인물은 레위인과 레위인의 첩,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입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레위인의 첩이 집을 떠나 친정 아버지 집으로 떠납니다. 남편 레위인은 네 달 만에 여인을 찾으러 옵니다. 장인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한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뭅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 기브아(예루살렘 북쪽 도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이들은 레위인 남성과 상관(相關)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남성 간 성폭력으로 이방인 남성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가령 감옥에 들어간 신입 죄수가 먼저 있는 이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것은 동성애와 상관없는 그저 수치심과 굴욕감을 안겨주는 폭력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노인과 레위인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첩을 내주게 됩니다.
결국 첩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윤간을 당합니다. 바깥에 버려진 첩은 남편이 있는 노인의 집까지 돌아왔지만, 집 문에 엎드려져 두 손이 문지방에 있었습니다. 죽어서까지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후 레위인은 자신의 ‘소유물’인 첩을 베냐민 사람들이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첩의 시신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냅니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은 분노하고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벌입니다. 민족 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숫적으로 열세에 놓인 베냐민 지파에게 두 번이나 패합니다. 간신히 세 번째 전쟁에서 이깁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는 멸족 위기에 처했지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가 존속할 수 있도록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허용합니다. 여기서 이방 여인들 역시 착취와 겁탈의 대상이 됩니다.
지금까지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은 레위인의 첩을 부적절한 행동을 한 여인으로 몰아갔습니다. 또는 왕이 없어 부도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연히 죽은 사람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고 첩이었던 이 여인을 통해 기브아 사람은 물론, 레위인을 포함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폭력성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여성은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짓밟힌 존재이지만, 남성은 폭력과 전쟁을 일삼는 이들입니다.
2. 본문 다시 훑어보기
한 사람의 원한으로 이스라엘의 용사 육만 여명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게 되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싸움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누가 잘했고 잘못했나를 떠나서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들을 바라볼 때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슬픈 일인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싸워야할 때가 있으면 싸워야 하겠지만 오늘 본문의 이 싸움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참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위신과 대의명분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베냐민 지파를 친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이나 40만의 대군을 대항해서 피 흘리며 싸운 베냐민지파나 모두 안타깝고 어리석은 백성들입니다.
레위인이라는 신분으로 모욕을 당한 제사장은 이제 자신의 분노를 갚아야 하겠다고 계획하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의 감정을 충동질하여 첩의 시신을 찢고 경악하게 만들어 자신의 의지에 동조할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레위인이었기에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모두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의 비류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결단을 하고 미스바에 온 회중이 모였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모였습니다. 2만 7천의 베냐민지파와 싸우기 위해 40만의 용사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전쟁을 벌여 1차, 2만 2천명(20:21), 2차 1만 8천명(20:25) 명이 죽고, 3차에는 베냐민 사람 25,100명의 군대가 희생됩니다.
이와같이 전쟁은 백해무익한 일입니다. 일제는 우리를 강제점령하여 무려 36년 동안이나 수탈과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에 1919년 3.1절에는 우리 민족이 분연히 일어나 독립만세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26년 후에 기적같은 8. 15 해방을 맞았습니다. 수많은 에스더와 같은 애국 여성과 독립운동가들과 민족혼이 살아있는 선혈들과 우리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자유 해방을 주셨습니다.
3. 여성 연대가 새로운 세상을 예비한다!
3.1운동 당시 인구의 5분의 1인 200만/ 210개 도시에서 1,500회의 대중집회를 벌였습니다. 사망자가 7,500명/ 부상자 16,000명/ 투옥된 사람이 47,000여 명에 달했다고 하였습니다.
3.1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길이길이 본받고 간직해야 할 중요한 민족정신을 남겨 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3.1운동은 <세계 혁명사의 기원>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5.4 운동과 인도의 무저항 <사티아그라하>운동, 이집트와 터키의 민족운동, 아시아와 중동의 민족운동이 우리 한국의 3.1 독립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민족자결주의 운동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3·1 운동을 잊지 않고 특별절기로 예배를 드리며 기억해야 하는 데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숫자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미약했지만
첫째,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눈물과 비통을 씻어 준 것이 교회였으며,
둘째, 3·1 운동의 주체와 진원이 교회였으며,
셋째, 3·1 운동 후에 직접적으로 박해받은 것이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3.1절과 교회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한국 민족의 피묻은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오늘 에스더기도회에 붙여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새로운 구원의 사건에 남성은 입을 닫고 역할이 없으나 여성 연대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령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제사장은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거든 ‘요한’이라고 하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역사에 남성은 입을 닫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반면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요한을 임신하고 부끄러워 5개월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찾아옵니다. 10대의 어린 임산부와 할머니 임산부가 만났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사벳의 뱃속 아기가 신나게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태아가 그리스도를 먼저 알아본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 충만해서 마리아를 축복했으며 마리아는 석 달가량 머물다 돌아갔고 사가랴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여성 연대가 메시아를 맞이했으며 결국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도 남성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여성들만 남았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는 자리에 전쟁과 폭력을 추구하는 ‘남성성(男性性)’ 대신, 사랑과 배려의 여성성(女性性)으로 ‘바꿔치기’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3.1절 105주년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여신도들의 생명 사랑의 헌신이 우리 분단된 한반도의 허리를 고치고 민족의 미래를 열어가는 놀라운 역사를 열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잘못된 결정
삿 20:1-11 / 우인택목사
오늘 본문은 레위 사람이 보낸 첩의 시신 조각을 받고 경악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총회를 열어 레위 사람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 기브아를 응징하기로 결의하는 장면입니다.
1. 먼저, 1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단’은 분배받은 기업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모리 사람들에게 쫓겨나 거할 성을 찾던 단 지파가 가나안 땅의 최북단에 있는 라이스 성읍을 점령하고 자기 지파의 이름을 따라 ‘단’이라고 명명한 곳입니다(18:28-29)
그러므로 단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는 성읍입니다.
‘브엘세바’는 사해 남서쪽 네게브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 최남단을 대표하는 성읍입니다.
‘길르앗 땅’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거주하고 있는 요단 동편의 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은 이스라엘 최북단에서부터 최남단까지, 요단동편까지, 모든 이스라엘 땅을 지칭하는 표현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일하게 베냐민 지파는 빠졌습니다.
그들은 사건의 당사자를 한쪽만 부른 것입니다.
이로 인해 동족상잔의 비극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2. 이어서 2절에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할 것으로 이미 마음을 굳혔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전쟁 때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한 전쟁의 실패를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감정에 격한 반응을 하며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로 인해 더욱 큰 문제를 직면하고 말았습니다(19-25절).
여러분 우리가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이사야 55:8절에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고 말씀하는 것 같이 다수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주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그 주장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검증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일례로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에 사백 명의 선지자들과 미가야 선지자 한사람의 의견이 충돌을 했는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미가야 뿐이었습니다(왕상 22장).
남유다 시드기야 왕 때의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가 많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 하여 그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판단이 될 수도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어도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면 그것들은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맙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까?
오늘,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이어지는 3-7절에 이스라엘 총회는 이 사건의 당사자인 레위 사람에게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말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레위 사람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기브아 사람들의 말도 함께 들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에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나서 옳고 그름을 신중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레위 사람은 자기의 첩이 죽게 된 책임이 전적으로 기브아 사람들에게 있으며, 자신은 피해자일 뿐임을 강변했습니다.
자기가 첩의 시체를 토막 내어 이스라엘 온 땅에 보낸 것의 책임이 전적으로 기브아 사람들에게만 있고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범죄 이전에 자신이 레위 사람으로서 첩을 둔 것부터 지탄받아 마땅한 일임에도 그에 대한 잘못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는데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사장인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해서 이스라엘 땅에 우상숭배와 음란의 악행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것들에 대한 잘못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자극하여 동족간의 전쟁을 부추겼습니다.
그는 완전히 타락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러한 레위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이 당연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은 백성들은 레위 사람이 의도한 대로 모두가 기브아 응징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타락한 신앙인의 화술에 다 넘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흥분하여 이성을 잃고 동족인 기브아를 치는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동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과 정죄를 말하는 저들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격한 감정을 유발하는 사건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뜻을 묻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이 요동할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셨는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오늘 본문과 같은 실수를 막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오늘 말씀에서 타락한 종교지도자가 얼마만큼 사회에 악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는지 분명히 보았습니다. 자신의 큰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상대방의 잘못만을 정죄하려는 레위 사람으로 인해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특히 레위 사람과 같은 교회 지도자가 일어나지 않도록 날마다 기도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사기 20:1-16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있는 두 이야기는 사사시대의 종교적 도덕적 타락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사사시대 초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보입니다. 첫째 이야기에는 이스라엘 단 지파의 가나안 땅 분배 및 이주와 관련된 일이 있고, 둘째 이야기에는 아론의 손자가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이야기가 사사시대 초기에 발생한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보도하고 있다면, 사사시대 중후기에 그들의 타락상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위 ‘사사기 순환’이 반복될수록 타락의 양상은 심화되었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을 잘 알려주는 구절이 두 이야기에 각각 나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삿21:25)
‘왕이 없었다’라는 표현은 둘째 이야기 19장 첫 구절에도 나옵니다. 두 이야기를 통해 주의해야 할 점은 사건의 발단을 특정 인물 또는 인물들로 국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비극적 사건에서 범죄의 주연이나 조연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건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지, 그들만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두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총체적 타락으로 기인한 사건들입니다. 사건 발생의 근본 원인은, 진정한 통치자이시고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없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견대로 살았다는 것은 삶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두 이야기를 두고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다양한 견해와 사건 원인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이야기를 전하면서, 성경 독자에게 현대적 개념의 해석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삶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고 각자의 소견대로 살아간다면 그 사회와 국가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살펴보았던 19장에서는 레위인의 축첩(蓄妾), 첩의 행음과 그 이후 친정행, 레위인의 처가 방문과 그 이후 기브아 유숙시 발생한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둘째 이야기의 중간 부분으로써 레위인 첩의 죽음에 따른 이스라엘 총회 결정과 이에 대한 베냐민 지파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나와서(1-2)
이스라엘 총회가 열렸던 이유는 지파들이 한 레위인이 보낸 토막 시신을 받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모든 영토에 있는 지파들이 다 모였다는 뜻입니다. 총회는 지파의 어른들을 포함해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인 40만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인 곳은 ‘미스바’입니다. 미스바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입니다. 레위인의 첩이 죽임을 당한 사건 현장이었던 ‘기브아’에서는 북쪽으로 약 7km 떨어진 곳입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범죄 현장 가까운 곳에서 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브아 범죄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모인 것이기도 하지만, 여호와 앞에 모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총회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심판을 내리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레위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4-7)
총회는 발생한 사건에 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였습니다. 비록 4절과 5절이 레위인의 요약된 진술이라고 할지라도, 기브아 사람들이 레위인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레위인을 상대로 관계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19장 22절의 ‘관계’는 남색, 즉 동성애를 의미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의 첩을 욕보여 죽게 하였다고 진술하였는데, 첩이 기브아 사람들로부터 욕을 당했던 경위를 상세하게 진술하지 않음으로, 첩에 대한 자신의 보호 책임 부분을 의도적으로 빠뜨렸습니다. 레위인은 이어서 자신의 첩의 시신을 토막내어 보낸 이유와 기브아 사람들에 합당한 심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으로 레위인의 첩이 죽었지만, 시신을 토막내어 12지파에 보내었던 레위인의 행동이 바람직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지파들 역시 시신의 토막을 받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지파의 어른들이 모인 것은 바람직하였지만, 피의자 기브아 사람들의 진술을 듣지 않고 군인 40만명을 모집한 것은 성급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과 진행 과정이 사사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치자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소견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송사자 레위인의 일방적인 진술을 듣고, 레위인의 판결 요구에 이스라엘 총회는 징계를 결정합니다.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8-11)
이스라엘 총회에 베냐민 지파 대표는 불참했습니다. 그 이유를 사사기 기자가 증거하고 있지 않지만, 그 이유가 어떻든,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 지파 대표를 총회에 참석시켜 문제를 같이 해결하려고 했었더라면,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총회가 여호와 앞에 모인 총회라고 생각하였지만, 자신의 소견대로 진행되는 총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총회 결정은, 기브아 사람들이 행한 대로 징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행을 행한 대로 징계하는 것은 율법에 있습니다. 하지만 증인 출석도 없고 피의자 심문도 없는 징계 결정은 율법에 위배 되는 일입니다. 징계 과정을 어떻게 보면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소견에 따른 결정이었을 뿐입니다.
기브아를 치려는 결의
매튜 헨리 주석 / 사사기 20:1-11
Ⅰ. 레위인의 첩에 대한 사건을 검토하고 그 일에 대해 어떤 처벌을 가할 것인지 의논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총회가 열렸다(1,2절). 그들은 어느 한 집권자에 의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심으로 인하여 서로 동의하고 한 마음으로 뭉쳐 모이게 된 것 같다.
1. 그들이 모인 장소는 미스바였으며, 그들의 행렬은 하나님의 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스바는 실로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행렬은 미스바에서 뻗쳐 있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실로는 작은 마을이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총회를 열 때면 그 옆 성읍을 본거지로 잡았다. 그것은 실로에서 성전 일을 보는 제사장들이 큰 무리로 인해서 곤란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2. 그곳에는 맨 북쪽에 있는 단 지파 (우리는 이 지파가 제일 늦게 땅을 차지했다는 것을 18장 29절에서 읽었다.)에서부터 제일 남쪽에 있는 브엘세바까지의 사람들과 길르앗에 사는 사람들 (이 지파는 요단 건너편에 자라잡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합심했다. 비록 이 사건이 레위인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이 모임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호의가 아니라 백성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합이었다. 그리하여 이 레위인은 이처럼 말하고 있다. "내가 백성들에게 호소하노라." "하나님의 백성 중 칼을 빼는 보병은 40만명이었다." 그들은 싸움을 위해 잘 훈련되고 무기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가나안 전쟁을 알고 있는 자(3:1)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사람들의 모임에는 각 집안의 대표(이들은 백성들의 모퉁이 돌과도 같다.)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으며 천명, 백명, 오십명, 혹은 열명의 우두머리로서 그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비록 이스라엘에 왕이나 사신들이 없었지만, 그들을 명령하고 통치하는 일은 행해졌을 것이다. 그 일을 하는 조직으로는,
(1) 뜻을 정하기 위한 총회가 있었다. 그리하여 백성의 우두머리가 그들을 대표하여 일을 안내하고 지시했다.
(2) 전투를 위한 군병들의 총집합이 있었으며 이들은 칼을 빼는 자로 모두 전사(戰士)였다. 그러나 이들은 돈으로 고용된 자들이 아니고 그들 스스로 비용을 들여 무기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 가나안으로 왔을 때는 6만명이었지만, 이 때에는 더 그 숫자가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남자들은 20세에서 60세 사이에 이르는 사람들이며, 이 중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병기를 든 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또한 두 지파 반의 병사 수가 4만이었지만(수 4:13), 이들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
Ⅱ. 베냐민 지파에게 이 회의에 오라는 통고를 보냈다(3절).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들었다." 회합에 모인 자들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들의 형제와 논의하여 이 일을 잘 매듭짓기 위하여 그들을 정식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평화와 명예를 생각하기 보다는 이 소환 명령을 듣고는 화를 냈으며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다.
Ⅲ. 기브아 사람의 범행에 대한 조사가 엄밀히 이루어졌다. 전달자가 이 끔찍한 사건을 알려 그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이러한 일이 사실보다 더 나쁘게 과장되는 일이 흔히 있기 때문에, 이들은 상세히 이 일을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위원회에서 목격자들의 증언 (이들은 물론 서약대로 바른 증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을 검토하고 이 일을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단지 레위인의 진술만으로 되어 있으나 좀 더 정확한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기 위해 그의 종과 그 노인의 증언을 참작하기 위해(3절) 이 일을 "우리에게 고하라" 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율법상으로는 단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어떤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레위인은 그 일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진술했다. 그가 먼 길을 가는 중 날이 저물어 기브아에 머물어 유숙하고자 하였고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던 중(4절), 그곳에 살고 있는 기브아 사람들이 나그네된 자들을 보호해 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냉담했으며, 더우기 그가 유숙하고 있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또한 기브아 사람들은 그들의 사악한 행동에 아무런 수치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19:22). 그들은 소돔 사람처럼 남색조차도 거리끼지 않고 행하려 했으며, 만일 그가 진중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사악한 사람들에게 복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의 첩에게 행한 일로 보아도 그들이 그를 그들 수중에 넣었다면 그를 처참하에 짓밟아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 첩을 욕보여서 죽게 했다" (5절). 그리하여 이 사악한 일에 대해 그의 나라 백성들이 분노하게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이 행하여졌다는 것" 을(6절) 증거하기 위하여 죽은 시체를 조각내어 온 지파에 보냈다. 모든 음행은 망령된 것이며 이스라엘 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계약과 함께 그들의 몸에 영예로운 인(印)을 치고서도 그들의 몸을 더럽힌 자들은 하늘로부터 거룩한 보복을 받아야 했으니, 그들의 이름은 나발이었고, 그들의 행실은 정말 망령되었다. 그는 회합에 모인 자들의 정당한 판결을 요청하며 그의 진술을 끝내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므로(7절) 규례와 법률을 알 것이니라" (에 1:13). 즉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니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의 땅을 더럽히는 일을 두려워 해야 한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한 자손이니 이 악한 일을 몰아내야 하며, 하나님의 지파인 레위인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 대한 너희들의 의견과 방책을 내놓도록 하라."
Ⅳ. 그들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백성을 불명예스럽게 수치스럽게 만든 이 사악한 성읍에 복수를 가할 때까지 흩어지지 말고 함께 있기로 했다.
1. 그들은 망령된 일이 행해진 것에 대해 열렬한 분노를 표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 할 일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수치를 씻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으며, 죄악을 다스려 그 백성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칼을 뽑기로 했다(8절). 이러한 태도로써 그들은 개인의 일보다는 공공의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참된 이스라엘의 자손임을 보여주었다.
2. 그들은 신중하게도 그 백성들의 남은 자들을 위해 양식을 예비할 상당수의 군대들을 선정하여 보냈다(9,10절). 그들은 10명에 한 사람꼴로 제비를 뽑아 4만명을 선정하여, 이 큰 군병들이 먹을 양식과 그 밖의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오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음 이곳으로 올 때는 단지 미스바까지 올 동안만의 식량을 준비했을 뿐 그보다 더 먼 기브아까지 진격할 만한 준비를 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일단 흩어지면 모두 다시 모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 중에 사람을 뽑아 보내었다. 사람들이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모였을 때는, 그들의 열의가 아직 식지 아니한 때에 일을 감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은 일의 진행이 지연되면 이 뜨거운 열의가 빨리 식어 버리기 때문이다. 오늘 해버릴 수 있는 선한 일을 결코 내일로 미루지 말자.
3. 그들은 이 회합과 일의 진행에 있어서 일치 단결했다. 그들은 "아무런 이의 없이" (8절) 제비뽑기에 응했으며 "하나님같이 합심하여" (11절) 일을 집행했다. 이처럼 그들의 자랑과 영광이었던 것은 여러 지파들이 공동의 선한 일을 위해 힘을 합하였다는 점이었다.
호크마 주석
=====20:1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17:6과 18:1;19:1의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은 오직 '여호와'한 분 뿐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인것은 지도자들의 통솔하에 각 지파 간을 연결하는 연락 조직에 의해 된 것이지만, 본서 기자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모인 것'을 부각시키므로써 여호와의 통치권 을 강조하고있는 것이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은 가나안 최북단의 성읍이고(18:29) 브엘세바는 최남단의 성읍이다(창21:31). 따라서 본절과 같은 표현은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 전역(全域)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삼상3:20;삼하3:10;24:2;대상21:2;대하30:5).한편 '단'(Dan)의 본명은 '라이스'(Laish)이다. 그런데 단 지파가 이곳을 정복한 후자기 조상의 이름을 따라 '단'으로 개칭하였다((18:29). 따라서 본장에 나오는 사건은적어도 단 지파의 라이스 정복 사건 보다는 이후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길르앗 땅 - 이것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과 상대적인 것으로서 요단 동편의 전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0:3 주석을 참조하라.
미스바 - '망대'(watchtower)이라 뜻을 가진 이 지명이 가리키는 곳은 두 곳이다.한 곳은 길르앗 땅의 미스바이고(10:17;11:11,29,34), 다른 한 곳은 베냐민 지파 변방에 위치한 미스바이다(수18:26).10:17주석 참조. 본절의 미스바는 물론 후자이며 기브아 북쪽 7.5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 이곳은 '네비 삼월'(Nebi-Samwil)로 불리우고 있다. 한편 혹자는 왜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는가에 대하여 답하기를 미스바에적당한 예배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Goslinga).그러나 카일(Keil)은 실로의 성막(수18:1;삼상4:3,4)이 그곳으로 옮겨진 것은 아니라고 못박고있다.어쨌든 이후로 미스바는 국가적 총회 장소로 자주 나타나는데 사무엘시대에도 그러했고(삼상7:5-12,16),왕조 시대 말기(왕하25:23)나 마카비 시대에 도 이곳에서 전체 회중의 총회가 열렸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모은 또 다른 이유는 미스바가기브아에서 가까왔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에게 크게 위협을 가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20:2
본절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인 본질적이 이유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즉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재판하고 응징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모든 지파의 어른들 - 여기서 '어른들'에 해당되는 원어 '피노트'(* )는'모퉁이돌'(corner stones)이란 뜻이다. 이는 비유적으로 '지도자들', 또는 군사적인의미에서의 '장'(chief)들을 가리킨다(삼상14:38;사19:13). 따라서 여기서 어른들은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로서 40만의 보병들을 지휘하는 장군의 역할을 수 행했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Hervey, Mattew Henry).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 - 이처럼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모인 군사의 수가 40만이었다는 것은 출애굽시 장정의 수가 60만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민26:51) 실로 엄청난 것이다. 또한, 훗날 사울이 암몬과 싸우기위해 군사를모집 하였을 때 그 수가 33만이었던 것만 보더라도(삼상11:8) 여기에 모인 수는 이스라엘 장정 전체가 다 모인 수임을 알 수 있다.
=====20:3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 이것은 베냐민 자손들이 기브아 비류들의 사건(19:22-26)을 이제 듣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미스바에서 총회가 열렸다는 사실을이제 들었다는 뜻이다. 앞서 레위인이 베냐민 지파에게도 시신한 덩이를 보냈을 터이니(19:29), 그들은 이미 사건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Keil & Delizsch,Lange). 그러나 각 지파들이 총회를 가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베냐민 지파들이 총회를가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베냐민 지파에게는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은이제서야 총회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방안을 그들 나름대로 연구하였을 것이다. 한편13절에 나타난 베냐민 사람들의 태도를 볼 때, 이때 베냐민 사람들은 그 총회에 대해강경히 대처하기로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 총회는 기브아 비류들의 사건에 대해 신중히 대처하기위하여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전체회중 앞에서 다시 한번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레위사람으로 하여금 자초지종을 말하게 했다.
=====20:4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 본절에서 7절까지에 기록된 레위인의 보고(報告)에서 이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실제로 노린 것은 그의 목숨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대신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하지 않았다(19:25). 여기서 은근히 자신의 죄를 감추려는 레위인의 교활함을 발견하게 된다.
=====20:5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 이처럼 본문에 나타난 레위인의 이야기의 초점은 오직 기브아 사람들이 '그의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하였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오직 기브아 사라들이 '그의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하였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청중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도록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특히 여기서 '욕보여서'( , 인누)는 강조형 능동태 동사로서 '여성을 무지막지하게 능욕하다'는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말 역시 청중들의 분노를 끊어오르게 하기에 더욱 충분하였을 것이다.
=====20:6
이는...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 여기서 이 레위인은 자신이 첩의 시체를 쪼개어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내게 된 이유를 강조함으로써, 사람의 시체를 각뜬 자시의 잔인한 행위에 대하여서는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부 기브아 비류들의 행위를 기브아 사람들 전체의 악행인 양 과장하여, 이것이 전 이스라엘 지파에 대한 범죄임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국가적 대처 방안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이 과장된 레위인의 보고 속에는 자신의 죄를 감추고사적(私的)인 분노를 민족적인 분노로 미화시키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20:7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 여기서 이 레위인이 요구한 것은 레 18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음란죄에 대한 형벌이다. 만일 이레위인의 말대로 기브아 사람들 전체가그러한 범죄를 행했다면 그들은 이스라엘 지파에서 끊쳐져야 할 것이다(레18:29).
=====20:8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장 일치로 베냐민 지파를 징벌할 것을 가결했다. 한편 여기서 '일어나다'에 해당하는 '쿰'(* )은 성전(聖戰)의 출전이나 어떤 직무나 의무 수행에 있어서의 예비적 동작을 가리킨다(신17:8:수3:16:왕상8:20).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결연한 행위는 한 지파의범죄를 징벌하기 위한 심판적 태도라고 볼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심판적직무 수행을 마칠 때까지 결단코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겠다고 결의했다.
=====20:9
제비 뽑아서 그들을 치되 - 여기서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위하여 제비 뽑았는지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의견들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기브아를 치는 대는 전체 보병 40만(2절)이 다 동원 될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 가운데 1/10 을 제비 뽑아 기브아를 치게 하고 나머지는 그들을 위해 군량미를 준비케 하거나 사상자가 생길 때 병력을 보충케 하였다는 견해가있다(Hervey, Cassel, Wycliffe, Mattdw, Henry). 둘째, 여기서 제비 뽑은 이유는 가나안을 정복할 때와 같이 기브아를 정복했을 때 각 지파가 그 땅을 나누어 취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가 있다(Keil, Goslinga). 그러나 본절 이후에 나타난 제비 뽑은 결과를 보면 땅분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후자의 견해는 옳지 않다.한편 70인역은 본절과 관련, '제비 뽑아서'와 '그들을 치되'사이에 '우리가 올라가리이다'라는 말이 빠진 것으로 보고 있다(Pulpit Commentaty). 그러므로 본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 뽑은 것은 기브아 땅의 분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기브아를 칠 자들을 선출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20:10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취하고 - 앞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미정복지를 정복하러 올라갈 때에는 자기에게 분배된 기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각 지파별로 올라갔다(1장). 그런데 본절에서는 기브아 비류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지파가 공동르로 각 지파중에서 사분의 일씩 선발하여 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온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아 사람들의 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혼연일치 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이스라엘 내에서 죄악을 제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한 열 한 지파의 궐기는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신13:5;17:7;19:19). 그러나 그들은 형제 지파를매몰차게 정죄하기에 앞서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통절히 느껴야 했고,그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민족 현실을 두고서 회개해야 했다. 오늘날도, 교회와사회에 내재해 있는 여러 문제들을 보고 의분을 느끼고 비판하는 자는 많지만 그러한문제들을 곧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부터 개혁시키고자'하는 진정한개혁자는 그리 많지 않다(마7:3-5).
망령된 일을 행한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네발라'(* )는 '무분별하다', '어리석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마틴노드(MartinNoth)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을 표현할 때 쓰는 전문적 용어로 보았다(삼상 25:2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아 비류들이 저지른 윤간 행위(19:25)를하나님의 법을 어긴 심각한 범죄 행위로 보고, 기브아 비류들을 징계하려 했음을 알수있다. 사실 각종 성 범죄는 인간의 영혼과 그기본 인격을 파괴하시는 죄악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중차대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레 18:1-5 강해, '성경에 나타난 성범죄의 이해' 참조
=====20:11
하나같이 합심하여 - 8-11절에 대한 본서 기자의 주석이다. 본서 기자는 본 사건을다루면서 이전의 사사기 시대 동안에는 볼 수 없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체감과 협동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래로 이와 같은 일체감을 보여준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지파간에 반목이나 비협동적인 모습이 자주나타나있다(5:17;12:1). 따라서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그 집단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단합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단합은 대항해야 할 공동의 적이나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뚜렸할 수록더욱 강하게 요청되는 법이다. 이와 관련,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 중의하나로서 우리는 교파 간의 분열 혹은 동일 교파 내의 또 다른 분열을 들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이간시켜 소원(疏遠)해지도록 하는 것사단의 주 임무임을 고려하건대(창3:1-5;갈5:20), 우리에게 있어 교회의 '하나됨'은그 무엇보다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할 것이다(엡4:4-6). 물론 이러한 일치 운동이 자칫하면 맹목적 획일 주의로 흐르거나 변질된 복음을 낳게 할 위험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의 일치를위한 탐구와 노력은 다각적인 안목에서 부단히 전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