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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내전2
삿 20:24-35
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29 이스라엘이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하니라
30 이스라엘 자손이 셋째 날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매
31 베냐민 자손이 나와서 백성을 맞더니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그들이 큰 길 곧 한쪽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요 한쪽은 기브아의 들로 가는 길에서 백성을 쳐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죽이기 시작하며
32 베냐민 자손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 하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르기를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하고
33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그들의 처소에서 일어나서 바알다말에서 전열을 갖추었고 이스라엘의 복병은 그 장소 곧 기브아 초장에서 쏟아져 나왔더라
34 온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택한 사람 만 명이 기브아에 이르러 치매 싸움이 치열하나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삿 20:24-35 / 그러자 베냐민군도 기브아에서 나와 또 싸움이 붙었는데, 이번에도 베냐민군이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을 1만 8천 명이나 쓰러뜨렸다. 그들은 모두 칼을 잘 쓰는 용사들이었다. 26)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다시 벧엘로 올라가 어째서 자신들이 싸움에서 패해야 하느냐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다. 그들은 해 저물 때까지 울면서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바쳤다. 27-28) 당시 벧엘 성소에는 계약궤가 모셔져 있었는데, 엘르아살의 아들이며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거기서 일을 보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여쭈었다. `우리가 또한 형제인 베냐민 지파와 싸워야만 하겠습니까? 이제는 그만두고 싶은 심정인데요' 여호와께서 `다시 한 번만 더 올라가 싸워라. 내일은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어 너희가 싸움에서 이기게 하리라.' 하고 대답하셨다. 29) [무너지는 베냐민 지파]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은 이번 싸움에서 작전을 바꾸어 자기 군대를 몇 부대로 나누어 기브아를 빙 둘러 에워싸게 하였다. 그리고 각부대를 맡은 자리에 모두 매복시켰다. 30) 그러다가 사흘째 되는 날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이 전처럼 기브아를 치려고 전투 대열을 갖추어 출동하자 31) 베냐민군도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과 싸우려고 성을 비우고 기브아에서 모두 나왔다. 성에서 나온 베냐민군들은 벧엘로도 올라가고 기브아 앞에 있는 들녘으로도 뛰어나갔다. 그들은 이스라엘군을 30명쯤 쳐죽이고는 32) `이번에도 우리가 또 이긴거야! 별것도 아닌 녀석들이 자꾸 쳐들어온단 말이야!'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은 처음에 쳐들어가 도망하는 체하다가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베냐민군을 꾀어 냈다가 그때 매복하고 있던 부대가 성안으로 기습 공격해서 성문을 걸어 잠그자는 작전을 세워 놓고 있었다. 33) 이스라엘 군대가 각각 맡은 자리에서 떠나 바알다말에 집결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 기브아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부대가 갑자기 일어나 쏟아져 나왔다. 34) 매복하고 있던 1만 명의 특공대가 기브아로 쳐들어갔다. 베냐민군은 자기네가 이렇게 참변을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싸움은 격렬하였다. 35) 여호와께서 베냐민군을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에게 넘겨 주셔서 그날 이스라엘 연합군이 쓰러뜨린 베냐민군의 수는 2만 5100명이나 되었다. 쓰러진 사람들은 모두 칼을 잘 쓰는 명수들이었다.
첫 번째 전쟁에 이어 두 번째 전쟁에서도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연 이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이스라엘은 승리하기 이전에 깊이 생각했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전투(24-28) 첫 패배 후, 이스라엘 연합군은 다시 베냐민을 치러 나섭니다. 그러나 또다시 패배하게 됩니다. 온 이스라엘은 벧엘로 올라가서 울며 금식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베냐민과 싸워야 하는지 여쭙습니다. 그런데 첫 전투와 두 번째 전투 후 베냐민을 내 형제 베냐민이라고 칭합니다. 이스라엘은 당장이라도 전쟁을 멈췄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불법과 불의가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과 이방의 문화에 물들어 버린 자신들을 돌아보았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은 사실 어떻게 해서든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는 요청일 뿐이었습니다. 진정한 징계와 심판은 하나님께 있을 뿐이며, 이미 이스라엘 전체에 죄악된 삶이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어느 편이 승리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수도 없고 영광을 받으실 수도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세 번째 전투(29-35) 앞선 두 번의 전투는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였을 수도 있습니다. 베냐민의 죄악에 대해 공의의 하나님께서 묵인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지 않고 자신들의 분노를 절제 없이 드러내는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돌이키지 않는 베냐민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두 번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베냐민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매복 전술에 패배하게 됩니다. 이 전쟁이 이스라엘 연합군의 승리가 아닌 베냐민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35). 이 전투에서 베냐민 지파의 용사 대부분이 전사합니다. 처음부터 베냐민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정당성도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이 승리했지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참담한 전쟁이었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길을 잃지 말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길을 잃었을 때 돌아오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잊고 잃어버리면 바른길을 갈 수도 없고 길을 잃었을 때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을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근본적으로 약하고 무력한 백성에게 그분의 강력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 강하고 능력 있는 구주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내 연약함을 직시하게 하시며, 그분에게 달려와 능력을 구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너무 거대해서 올라갈 수 없는 산으로 부르시고, 내가 무력함을 깨닫고 그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인도해 실패를 맛보게 하시고, 내가 그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힘써서 증명하시고, 그분의 부르심을 반가이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 설 교 >
죄는 더 큰 죄를 낳습니다
삿 20:29-48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두 차례에 걸쳐서 패배한 이스라엘 연합군이 마침내 세 번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베냐민 지파가 멸족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1. 먼저, 29절에 “이스라엘이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연합군이 28절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고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거듭된 참패의 충격으로 이 전쟁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두 번째 전투에서 그들은 23절에 하나님으로부터 “올라가서 치라”는 응답을 듣고 싸운 터라 그 패배의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충분히 의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믿고 지체없이 전투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신앙이 조금 회복된 듯이 보입니다.
26절의 ‘금식과 번제와 화목제’, 그리고 28절의 ‘비느하스의’ 등장은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과 같이 군사적인 우위를 믿고 베냐민을 무작정 공격한 것이 아니라 전술을 바꾸어서 매복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격할 때에 사용한 작전이었습니다.
30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이 셋째 날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이 전과 같이 전열을 갖춘 것은 베냐민을 유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들은 두 번의 승리로 교만에 빠져서 성읍을 빠져나와 이스라엘 연합군을 맞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처럼 이기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정에 빠져서 35절에 그날 자그마치 ‘이만 오천백 명’이 죽게 됩니다.
여러분, 이처럼 사람은 일이 생각대로 잘 진척되고 어려움을 당하지 않으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지 않는 한,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이 교만에 빠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상고했듯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는 교훈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잘 되고 평안할 때 스스로의 삶을 말씀 앞에서 점검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6-46절 말씀은 앞부분인 29-35절의 말씀을 좀 더 상세하게 반복하여 기록한 부분입니다.
40절에 기브아 성읍이 이스라엘 군대의 공격을 받아 불에 타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라는 표현은 여호수아의 공격으로 멸망당한 아이 성을 연상하게 합니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악의 성읍인 기브아는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경고합니다(롬 6:23).
죄를 범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공의롭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죄를 범하고도 그대로 둔다면 이로 인해 그 인생은 파멸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죄가 지닌 파괴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잔인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노아의 홍수심판, 바벨탑사건, 이스라엘이 분열되고 멸망당한 것 등의 모든 파멸의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의 양심은 화인 맞아서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딤전 4:2).
오늘, 나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없는지 스스로를 살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7절에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용사로 불리우던 자들이었지만 전쟁에 패배함으로 도망자가 되어 광야에서 숨어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에 빠졌던 자신들의 실수를 후회하고 또 후회했을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싸움을 했다면 결코 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8절에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베냐민 지파가 더 이상 항거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그들은 성읍 사람들을 마구 죽인 것입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가 그들의 형제임을 망각하고 분풀이로써 잔인하게 그들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연합군의 모습은 앞으로 전개될 사사기의 암울한 미래를 보게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한번 범죄와 타락의 길에 빠지면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큰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성도가 된 사람 중에서 다시 범죄에 빠진 경우를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범죄가 이처럼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늘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심으로 사사기의 비극을 교훈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 형제인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는 감정에 휩싸여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양측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전쟁에 패한 베냐민은 멸망의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악한 자들을 대하되 성령의 능력으로 악을 이기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비로소 준비가 되다
사사기 20:26-35 / by 짱목사
이스라엘 백성, 곧 온 군대가 베델에 돌아와 하나님 앞에 앉아서 울었다. 그날 그들은 저녁때까지 금식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께 다시 여쭈었다. 그때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베델에 있었고,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섬기며 그곳에 함께 있었다. 그들이 여쭈었다. "우리가 또 진격하여 우리 형제인 베냐민 지파와 싸워야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끝내야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싸워라. 내일 내가 너희에게 승리를 줄 것이다."
이번에 이스라엘은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사흘째 되는 날에도 이스라엘이 나가서 베냐민 앞, 전과 똑같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나와서 군대와 맞서며 성읍 밖으로 밀고 나갔다. 베냐민 지파는 전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들판에서, 베델과 기브아로 가는 길에서 서른 명 정도가 쓰러졌다.
베냐민 지파 사람은 "우리가 전처럼 그들을 파리 잡듯이 죽이고 있다!"하고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전략이 있었다. "우리가 후퇴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길로 끌어내자."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더 멀리 바알다말까지 나갔다. 그때 이스라엘 복병이 기브아 서쪽 지역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뽑힌 열 개의 정예부대가 드디어 기브아에 이르렀다. 맹렬한 피의 전투였다! 베냐민 지파는 자신들이 패하여 무너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그들을 패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날 베냐민의 스물다섯 개 부대를 전멸시켰다. 25,100명이 죽었는데, 모두 칼솜씨가 뛰어난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나갔다고 생각했는데도 두 번이나 의외의 패배를 경험한 이스라엘, 이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있는 벧엘로 올라가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여쭙지요.
"우리가 다시 올라가 형제 베냐민 지파와 싸울까요, 말까요?"
전쟁에 대한 확신이 많이 흔들린 모습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올라가라. 내일은 그들을 너에게 넘겨 주겠다."
아! 드디어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자손의 태도가 바르게 잡힌 것일까요?
베냐민 지파를 정죄하고 공격하기 이전에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금식한 그들의 태도가, 전쟁을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겸손하게 묻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제 정말 권징의 전쟁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된 것일까요?
신약성경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죄를 지은 자를 바로잡기는 하되 먼저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하며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군대의 일부를 매복시키기고 일부러 싸움에 져 주면서 베냐민 지파의 군대를 끌어낸 후 성읍을 기습하는 고전적인 작전이었습니다.
이틀간의 승리에 도취된 베냐민 지파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얕잡아 보면서 방심한 채 성읍을 나왔거든요.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베냐민 지파의 죄를 그냥 넘어가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공의의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베냐민 지파를 직접 심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고 십자가 은혜 아래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본문을 대할 때 조금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임할 모든 심판은 십자가에서 모두 예수님께로 떨어졌거든요.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 은혜를 의지하며 살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된다고 방심해서는 안되겠지요.
오히려 은혜를 입어 심판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거룩에 힘쓰게 됩니다.
다만 이제는 그 동기가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함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인 것이구요.
그리고 그 태도는 형제의 잘못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20:24,25
다시 이스라엘 자손...땅에 엎드러뜨렸으니 - 이처럼 본절은 두번째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이 패배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 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흘린 눈물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패배로 인하여 여호와를 원망하는 눈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한번의 패배를 통해서도 바른 자각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실수와 범죄를 반복한 것이다. 21절 주석 참조.
=====20:26
거듭 패배를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자손들은 보다 근원적으로 패인을생각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아 교만하고 완악했던 모습들을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전까지는 병력의 수효만을 믿고 하나의 요식(要式) 행위로 하나님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모든 해결책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겸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즉 그들은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된 실상들을 직시하고,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우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시 119:71;히 5:8).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비운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지혜와 위로로 채워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시 107:9;약 2:5).
벧엘에 이르러 - 18절 주석 참조.
저물도록 금식하고 - 첫번째 전투에서 패했을 때에 그들은 여호와 앞에 나아가기에앞서 '스스로 항오를 벌였다'(22절). 반면에 이번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즉 그들이 또다시 힘으로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려고 했다면 힘을 쇠잔케 하는 금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성경에는 회개를 위해 금식한 경우가 많이있으며(삼상 7:6;욜 2:13;행 9:9),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 금식한 예도여러 번 있다(출 34:28;욜 1:14). 에 4:1-3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번제와 화목제 - '번제'(Burnt Offerings)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기원하며 드리는 제사이다. 그리고 '화목제'(Peace Offerings)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화목과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한편 이 두 제사는 모두 예배자가자원하여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20:27
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 혹자는 본절을 근거로 하여 사사 시대에이미 실로의 성막이 영구히 벧엘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 18:1;삼상1:3;2:14;3:21;4:3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 당시 블레셋 사람들에게빼앗길 때까지 실로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베냐민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실로에서 벧엘로 옮긴 것임이 분명하다(Hengstenberg, Keil & Delitzsch, Lange). 한편 그들이 언제 하나님의 법궤을 그곳에옮겼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두 번의 전쟁 패배 이후에 실로에서 벧엘로옮겨온 듯하다(Hengstenberg).
=====20:28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 본 절에 등장하는 비느하스(Phinehas)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부디엘의 딸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다(출 6:25).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이미 활동하기 시작했다(민 25:7). 때문에 그가 제사장으로 지낼 때는 사사 시대 초기임이 분명하다. 이로 볼 때 본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의 발생 연대 역시 사사 시대 초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 세번째 전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증하는 이같은 약속을 주신 것은 26절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화목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회개하고 서원함으로 드려진다. 그러므로 본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승리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20:29
군사를 매복하니라 - 이스라엘 연맹군들은 두 번의 패배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현명하게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사전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는 저들이더 이상 베냐민 지파를 앝보는 것과 같은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한 증거이다.이는 마치 과거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공략할 때 사전 준비를 갖춘 것과 흡사하다(수8:4).
=====20:30
제 삼일에...전과 같이 - 이스라엘 연맹군은 군사를 매복한 것을 베냐민 사람들이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전날과 같이 항오를 벌였다. 즉 그들은 베냐민 군을기만하기 위하여 지난 번과 다름없는 전투 대형을 갖추었던 것이다. 19, 20 절 주석참조.
=====20:31,32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 본절에 묘사된 전투의 양상은 수 8:3-28에 기록된여호수아의 아이 성 전투의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 즉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유인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기세 등등하게 기브아 성읍을 떠난 이스라엘 연맹군을추격했던 것이다.
=====20:33
바알다말 - 지명의 뜻은 '종려나무의 주인'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유명한종려 나무의 산지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 기브아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혹자는 이를 라마와 벧엘 사이에 있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숲'과동일한 장소인 것으로도 추정한다(4:5).
기브아 초장 - 여기서 '초장'에 해당하는 원어 '마아레'(* )는 나무나 풀이없는 황량한 벌판을 가리킨다. 이러한 곳에는 웅덩이가 많기 때문에 복병들이 숨기에적합하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 454).
=====20:34
기브아에 이르러 - '기브아(베냐민)의 군대에 대항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베냐민 앞에서 거짓 패주하며 그들을 기브아 성읍으로부터 유인했던 이스라엘군사들이 이제 급히 돌이켜 복병과 더불어 베냐민 군에게 협공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 바알 다말에서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베냐민 사람들은 기브아에 매복해 있던 복병들(29, 33절)이 자기들의 후미를 공격하는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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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 일백을 죽였으니 - 베냐민 지파의 전체 군대 수효는 26,700명이었다(15절), 그런데 본절에서 죽은 베냐민 사람이 25,100명이며, 47절에서 죽지않고 도망한 사람이 600명이었다. 그렇다면 그 수는 전체 25,700명으로 15절의 수치와차이가 난다. 그래서 70인역(LXX)에서는 15절의 수치를 25,700으로 수정하여 번역하고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합리적인 계산에 의한 수정일 뿐 그에 대한 분명한 근거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1000명을 첫번째 전투나 두번째 전투에서 이미 죽은 자들의 수효로 이해하여야 한다(Goslin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