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로마사에 대한 오해가 예전부터 정도가 심했고, 기존의 오해와 편견을 타개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모 작가 때문에 이게 더욱 더 심해진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때문에 콘스탄티누스가 다소 엉뚱한 부분에서 과대평가되는 가 하면,
한국에만 있는 물구나무선 기독 광신도인 기독 안티 광빠돌이들에 의해 저평가 되는 부분도 상당합니다.
이에 대해 일일히 다 얘기하자면 글이 몇 개라도 모자라겠지만 일단 올리신 부분에 대한 내용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로마)
서기 30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리타니아 사령관에 오른 그는 황제의 난에 뛰어든다.
스스로 황제를 자처하는 6인의 후보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콘스탄티는 점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간다.
--->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다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 뒤를 이어 브리타니아 사령관에 오른 적 없습니다.
애초에 콘스탄티우스는 브리타니아 사령관이 아니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죽어서 당황하던 장병들에게 아우구스투스로 옹립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섯 황제 시대의 황제들은 "후보"가 아니라, 막센티우스와 갈레리우스를 제외하면 모두 황제가 맞습니다.
이후 그는 중요한 전투를 앞 두고 갑자기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이것은 응집력이 강한 기독교도의 지지를 받고, 반대파를 수세로 몰아가기 위한 전략이었다.
---> 밀라노 칙령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발표된 바가 없으며, "갑자기" 된 바도 없습니다.
막센티우스를 제거한 후 리키니우스와 양대 로마 황제로 위치를 공고히 했을 때 두 사람 간의 정치적 합의로 나온
산물입니다. 절대 콘스탄티누스 혼자만의 작품은 아닙니다.
그리고 당대에 기독교도들 별로 절대 다수도 아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반대파라고 해서 굳이 반기독교적인 것도
아니었고요.
또한 그전부터 기독교의 세력은 강해져가고 있었으며, 왜 나라에서 남이 믿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강했습니다. 이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때부터 황제가 존경하던
성인들 대열에 Jejus가 끼었을 정도입니다.
이후 그는 '밀비우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황제리그에서 최종 승자가 된다.
----> 그 전투는 막센티우스를 이겼던 전투에 불과합니다. 리키니우스를 쓰러뜨리고 단독 황제가 되었을 때가 그 순간입니다만
사람들이 기대하던 드라마틱한 승리 이후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기독교의 힘을 빌어 자신의 권력강화와 세습안정화를 꾀하려고 한다.
---> 단순히 콘스탄티누스 혼자만의 야욕으로 이뤄진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계 수익성 악화 구조에 있는 체제가 선택하는 길이 체제를 통합하는 이념의 모색인데, 이건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부터 이뤄지던 일입니다.
마침내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고 기독교를 로마의 다신교와 절묘하게 합성시켰다.
---> 엄청나게 잘못된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교리에 별반 이해도 없었으며 관심도 없었던, 전형적인 이교도 황제였습니다.
일부 많이 모르는 분들이 콘스탄티누스가 중세 기독교를 만든 것처럼 얘기하는 데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삼위 일체론은 콘스탄티누스가 채택해서 정통 이론이 된게 아니라, 그전부터 플라톤 철학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사실 굳이 정체를 말하자면 기독교 신자가 된 그리스 철학자들이지만.....) 의 영향으로 공의회 이전부터
어느 정도 주류 이론으로 굳어지던 이론이었습니다.
(애초에 기독교가 나오기도 전에, 그 기독교가 모태가 된 헤브라이즘이란 것 자체가 헬레니즘 영향을 받아 많이 변한
헤브라이즘으로써, 모세 때 유대교와는 물론이려니와 네헤미야와 에스라 때의 그 유대교와도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사실 이건 헬레니즘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는 아리우스파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삼위 일체론을 굳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건, 그쪽이 주류였기 때문입니다. (모 작가 말대로 이해가 안 되는 게 보다 신비주의가 강하니 제국 통합에 도움이 되네
어쩌네....결코 아닙니다. 거기까지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있었으면 공의회에서 했었을 일이 거기에서 그쳤을 리가
절대 없습니다. )
이후 개종한 사람들에게 온갖 특혜를 주어 기독교를 로마 전체로 확산시켰다.
----> 콘스탄티누스 때는 그렇게 두드러지는 특혜는 없었고, 콘스탄티누스는 그 아들과는 달리 교권 보호에도 무관심 했으며
최고 제사장 직도 의욕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기독교의 확산 자체도 콘스탄티누스 때 그렇게 획기적으로 증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의 지위는 신으로부터 선택된 황제로 인정받게 된다.
----> "그 결과"가 아닙니다. 애초에 콘스탄티누스는 이교도 로마식 개념의 황제 그대로였습니다.
원로원에서 선출되었고 4두들로부터도 정식으로 인정받았던 그의 황제 자리는 로마법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는 기독교도들로부터 대제로 추앙받고 있다.
-----> 솔직히 이건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지, 실제로 정말로 그래서가 아닙니다.
본격적인 의미의 기독교화라면 콘스탄티우스 2세와 테오도시우스지만.....
첫댓글 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 의견에 제가 몇 가지 말씀드릴께요.
1. 여섯명의 황제 후보는 잘못 표현되었다 --> 네 맞습니다. 하지만 당시 최후의 1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가들은 모두 6인이었습니다. 이해를 쉽게 하고자 그냥 '후보'라는 범주로 단순화 했습니다.
그들 여섯 황제는 "최후의 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까진 없었으며 그건 콘스탄티누스도 애초엔 마찬가지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식 전제정 체제는 도저히 황제 혼자서 커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그건 콘스탄티누스마저도 단독 황제가 되고 나서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등장한 게 오공자 체제였죠. 멍청이 아들들이 말아먹긴 했습니다만.
그 부분은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2.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다신교와 합성하지 않았다 --> 유대교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로마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일요일로 바꾼 것을 대표적인 예로 봅니다.
이것은 좀 복잡한 배경이 있지만 한번 간단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원래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되었고 아주 초기에 주로 믿던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유대교의 4대명절과 그 예법을 다 지키면서도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전파하던 교리를 믿었습니다. 이들을 "메시아닙 쥬스"라 하는데 10세기까지 존재하다가 소멸, 현재 다시 부활한 공동체 입니다. 현재 예루살렘에 가면 이들의 공동체와 교회가 존재한다고 하네요. 그렇기 떄문에 이들은 안식일에 모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기원후 60년대가 되면서 점차 이방인(유대인이 아닌 민족들) 신자가 늘어나자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유대인이 아닌데 왜 유대인들의 예법을 지켜야 하느냐" 라는 문제였죠. 이 문제를 접한 바울 선생 및 12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회의를 한 결과 유대인은 유대인의 예법을 지키고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예법에 따라 예배를 드려라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 결과, 이방인들은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죠.
원래부터 메시아닙 쥬스가 예배를 드리는 안식일과 이방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일요일이 분리되어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결코 쿤스탄티누스 대제가 기존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원래는 안식일에 예배 드리는 것을 일요일로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12사도와 바울이 이방인들을 일요일에 예배 드리게 한 것을 다신교와의 합성이라고 보는 것은 우습지만 만일 이 관점으로 볼 수 있다면 기원후 60년대에 이미 일어난 것이지 결코 콘스탄티누스가 한 것이 아닙니다.
유문기님 설명대로며, 그 외에도 교리적인면에서 콘스탄티누스가 개입된 부분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그는 그저 몇백 년 거치면서 형성된 당대 기독 신학 주류에 편승했을 뿐입니다. 다소 편견을 벗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및 기독 신학사를 추천드립니다. 로마인 이야기는 적어도 기독 신학 부분에서는 작자가 너무 거기에 자기 호오를 강하게 표출해서 아예 자료 참고도 하지 않고 결론을 도출했기에 무리한 논리 비약이 많습니다.
아~ 덕분에 자세히 알게되었네요. 메시아닙 쥬스라... 기억해두겠습니다.
3. 황제는 기독교 확산을 위해 특혜를 남발하지 않았다 --> 성직자에게 납세를 면제해주어 부유층들이 세금 도피처로 활용하였고, 개종한 군단병들에게는 일요일에 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혜택이었고, 기독교 확산에 결정적인 기름을 부어준거라 생각됩니다.
임용관님께서는 3번 주장을 나중에 바꾸셨습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임용관님 애초 언급은 "특혜를 주어 기독교를 대폭 확산시켰다"입니다. 다만 나중에 바꾸신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자면, 그 자체로는 그다지 큰 혜택은 아니었고, 기독교 확산에 별반 결정적 기름은 안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기독교인이 그리 많이 늘지 않았으며 이는 다름아닌 율리아누스 황제 시절에 증명이 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납세 혜택에 의한 부유층들 세금 도피처는 여러 시대에 걸쳐서 일어난 일이지 그 당대에 갑자기 사회 문제가 될 정도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폭확산이 맞는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대폭 확산"이 되지는 않았고 여전히 지식인 계층과 군인 계층에서는 이교도들도 많았습니다. 그 조치 자체로는 생각보다는 확산에 별반 결정적인 조치는 되지 못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를 제외하면 이를 진지하게 언급하는 학자가 없는 이유는 그녀가 그들보다 통찰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침소봉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조치가 결정적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보호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 콘스탄티스 때부터..
물꼬는 텄으나 실질적인 확산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알겠습니다...
4. 당대에 기독교도들은 절대 다수가 아니었다 --> 오리엔트 정제인 막시다이아의 통치 지역은 서방 보다 기독교도가 몇 배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콘스는 그 동안 로마에서 탄압을 받은 기독교도의 재산을 다시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기독교도들에게 시달릴 막시다이아를 고려한 강력한 무기가 되었지요.
절대 다수가 아니었습니다. 보통 우리들의 이미지에는 '기독교인들이 90%정도로 로마 제국에 넘쳐 흘러 그것을 이기지 못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공인했다' 라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로부터 313년 기독교 공인까지 수 백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전체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비율은 10%정도이고 이들도 주로 도시에 있었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시골에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배영수 외 14명, 『서양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3 9쇄), p58)
무슨 뜻인지 잘 알겠네요...
5.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식 개념의 황제 그대로였다 --> 이후부터 로마에선 신정국가처럼 황제의 세습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나중에는 다시 로마식으로 바뀌었지만요. 여기까지가 제 생각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님 의견이 대체적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습에 대해 어느 정도의 사회적 동의가 있었던 것은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이며, 또한 로마가 신정 국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는데 이 또한 크나큰 오해십니다. 이후에도 로마에서는 재능이 부족한 황제의 세습에 대해 대단히 미심쩍은 의문을 품었으며, 설령 그자가 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공화정 로마로부터 계속된 전통, 임페라토르의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에서 결격되면 그 자는 비참한 최후를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혀 세습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건 비잔틴 로마 제국 시절로 분류하게 되는 헤라클리우스 이후 시대로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세습 황제가 그나마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유능한 보필자가 있었을 때 얘기입니다. 멍청한 황제의 표상인 호노리우스도 스틸리코가 죽자마자 바로 콘스탄티우스라는 공동 황제를 선발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콘스탄티누스 사후 직후에도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대에서만 해도 장군들의 반란에 황제가 목이 달아났으며, 율리아누스가 세를 얻은 것이 그 역량 덕택이었으며,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지 못한 황제가 이후에 또 나옵니다. 때문에 말씀하시는 내용들은 설득력이 대단히 적습니다.
그리고 제 주장의 출처를 말씀드리면...에이, 이거 몇번째 얘기하는건가 싶으면서도, 또 언급하자면 사생활의 역사, 비잔틴 제국사(게오르그 로마 제국 최후의 백년, 로마인 이야기, 고대 전쟁사 이야기...등등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책인데 계속 적느라 쪽팔리긴 하지만 근거를 대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어쩌는 수 없군요. -_-
저는 당시를 말하는거고, 님은 결과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저도 결과론엔 동의합니다...
"신정 국가처럼 황제 세습을 당연하게 여겼다"가 입증되려면 콘스탄티누스 사후에 벌어졌던 추이를 볼 수 밖에 없으며, 이는 "결과"가 아니라 "FACT"그 자체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당시에 그랬다면 그 바로 다음 계승에서 세습을 당연시 해야 했습니다만 그리 되지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아들이라서 제위계승했다지만 그거라면 원수정에서도 마찬가지며, 결정적으로 그들은 기독교도도 아니었습니다. 후세 로마 제국에서 보이는 기독교식 절차도 아예 없엇습니다. 이는 결과론의 범주가 아닙니다.
기독교도의 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도가 다신교를 누르고 승리할수있던것은 "조직력" 덕분입니다.
이 조직력이 아니라면 기독교공동체가 박해나 와해의 위협을 피할수없엇을겁니다 (물론 로마제국시절 항상기독교가 박해받지는 않았습니다.)
세습이 로마제국계승의 기본원칙아니던가요. 양자만 해도 세습이란 면이 강한데 말이지요. 티베리우스 황조만 해도 얼마나 많은 폄하를받았고 그 업적들이 부당한 평가를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입니다
세습이 기본 원칙이었는데, 콘스 황제가 이를 종교와 결합시켜서 그것을 신성불가침화 하려고 했던걸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으며 그렇게 할 의도도 없었고, 콘스탄티누스 자체도 이교도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처 언급이 늦었지만, "종교와 결합시켜서 신성불가침화 했다"자체는 틀린 FACT입니다. 보다 정확한 FACT는 "기독교 세력을 황실의 우군으로 끌어들이려 했다"입니다. 나중에 덧씌워진 성 콘스탄티누스 이미지는 당대에서 몇백년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덧씌워진 선전이지 실제와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기독교 세력의 우군화에 동감합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살이 붙혀진걸로 이해할께요...
6인 후보/ 종교 합성/ 다수의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님들의 의견을 인정합니다. 다만 콘스 황제의 기독교 확산과 신정국가론에 대해서는 제 생각이 어느 정도 맞다고 봅니다. 1) 콘스 황제는 기독교도의 기하학적 증가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고, 기독교도 확산에 불을 붙였습니다. 2) 황제는 소기의 목적(수도이전, 주교의 권력화)이 달성되자 로마가 완전한 신정국가가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의 정서를 고려한 판단인 것으로 보여지구요. 다만, 로마인들이 오리엔트식 전제정치에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나중에 이러한 의미가 퇴색된게 아니었을까요?
1) 기하학적 증가에 절대적인 역할도 못했으며, 확산에 불을 붙이지도 않았습니다. 불씨를 붙였다면 모를까. 물론 정책 방향을 제시한 건 큰 업적입니다만 임용관님 생각처럼 그리 큰 역할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 위 리플 및 참고 서적들을 참조해주십시오. 2) 콘스탄티누스는 로마가 완전한 신정국가가 되었음을 인정한 바가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끝까지 로마 노바를 두고 로마의 새로운 수도라고 발표를 못하고 얼병이처럼 얼버무린 건 로마인들의 보수적 관념이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많이 알게 되었네요. 알려주신 서적을 제가 꼭 읽어봐야겠어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본문을 좀 손질할께요^^) 아 그리고 이런한 과정은 저에게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