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쥐랑 김두한이랑 무슨 상관있어여???
엘ㅈㅣ 화이팅
--------------------- [원본 메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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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김을동 애끓는 추석성묘, "김두한의 딸, 부끄럼없이 살겠어요" </sctitle></p>
<p align="right"><font color="#666666"><sctime>2002-09-19 11:36 </sctime></font></p>
<p><img src="http://www.sportschosun.com/image/article_line.gif" border="0" vspace="10"></p>
<p><scnews>
<table border="0" cellpadding="5" cellspacing="1" width="100%" 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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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p align="center"><b>72년 무허가 골방서 임종, 집엔 장례치를 돈도 없어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아<br>
연금 통장째 고아원 기탁 전해 듣고 불효 가슴아파 조선족학교
살리기 앞장 </b></td>
</tr></table>
<table border="0" cellpadding="4" cellspacing="1" width="100" bgcolor="#828282" align="left">
<tr>
<td height="15" bgcolor="white"><p><img src="http://www.sportschosun.com/news/life/200209/20020920/29t29004.jpg" width="160" height="239" border="0"></td>
</tr><tr>
<td height="15" bgcolor="#EDF0F1"><p>◇'영웅 김두한,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생애를
마치고 여기 잠들어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며, 권력보다는 약한 자 편에 설 줄 알며…'<김두한 추도비문
중></td>
</tr></table>
<p> 스산한 가을 바람만 이따금씩 나뭇가지에 걸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묘소. 질풍노도처럼 살다간 풍운아의 거대한 발자취도
세월의 무게 만큼은 어쩔 수 없어 한줌 흙으로 변해 있었다.<br>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공원묘지 내 김두한 묘소. 멀리 노고산이 마주 보이고, 산자락 밑으로 굽이쳐 흐르는 내를 따라 일영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공원의 정상부분. 이곳에서 30년을 일해온
묘지기 이선군씨(58)는 "죽어서도 높은 곳에서 호령하라는 뜻이 담긴
명당"이라며 껄껄 웃었다. <br>
하지만 영웅의 안식처 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진입로조차 없어 묘지 숲을 40여m나 헤쳐갔고 20평 남짓한 묘역은 너덧사람이 들어서기에도 벅찬 공간이었다.<br>
'영웅 김두한, 정의를 위한 투쟁의 생애를 마치고 여기 잠들어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며, 권력보다는 약한 자 편에 설 줄 알며, 그 힘을 올바로 쓸 줄 알며, 그 많은 시련과 고통으로 일관된 생애를 떳떳하게 살고 가다.'<br>
협객 김두한이 시대를 거슬러 왜 다시 떠올랐는가. 극작가 김기팔의 추도 비문이 그 해답을 보여주는 듯 했다.<br>
그의 장녀 탤런트 김을동(57)은 이번 추석 성묘에서도 '거리의 독립투사'란 한마디를 새기며 조화를 바쳤다.<br>
"할아버지의 독립정신을 배우지 않았다면 '정의와 인정과 눈물의
주먹' 김두한은 없었을 겁니다."<br>
<table border="0" cellpadding="4" cellspacing="1" width="100" bgcolor="#828282" align="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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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5" bgcolor="white"><p><img src="http://www.sportschosun.com/news/life/200209/20020920/29t29004_1.jpg" width="160" height="253" border="0"></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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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height="15" bgcolor="#EDF0F1"><p>◇탤런트 김을동이 경기도 양주군 장흥의 아버지 묘소에서 추석 성묘를 하고 있다. <최완규 기자 dominico@></td>
</tr></table>
<p> 72년 서울 정릉산골의 무허가 골방에서 쓸쓸한 임종을 했던 김두한은 장례비용조차 남기지 않았다. 1년에 서너번 집에 들를까 말까. '아버지가 아니라 원수'라 여기며 장례식때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던
김을동.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은 장례식날 의정부 모 고아원생들이 장지로 가는 길목에서 지내준 노제 때문이었다. <br>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독립유공연금을 통장째 기탁, 수백명 고아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김을동은 생전 아버지에 대한 불경과 불효를 씻기 위해 유업의
실천에 나섰다. <br>
다름 아닌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을 완수하는 것. 우선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조선족 실험소학교 살리기에 앞장섰다.<br>
마지막 남은 조선족교육기관으로 장군이 설립해 민족사랑을 펼쳤던 역사 현장. 그러나 재정난과 조선족 인구 감소로 폐교위기를 맞았다. 600여 학생들은 대부분 부모가 한국에 돈벌러 나와 있는 '중국판
이산가족'이다. <br>
김을동은 이들에게 한글컴퓨터 보내기운동을 벌이면서 이 학교 예술단을 초청, 2000년 첫 고국공연도 성사시켰다. <br>
하지만 혼자힘으론 역부족임을 실감하고 있다, <br>
"사회적 관심도 후원의 손길도 점점 끊기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정성과 빵 한조각, 음료수 한병의 후원이 절실합니다."<br>
'장군의 손녀'라는 호칭이 생활인 김을동에겐 족쇄나 다름 없다. 노래 솜씨 빼어난 연예인이면서도 돈벌이 좋은 밤무대 한번 못 나가고,
일본 나들이 때에도 그 흔한 일제 코끼리 밥통 하나 맘놓고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br>
그러나 그는 말한다. 장군의 손녀로서, 거리의 독립투사 딸로서 생애 마지막날까지 한점 부끄럼 없이 당당히 살아가겠노라고.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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