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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8월 11일 주일오전
렉시오나리 : 사1:1,10-20; 눅12:32-40
본문 : 창41:53-42:28
제목 : “요셉과 형제들의 첫 대면”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33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41편 1,2,4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130편 2,3,4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62편 1,4,5,6
성찬식 찬송 - 시65편 3,5
폐회찬송 - 시91편 1,5
요셉과 형제들의 첫 대면
일곱 해의 풍년이 끝나고 일곱 해의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전 세계는 기근으로 인해 고통하고 신음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총리로 대처한 애굽에는 곡식이 있었습니다. 41장 54절을 보면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어찌할 수 없는 곤고함을 사용하셔서 결국 세상을 다스리는 이가 하나님의 계시를 맡은 요셉임을 보여주심으로써, 참된 양식, 즉 인생들에게 있어 진정한 양식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기근은 야곱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42장에 들어가면 이제 요셉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던 성경이 형제들의 이야기로 주제를 옮겨갑니다. 이제까지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후의 그의 행보를 주로 기록했는데, 42장부터는 판도가 조금 달라집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요셉의 형제들과 요셉의 만남이 시작되고, 이제 여기에서 다시 중요 주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 첫머리에서부터 들었던, 요셉의 사명, 곧 “어떻게 교회를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교회가 어떻게 형제애를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가 이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42장의 말씀은 요셉과 형제들의 ‘첫 대면’인데요, 이 첫 대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성도의 교제’, 곧 형제애에 있어서 무엇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아주 확연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전 개
오늘 말씀은 야곱의 아들들이 기근 때문에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3절과 4절 말씀을 보시면 요셉의 형 10명이 곡식을 사러 갔고 베냐민은 가지 않고 집에 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성경은 ‘야곱이 보내지 않은 것’으로 말씀합니다.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즉 요셉을 잃은 야곱이 베냐민까지 잃을까 염려하여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형들은 이제 애굽에 도착하여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8절 말씀을 보시면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헤어진 기간이 길었고 요셉이 많이 변한 탓도 있겠지만, 그뿐 아니라 요셉 편에서는 형들이 올 것을 생각하고 있었어도 형들 편에서는 요셉이 거기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을테니 알아보는 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형들이 요셉에게 고개를 숙였을 때,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9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우리가 이 사건을 읽을 때에 주목해야 하는 점은 ‘요셉이 왜 이렇게 하는가’라는 점입니다.
요셉 사건을 볼 때 우리가 세부적인 면을 집중해서 잘 보지 않고, 더군다나 잘 질문하지 않기 때문에 왜 요셉이 형들을 갑자기 스파이로 몰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요셉은 형들을 정탐이라고 몰았을까요?
우리가 9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요셉이 형들을 정탐으로 몬 것이 ‘충동적인 것이거나’, ‘혹은 개인적인 복수심에 의한 것이거나’ 이런 것들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9절은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정탐들이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요셉이 형들을 정탐이라고 한 이유는 과거 그들이 자기에게 했던 일들이 떠올라 화가 치밀어 올라서 한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라, 혹은 재미 삼아, 장난 삼아 한 행동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과거 자신에게 주셨던 계시를 떠올려서 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대해 꾼 꿈은 37장에 요셉이 처음 등장할 때 꾸었던,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를 향해 절하던 꿈입니다. 이 꿈은 그 때 당시에는 요셉이 얼마나 이해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입장에서 보면 요셉이 장차 당하게 될 일을 지시해주는,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 있는 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꾼 꿈을 생각했다”는 것은 형제들을 보고 요셉이 자신에게 주어진 구속사적 사명을 생각했다는 것이고, 따라서 형들을 정탐으로 몬 것은 이 구속사적 사명을 인식하는 가운데 행한 일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요셉은 화가 치밀어서 이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아주 냉철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가운데,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이 형들을 정탐으로 몰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통과하라
그러면 요셉이 이 구속사적 사명을 기억하면서 형들을 정탐으로 몰았다는 것은 정탐으로 모는 것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것일까요? 요셉은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 구속사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요셉은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요셉이 하려는 일은 이제 요셉이 이어서 하는 행동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요셉이 하는 말 속에서 이 의도와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뒤에 요셉이 하는 말들 중에서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는데, 이 중 특히 두 단어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시험하다”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진실”이라는 단어입니다.
1. 시험을 통과하라
먼저 15절의 제일 첫 부분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한 번 보십시오. 형들을 정탐이라고 하면서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우리말로는 “진실함을 증명하라”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매우 좋지 못한 번역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에서 “진실함”이라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굳이 이것을 “진실함”을 넣어서 번역한 것은 잘못으로 보입니다. 이 문장에는 “진실함”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원문은 이 문장이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입증하라” 입니다. 즉 15절 첫부분의 단어는 “진실함”이 아니라 “시험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진실함”은 다른 곳에 나옵니다.
15절의 앞부분에서 오히려 주목할 것은 “진실함”이 아니라 “증명”이라고 번역된 말인데, 제가 조금 전에 “입증하라”라고 했지만, 이 말은 원래 “시험하다”라는 단어이고 여기서는 수동형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시험을 받아서 통과하라”는 뜻으로 제가 “입증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형들을 정탐으로 몬 후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시험을 통과하시오” 즉 요셉의 의도에서 첫 번째 중요한 단어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형들은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16절에도 나옵니다. 비록 우리말 성경은 15절에서는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고 번역하고 16절에서는 “시험하여”라고 다르게 번역했지만, 16절의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할 때 “시험하다”라는 단어가 15절의 저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지금 “시험을 통과하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우리가 앞서 살핀 내용의 빛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억하는 가운데 형들을 정탐으로 몰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사전을 찾아보면 이 시험한다는 단어는 “무언가의 가치를 결정하거나 알아내기 위하여 시험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요셉의 형들은 창세기가 마쳐지기 전에 요셉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조상들로 서기 위해서 시험을 통과하여 자신들이 이 일에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시험대에 올려 놓은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정탐으로 몬 것은 형들을 시험하여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조상으로 적합한 사람인지를 입증하게 하는, 그 가치를 보여야만 통과되는 시험대 위에 놓은 그런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마치 감독관처럼 이 시험을 통하여 형들의 가치를 판단해야 했고, 부족하다면 그것을 만들어 주어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이미 형들이 요셉을 판 전력이 있는, 곧 형제애에 있어서는 실격의 태도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정탐으로 몬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시험”입니다. 요셉은 시험을 통해서 이들이 이 시험을 통과하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2. 진실
1)
그리고 요셉이 두 번째로 강조하고 있는 말은 “진실”입니다.
조금 전에 15절 앞부분에는 “진실”이 안 나온다고 했는데, 이 진실은 16절과 20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우리가 바로 지난 주일에도 들었던 바로 그 단어, 히브리어로 ‘에메트’입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적합한 자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 시험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들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먼저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요셉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시험하겠다, 이 시험을 통과하거라, 시험의 내용은 너희가 진실한 사람인가 라는 것이다.”
그리고 20절에도 같은 방식으로 ‘진실’이 나옵니다.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둘 다 에메트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에메트가 ‘신실함’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변개하지 않는 것, 어떤 점에 대해서 믿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는 것, 요셉은 형들에게 “시험하겠다” 했는데, 그 시험의 내용이란, “너희는 정말 진실한 자들이냐? 너희는 신실하냐? 너희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냐?” 이것이었습니다.
2)
그리고 “진실”은 이 본문 속에 굉장히 여러 번 반복되는데, 16절과 20절 뿐 아니라, 단어를 바꾸어서 비슷한 뜻으로 다시 두 번 더 나옵니다. 11절과 19절에 “독실”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히. 켄). 이 역시 진실과 비슷한 뜻입니다. 11절과 19절을 한 번 보십시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11절),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19절)
여기 “독실하다”로 번역된 말 역시 이 본문 전체에서는 같은 맥락 안에 있습니다. 둘 다 요셉의 시험대 앞에서 자신들이 증명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형들은 처음에 정탐이라고 몰렸을 때 자신들을 변명하면서 “우리는 독실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단어만 바꾸어서 “너희가 진실한 자들이라면 이렇게 해서 너희를 입증해 보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둘은 통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전체 대화에서 중심 주제는 그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시험을 통과하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시험의 내용은 ‘자신들의 진실함의 입증’이다.
회개로 이끌기 위한 방편
이 시험의 성격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정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용하셔서 형제들에게 무언가 하시려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큰 주제로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사실은 단순한 다툼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구축’, 곧 교회가 바로 서게 되기 위해서는 형제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요셉의 형들이 이것을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아마도 성령님의 지혜를 받아, 이 방법으로서 사용한 것이 ‘형제들을 정탐으로 모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정탐으로 몰아감으로써 형제들이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려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대처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위기 대처 능력의 여부를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진정한 형제 사랑이 생기도록 하게 하기 위한’ 모종의 조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앞서 다룬 내용들에서는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본문을 읽어 보셨으니 요셉이 그들의 진실함을 입증하기 위한 방법으로 말째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시험은 ‘요셉을 판 형제들이’, ‘요셉과 같은 배에서 나온 동생인 베냐민을’ 온전한 형제로 대우하여, 요셉에게 행한 악행을 씻을 수 있느냐의 시험인 것입니다. 그들의 진실함은 이것을 통해 증명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시험은 “자신들의 가치로움을 입증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하여 이들이 진정한 교회로 설 수 있는지를 요셉을 통해 시험하고 계십니다. 딱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떤 주석은 이 시험을 이렇게 말한 곳도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 시험에 실패하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2장 10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가 크게 일었을 때 모세를 통해 다시 시작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요셉을 통해 다시 시작하실 것이다.”
정확하게 딱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주석은 굉장히 무시무시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자격이 없으니, 다 죽여버리고 모세를 머리로 하는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주석의 설명은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지금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로 바르게 설 수 있는 자들인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이들이 하나님의 교회로서 자격이 있는지가 검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검증에 ‘진실함’이 요구된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형제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반문하게 됩니다. 이들은 그가 요셉인지 전혀 모른 채 애굽 총리에게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독실한 자입니다! 우리는 정탐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도 그렇고, 거기 서 있는 요셉도 그렇습니다. 과연 저나 여러분이나 거기 있던 요셉이 형제들의 이런 말을 듣고 “그렇군요 당신들은 참 독실한 사람들이군요”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마치 이 장면은 TV에 나오는 연애인들 중에서 평소에는 퇴폐적인 춤을 추고, 문란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고, 예능에 나오면 온갖 추한 꼴을 보이는데, 자기 소개란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써 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가 요셉 부분을 들어오면서 계속 보고 있지만 형들은 전혀 독실하지 않습니다. 형들은 전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요셉 제일 처음, 37장에 등장할 때부터 살폈지요?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고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부분을 설교할 때, 이런 잘못 안에 유다가 가나안 여자에게 내려가서 아이들을 낳은 것과 같은 행위라고 설명했습니다.
“진실함”이나 “독실함”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설교에서도 들은 바 있지만 성경에서의 “진실” 혹은 “신실함”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즉 사람이 이것을 갖추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들에게 ‘진실함 혹은 신실함’을 묻는다는 것은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똑바로 서 있냐는 것의 문제입니다.
형들이 정말 하나님 나라를 형성할 수 있을 만한 토대를 갖추었습니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고, 교회를 형성할 토대로서 빵점인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그 증거가, 바로 지금 그들의 눈앞에 서 있습니다. 요셉 아닙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도 무시하고, 교회의 어떠함에 대한 인식도 전혀 없고, 심지어는 훨씬 더 일반적인 상황에서 보더라도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죽이려는 태도, 더군다나 그것이 자기 형제인데, 오늘날 형사법으로 말하자면 존속살인과 시체 은닉 및 유기까지 저지르려고 했던 이들이, 그 대상자가 되는, 그 증인이 되는 사람인 요셉 앞에 서서 자신들이 ‘독실한 자’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이 그들을 정탐으로 몰면서 “너희들의 진실함을 입증하라”고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정말 교회로서 설 수 있게 되려면, 혹여나 과거 그런 모습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으로 서야 합니다. 다시 똑같은 종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요셉을 또 팔아야 하는 그런 상황이 또 닥쳐온다면 이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나라를 형성할 기틀이 될 사람들이라면, 모든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듯이’, 자신들도 그렇게 신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형제들은 요셉을 판 사건에서 이미 한 번 실패했고, 이제 다시 그 가능성을 질문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형제들을 “시험하는 이유”이고, 그 시험이 특별히 “진실함을 입증하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이후의 전개과정을 보면, 여기에서 우리가 이 주제, 즉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형제들이 교회로서의 신실함, 진정한 형제 사랑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에서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주제가 하나 떠오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쭉 보시면, 요셉이 처음 말하는 장면이 9절부터입니다. 요셉이 꾼 꿈을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정탐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 대화가 20절까지 지속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핀 전체 내용이 이 20절까지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정탐으로 몰고, 형들은 자신들의 독실함을 입증하려 애쓰고, 그리고 이 때문에 요셉이 이들에게 말째 동생을 데려오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진실함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20절까지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전개가 끝나고 나서 21절부터 형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여기 굉장히 놀라우면서도 중요한 주제가 등장합니다. 21절의 지점은 대화가 다 마쳐진 후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 대화의 열매, 결론에 해당합니다. 즉 요셉이 이렇게 형들을 시험대에 올려 놓았을 때, 형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했는지, 다르게 말하자면 형들이 요셉의 이 시험에 노출되었을 때, 이들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것을 볼 수 있는 지점이 바로 21절부터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요셉과의 대화를 마친 후 형들이 곧바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함께 21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
아마 성경 이야기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이 지점에서 깜짝 놀라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형들은 지금 정황상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형들은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되었고, 지금 당장 자신들의 진실함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처음 16절에서는 전부 갇히고 한 명만 가서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가 3일 감옥에 갇힌 후에는 19절에서는 한 명만 남겨 놓고 나머지가 전부 가서 말째 아우를 데리고 와야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계속 이야기해야 하지만 일단은 성경의 언급을 다 보고 말해 봅시다. 22절을 계속 읽겠습니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으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다!”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 봅시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약간 정황이 흘러가서 객점에 중간에 도착하여 짐을 풀렀더니 거기 돈이 그대로 있었을 때의 형제들의 말입니다. 28절도 읽겠습니다.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야차 레브, 정신이 뛰쳐 나가다)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28절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은 이들이 이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요셉의 시험이 무엇을 가져왔는가?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분을 읽고 우리는 무엇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요셉의 형제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문제, 즉 자신들이 정탐으로 몰리게 되어 진실함을 시험받게 되었을 때에, 모든 형제들이 다 같이 뜬금없이 과거 자기 동생 요셉을 죽인 사건을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1)
요셉의 시험의 의도는 형들이 진실함을 입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형들은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가기 위해서 형제애를 가진 사람임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단순히 “앞으로 잘 하자”, “이제부터 잘 하면 돼” 그렇게 하고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현재와 미래에 이루실 일을 위하여 ‘과거를’ 생각나게 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정황은 굉장히 뜬금 없기 때문에, 형제들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자신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일이 과거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 주고 계신 것이라는 이런 인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과거를 기억나게 하고 계십니까? 회개와 청산이 없이는 진정한 진실함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일본과의 무역전쟁 때문에 온 나라가 불매운동으로 뜨겁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근원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문제는 양편에 다 있습니다. 첫째는 일본이 근본적 의미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벗어난 직후에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 등의 방식으로 일제의 잔재를 청산했어야 했던 시절에 빨갱이를 트집 삼아 이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치가 유럽을 점령했을 때 프랑스 역시 지배를 받았지만 프랑스는 전쟁이 끝난 직후에 나치부역자 6천 7백명을 사형시키고, 2만 6천명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치인, 언론인, 작가 등 글을 쓰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에 몸 담았던 사람들을 향해 “그 때 당시 그런 지위에 있었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해해주려 했던 반면, 프랑스는 정치나 언론 등 국민들에게 말과 글로 사상적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사람들 중 부역자들은 ‘가중처벌’했습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 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난지가 무려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문제가 생기면 나라 안에 기득권자들이 우리나라의 편을 들기보다 일본의 편을 드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프랑스처럼 과거사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는 정치나 언론, 경제나 사회 요지에서 매국노의 후손들이 가장 큰 기득권을 잡고 있습니다. 이들이 늘 하는 이야기는 똑같습니다.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를 향해 가자” 하지만 이런 말은 거짓말입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미래를 향해 갈 수 있습니까?
신자는 사실 죄에 대하여 이것과 동일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제는 잘못했지만, 오늘부터는 잘 할 수 있어요”, “어제 저지른 죄는 잊어주세요. 내일은 그렇지 않을 거에요”
여러분! 오늘과 내일의 신실성은 과거의 신실성이 보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회사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 회사가 이제껏 걸어온 길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가 과거 행한 행적으로 통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없이 무슨 수로 현재나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까?
죄인에게 있어 ‘과거의 죄에 대한 회개 없이’ 현재나 미래의 신실한 삶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은 신자라면 더더욱 과거를 올바르게 청산하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앞서 말씀드린 사회의 문제에서조차도, “우리가 앞으로 건전한 길을 걸어나가기 위해서는 ‘미래를 바라보자’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과거를 깨끗하게 하자라고 먼저 말해야 한다”라고 앞장 서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과거는 대충 덮고, 앞으로 잘해 봅시다”라는 생각은, 적어도 회개를 이해하는 신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형제들이 신실함을 증명해야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어떤 마음을 주셨습니까? 현재의 신실함은 과거의 악행을 회개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동일한 주제, 즉 형제 사랑을 구축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할 때, 그 일을 “이제부터는 잘해 봅시다”, “앞으로 베냐민을 사랑하면 됩니다” 이런 전망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회개부터 해야 했습니다. 과거 그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악행을 덮은 채로 베냐민을 사랑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자신의 과거의 악, 회개해야 할 죄를 하나님 앞에 먼저 까발라 내놓지 않으면, 그 위에 무언가를 쌓는 것은 불가능함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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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애의 회복’이라는 것이 ‘형제간의 관계 회복’을 통해 되는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성도간의 관계 회복에서 실패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는 악행을 저지른 뒤에, 눈물로 베개를 적시면서 하나님께 회개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시51:4)라고 말합니다. 제가 교회에서 설교 등을 통해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여기에서 다윗의 고백은 “나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항상 사람에게 지은 죄를 갚을 때는 ‘한편으로 하나님께 갚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에게도 갚을 것을’ 명령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손해에 대한 배상의 모든 법이 이렇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고백은 “나는 사람에게는 죄를 짓지 않았다”라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에게 짓는 모든 죄악조차, 그 근본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다”라는 주제를 말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을 죽인 형제들은 ‘형제애’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목표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이해를 쉽게 하려면 우리 주변의 상황에 한 번 대입해 보십시오. 내가 어떤 형제, 어떤 자매와 심각한 관계의 깨어짐 중에 있습니다. 이것을 회복하는 근본적인 대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형제애의 회복이 형제간의 관계 회복을 통해 궁극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제애의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 앞에 엎드림에 있는 것입니다. 형제애가 깨어졌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형제들에게 손을 먼저 내미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먼저! 우선적으로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먼저 엎디어지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관계 회복을 실패합니다.
“싫지만 사랑해야 해!”라고......그나마 성숙한 성도들은 결심합니다. 여러분! 냉정하게 말해, 교회 안에 있는 형제, 자매라고 해서, 모두 내 취향이 아닙니다. 아주 현격하게 성격이 달라 벌어지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만나면, 성숙한 신자일수록 최선을 다합니다. “사랑해야 해!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해! 싫지만 노력해야 해!” ...... 좋은 태도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깨어지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셉이 형제들과 첫 대면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키워드가 둘 있었습니다. 첫 키워드는 “시험하다”였는데, 시험의 내용은 둘째 키워드 “진실함”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실함을 입증하는데 있어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고 내린 두가지 결론적 주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첫째, 과거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현재나 미래는 없는 것이다. 둘째, 진정한 형제애의 회복은 형제애 자체의 회복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쓰러지는 데에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형제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요셉보다 더 큰 이를 모시고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온 몸을 던진 요셉보다 더 교회를 위하여 온 몸을 던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 두 주제를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됩니다. 교회 됨을 위한 형제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드리기를 아끼지 않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요셉의 비전에 더욱 다가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깨닫게 하고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찬송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