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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Kyrgyzstan
5일차 18:00 HY777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공항 출발 (약 1시간 20분 소요) | |||
비쉬켁 (키르키즈스탄) | 20:15 키르키즈스탄의 수도 비쉬켁 도착 (시차 : -3시간) (우즈벡보다 한시간 느립니다)
* 국내선은 현지사정에 따라 항공편 및 출도착 시간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가이드 미팅 후 호텔 투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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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시설 | Golden Dragon 또는 동급 | 식사 | 조식: 호텔식 중식: 한식 석식: 기내식 |
비쉬켁 (키르키즈스탄) | 호텔 조식 후 비쉬켁 출발, 이식쿨로 이동
이동 중 고대도시의 유적인 부라냐탑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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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쿨 (키르키즈스탄) | 알라아르챠 계곡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산악호수 이식쿨 도착 및 관광 (약 5시간 이동)
특전3) 이식쿨호수 유람선 (보드카 및 샤슬릭 제공) : 이식쿨호수에서 배를타고 바다처렴 펼쳐지는 풍광감상 및 자연속 휴식 : 암각화공원 및 소박한 박물관 견학
이식쿨 리조트 자유시간 및 호텔 휴식 : 빛나는 호수풍광속에서 자유로운 휴식시간을 즐겨보세요! | ||
숙박시설 | Karavan Resort 또는 동급 | 식사 |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현지식 |
이식쿨 (키르키즈스탄) | 호텔 조식 후
이식쿨 출발, 비쉬켁으로 이동 (약 5시간 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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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쉬켁 (키르키즈스탄) | 비쉬켁 시내관광 구소련 국민들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인민친선광장, 국회의사당건물 마나스동상, 알라 투 광장, 빅토리광장, 핀필로브 공원, 박물관 등
석식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 ||
비쉬켁 (키르키즈스탄) | 호텔 조식 후
비쉬켁 출발
국립공원의 멋진 산악풍광을 감상하며 카자흐스탄 국경지대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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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시아 북부에 있는 내륙국으로, 1864년 제정러시아에 정복되었다.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 투르키스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1926년 키르기스자치공화국, 1936년 키르기스스탄공화국을 거쳐 소련이 붕괴되면서 1991년 분리독립하였으며 독립국가연합의 일원이다. 정식명칭은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이다.
지도
키르기스스탄 국기
키르기스스탄 국장
면적:19만 8백 제곱킬로미터
언어:키르기스어, 러시아어
독립일:1991년 8월 31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인구:590만명(2015년통계, 112위)
GNP:2088$
대통령:알마즈벡 아탐바예프(Almazbek Atambayev) (2011.12 취임
종교:이슬람교(75%), 러시아정교(20%), 기타(5%)
키르기즈스탄
키르기스스탄이란 국가는 러시아혁명 후 성립되었으나 그 주요 민족인 키르기스인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르기스인은 기원전부터 예니세이강 상류 유역의 삼림지역에 살던 수렵민족집단으로, 중국이나 페르시아의 역사서에 키르기스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중국의 한대(漢代)에는 견곤(堅昆)으로 기록되었고, 기원전에는 흉노에 복속되었다. 7세기에는 돌궐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돌궐이 붕괴할 때는 당(唐)나라의 속령이 되었다. 그 후 위구르가 성립하면서 그 지배 하에 들어갔으나, 840년에는 10만의 기병으로 위구르의 수도를 공략하여 위구르를 멸망시켰다. 이것은 위구르인을 서쪽으로 이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북아시아 유목민의 세력에 압력을 받으면서도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11세기 경에는 도시를 건설했고, 13세기에는 관직제도를 정비한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의 칭기즈칸에 정복되었으나, 몽골이 멸망한 후에는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에 이르러 그 일부가 남서의 세미레체 지방으로 이동하였고, 18세기에는 다시 톈산산맥의 북측과 페르가나 협곡으로 이동, 현재의 거주지가 되었다. 1758~1759년 중국의 청나라가 동(東)투르키스탄을 정복할 때 키르기스인의 일부는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타림 분지의 북변, 페르가나의 동부, 파미르 산지 등에 분거하여 유목생활을 했으나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다. 일부는 코칸드 한국(汗國)이 지배하였으나 19세기 제정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로 1864년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제정러시아는 유목지의 국가 소유를 선언하고, 그 중 가장 좋은 토지를 러시아 이주민에게 대부분 분배하면서 러시아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원주민을 전시 후방 작업에 강제 징집, 노역에 동원하자 대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러시아혁명 직후에는 지주들에 의한 반소(反蘇)저항운동이 있었으나 1920년경 진압되었다. 1917년 혁명 후, 키르기스스탄은 소비에트 투르키스탄의 일부가 되었고, 1924년 중앙아시아가 지역적으로 재조직되어 국가가 창설될 때, 종래의 투르키스탄에서 분리, 키르기스자치주가 되었다. 1926년에는 키르기스자치공화국이 되고, 1936년에는 키르기스스탄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구소련 연방의 해체에 따라 1991년 8월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국가로서 주권을 선언하였다.
자유화되었다. 국영기업의 사기업화와 농지의 재분배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개혁이 진척되었다. 또한 민족간 여러 세력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독립 후 제정된 헌법에 따라 아스카르 아카예프(Askar A.Akayev)가 임기 5년의 대통령직에 당선, 재선되었고, 1998년 3월에 주마리예프 내각이, 같은 해 12월에 이브라이모프(Ibraimov) 내각이 발족하였으며 1999년 4월 무랄리예프(Muraliyev)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 대통령 위해설과 관련하여 비슈케크 시장과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2005년 봄의 국민적 시위는 대통령 마카예프의 축출로 이어지며 7월 대통령 선거에서 바이예프가 압승하였다. 2006년 4월, 5월, 11월 비쉬케프에서의 반정부 소요는 대통령의 권한을 정부와 행정부로 이양하는 신헌법의 개정으로 이어지고 2006년 국민투표에서 채택되었다. 국영기업의 사유화, 민주와 정치적 자유의 확대, 부패 추방, 민족 갈등 및 테러리즘과의 투쟁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국경선 설정이 민족 고유의 역사적·문화적 동질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소련의 편의에 따라서 구획되었으므로 장래 분쟁의 여지가 많다. 1989년에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의 국경에서 토지와 물의 이용권과 관련해 양국민이 충돌하여 사망자가 나고, 최근 타지키스탄은 국경선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1990년에는 페르가나 분지의 키르기스스탄 영토인 오슈주(州)에서 주택 용지의 분배를 둘러싸고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이 대립하여 폭동이 일어났다. 오슈주 인구의 1/3, 오슈시(市) 시민의 절반 이상인 우즈베크인이 자치(自治)와 우즈베키스탄으로의 편입을 주장해 양국 국민의 감정 대립으로 발전한 결과이다. 이 소요는 약 1주일간 계속되어 사망자 230여 명을 포함한 4,0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키르기스 공화국(키르기스어: Кыргыз Республикасы 크르그스 레스푸블리카스, 러시아어: Кыргыз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키르기스스카야 레스푸블리카[*]), 약칭 키르기스스탄(키르기스어: Кыргызстан 크르그스스탄, 러시아어: Киргизия 키르기지야[*], 문화어: 끼르기즈스딴, 끼르기지야)은 중앙아시아 내륙의 공화국으로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었다가 1991년에 독립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과 마주하고 있다. 2005년까지는 혁명과 내전으로 정국불안이 이어졌다. 키르기스스탄은 국토가 대부분 산이여서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13세기경 몽골에 정복됐으며 17∼18세기 청제국에 편입됐다. 19세기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936년 지금의 공화국이 되었으며 1991년 8월 독립을 선언하고 12월 CIS(독립국가연합)에 가입했다. 톈산 산계(山系)와 파미르 아라이 산계가 달리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산국으로서 기후는 매우 건조하다. 주민은 키르기스인이 48%, 러시아인이 26%, 우즈베크인이 12% 등이다. 종교는 이슬람이며 의무교육은 9년이다. 산지의 목초지가 넓기 때문에 양의 이목(移牧)을 행하고 있다. 귀리, 밀, 사탕무, 담배, 과수재배 등의 농업과, 석탄, 석유, 천연가스, 수은, 안티몬, 망간, 제분업, 제당업 등의 공업이 있다.
1.역사
1세기 무렵 흉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가, 다시 6세기에 돌궐의 지배를 받게 된다. 7세기에는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8세기에는 다시 위구르의 침략을 받아 지배를 받게 된다. 9세기에는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키르기스스탄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지배 하에 다시 들어가고, 16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1863년 북쪽 지역이 러시아 제국에 병합이 되며,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게 된다. 1926년 키르기스 자치공화국으로 개칭을 하고, 1991년 8월 31일 소련의 쿠데타에 의해 독립을 하게 된다. 1993년 새 헌법을 제정하고, 지금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키르기스스탄은 2005년에 튤립 혁명으로 아카예프 대통령이 쫓겨났는데, 혁명 주역 가운데 고려인도 들어 있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2]
2005년 7월 10일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8년 10월 6일에 키르기스스탄 남쪽에서 지진이 발생, 사망자가 65명으로 늘었다. [3]
2010년 4월 7일 경기 침체와 정부의 언론 통제로 수도 비슈케크를 중심으로 야당 측에 의한 반정부 운동이 격화되어 야당 세력이 대통령궁을 점거하였다. 다음 날 4월 8일 전 외상 로자 오툰바예바가 임시 정부 수립을 발표하였다.
2010년 6월 11일 남부 오슈에서 청소년 단체 간의 대립을 계기로 키르기스인과 우즈벡인 사이에 민족 항쟁이 격화되고 약탈과 방화, 살인이 잇따르면서 사태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유엔은 10만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대피하고, 난민 30만명이 발생하였다고 발표했다.[4]
폭동 이후,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오쉬주, 잘랄아바드주, 바트켄주를 3단계 여행제한지역으로 그외 지역은 2단계 여행자제지역으로 여행경보를 조정했다. 2012년 9월 3일에 키르기스스탄의 세 정당은 새 연정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5]
2.지리
국토 전체의 40%가 해발 3000m를 넘는 산간 지방이다. 국토는 동서로 길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경에는 톈산 산맥이 펼쳐져 있다. 남쪽에 위치하는 타지키스탄으로는 파미르 고원이 펼쳐져 있다.
국토의 중앙과 동서로 산맥이 펼쳐져, 국토는 수많은 협곡으로 갈린다. 최고봉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에 우뚝 솟은 포베티산(Pobeda 또는 Jengish 혹은 승리봉, 7439m), 그 다음으로 칸·텡리(Khan-Tengri 또는 Kan-Too, 6995m)이다. 4000m급의 봉우리가 적지 않다.
주요 하천은 시르다리아강 지류의 나른 강이고, 주요 호수는 국내 북동부에 위치하는 이스쿨 호수(Issyk-Kul)이다. 동서로 180km, 남북으로 60km, 둘레가 700 km에 이른다. 호수 표면의 해발은 1600m이다. 이스쿨 호수와 나른 강은 서로 다른 수계를 가지고 있다.
3.기후
주변의 카자흐스탄이나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달리 국내에 사막은 존재하지 않고, 이 지역은 천혜의 기후를 가지고 있다. 동서로 뻗어있는 계곡 부분은 사람이 거주하기 적절하며,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하계에 비가 적은 온대의 지중해성 기후 (Cs)에 해당한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로마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기후 지역이다. 산지는 아한대 습윤기후 (Df)이고, 특히 고지대는 고산기후(H)가 된다. 톈산 산맥을 끼고 남쪽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아라 산맥을 끼고 북쪽으로 카자흐스탄에는 스텝기후(BS)와 사막기후 (BW)가 펼쳐진다.
실제 강수량을 비교하면, 톈산 산맥의 100km 남쪽에 위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카슈가르의 연강수량은 60mm이지만, 비슈케크(북위 43도, 해발 800m)의 강수량은 450mm에 이른다. 이것은 로마나 샌프란시스코와 비슷한 수준이다. 비슈케크의 평균 기온은 1월에 -3도, 7월에 25도이다.
비슈케크와 제2의 도시 오시, 중앙부의 나린에는 구 소련 시대에 대규모 관개 시설이 부설되어 있기 때문에, 면화를 중심으로 한 경작에 적합하다. 이러한 관개지는 시르다리야 강, 나린 강의 지류에서 물을 얻고 있다.
4.정치
의회는 120석의 일원제이다. 2005년에 신헌법이 발포되기 이전, 1994년 10월부터 2005년 1월까지는 양원제로서, 상원에 해당하는 입법의회(정원 60석)과 하원에 해당하는 국민대표의회(45석)로 나뉘어 있었다. 2010년에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개헌하는데에 성공하여 지금은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의원내각제 체제의 국가이다.
5.주민과 언어
키르기스족들이 69.5%정도 차지하고, 유르트와 야크를 방목한다. 기타 소수민족은 러시아인 (9.0%), 남부의 우즈벡족 (14.5%)이다. 소수그룹을 차지하는 위구르족 (1.1%), 타지크족 (1.1%), 카자흐족 (0.7%), 둥간족 (1.2%)과 터키인 (0.9%), 고려인 (0.3%), 우크라이나인 (0.5%)이다.
키르기스어와 러시아어가 공용어이며, 키르기스어는 1991년 9월부터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신생국인 키르기스스탄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이 대부분 떠나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다. 러시아어는 2000년에 다시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키르기스어는 투르크어족에 속한 언어로 20세기까진 아랍 문자로 표기되었다. 1928년에서 1941년까진 로마자로 표기되다가, 1942년부턴 키릴 문자로 표기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이해할 줄 안다. 특히 비슈케크 주민들은 러시아어가 모국어이고, 사업과 정무에서 많이 사용된다. 소수 민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길가 무덤
6.종교
75%가 이슬람교에 속하고, 25%는 러시아 정교회이며[6]다른 종교들도 존재한다.
7.문화
키르기스인은 유목민의 전통을 의식하는 민족으로서, 부족주의적 성격이 강하며 지역적으로 남부와 북부의 문화적 차이가 크다. 옛 실크로드를 따라서 취락이 발달하였으나, 코칸드 한국이 1825년에 토성의 요새를 건설하고 피슈페크(Pish Pek)라는 취락이 형성되었다. 1940년 후 러시아가 이 요새지를 파괴하고 자국의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토성 요새지의 흔적은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일부 남아 있었으나 오늘날 신흥 아파트 지역으로 바뀌었다. 도시경관 중에서 중앙아시아적 경관은 없고 러시아의 도시풍이 압도하여 오래된 고목, 뒷골목의 주택이 우크라이나 양식이다.
8.행정구역
키르기스스탄은 현재 7개의 주(주; 단수область 복수областтар)로 구분되어 있다. 수도는 비슈케크이다. 도시(Шаар)도 구분되어 있다.
9개 구역. 1번이 수도 비슈케크. 3번이 수도 바슈케크가 있는 추이 주. 8번이 이식쿨 주
9.외교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여러국가(구 소련 분리독립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10.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는 구 소련 해체와 한-소 수교 이후인 1992년에 수교하였으며, 1993년 대전 세계박람회에 CIS공동관 국가로 참여한 적이 있다.
키르기스스탄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오랜 역사와 빼어난 경치를 가진 인구 200만 명의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 민족과 같은 알타이족이고 한국어와 같은 알타이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생김새나 풍습도 우리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은 키르기스인들이 사는 곳을 말하지요.
키르기스인들은 이미 기원전 2천 년경부터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내리고 중국에 대항해 왔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며,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기원전 1세기까지 흉노와 함께 중국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게 만들었지요. 5~6세기경에는 키르기스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 뒤 키르기스인들은 유목 생활을 계속하면서 실크로드를 통해 첨단 기술과 정보를 받아들여 번창했으며, 동서양 문명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했어요. 키르기스스탄은 1876년 러시아에 강제로 지배를 당하면서 고통을 겪었으나 1991년 다시 독립을 선포하고 새로운 발전을 준비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