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滿州事變)과 제 1차 상해사변
출처: http://blog.naver.com/mirejet/110037434974
관동군의 잇다른 침략행위는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피할수 없었고 또 관동군의 섣부른 단독행동으로 감정이 상한 육군과 정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선 만주 전토를 직속화하지않고 대신 괴뢰정부를 내세워 통치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는 유조구 사변 후 4일이 지난 후였다.
만주국 황제 푸이
특무기관자이었던 도이하라 대좌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인 애신각라 푸이(愛新覺羅 溥儀)를 불러 일본군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만주족의 국가인 청조의 부흥을 전제로 푸이는 새로운 국가의 황제로 추대되는 것에 동의했다. 11월 10일에 푸이는 텐진(天津)의 자택을 출발해 13일에 관동군의 본부에 도착했다. 한편 관동군은 친일파인 장징후이(張景惠)를 총리로 내세워 군벌과 토착지주들을 규합해 신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장징후이(張景惠)
만주국 총리였던 장징후이, 사실상 관동군에 의한 명령을 다 받아주는 물러터진 총리라 하여 별명이 <두부총리>였다. 한편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스팀슨은 1932년 1월 7일에 일본의 만주침략에 의해 중화민국의 영토, 행정의 침해를 파리 부전(不戰)조약에 위반하는 행위라고 일본과 중화민국에 통고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물론 영국 등 유럽 각 제국도 소극적이지만 이에 찬성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인식부족에 의한 것이라 평가하고 거부했다.
만주에서 진공중인 일본 관동군 소속 육군부대
1932년 1월이후 국제사회가 만주로 눈이 쏠린 틈을 타 관동군은 당시 국제도시였던 상하이를 침공해 중화민국군과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제 1차 상해사변) (이전 장쭤린 폭사사건과 유조구 사건도 만주사변의 원인 중 하나였다)
이에 1932년 3월, 중화민국 정부의 제소에 의해 국제연맹에서는 윌리엄 륏튼 경에 의한 조사단(륏튼 조사단)을 파견하여 약 3개월에 걸쳐 만주지역을 조사 후 륏튼은 9월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1933년 2월 24일, 대일권고안이 포함된 보고서가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찬성하지 않았다. 1932년 2월 초순경부터 관동군은 만주 전 지역을 점령했다.
3월 1일, 관동군은 만주국(滿州國) 건국을 선언하고 국가원수 자리인 집정(執政)에 청조의 폐제인 푸이를 추대 후 수도를 신징(新京, 현재 장춘)으로 정했으며 연호를 대동(大同)으로 정했다.
이 발표는 동북행정위원이었던 장징후이의 공관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푸이의 집정취임식이 3월 9일, 신징에서 행해졌다.
3월 12일,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총리의 내각은 내각회의에서 <만주와 몽고는 중국본토에서 분할독립한 정권이 통치하는 지역이어서 차제 국가로 발전하는 설비를 유도한다>라고 발표했다. 일본정부는 관동군의 독단행동을 사실상 인정한 셈이 되었다.
군부를 견제하다 결국 암살당한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
이누카이 총리는 이러한 관동군의 횡포와 전횡에 불만을 가져 만주국 승인을 미루고 있었는데 급진파 청년장교에 의한 습격사건( 5. 15 사건)이 일어나 이누카이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는 내각의 약화화 권위가 군부에 밀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군부가 의회의 통제권을 이미 벗어난 것을 의미했다. 1932년 6월 14일, 이누카이 암살 후 새로운 총리가 된 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신임총리 주재의 중의원 본회의에서 만주국 승인법안이 제출되어 만장일치로 가결되어서 9월 15일에 대일본제국(사이토 내각)과 만주국 사이에는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가 체결되어 일본의 만주내 권리보호와 관동군의 주재를 인정했다. 그러나 만주국은 사실상 관동군에 의한 일본의 괴뢰정부에 불과해서 구미제국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각국과 국제연맹은 이를 침략행위로 비난했는데 만주는 중화민국의 영토라는 중국측 주장에 국제연맹이 손을 들어 줌으로 1933년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말았다. 관동군에 의한 장쭤린 폭살사건, 유조구 사건, 일련의 만주침략전을 통칭해 만주사변이라 일컫는데 군부에서는 지나사변(支那事變), 당시 언론에서는 일화사변(日華事變)이라 보도했다. 만주사변은 바로 중일전쟁(中日戰爭)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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