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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은 곤란합니다
글쓴이: 우주가람
<26>
“......”
대체 전화기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윤수빈의 이름을 짖어대던
녀석의 얼굴은 말도 못하게 굳어져있었다. 서우는 포트에서 갓 빼온 커피를 홀짝
이며 우그러진 찬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꼬라지하고는. 입술은 다 트고 눈 밑도
부어서 엉망이다. 여자 꽤나 울리던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저렇게 망가진 꼴을 보
면 조금은 애처롭기도 하다. 한참동안 그렇게 죽은 듯 굳어있던 찬은이 쉰 목소
리로 짧은 단어 하나를 내뱉어냈다.
“...누나?”
서우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눈앞에 있는 하찬은의 누나라면 잘 알고 있었다.
하찬양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한때 자신이, 혹은 자신을 곁에 끼고 다니
던 여자인데. 특유의 오만함과 굽혀질 줄 모르는 그 콧대를 꽤나 좋아했었다. 물
론 그것도 수빈을 만나기 전까지 이지만.
그런 그녀의 전화를 받으며 저렇게까지 표정을 굳힐 필요가 있는 건가. 하지만
서우는 이내 한가지를 생각해냈다. 분명 저 녀석 처음에는 윤수빈을 찾아댔었지.
누나의 번호를 보고 윤수빈의 이름을 짖어댈만큼 등신은 아닐거다. 서우의 표정
이 더욱 알 수 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찬은은 스피커로 들려온 목소리에 얼빠진 듯 대답만 해대더니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불꺼진 회사 로비에 찬은의 쇠 의자
끼긱거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서우 또한 한 쪽 귀를 시큰둥하게 막으며
일어났다.
서우의 눈이 왜 그러냐고 묻자 찬은에겐 누가 각성제를 투입하기라도 했는지 반
쯤 맛이 간 듯 한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서우가 어깨를 으쓱이자 찬은이 문 쪽으로 발을 떼며 서우에게 한마디 한마디 천
천히 뱉었다.
“...남서우, 이 개새끼.”
뒤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무궁무진한 듯싶었지만 의외로 찬은은 거기서 말을 뚝
끊으며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리문을 활짝 열고 나가는 찬은의 뒷모습을 보며 서우는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커피가 아직 따뜻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빈과 관련된 일이겠지.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저 짹짹대는 강아지가 자신을 이렇게 물고 갈 리가 없다. 하지
만 서우는 뒤따라가지 않았다.
그 눈은 이미 수빈에게 미쳐있었다. 그 눈이 자신에게 소리쳐대고 있었다. 개자식
. 가져갔으면, 빼앗아갔으면! 행복하게 해줘야 할 것 아냐! 그 눈에서 눈물 한방울
나지 않게 만들어야 할 것 아냐!
서우는 아직도 뜨겁다싶은 커피로 입술을 살짝 적시며 자조적인 말을 뱉어보았
다.
“그런 기본적인 것 따윈 나도 알고 있다고.”
하지만 행복하지 못 한다고. 행복하지가 않다고. 행복해지려 해도, 행복하다 주문
을 걸어봐도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수빈은 그렇게 자신에게 말했고 자신은 소경
되고 벙어리되고 귀머거리된 것 마냥 못 본척, 듣지 못한 척, 이별따윈 말하지 못
하는 척.
그를 놓지 못하고 있다.
차갑다싶은 빈 회사의 라운지에서 잠시 혼자 눈을 감고 있던 서우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눈앞에 꺼내 올린 서우
는 차마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그 번호에 피식 웃으며 폴더를 들어올려본
다.
수빈은 사슬이다. 끊을 수도 그 안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지독한 사슬이다. 아니,
어쩌면 사실 그 사슬은 이미 헐거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자신이 끊고 싶지
않을 뿐. 서우는 스피커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쓴 웃음을 지었다.
그 아름다운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놓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숨을 멈춘다면 모를까. 지독한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 환자, 예전에 여기 온 적 있는 것 같은데. 맞죠?”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록이 있나요?”
세훈이 묻자 의사는 차트를 휙휙 넘기더니 검지로 종이 한 부분을 탁 튕기며 혀
를 차대기 시작했다.
“맞네요.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했었건만. 알겠습니다. 만약의 상황도 고려하
셔야겠습니다만,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이 명줄 하난 끈질긴 놈이. 환자분 보
호자 연락처는 제가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연락하기로 하고 일단 전 수술실로 들
어가보겠습니다.”
아마 병원에서 급히 연락을 받고 집에서 나온 모양인지 편한 면바지에 티셔츠 하
나를 덜렁 걸치고 있던 50대 중반 쯤 되어보이는, 키가 늘씬한 중년의 의사는 수
술실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이없게도 짧은 만남에 세훈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수빈을 아는 듯
해보이는 의사의 태도에 조금 마음이 놓이는 듯 했지만 그가 뱉은 말들은 그리
가벼운 말들이 아니었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전 군대에서 말했던가. 원
산폭격을 하고 난 뒤 맘에 안드는 고참의 발에 머리통이 세게 까여진 적이 있던
수빈이었다. 그때 무서울정도로 코피를 쏟아냈었지. 정말 사람 하나 골로 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무심하게 일어나 피를 빼내던 녀석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
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말했었다.
‘머리 터진적은 있어도 이정도 쯤은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죽진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훈이 조금 착잡해져오는 마음에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고 있을때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찬은의 모습이 눈에 띄였다. 왠지 모르게 숨도 쉬지 않
고 세게 달려대는 녀석의 모습이 너무나 절박해보여서 세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
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알아본 찬은은 세훈에게로 곧장 달려와 말을
쏟아냈다.
“뭐예요. 어떻게 된거래요? 왜 그러는건데요? 왜 수술실에 들어가는건데요!”
“찬양이는?”
“몰라요. 묻고있잖아. 뭐가 어떻게 된거냐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빽 하니 소리를 지르는 찬은을 보며 조금은 놀랐다. 성격없는
녀석이라곤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찬양의 옆에서는 그녀완 다르게 꽤나
예의도 지킬 줄 알고 장소와 때도 가릴 줄 아는 녀석이라 생각은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 녀석이 처음으로 반말을 하며 소리를 지르다니. 세훈은 얼떨떨한 표
정으로 물었다.
“설마 아는 사이야? 윤수빈하고?”
“아는 사이예요. 어떻게 된 거냐고요.”
“자세한건 나도 잘 모르겠고. 일단 앉아.”
긴 얘기가 끝난 뒤에도 찬은의 눈은 닫겨버린 수술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조금쯤은 안쓰러워진 세훈이 커피라도 뽑아줄까 라고 묻자 찬은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수빈을 사랑한다. 사랑하고 사랑하지
만 그 사랑 때문에 그가 아프다거나 힘들다면 자신이 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로 뻗어지려는 손을 잘라낼 것이다. 자신이 그에게 멋대로 마음을 전한 뒤
기뻐 제 생활로 돌아갔을때 수빈은 괴로움에 흐느끼고 있었다. 그 가는 몸을 떨
며 끝도 없는 한숨과 후회를 내뱉었다고 한다.
차라리 죽어버릴 걸 그랬단다. 차라리 죽어버렸다면 남서우란 새끼는 남서우로
살아갈 수 있었을거라고, 그러면 자신은 윤수빈이라는 존재로 죽어버릴 수 있었
을 거라고 말했단다.
그 흐느낌이 머릿속에서 빌어먹게도 맴돌아대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말하고 싶었
다. 난 지금 당신이란 존재가 살아있어서 이렇게 행복했다고. 남서우란 자식도,
그 빌어먹을 자식도 아마 똑같은 마음일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수빈을 처절하게 붙잡고 있는 그 남자의 간절함에서 수빈을 뜯어
내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눈을 뜨지 않는 수빈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봐주지 않아도 좋아요.
내 이름이 아닌 남서우라는 자식의 이름을 불러도 좋아. 다 좋으니까 살아만 있
어줘요. 수빈은 단 한마디도 듣지 못할 것이었지만 주문을 외우기라도 하는 듯
중얼거렸다.
“괴롭히지 않을게요. 내가 조금이라도 신경쓰이고 거슬린다면 물러나 있을게요.
나같은 거 신경쓰지 않아도 좋으니까.”
목이 메여와 다음 말은 차마 뱉지 못했다. 찬은은 한참을 망설이다 먹먹해진 눈
으로 수빈을 바라보며 속으로만 작게 읊조렸다.
살아만 있어주세요.
눈을 뜨자 조금은 누르스름한 천장과 약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수빈은 잠
시 지끈거리는 머리에 한쪽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가는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산
소 호흡기를 짜증스럽게 내렸다. 눈동자를 굴려본다. 언젠가 이 곳에 온 기억이
있다. 아아, 물론 근처에 큰 병원이라곤 이 곳 밖에 없으니 사고만 당했다하면 이
곳에 왔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는 더럽게 익숙한 느낌에 수빈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수빈은 또 한번 익숙한 ‘것’을 보며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야.”
그 것의 머리를 살짝 손등으로 건드렸을 뿐인데 선잠을 자고 있던 모양인지 그
것은 곧 눈을 껌뻑껌뻑 뜨며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껌뻑거린다. 이런
끝내주는 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표정이란 것이 고작 한심하다는 표정뿐이라
안타까워 미칠지경이었다. 수빈은 한숨을 팍 쉬며 아직까지도 제 오른손을 저릴
정도로 붙잡고 있는 녀석에게 말했다.
“침 묻었어.”
“우악!!!!! 일어났다!”
수빈은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어났다고 외치면서 왜 저만치 멀리로 뒷걸음질
쳐 가는건데. 그것도 엄청나게 어정쩡한 자세로. 조금 촉촉하다싶은 손바닥을 보
란듯이 시트에 북 문질렀다. 사실 침이라고 하기에도 뭣 한 습기찬 공기였지만
어쨌거나.
“...네가 왜 여기있어.”
분명 문 앞에서 사라졌었는데. 누구 연락받고 온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녀석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의외로 차분한 수빈의 목소리가 울리자
격한 몸동작으로 물러났던 자신이 민망했던지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수빈의
옆으로 걸어왔다.
“괜찮아요? 의사선생님이 깨어나면 무조건 안정이라고 하셨으니까 다시 누워요.”
“괜찮아. 그건 그렇고 나 여기 며칠 동안이나 누워있었던거야.”
가슴을 압정 하나가 꾹 누르고 들어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평소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는 수빈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목까지 치밀어올라서 견딜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 뭔가
가 입술에서 튀어나올 것 만 같아서 억지로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수술 하루에 코마상태 이틀이요.”
수빈의 표정이 확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덕분에 찬은의 기분 또한 버려진
종이짝처럼 구겨져버렸다. 아아,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일그러
진 표정으로 작게 욕을 읊조린 수빈은 당장에 침대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찬은이 그런 수빈을 막으려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한쪽 구석에 내팽겨쳐져
있던 찬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전화가 울리건 말건 두 남자
는 상관없다는 듯 서로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 또 팔뚝에 박혀
있던 링겔바늘을 쥐어뺀건지 수빈의 팔에는 피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다. 찬은
은 그 순간 그 붉음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수빈
의 어깨를 잡았다.
“어딜 가려고요.”
“비켜.”
“...일단 팔부터 지혈하고 가요.”
수빈의 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치켜뜨여지며 자신의 어깨를 쥐고있는 찬은의
손을 가차없이 쳐냈다. 찬은의 손을 내치고 나서 자신도 놀랐는지 살짝 눈동자를
떠는 수빈을 보았다. 하지만 수빈은 곧 마음을 굳게 먹은 듯 생전 들어본 적 없던
날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눈동자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찬은은 그의 왼손 네번
째 손가락에 아직도 버젓이 걸려있는 반지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멍청하니 수빈
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었다.
“남서우가 죽어.”
“...네?”
“내가 없으면 남서우는 죽는다고! 그 새낀 정말 죽어!!”
그 말에 참고 참아오던 찬은의 목소리 또한 터져나왔다.
“당신도 죽어! 당신도 또 한번 이런 일 있으면 정말 죽는다고! 가는 건 말리지 않
아. 대신 몸이나 좀 추스리고 찾아가라고!! 차라리 내가 그 자식을 데리고 올게.
일단, 그러니까 당신은 일단... 지혈부터 해.”
처음듣는 자신의 성난 목소리에 반쯤 얼어있던 수빈을 강제로 침대에 앉혔다. 피
가 쏟아져나오다 못해 그 부분이 조금 부어오른 것 까지 보인다. 젠장, 미치겠군.
찬은이 신경질적으로 침상 옆에 달려있는 벨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깨어났어요. 아무나 좋으니까 빨리 와주세요.”
말을 마치고 수빈을 바라봤을때 그는 그새 또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의 계산을 끝
내기라도 한건지 알수 없는 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렷한 한쌍의
갈색 눈으로 찬은을 바라보던 수빈은 한숨을 길게 뿜으며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일
어났다.
“전화나 받아. 나도 내 상황 알겠으니까 남서우한테 전화나 한통 하고 올게. 5분
안에 올테니까 찾지 마.”
애초에 찬은의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말을 마친 수빈은 그대로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자신의 깨끗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지혈하고
움직이라니까 끝까지 말은 죽어도 안 듣지? 찬은은 한숨을 팍팍 내쉬며 눈치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왜.”
[옆에 윤수빈 있냐?!]
다급하게 들리는 찬양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잠깐
밖에 나갔는데. 그러자 전화는 찬양의 짧은 욕과 함께 끊어지고 말았다.
*
미치도록 너 하나가 갖고 싶었다. 내 손에서는 아스라질 것을 알면서도 놓고싶지
않아 네 숨통을 조여갔지. 그런 나를 사랑했었던 넌 숨이 막힘에도 불구하고 끝
까지 내 손에 목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알면서도 보지 못한 척,
네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 척.
하지만 아무리 내 행동을 정당화시키려 해 보아도 나의 이름을 되찾지 않는 한,
나를 되찾지 않는 한 돌아오지 않을 너란 것을 알기에ㅡ
거짓일지라도 놓아보려한다. 너를 위해, 비겁한 나를 위해. 애처로웠던 나의 집착
을 위해ㅡ
“건배.”
*
왠지 모르게 불안해져 병실 밖으로 나오니 로비 쪽에서 어슬렁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는 수빈이 보였다. 탁 풀리는 긴장에 팔을 쭉 늘어뜨렸다. 다행이
다. 아무일 없는거구나. 그래서 찾지 말라던 수빈의 말에 따라 뒤돌아 가려했다.
그때 병원 유리문이 쫙 열리며 시끄러운 앰뷸런스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비
워진 로비에 수빈 또한 얼떨떨하게 뒤로 물러났다. 시끄럽게 울려대던 앰뷸런스
가 멈추고 그 작은 차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타고 있던건지 모를정도로
담 둑 터지듯 사람들이 차 뒷꽁무니에서 튀어나왔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찬은은 실려 들어오는 남자의
얼굴과 그 뒤를 따라들어오는 두 남녀의 얼굴에 자리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울고 있는 찬양을 세훈이 부축하며 따라오는 건데?!
순간적으로 패닉상태가 되어버려 입에선 어버버 거리는 소리밖에 흘러나오질 않
았다. 패닉을 깬 것은 차가운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지르는 고함소리였다. 소리
를 쫓은 찬은의 눈에 보인 것은 그 어느때보다 동요하고 있는 수빈의 모습이었다
. 멀리서도 확실하게 보이는 수빈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걸려있는 검은 반지가
흔들려대더니 이내 그 답지 않은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하게 불
렀다.
“남서우!!!!!!”
남서우였다. 남서우였다. 죽은 듯이 팔을 늘어뜨리고 실려들어오던 것은 그 냉정
하고 고고하던 늑대 남서우였다. 늑대의 식어버린 몸뚱이에 검은 고양이가 달라
붙었지만 채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 곁에서 늑대의 몸뚱이를 옮기고 있던 자
들에게 가로막혀버리고 말았다.
“남서우!! 남서우! 남서우!!!!”
수빈은 제정신이 아닌것 처럼 서우의 이름만을 불러댔다. 그 모습을 멍청하게 바
라보고 있던 찬은은 어금니을 꽉 베어물며 자꾸만 밀쳐지면서도 서우를 따라가
려는 수빈을 뒤에서 끌어안아버렸다.
“놔!!! 놓으라고!!!!!!”
품 안에서 발버둥치는 수빈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정신차려요! 이러면 다가가지도 못하잖아!!”
“남서우!! 남서우!!!! 젠장!! 어째서 네놈은!!!”
수빈의 감정이 폭발해버렸다. 온갖 세상의 묵은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낸 수빈에
게 찬은은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기다린 남서우에 대
한 야속함과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 곁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잔인함. 지금 이 순
간까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정도
의 간절함. 그 감정들에 찬은은 입을 다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수빈을 끌어안
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남자의 몸은 뜨겁다. 쏟아내고 있는 눈물조차 뜨겁다. 너무나도 뜨거워 그 눈
물에 닿아버리는 곳마다 움푹 움푹 패이는 듯 하다. 살점이 뜯겨져나가는 것 같
아. 너무나도 서럽게 그의 이름을 불러대는 그를 보며 울다 지친 듯 보이는 찬은
을 부축한 세훈이 찬은에게 눈짓했다. 일단은 병실로 들어가자.
찬양과 세훈이 먼저 수빈의 병실로 들어가고 난 뒤에도 찬은은 한참동안 수빈을
끌어안고 있었다. 울지마. 울지마. 당신, 이러면 남서우 못 봐. 이 난리치는데 누
가 들여보내 줘. 울음범벅이 된 그 얼굴에서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내며 같잖은
말들을 지껄여댔다. 그의 눈물소리가 사그라져들때까지, 떨리던 어깨가 잠잠해질
때까지.
눈물을 그친 그는 그때까지도 꽉 막혀있던 목소리로 찬은에게 딱 한마디 던졌다.
“살아있을까.”
그리고 찬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럴거라고. 당신 눈에서
이렇게 눈물뽑아놓고 죽어버리면 그 자식은 인간이 아냐. 자신이 수빈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근거 없는 희망뿐이었다. 거짓이 될 지도 모르는 같잖은 희
망 뿐이다.
품을 수 있는 것 또한ㅡ
울타‘ULTA'라고 하는 신경각성제 혹은 신경마취제라고 한다. 사람의 기억을 미묘
하게 비틀고 섞어놓아 극도의 흥분을 준 뒤 쥐죽은 듯 온 몸에 모든 신경을 마비
시키는 양날의 검 같은 존재였다. 그랬기에 처음엔 정신병원쪽에서 환자를 안전
히 재우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울타라는 것이 굉장한 중독성을 가
지고 있어서 한번 이것을 투입한 환자들은 그 뒤로 잦은 발작과 이상현상을 보이
고 있다한다. 그렇기때문에 의학계에서는 쉬쉬하며 그 사용을 멈춘 위험한 액체
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이 주는 극도의 흥분상태, 혹은 낙원에 취해 그것을 뒷세계
로 흘려보냈다. 마약으로서 울타는 굉장히 퍼지기 쉬운 형태였다. 액체에 색 또한
무색이었기에 눈을 보기엔 ‘물’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특유의 살짝 쏘는 향이 있
었지만 그것도 울타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알지 못한다.
마약으로서 울타는 제 기능을 확실히 했다. 하다못해 부작용까지 말이다. 최고의
낙원을 보여주는 대신 울타는 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
‘기억’
조금이라도 과다복용하게 되면 짧은 기억이 뒤섞이는 것 부터 시작해서 그 한도
를 넘으면 모든 기억들이 헝크러지고 잘려나가고 심지어는 없던 것도 덧붙여져
미쳐버리게 된다. 한마디로 그 제어를 잃는 것이다. 울타를 과복용 한 순간부터
그 사람의 기억은 전적으로 하늘에 달린 것이었다. 걔중에 반은 신경의 통제를
잃어 죽어버리기도 했다. 손쪽으로 향하는 신경들이 죽어버려 회복되지 않는 경
우도 있었고 시신경이 죽어버리는 현상이 오기도 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해도
80%이상의 과복용자들은 기억을 뭉텅이로 잃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사람이 반이라고 하니 말 다한거다.
“...그 울타를 마셨어. 이해가 가?! 그 미친놈이 위스키에 풀어서 단번에 털어넣은
거라고!”
다시 한번 감정이 북받혀서 붉게 변한 얼굴로 말을 토해내는 찬양과는 다르게 수
빈의 눈물마른 건조한 눈은 그저 껌벅거리며 그 말을 들을 뿐이었다. 눈물을 흘
리고 싶었다. 서우야, 서우야, 서우야. 왜 그랬어. 꼭 그렇게 해야만 했어? 내가 떠
났으니 내 기억까지 잘라버리려한거야? 수빈의 입술사이에서 얇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살아돌아와도, 네가 죽어도 난 입하나 뻥긋할 수가 없을 것 같
아. 변명할 수 있는 말도 없어. 너를 위해 울면서 나를 잡은 그 품에서 눈물을 멈
췄어. 서우야, 네가 보고싶지 않던 답지를 보고 선택한 것 처럼 나 또한 그 답지
를 봐 버린 것 같아.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서우야, 서우야, 서우야.
찬양의 말은 계속되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거야? 최소 기억상실이라고!!!”
동시에 이젠 더이상 흘러나올 눈물도 없을 것만 같았던 수빈의 눈에서 눈물이 투
둑둑 떨어져내려왔다.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밖에 없다, 서우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널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내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서 미안해. 미안해. 널 사랑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내 마음을 일찍 잘라내버
리지 못해서 미안해. 서우야, 미안.
“미안해, 서우야. 미안해.”
울었다. 울고 또 울어보았다. 가슴이 먹먹해서. 울고만 있는 자신을 제가 더 아픈
듯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저 안타까운 찬은의 눈동자에 더 울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서우야. 네 온실 속에서 숨쉬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스스로 온실을 부수
게 만들어서 미안해.
<27>
찬은의 손이 이마를 스칠때에도 수빈은 잠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눈 또한 뜨
지 않았다. 눈을 뜨진 않았지만 어쩐지 녀석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부분이 뜨거
워지는 것 같아졌다. 눈을 뜰 수가 없어. 눈을 뜨게 된다면 안쓰러운 눈으로 자신
을 보고 있을 찬은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눈을 뜨지 못했다.
이렇게나 떨려오는데. 이렇게나 요동치는데 어째서 모르고 있었던 걸까. 깨어나
지 않는 남서우를 두고서 이 아이 앞에만 서면 이렇게나 심장이 뜀박질해대는 것
을. 어째서 조금 더 일찍, 모두가 아프기 전에 깨닫지 못한 것일까.
이 아이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뻔히 보이는 답을 앞에 두고서도 어
째서 읽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답은 하나였다. 남서우를 사랑했던 기억이란 안경
을 벗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남서우를 위한 길이고 자신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사람은 거짓 사랑을 받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속이려했다.
마음이 굳어진다. 요동치던 마음에 주문 하나를 외웠다.
나는, 이 아이에게, 이끌리고 있다. 감히 막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마음에게 속삭
인다. 나는 남서우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만큼 사랑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남서우를 사랑 ‘했었’다. 지금은 이 아이에게 이끌리고 있어.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손을 밀쳐냈을때 그렇게도 흔들리던 아이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아이는 끝까지 거리를 두며 수빈을 바라보다가 병실 밖으로
나갔다.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손 잡고싶어도 참을게요. 안고싶어도 참을게요. 키스하고 싶고, 내 옆에만 두고
싶어도 참을게요. 가지마.’
혼자 남은 병실에서 그저 웃어버린다. 내가 정말 이기적인 놈인 것 같아. 그래, 알
고 있어. 그러니 조금 더 낵[ 욕심부려도 괜찮을 것 같아, 하찬은.
“보고가지 않아도 괜찮겠어?”
“괜찮아. 잘된거지. 어차피 날 보고 기분 좋아할 녀석도 아니고.”
유부녀라기보다는 화려한 싱글 중년의 미를 뽐내는 정장의 여자는 비어있는 병
실에서 나오며 쫑알대는 의사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빈 웃음이
걸려있었다. 어차피 자신을 보고 좋아할 녀석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수도 없고.
“그래도 미국에서 여기까지 온건데.”
“돈지랄이라고 생각해. 내가 왔었다는 말은 행여나 하지도 말고.”
“어련하시겠어.”
못말린다며 고개를 흔든 의사 또한 젊었을적엔 여자 꽤나 울렸을 법한 훤칠한 키
와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를 보며 그녀는 특유의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꽤 감사한 녀석이다. 생긴건 꼭 무슨 놈팽이 중년같이 생겨가지고는 실력도 꽤나
좋아서 10명 중 5명이 실패라고 예견했던 수술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장본인이
었다. 덕분에 그녀의 아들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고. 그녀는 그의 볼에 살짝
입맞추곤 돌아서서 거침없이 병원에서 빠져나갔다.
“또 한번 살려줘서 고마워.”
단 한번도 어미가 어미노릇 한 적 없는 불쌍한 내 아들을 살려줘서 고마워. 그 불
쌍한 인생이 내가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니까.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조금
어벙벙해져있던 남자의사는 그녀의 가느다란 몸이 병원 회전문을 빠져나가는 것
을 확인하며 짧게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여자다. 그렇게 제 새끼를 생각하고 있으면서 왜 그 앞에서는
아무나 못할 잔인한 말들을 던져댈 수 있는건지. 뭐, 이것도 하나의 비뚤어진 모
성애라고 해야하나, 라고 그는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폈다.
살려줘서 고맙다라. 오늘만해도 몇번째 그 이야기를 듣는건지 모르겠군. 그도 미
련없이 뒤돌며 가운을 한번 털었다.
“뭐, 이 맛에 이 막노동을 아직까지 하는거지만 말이야.”
*
“남서우 깨어났어. 하반신마비에 정신착란 그리고 기억상실이래.”
아침에 찾아온 찬양이 경멸스러운 눈으로 수빈을 바라보며 던지고 간 말이었다.
그녀가 말을 던진 순간 병실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찬은은 달라붙고 수빈은 밀쳐
내는 장난을 하고 있던 두 남자의 표정은 바로 굳어졌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면
서 찬양은 서우의 병실을 툭 뱉고 방에서 아예 나가버렸다.
얼마나 긴 침묵이 흘렀었는지 모르겠다. 찬은은 수빈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의외로 수빈의 표정은 무척이나 담담해서 찬은이 놀랄정도였다. 아니,
그렇게까지 담담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시트위로 올려져있던 손가락이 미세하
게 움찔거리는 것을 보면 꽤나 큰 타격을 입은 듯 했다. 하지만 구지 그것을 밖으
로 표현해내고 싶어하지 않는 수빈의 모습에 찬은 또한 침묵으로 넘어갔다.
“매점가자.”
아이러니하게도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수빈이었다. 난데없이 매점이라니. 찬은
이 놀라 눈만 멀뚱멀뚱 껌벅거리고 있자 수빈은 ‘뭐야, 이 놈은.’ 이런 표정을 지
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매점가자. 따뜻한거 마시고싶어.”
“에, 사올게요. 뭐 마시고 싶...”
“아니. 같이 가.”
말 끝내기가 무섭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빈을 보며 찬은은 생각했다. 이 사람
왜 이래. 여전히 틱틱거리고 여전히 무심한 듯 억양없는 목소리지만 뭔가 다르다.
뭔가가 가장 중요한 그 뭔가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하지. 찬
은이 생각을 하느라 눈썹을 살짝 미묘하게 꺾었다.
달라졌다. 수빈의 손가락에 걸려있는 저 검은 반지도 여전하고 억양없는 말투도
꼭 같은데 뭔가가 달랐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고민해봐도 알 수 없었기에 그냥
수빈을 따라가기로 했다.
아, 저 손가락에 있는 반지가 목을 옥죄는 느낌이다. 죄짓는 기분일지라도 저 반
지를 빼내버리고 싶었다.
매점에서 찬은의 만류에도 수빈은 결국 캔커피를 사 나왔다. 옆에서 소보루빵을
뜯어먹으며 입술을 댓발 빼내밀고 있는 찬은을 힐끔 본 수빈은 화해의 표시로 마
시고 있던 캔커피를 찬은의 눈 앞에 쓱 내밀었다.
“뭐예요. 한 입 주면 내가 또 헤벌레 하고 받아먹을 것 같아요?”
“싫음 말고.”
단번에 눈앞에서 커피캔을 치우려하는 수빈의 행동에 찬은은 기겁을 하며 수빈
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누가 싫데요?”
“싫다매.”
“싫다고는 안했어요.”
쳇, 하고 퉁퉁거리며 커피를 반절이나 비워버리는 찬은의 모습을 옆에서 심드렁
하니 보고 있던 수빈이 그의 배에 주먹을 한대 먹이며 말했다.
“작작 좀 먹어라?”
“웁, 아 나 진짜. 그렇게 갑자기 배를 치면 어떡...”
찬은의 말이 끝나기가 전에 수빈의 손등이 그 배를 또 한번 짧게 치고 커피까지
빼았아갔다. 진심으로 이럴때면 수빈이 남자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생긴건
정말 곱상하게 생겼는데 대체 저 가느다란 손가락 5개가 모이면 어떤 융합과정
을 거치는건지 무지막지한 파워를 낸다.
그렇게 찬은은 아프다며 찡찡대고 수빈은 들은척도 안하며 커피를 홀짝이며 걸
어가고 있었다. 방문 앞이 보일때쯤 되었는데 갑자기 걸어가고 있던 수빈의 걸음
이 멈췄다. 찬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러냐 묻자 수빈은 아무런 대답도 없
이 한 곳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한 의사와 한 중년 부인이 서 있었는데 둘의 분위기가
마치 오래된 연인사이를 보는 것 같았다. 찬은이 왜 그래요, 라고 물었으나 수빈
은 다시 한번 그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며 묵묵히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 한 모
금을 들이 마셨다.
아아, 입술이 바싹바싹 마른다.
웃으며 남자 의사와 이야기하던 그녀는 병원 문을 나서기 전 그의 볼에 여운을
남기는 짧은 입맞춤을 던져놓고 무책임하게 나가버렸다. 옆에 서 있는 찬은은 저
아줌마 대담하네, 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수빈은 그의 말에 쓰게 웃어버렸다.
그래, 대담하지. 그리고 대단해. 여기까지 와 놓고는 제 아들자식 한번 보고가지
않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 속 한 구석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얼
음같은 말 한마디에 가슴 한 구석이 얼어버렸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와 꼭 같은
무심한 눈동자로, 메말라버린 갈색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기계적인 말을
읊조리고 사라졌던 그녀, 어머니. 수빈은 잠시 눈을 감으며 캔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커피가 쓰다. 아, 그래 커피니까 쓴 것이겠지. 눈을 뜨면 그녀가 사라져있을 것이
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갈 것이고.
수빈은 눈을 떴다. 꽁꽁 묶여있던 매듭을 잘라버린 기분이다. 그녀는 떠나갔지만
자신을 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진정으로 버릴 수 있는 부모
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수빈은 슬쩍 입가에 웃음을 걸며 찬은의 어깨를 밀
어 방으로 들어가자 말했다.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버리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
만 지금은 아니야.
과거의 사슬에서 풀려난 듯한 기분에 수빈은 개운하면서도 조금 쓸쓸한 눈빛을
그녀의 사라져가는 뒷모습에 던져보았다. 어머니, 언제쯤 당신은 내 앞에 설 수
있으신 겁니까.
방에 들어가자 찬은이 얼마 남지도 않은 커피를 빼앗아 제가 훅하고 다 마셔버린
다. 수빈이미간을 찡그리며 노려보자 녀석은 너무 빨리 마셔 켁켁거리면서도 할
말은 해야겠는지 입을 열였다.
“커피 마시면 바보 되요.”
“그럼 넌 커피만 마시고 산거네.”
“네...가 아니고. 엑, 나 바보는 아니라고요.”
“...바보.”
무작정 수빈의 말에는 바보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찬은은 제가 대답을 하
고 2초뒤에야 그 대답을 해야할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찬은을 보며
수빈은 또 찬은을 바보라고 확정지어버렸고.
잠시 둘 모두 웃고 있다가 소강상태가 왔다. 수빈은 침대 위로 기어올라가 편하
게 늘어 앉았고 찬은은 그 옆에 멀뚱히 서 있었다. 바보같이 머리를 긁적이던 찬
은이 수빈에게 조심스래 말을 걸었다.
“저기요.”
“수빈형, 이라고.”
“안 가볼거예요?”
찬은의 물음에 책을 집어 책갈피가 있는 곳으로 열고 있던 수빈의 손이 멈칫했다
. 이내 수빈의 갈색 눈이 찬은의 눈과 마주하려 올라왔다. 두개의 새카만 눈이 자
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아아, 지금까지 그걸 신경쓰고 있었던 건
가. 수빈은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쓰고 말았다.
“혹시 내가 신경쓰여서 못 가고 있는거면 내가 갈게요.”
“내가 갔으면 좋겠어?”
찬은은 솔직하게 도리질쳤다. 아니요. 남서우라는 사람에겐 죽도록 미안하지만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남서우에게 보내버리면 다신 잡을 수 있는 기회
도, 곁에 남아있을 수도 없을 것만 같아서 보내고 싶지 않아.
“아뇨. 하지만 가야하잖아요. 그러니까 보내줄게요.”
“네가 보내고 싶은거야?”
자신의 감정을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 듯한 수빈의 물음에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목언저리까지 치밀어올랐다. 평소같으면 몇번이고 참았을
텐데 왠지 이번만큼은 참을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참지 못했다.
“보내고 싶을리가 없잖아요!”
수빈의 말간 눈은 아무런 미동없이 소리를 버럭질러댄 찬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마치 ‘그래? 어디 한번 계속 지껄여봐.’라고 말하는 듯 해서 더욱 자극받
아버렸다.
“지금 보내버리면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단말이예요. 잡을 수도 없을 것 같고. 당신
이 그렇게 아픈사람 내팽겨치고 돌아올 수 있을것 같지도 않고. 내가 당신에게
그 사람같은 존재도 아니...고?”
차마 민망해 수빈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뱉어내고 있던 찬은은 어느
새 책을 덮고 일어나 침대에서 나온 수빈이 자신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낀 뒤
로 말이 뚝 끊겨버렸다. 자신은 지금 밀려드는 열등감에, 그 사실을 자신의 입으
로까지 말해야 한다는 것에 얼굴까지 붉어져있는데 눈앞에 서 있는 수빈의 얼굴
엔 왠지모를 미묘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왜 그래요?”
“키스한다.”
찬은이 그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 수빈의 두 팔이 부드럽게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 끌어안은 목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수빈은 저도 모르게 입술끝에 미소를 담뿍
걸어버렸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어리둥절 해 하는 녀석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
추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거운 얼굴이, 뜨거운 숨결이, 뜨거운 입술이 느껴진다. 수빈은 속으로 자신에게
짧은 욕을 던졌다. 미친놈. 이 상황에 이게 말이 돼? 하지만 어쩌겠는가. 너무나
도 솔직하게 제 심장을 드러내보이는 이 아이의 입술이 너무나도 갖고 싶었는데.
그 순수함을 취하고 싶었다.
수빈의 망클한 혀가 찬은의 입술을 톡톡 건들인다. 열어 줘. 그때까지도 어리둥절
,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하던 찬은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싸구려 캔
커피의 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 입술을 탐했다. 느릿하고 천천히, 지금까지 그
어떤때보다 더욱 짙고 느리게 서로를 느껴갔다.
마주치는 입술이 뜨겁다. 뒤엉키는 혀가 뜨겁고 코에서 느껴지는 옅은 숨소리조
차 뜨겁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둘뿐이었으면 했다. 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
도 만들어 이 아이의 뜨거움을 죄다 마셔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 빌
어먹을 세상속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기에 수빈은 천천히 밀착해있던 찬은에게
서 떨어져나오며 마지막으로 그 아이의 콧등에 입 맞췄다.
눈을 올려 바라보니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찬은이 보였다. 이 아이는 지금 수
빈 자신이 얼마나 그 표정에 흔들리고 있는지, 다시 한번 그 입술을 탐하고 싶은
지 모를 것이다. 찬은이 입을 떼기 전 수빈은 제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오랫동안
걸려있던 그 검고 낡은, 남서우와의 기억을 너무나도 쉽게 빼냈다.
“...아.”
찬은의 신음성이 들렸다. 왜 빼는 거예요, 라고 묻는 듯한 그 신음소리에 수빈은
한쪽 입꼬리를 무성의하게 들어올렸다. 정말 바보같은 녀석이다. 이쯤하면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건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냐.
하지만 찬은이 알리가 없었기에 수빈은 짧게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잡아 들었다
. 손을 가져대 억지로 찬은의 손바닥을 펴본다. 그리고 그 넓은 손바닥 정 중앙에
아직 자신의 온기가 남아있을 흑색 반지를 올려놓았다.
수빈이 억양없는 무심한 말투로 말 하나를 뱉으며 굳어버린 듯 서 있는 찬은을
비껴지나갔다.
“다녀올게.”
찬은은 멍하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반지를 빼낸 손가락 부분이 하얗다. 얼마나 빼질 않았으면 이 부분만 파리하게
하얘졌을까. 수빈은 헛웃음을 뱉으며 잡고 있던 문고리를 돌렸다. 이 문 안에 남
서우가 있다.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자신을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하지만 자
신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남서우가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문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침대 위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느릿하게 눈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와 형광등 빛을 받아 살짝 푸
르게 빛나는 바다빛 눈동자. 그 남자 남서우에게 다가서며 수빈이 말했다.
“나 왔어. 서우야.”
죄스러움에 숨이 막혀온다.
*
아...........정렬 귀찮아 죽겠네요.
ㅠ.ㅠ.ㅠ.ㅠ.ㅠ.ㅠ.ㅠ...
흐.........아무튼 다음편 그리고 그 다음편이 완결입니다^^....!
첫댓글 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서우야아아아아아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서우가 안됐긴 하지만 기억상실이면 차라리 수빈이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다른 좋은사람 만나면 안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