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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은 곤란합니다
글쓴이: 우주가람
<28>
남서우라는 이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는지 서우의 눈이 천천히 올라와 수빈과
마주했다. 순간 입이 얼어붙어버린 것 같아 아무말도 걸 수가 없었다. 처음 서우
를 만나 온 몸을 감돌던 묘한 떨림, 물론 그때엔 분노였겠지만, 그것이 다시 몸을
덮쳐왔다. 영혼마저 떨리는 듯한 그 느낌에 수빈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나 왔어, 서우야.”
잠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있던 서우가 입을 열었다.
“그쪽은 또 누구신데.”
또, 라고 묻는 것을 보니 자신의 기억속에서 잘려져나간 사람들 몇이 찾아왔었나
보다.
발칙한 기대를 해버렸다. 만약 눈 앞에 있는 남서우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자신과
함께했던 모든 기억들이 지워지고 찢겨져있다면 지금 아무런 말 하지 않고 물러
나도 족쇄에서 풀려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 망상은 숨을 채 다
섯번 내쉬기도 전 부숴져버렸다.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다. 이렇게 도망쳐버린다면 네 곁에 나라는 비열한 남자가
있었다는 것조차 넌 기억하지 못할테니까.
수빈은 살짝 웃으며 제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다지 하얘보이지는 않는 손가락에
비해 유난히 밝은 빛의 띠 모양이 그의 네번재 손가락 밑둥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 너와 내 시간이 들어있어. 너와 내 행복했던 시간들과 너와 내게 신이 주
었던 잔인한 시간들까지 모두.
턱짓을 하는 수빈의 모습에 이불 밖으로 나와있던 제 왼손을 본 서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둘 모두 선명하고 창백한 흰 띠가 둘러져있었다. 복잡미묘
한 표정을 짓는 남서우를 보며 웃기게도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해버린다. 모든 기
억을 잃은 남서우라지만 저렇게 멀쩡하게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눈을 깜박인다.
그렇게 ‘살아있는’ 남서우가 자신을 완벽하게 망각했다 생각하면 머리 한쪽이 마
비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하고 있는 서우에게 수빈이 말했다.
“나는 남서우를 사랑‘했던’ 윤수빈. 그리고 너는 그런 날 사랑‘했던’ 남서우.”
서우는 그 말에 대답을 하기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핏기없어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 얼굴이 인상을 쓰니 사람이라기보단 잘 만들어진 조각의 바스
러짐같았다. 상식은 남아있나보네. 지금 네 머릿속엔 대체 어떤 기억들이 나대신
자리하고 있을까. 네 세상은 지금 무엇으로 돌아가고있을까.
수빈은 쓴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아 곧 튀어나올 그의 질문에 응할 자세를 취
했다. 그 어떤말이 나오더랃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보았다.
“내가 남자를 사랑했었다고? 너를?”
“그래.”
단호한 수빈의 대답에 잠시 불쾌한 듯 인상을 찌그리던 서우가 체념해버린 목소
리로 손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그래. 반병신된 마당에 무슨 말인들 못 들어주겠어. 지껄여봐.”
지껄여보란다. 순간 가슴속에서 욱하는 것이 치밀어올라와 목구멍까지 기어올라
왔다. 하지만 수빈은 자신을 생판 모르는 타인인듯 대하는 서우의 눈 앞에 무너
져버리고 말았다. 저런 표정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하다못해 처음만난 그날까
지도 녀석은 알수없는 눈빛만을 지었을뿐 저런 표정을 짓진 않았어.
꽉 꽉 메여오는 목구멍을 억지로 뜯고 넓히며 수빈이 말했다.
“내가 널 사랑했다.”
“자꾸 과거형으로 말하는데 무슨 뜻이야.”
“듣고있는 그대로야. 난 한때 너라면 내 숨을 다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었어.
한번도 네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네 곁에 있을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건 했을거
고 무슨 소리라도 다 들을 자신이 있었어.”
또 한번 서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본론만 말해.”
길어질 듯 한 말에 수빈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며 말을 시작했다.
“네가 사라졌고,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뒤에 내 앞에 나타났어.”
“그래서.”
“널 보면, 내 이름을 그렇게 불러주던 네 입술을 보면, 내 귓가에 항상 주문같이
맴돌던 그 목소리를 들으면. 그 언제가 되더라도 널 다시, 너만을 다시 바라볼 자
신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마음이 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변했다고? 그래서 용서라도 빌러 온
거야?”
자신을 직시하는 남서우의 깊은 바닷빛 눈에 숨이 막혀온다. 용서를 빌러온 것이
아니다. 용서받지 못할 거란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네게 용서를 빌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값은 평생토록 갚을게. 수빈은 잠시 고개를 떨궜다가 다시
천천히 들어올리며 서우를 바라보았다.
“내 말 잘들어 남서우. 네 잘못이 아냐.”
“그럼 네 잘못인가.”
귀에 흘러들어오는 멋드러진 남서우의 목소리가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이 고
통스러웠다. 그래, 서우야. 내 잘못일지도 몰라. 아니, 사실은 말하고 싶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수빈은 달달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니. 탓을 돌릴 사람조차 없어. 탓을 떠넘길 예전의 네가 없잖아.”
수빈의 그 말에 서우의 긴 침묵이 시작되었다. 분명 머릿속으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거다. 조각나고 깨어진 기억조각들에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이 사랑했다던 ‘윤수빈’이라는 이 인물의 말을 끼워맞추고 있는 것이리라. 한참을
수빈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말 하지 않고 있던 서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며 뭔지모
를 웃음을 입술끝에 걸었다.
“넌 날 사랑했어?”
대답은 하나다.
“죽을만큼.”
“그래?”
“그래.”
그리고 서우는 수빈이 절대로 피해갈 수 없었던 질문을 뱉었다.
“그런데 5년이 그렇게도 긴 시간이었어?”
수빈조차도 자신에게 그 질문을 백만번은 넘게 던져보았었다. 5년이란 시간에 깨
어져버릴만큼 너와 내 사이가 얕았나. 하지만 언제나 생각의 끝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그저 그 질문 앞에서 말없이 도리질칠 뿐. 이젠 그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
된거야. 형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사형수처럼 수빈은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
로 서우를 불렀다.
“서우야.”
“듣고있다.”
듣고있다는 서우의 목소리에 간신히 간신히 눌러잡고 있던 눈물이 한방울 툭 떨
어졌다. 내가 어떻게 네게 이런 잔인한 말을 할수가 있는거지. 수빈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젠장, 울고싶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약하더라.”
“뭐?”
“5년이란 시간에 갈가리 찢기고 부숴질만큼.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너를 원망하고
있던 내가 너무 한심하더라. 그런 비겁한 나를 너무나도 간절하게 잡아주는 네
모습에 숨이 턱턱 막혀오는거야.”
결국 울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해, 서우야. 넌 나때문에 ‘널’ 잃어버렸고, 난 ‘널’ 잃어버렸어. 미안해, 서우야.”
울먹이며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수빈에게 표정변화 하나 없던 서우
가 손을 살짝 까닥였다. 이리와봐. 수빈은 그 손짓 하나에 뭐가 씌인 것처럼 그
앞에 다가갔다. 참 염치도 없지. 이렇게 비열한 자신때문에 미칠 노릇이었다. 누
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깊은 바닷빛 눈을 가진 녀석을 더이상 사랑할 수 없
다는 것은 신이 내린 저주일 것이다.
서우의 앞으로 다가가자 녀석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내가, 널, 구속했나?”
내가, 너라는 존재를, 구속하고 가두고 그렇게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만큼 목
을 죄였나. 서우의 무감동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질문에 수빈은 도리질쳤다.
“아니. 난 나라는 새장속에 네 자신을 가두는 널 볼수가 없었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서우는 되물었다.
“무슨 말이지.”
“말했지만 난 널, 내 하잘 것 없는, 쓰레기 같은 목숨보다 사랑했어.”
“그래서.”
“그래서 널 잃어버린 널 용납할 수가 없었어. 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네자신’을
나같은 쓰레기때문에 잃어버린 널.”
서우가 바람빠지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나도 못알아 듣겠다. 수빈은 눈물과
함께 막혀오는 코에 살짝 인상을 쓰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남서우, 넌 지금 어떤
과거속에서 살고 있는거니. 어떤 기억을 잃었고 어떤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는거
야.
정말 날 다 잊은거야? 아니면 잊은 척 하는거야.
“서우야.”
“성붙여.”
눈앞에 있는 녀석이 남서우라는 것을 자신이 잊을뻔 했다. 남서우는 유난히 ‘성’
에 집착한다. 서우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수빈 자신 뿐이었는데 그런 자
신에게까지 이제는 성을 붙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이런 세세한 것 하나하나에
매여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수빈은 김빠진 웃음을 흘려버렸다.
“그림 그리는거 좋아해?”
“뜬금없이 뭔데. 어. 그리는 건 꽤 좋아해.”
“기타는?”
“좋아해.”
“피아노는?”
이 질문까지 왔을때 서우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네가 어떻게 알고있냐는 거겠지.
하지만 수빈은 아무런 대답하지 않고 서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있지, 서우야. 네
가 이 질문에 내가 예상한 답을 한다면 넌 나를 만나기 전 시간에 살고 있는거야.
“...어떻게 알고있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수빈은 천천히 입을 떼 예쁜 미소
를 그리며 그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미소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슬퍼 금방이라도
아스라져 버릴 것 같았지만 말이다.
“난 네 과거니까.”
서우가 미간을 찡그렸다. 수빈이란 존재를 생각해보려하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대로 말하자면 기억해내려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는지 서우가 다
음 질문을 꺼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지만 막상 입술 앞에 닥치니 머
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만약 네가 한 말들이 모두 진실이라면 어째서 넌 여기 있는데.”
수빈은 침을 한번 꼴깍 삼키며 대답했다.
“도망치고싶지 않아서. 네 기억이 헝크러져있다는 허울 좋은 변명이 네 기억속에
서 내가 다시 한번 죽어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생각했어.”
“뭐가 그렇게 당당해?”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건 진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진리이기도 했지. 적어도 내게는.
서우가 곧 물어왔다.
“그거면 모두 용서될거라 생각해?”
“아니.”
“그러면.”
그리고 더이상 되돌릴 수 없는 말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두번째다. 남서우의 심장
에 비수를 박아넣어버리는 것은.
“널 사랑하지 않아, 서우야.”
*
“널 사랑하지 않아, 서우야.”
한순간 남서우의 숨이 멈춘 듯 했다. 둘 사이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생겨버린 듯 그들을 이어놓고 있던 쇠고랑이 쩔겅쩔겅거리는 소리를 내며 끊어
졌다. 끊어진 쇠사슬 속에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미적지근하고 끈적대는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수빈은 서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걸 말하러 온거야. 네게 용서 받을거란 허황된 생각은 하지 않아. 하지만 이 이
상으로 너와 내 목을 조르는 쇠사슬을 끊어야했으니까. 설사 그 과정에서 너와
내가 피흘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의 심장이 같은 곳을 보고있지 않은 이상
끊어내야 하는 것이니까.
“잔인하다.”
“미안해. 이 말만으론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미안해.”
또 한번 자제할 수 없을정도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서우는 수빈의 얼굴에서 끊임
없이 솟아나고 있는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대신 한참동안 멍하니 그 울음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은 가닌 선을 가지고 있는 몸을 한 녀
석이 자신의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도망쳐버렸어도 될 것을 이곳에 찾
아와 제 자신을 고문하고 있었다.
널 사랑했다. 하지만 이젠 아냐. 용서를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미안해.
용서하지 못할 만큼 잔인했지만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을만큼 애처로웠다. 끅끅
거리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제 입술을 깨무는 수빈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
거렸다.
서우가 수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기억하고 있지 않은, 하지만 네가 아는 5년전의 나와 이 지
랄맞은 일이 벌어지기 전의 나였더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데?”
수빈의 입이 몇번이고 달싹였지만 그 마른 입술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고있던 서우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수빈에게 말했다.
“가. 보내줄게.”
“서우야.”
“충분해. 너같이 자존심만 있는 녀석이 내 앞에서 울며불며 미안하다고 말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난 이미 널 용서해버렸을 것 같거든. 게다가 내가 5년간 떠나있었
다며? 거기서부터 게임오버였어. 내가 왜 매달렸는지 모르겠다.”
“미안해, 서우야.”
“사과하지마. 사랑했었다며.”
사랑했었다며. 죽을만큼, 어떤 소리를 듣는다해도 내 곁에 있고 싶을만큼 사랑했
다며. 그걸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소리없이 울어대며 한걸음도 떼지
못하는 수빈을 병실 밖으로 밀어냈다. 가라고. 넌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난 널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고. 수빈은 몇백번이고 미안하다 말했다. 울다지쳐 쓰
러져버릴만큼 울어대던 수빈은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머리에 꽤나 성질있어보이
는 눈을 한 녀석의 손에 붙들려 나가버리고 말았다. 서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래, 저게 네가 찾은 녀석이란거지.
한참을 눈을 감고있었다. 호화스러운 개인병실인지라 개인화장실까지 딸려있었
다. 한참을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적막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데 문열리는 소리
가 들리며 화장실에서 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걸어나왔다.
“미련하네요.”
그 남자의 한숨섞인 말에 눈을 감고있던 서우는 천천히 눈을 뜨며 그답지 않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베어물었다.
“어때? 어미고 자식이고 닮은 것은 이거 하나밖에 없는 것 같지?”
“웃지마요. 웃을기분 아니면서 웃는 거 보는 취미 없습니다.”
남자의 한숨섞인 말에 서우는 다시 한번 소리내어 웃었다. 화장실에서 기어나온
녀석의 이름은 박지훈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녀석이 치는 피아노소리에 끌려
괜히 억한 심정에 그 앞에서 그 곡을 쳐댄적이 있었다.
“괜찮을리 없겠지만, 이대로 끝내도 정말 괜찮은 거예요?”
녀석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아아, 그럴만큼 이건 심각한 상황이란 건가.
서우가 쓰게 웃었다. 괜찮을리 없을거라는 지훈의 말에 토를 달고 싶은 심정이었
다. 괜찮을리가 있겠냐. 웃고있던 서우의 마른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수빈의 앞에서는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모를정도로 그 눈물은 조용
히 그리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형.”
“아아, 괜찮아.”
말은 나오는데 눈물은 멈출생각을 하지 않는다. 수빈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청승
맞게 흘러나오는 눈물에 짜증이 났지만 눈물을 닦을 기운조차 없었다. 온 몸을,
가슴을 난자당한 기분이다.
수빈은 알고 있었을것이다. 그 말에 서우가 얼마나 상처받고 힘들어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용서를 빌고 잔인한 진실을 새겨주고
간 것은 죽도록 사랑했던 사랑에 대한 예의였다. 그것을 알기에 끝까지 같잖은
연기를 해댈 수 밖에 없었다.
지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서우를 보며 안타까운 눈을 접었다. 두 다리는
멀쩡하게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지훈은 머리를 짜증스럽게 뒤섞으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서우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지금 형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입을 한일자로 다문 지훈을 보고 있던 서우는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손등
으로 성의없이 닦아내며 화장실 문을 막고 있는 지훈의 어깨를 살짝 밀쳤다.
“비켜. 얼굴이나 씻게.”
“갈거예요?”
“어딜.”
서우의 손에 세면대 꼭지가 들려지며 물이 쏟아져나왔다.
“어디론가요.”
“박지훈.”
“예.”
“너 수능 이틀 남지 않았나.”
지훈이 뚱하게 그런걸 왜 묻냐는 눈을 하며 대답했다. 예, 이틀 남았는데 엿이라
도 주시게요? 그 뚱한 얼굴에서 튀어나오는 농에 서우는 피식 웃으며 제 얼굴을
차가운 물로 씻어내렸다.
“문 닫고 나가. 화장실까지 감시할거냐.”
지훈이 뭐라 토를 달려했지만 서우는 피식 웃으며 아무짓도 안할거라 말했다. 문
이 닫기고 지훈조차 사라지자 서우는 물을 틀어놓은 채 세면대를 잡고는 주저앉
아버렸다. 쭈그려앉은 다리 사이로 눈물이 쉴새없이 떨어져내린다.
사랑했다. 사랑했다. 사랑했다. 당신을 죽을만큼 사랑했다. 세상이 뭐라하던 당신
곁에 있고싶을만큼 당신을 사랑했다. 나는 당신의 과거니까.
수빈의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물소리가 거세지는 것 같았다.
세면대를 그러잡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바래졌다.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고 있다.
단 하나도 빼먹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수빈의 모든 것, 처음 이 병실에 발을
디딜때부터 그가 울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할때까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고있었던 사실이다. 수빈이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이 수빈을 사랑했다는 것. 하
지만 오늘만큼 수빈이 제 밑바닥까지 도려내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 가슴떨리는
고백은 달콤했지만 ‘사랑했다’라는 말 한마디에 그 달콤함이 독으로 목구멍에 들
어왔다.
서우의 목에서 생전 나온 적 없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를 사랑했고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원망이 아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해 울었다. 이 모든것이 어머니, 당신의 뜻이었다면 확실하게 성
공해 버렸다.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때론 유리조각보다 얇고 연약해 한번 부숴지
면 다시는 그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서우는 그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그 유리
조각파편에 손을 베어가면서도 예전에 그 투명했던 창을 만들려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다시 껴맞추려했다.
정신이 나갈정도로 울어댔다. 모든것이 끝난 것 같아 차라리 숨을 멈춰버리고 싶
었다. 자신앞에서 울어대던 수빈을 보며 그 작은 머리통을 끌어안고 괜찮다고, 괜
찮다고. 난 괜찮으니 울지말아달라고. 제발 울지말라고. 떠나도 내가 떠나고 내가
울고 내가 아파할테니. 내가 잘못했으니까 울지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계속해서 틀어져있던 물소리가 어느 순간 멎었다. 서우의 낮은 울음소리만 작은
화장실에서 울려댔다. 그런 서우의 뒤에서 목메인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앞으론 화장실도 감시해야겠네요.”
동시에 세면대 위에는 위세척을 하는 동안 지훈이 맡고 있었을 낡고 검은 반지
하나가 올려졌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미친 사람처럼 웃어버린다.
살아있다. 네가 내 사슬을 끊고 내 앞에서 걸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이
렇게 살아있어. 진저리나는 숨을 아직까지도 쉬어대고 있는 자신에게 한껏 경멸
을 담아 웃어보았다.
ㅡ내가 너무 약하더라.
ㅡ난 한때 너라면 내 숨을 다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었어. 한번도 네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ㅡ네 잘못이 아냐.”
ㅡ도망치고싶지 않아서.
ㅡ내가 널 사랑했다는 건 진실이었으니까.
ㅡ난 널, 내 하잘 것 없는, 쓰레기 같은 목숨보다 사랑했어.
나 또한 그러했다. 나 또한...
하지만 처음으로 내보여준 수빈의 말에 답할 수 있는 ‘남서우’는 없었다. 찾을 수
가 없었다.
잠든 수빈의 곁을 지키던 찬은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감겨오던 눈을 떴다. 어두
운 병실 문 앞에 자신도 익히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박지훈?”
“얘기 좀 할 수 있냐.”
젠장, 요 며칠 무단결석에 전화 좀 안 받았다고 터진건가. 하지만 화가 난 사람치
고는 지나치게 기운이 빠져있는 지훈을 보며 찬은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
았다.
<29>
얘기 좀 하자는 지훈의 말에 따라 온 곳은 오전에도 온 적이 있는 서우의 병실이
었다. 대체 여긴 왜? 라는 듯한 서우의 표정에도 지훈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었
다. 개인병실이라 그런지 꽤나 호화스럽다. 불이 꺼져있었는데 지훈은 아무렇지
도 않게 불을 키며 걸어들어갔다.
“야, 그렇게 불켜도 되나.”
“상관없어.”
혹시라도 환자가 자고 있으면 어쩌려고. 아까 낮에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을 남
겨주고 온 찬은이었기에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서우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멀쩡한 상태의 그였더라면 피할 이유도, 꺼릴
이유도 없었지만 그의 상태는 정상을 넘어선지 오래였다.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질문들이 떠올랐다. 왜 지훈이 이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일까. 이 곳에 와 대
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거지. 수능이 내일 아침인데 이 새벽에 자신을 깨워서
데려온 이유가 뭔지 묻고 싶었다.
“왜 그래?”
“뭐가. 막판 초치기나 하자고.”
서우대신 그의 침대에 수북하게 쌓인 참고서들과 수능 공략집들을 보며 한숨을
쉰 지훈이 보조침대에 주저앉으며 심드렁하니 말했다.
“얘기 하자매.”
“그런거 없어.”
지훈은 평소에 틱틱대는 말투 그대로 뱉으며 정말로 공부나 하자는 거였는지 암
기노트를 펼쳐들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찬은은 킥킥대며 웃으며 그의 양반다
리를 하고 앉아 지훈의 암기노트를 빼았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아니면 확 이거 다 먹어버릴거다.”
“미친놈. 지가 염소인줄 아나.”
“까짓거 개도 해보고 쥐도 해봤는데 염소라고 못하겠냐.”
넉살 좋게 말하는 찬은의 말이 반쯤은 진심이란 것을 지훈은 알고 있었다. 이 녀
석은 정말 가끔가다가는 인간의 상식으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저지르고
마니 말이다.
“부끄러워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하는 사이는 예전에 넘었지 않냐.”
얼굴을 들이대며 킥킥거리는 찬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지훈이 한숨을
뻑뻑 쉬어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고민하는 지훈의 눈 앞에서 찬
은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벙글벙글 띄우며 손가락을 돌렸다.
“꼬기꼬기 (꼬깃꼬깃) 쟁궈놨던 네 속을 털어놓...”
“닥쳐.”
찬은의 입엔 어느새 지훈의 주먹이 박혀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뭐가 그리 재미있
다는 건지 눈웃음을 쳐대는 찬은을 보며 지훈이 제 주먹을 빼내었다. 드러운 놈.
침 묻혀놓고 좋단다. 잠시동안 찬은을 바라보고 있던 지훈이 평소때와 같이 무심
해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행복하냐.”
지훈의 말에 찬은의 미소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알고
있기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찬은은 여전히 그 미묘한 웃음을 거두지 않고
지훈을 바라보았다. 남자답게 뻗어진 눈썹과 외 쌍꺼풀이 인상적인 이 녀석은 언
제나 제 일아니면 관심없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때론 자신보다 더욱 넓은
시야로 모두를 관찰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렇기때문에 녀석은 언제나 무심한 ‘
척’, 혹은 영향을 받지 않는 ‘척’ 해야했고 그때문에 돌아오는 역효과를 고스란히
저 혼자 받아내야만 했다.
가끔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사람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왔는데 어째서 그 조각 하나하나를 살
펴보면 왜 이렇게 미묘한 부분에서 닮아 있을까.
지훈의 무심함은 수빈의 무심함과 상당부분 닮아있었다. 둘을 설명하라면 세상
에서 조금은 엇나가 있는 방관자들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짙은
색의 끈으로 세상에 매달려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똑같지 않다.
지훈의 무심함이 체념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수빈
은 그 자신의 한계를 부정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찬은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 지훈에게 되물었다.
“행복해 보이냐.”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찬은은 웃어보였다. 모를일이다. 수빈을 그렇게도 갖고싶었는데. 그의 마음을 그
렇게도 갖고 싶었는데 그렇게도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르기를 바랬는데. 수
빈을 데리러 이 방안에 다짜고짜 들어왔을때 자신을 바라보던 서우의 빈 눈을 보
면서 죄의식을 느꼈다. 뻔뻔하도록 수빈을 옭아매고 그 존재의 모든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손에서 풀려난 수빈은 죄인인마냥 그 앞에서 울어대고 있었고 그 남
자는 비어버린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찬은은 그런 서우의 눈을 참을수가 없었다. 수빈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간절함을 담고있는 서우의 눈동자 앞에서 한시도 더 서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조금은 피곤함이 섞인 찬은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문
에 그때까지만해도 알 수 없던 표정을 짓고 있던 지훈의 표정이 풀렸다. 지훈의
입술사이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아
냐, 라는 듯한 그 웃음에 찬은의 볼이 부풀려졌다.
“왜 웃어. 난 진지하게 물어본거라고.”
지훈이 웃음을 가까스로 죽여대며 대답했다.
“모르겠다. 네가 어떻게 될지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어. 젠장, 여기서 웃으면
안 되는데. 넌 정말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넌 내 인생에 도움이 돼. 그러니까 앞으로도 딱 붙어있어. 마녀의 핍박쯤이야 날
위해 견디고.”
찬은의 말에 지훈은 큭큭대며 아예 간이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머릿속이 복잡
할땐 병원의 새하얀 천장이 최고다. 이번에 와 느낀 것이었다.
지훈의 머릿속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엉망진창이었다. 도저히 웃지 못할 것만 같
았는데 이 녀석이 눈 앞에서 너스레를 떠는 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나와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어느
선에 서야하는지,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지, 누구의 등 뒤에 서 있어야 하는
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단 두가지는 확실했다.
윤수빈이란 남자는 더 이상 남서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눈 앞에 있는 바보녀석은 그런 윤수빈을 사랑한다.
서우가 슬퍼하고 죽을만큼 힘겨워하는 것을 곁에서 보아왔다. 그의 마음을 충분
히 알고 있었고 그들이 사랑했던 시간들에 비하면 꽤나 지금 그의 반응이 양호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서우의 곁에서 함께 슬퍼했다.
찬은이 고민하고 또 버려지고, 다시 달려드는 것을 곁에서 보아왔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숨이 멈추질 않으니 사는 듯 해보이던 녀석의 삶에 한가지 목표
가 생기고 그 곳으로 세상의 말과 손가락질에 상관없이 달려가는 녀석을 보았다.
서우를 위해 그의 감정이 커지기 전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잡지 못했
다. 불타오르는 불덩이에게 달려드는 한 마리의 불나방 같던 녀석을 잡지 못했다.
잘못이 있다면, 이 비극을 제공한 사람을 꼽아야 한다면 아마 자신은 3위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 갔어?”
아아, 이제야 물어보는 건가. 질문 한번 참 늦다, 라고 괜한 핀잔을 주며 지훈이
대답했다.
“밤산책 나갔어.”
그래. 마지막 밤 산책 말야.
사실 찬은에게 묻기 전 서우에게도 물었었다. 수빈과의 모든 추억이 담겨진 그
낡은 반지를 손에 쥐었다가 펴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서우에게도 물
었었다. 괜찮아요, 형? 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하지만 왠지 그 표정에
묻고싶었었다.
‘행복해요?’
그리고 서우는 대답했다.
‘행복해 보여?’
아니, 지독하게 슬퍼보여. 아무런 표정도 짓고있지 않는데 그 표정이 지독하게,
지독하게 진한 그리움을 담고 있어서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어. 하지만
다음 순간 이 사람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서우는 웃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그 반지를 보면서 너무나도 서글프게 하
지만 그 언젠가 본 것만 같던 그 웃음을. 한참동안을 그 앞에서 ‘그 웃음’을 언제
보았었는지 생각해야했다. 서우가 반지를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기억났다. 저 웃
음은, 그날 피범벅이 된 손 사이에 얇은 UTP를 끼며 자신에게 다가왔던 그 날의
웃음이었다.
‘그렇게 보기만 하고 가려고?’
그리고 그때와 같이 지훈의 감정을 뻥하고 터뜨려버린 웃음이었다.
당신이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 설사 깨어지고 부숴진다해도 이 지옥문
앞에서 도망치지 않은 당신이 그때와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나서도 내
가 도망칠 수 있을거라 생각해?
대답은 아니었다. 당신에게서 나 다시 한번 도망칠 수가 없어.
“밤산책? 이 시간에?”
“응. 곧 돌아올거야.”
“박지훈아.”
“왜.”
“생각해보니까 난 행복해.”
“그래?”
찬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 죄 지은 기분이야.”
지훈이 짧게 웃으며 뭐라 말을 하려할때 방문이 열리며 낯익은 그 남자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너따위에게 책임을 몰아버릴만큼 정신이 나가진 않았어.”
어둠속에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져왔다.
“당신?!?!”
“시끄러. 소리는 지르지마.”
마지막 만났을때만큼 지루한 그의 목소리에 찬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모두 거짓말이었어?”
“그래.”
“어디서부터?”
찬은의 목소리에 어둠속에서 나온 그는 멀쩡히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대답했다
.
“처음부터.”
그는 거짓말같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따지기도 전 찬은의 주먹은 어느
새 서우의 얼굴을 내리찍고 있었다.
퍽-
그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지훈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구지 이어지려
는 찬은의 주먹을 막지는 않았다.
그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지훈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졌지만 구지 이어지려
는 찬은의 주먹을 막지는 않았다. 이대로 맞고있을 서우도 아니었고 따지고보면
이제까지 참고있던 찬은도 대견할 참이었으니까.
찬은의 주먹이 보통 주먹은 아니었는지 서우가 제 얼굴을 매만지며 일어났다. 뻐
근한 입가에 한번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한 서우는 그 어느때보다 날선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찬은을 보며 쌕 웃었다.
“이거면 됐나.”
“한참 모자라! 지금 장난해? 왜 당신이...”
이어지려는 찬은의 말을 자르며 서우가 대답했다. 편안하다기보단 여자라면 한
번쯤 돌아보고 갈만큼 매력적인 그 목소리에 찬은은 제 말을 멈추고 말았다.
“윤수빈을 사랑해.”
“뭐?”
“그런데 그 윤수빈은 날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앞에서 울며 용서를 빌어.
숨이 막힌다고, 네 앞에 있으면 숨쉬기가 힘들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녀석을 넌 어떻게 할 것 같냐.”
서우는 자신의 몸에 손하나 대지 않았는데 그의 손날이 목을 세게 내리찍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콱 막혀왔다. 처음부터, 애초부터 이 모든것이 거짓이었다면. 이
남자가 꾸민 작은 연극이었다면 아까전에 보았던 그 무심하게 비어버린 눈동자
또한 거짓이었다는 건가.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런 눈동자를, 수빈의 눈물 앞에서 그렇게 빈 눈을 할 수 있
었다는거야? 찬은의 눈동자가 바르르르 떨렸다. 대체, 어떻게, 당신이라는 사람은
.
그런 찬은의 표정에 서우는 다시 한번 웃으며 지친듯 해 보이는 몸을 지훈이 누
워있던 간이 침대로 던졌다. 지훈에게 잠시 시선을 준 서우는 침대에 뭔 책을 저
렇게 늘어놓냐고, 지금 수능 하루남았다고 시위하는 거냐고 짧게 농을 던졌다. 너
무나도 평소같은 모습, 아니 그보다 더욱 부들부들해 보이는 서우의 모습에 찬은
은 인상을 찌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건데, 당신은.
“당신이 놓는거야?”
“아니, 자르는거다. 죽는다해도 놓진 못할테니까.”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또 한번 웃었다. 그 웃음은 완벽하게 비어있어서 찬은
마저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서우의 표정은 언제 웃었냐
는 듯 가장 처음 그를 보았을때 이빨을 들이미는 은빛의 고고한 늑대마냥 바뀌어
있었다.
“처음도 끝도 내 선택이었어. 두번째 말하는거지만 너따위가 죄책감 받으라고 한
것이 아니니까 쓸데없는 것에 신경쓰지마.”
찬은은 한동안 아무말 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남서우의 깊은 눈만을 바라보았다.
저 무심한 눈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자신을 보고 있
는 것일까. 찬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그리고 단 한번도 이 남자에게 말하리
라 생각치 못한 말을 저도 모르게 뱉고있었다.
“...미안합니다.”
“사과하지마.”
비참해지니까, 라는 말은 삼켰다. 우걱우걱 목으로 씹어넘겼다. 눈 앞에서 진심으
로 자신에게 사과하고 있는 어린 개새끼에게까지 비참함을 드러내놓고 싶지 않
았다. 그 앞에선 이빨조차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네 놈이 윤수빈의 시선을 차지
한 녀석이라고. 떠나가는 윤수빈의 마음을 낚아챌 가능성이 가장 높은 네 녀석을
지금이라도 당장 뜯어발기고 찢어버리고 싶지만.
참는다.
갈 곳을 몰라하던 수빈의 시선을 사로잡은 녀석이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수빈은
그의 품속에서 숨쉴 수 있다고 했으니까. 단지 그 이유 하나에 비참함을 씹어삼
킨다.
“미안합니다. 한대만 더 때릴게요.”
서우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기도 전 찬은의 주먹이 다시한번 얼굴에 꽂혔다. 이번
엔 서우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어버렸다. 이 상황까진 생각지
못했던 지훈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찬은?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물어오는 지훈의 말에 찬은은 숨을 몰아쉬
며 제 손을 털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그 사람을 떠나려한 방식이라
면 잘못됐어.”
입 안쪽이 찢어졌는지 비린 핏맛이 느껴졌다. 서우는 일어서며 찬찬히 자신에게
두번씩이나 주먹을 뻗은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아무런 반문도 하지 못했다.
“내가 들은 당신 상태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아? 하반신 마비에, 뭐? 기억상실?
솔직히 나 그거 듣고 윤수빈이 함께 죽겠다고 하는건 아닐까. 당신이 만약 그렇
게 망가져버린다면 분명 수빈이 가장 필요할텐데.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감정이
당신과 윤수빈, 두 사람의 행복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들을
하루에 몇십번이고 몇백번이고 해댔는 줄 알아?”
이상하다. 찬은의 말이 계속되면 계속될 수록 이상하게 얼굴근육이 제멋대로 풀
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아, 조금쯤은 윤수빈이 이 녀석에게 왜 끌렸는지 알 것 같
다. 대책없이 솔직하고 대책없이 맑고 곧은 눈을 하고 있다. 그저 눈을 보는 자체
만으로도, 터져나오는 목소리만으로도 그것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상대방으
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웃으면 안되는 상황이란 걸 알면서도 서우는 웃었다. 방금전의 쓴 웃음이 아닌
진짜 웃음을 지어보였다. 서우의 입꼬리가 멋드러지게 올라가는 것을 보며 지훈
의 눈이 의외라는 듯 올라갔다.
“그러니까 이건 그 값이야. 당신의 그 빌어먹을 연극에 놀아난 값.”
찬은은 조금 높아진 자신의 목소리를 느꼈는지 길게 한숨을 뽑아내며 말을 이었
다.
“...모르겠어. 당신보고 지금 당장 가서 그 사람한테 나 멀쩡하다, 이렇게 널 기억
하고 있다고 말하라고 하고싶은데 그렇게 되면 간신히 얻은 시선마저도 빼앗길
까봐 겁이 나 그렇게 못 말하겠어. 이딴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논 건 당신인데 그
런 당신을 싫어할 수가 없어서 돌아버릴 것 같아.”
한참을 듣고만 있었다. 연극을 연극처럼 참아내고 한 자신과는 다르게 이 녀석은
수빈에게 그런 3류 연극따윈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저렇게 가슴속에 감정이 그
득그득한 녀석이 어떻게 뿜어내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아니, 못한다. 절대로 숨
이 끊어질때까지 수빈에게 거짓을 보여줄 수 없는 녀석이었다.
서우가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방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수빈이 그랬던 것
처럼, 이 꼬마 녀석이 지금 자신에게 악을 쓰며 말하는 것처럼. 수빈에게 다가가
놓아줄게, 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되었을것을.
겁이 났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앞에서 ‘놓아줄게.’라는 말을 뱉기 전 아무 생각없
이 다시 한번 수빈을 갈구하게 되어버릴까봐. 그의 존재가 부스러지도록 쥐어버
릴까봐 겁이 났었던 거다. 겁쟁이였다. 그 앞에 서면, 진심으로 보내준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에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뭐 이젠 아무래도 좋지. 적어도 겁쟁이로 퇴장하진 않았으니 된거다.
서우는 웃으며 동시에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의 주먹은 찬은이 막을새도 없이 빠
르게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번엔 찬은이 나가떨어졌다. 주먹이 나올거라곤 생
각조차 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찬은을 보며 서우는 이것도 꽤 괜찮은
데, 라고 생각해버렸다.
이런식의 결말도 나쁘진 않아. 비록 자신의 연극 시나리오에 조금 수정이 필요했
지만 이런식의 결말도 나쁘진 않았다.
“나 또한.”
차라리 널 처음 본 그날 죽여버렸다면 좋았을것을. 하지만 나는 널 죽이지 못했
고 너는 날 증오하지 못했으니.
서우는 그저 눈을 감을 뿐이었다. 끝나버린 사랑에 애호하기에는 너무나도 형광
등이 세 사람에게 내리쬐고 있었다. 비참함을 씹어넘기기엔 너무나 상냥한 이별
이었다.
*
지훈이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더니 곧 하찬은, 이라는 녀석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반대편 벽 쪽 의자에 앉아있던 서우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천천히
그들이 나온 방문 앞으로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에게서 들리는 발소리가 오늘따라 왜 이리 큰지 알수가 없
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로 이 앞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우는 떨
리는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네가 잠들어 있는 이곳. 나의 마지막 밤 산책이 될 이 곳. 내게 주어진 마지막 진
실의 시간. 그 모든 것이 마지막이기에, 그리고 끝이기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엔 네가 악몽이라도 꾸고있는듯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그 작은 신음소리에 또 한번 가슴이 미칠듯이 아려왔다.
“나 왔어. 윤수빈.”
자고있던 수빈의 미간이 더욱 찡그려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손을 뻗고 싶었지
만 지금 이대로 손을 뻗는다면 보낼 수가 없기에 뻗었던 손을 끌어내렸다. 그리
고 그 옆에 힘없이 앉으며 속삭였다.
“나 왔어.”
그리고 수빈은 눈을 뜨지 않는다.
*
나 왔어.
눈 뜨지마ㅡ 듣지도 마.
사랑해. 지금도 사랑해.
ㅡ떨려오던 그의 목소리를 듣고만다. 그리고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아아, 차라
리 숨이 멎었다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
*
다음편이 완결입니다.
보고싶으신가요?^^?
그럼 댓글을 달아주세요. 명백한 협박입니다.
전 공갈도 잘해요. ^^ㅋㅋㅋㅋ...
지금까지 함께 달려주신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글이 끝나고 나서도 가끔씩 생각나 다시 부분 돌려보기 하게 되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첫댓글 으앍.. 우주가람님 안녕하세요!! 여기서 이렇게 청소년을 곤란합니다를 보다니 반갑습니다!! 으앍.. 아 참 저 유이입니다 에..혹시 모르셔도 괜찮아요:$ 아무튼 정말 반가웠습니다!! 꺄후
ㅠ.ㅠ아아아아 소나에서보다가인소닷에서볼줄은몰랐어요 ! 중간중간보면서눈물이찔끔찔끔<흙흙. 완결기대할게요 ~
꺄~~~~~ 직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우너무슬퍼...ㅜㅜ 힝힝
전서우랑잘됐으면햇는데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헝헝, 진짜 저는 서우보다는 찬은이가 좋지만, 서우도 잘 됐으면 좋겠고, 순간 드는 생각.. 차라리 수빈이가 두명이엇다면 좋았을것을.. 헝헝
아 정말 사람은 왜 마음이 변하는걸까요 크흑 울적해진다 ..
지훈이가 서우옆에서 힘든거 다 받아주고 위로해주다가 둘이 러브하면 안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