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창중입니다. ^^
damul님과의 역사토론이 이어지고 있는 차에 몇가지 꼭 지적해야할 것들이 있어서
알려드리고자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은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당연히 알아야 할 사실이면서도
교과서에서 사라졌으며 진실임에도 모든 국민들에게 왜곡되어 알려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글입니다.
최대한 fact들만을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왜곡과 말살의 역사는 일제의 식민지 시대만이 아니며
일제시대보다 더 처절한 왜곡과 말살이 이어졌던 시기가 조선초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갖지 못했기에 명나라의 후원이 매우 소중했으며
마치 박정희 전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미국의 후원과 일본과의 친선이 필요했던 것처럼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은 정당성의 결여로 인해 필연적으로 명나라의 후원이 절실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중의 태조실록에 보이는 태조 이성계의 말처럼 우리나라를
사실상 고래로부터 중국을 떠받드는 나라인 것처럼 표현하는 어록을 남겼던 것이지요.
고려라는 나라는 당시에 송나라 및 주변 요나라나 금나라등과 대등한 외교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래의 글들은 그와같은 조선초기의 역사적 인식하에 저질러졌던 수많은 역사책들의 소실과
왜곡의 증거이며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삼성기를 비롯한 단군조선시대의
기록들에 대한 근거가 되는 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했습니다.
< 세조 3년 5월 26일 >
<원문>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
《表訓三聖密記》、《安含老》、《元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一百餘卷、《動天錄》、《磨蝨錄》、
《通天錄》、《壺中錄》、《地華錄》、道詵^《漢都讖記》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
<해석>
세조 3년 5월 26일(무자) :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 대변설(大辯說)
- 조대기(朝代記)
-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誌公記)
-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 동천록(動天錄)
- 마슬록(磨쳗錄)
- 통천록(通天錄)
-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 예종 1년 9월 18일(무술) >
<원문>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
《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ㆍ《玉居仁》ㆍ《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壼中錄》、《地華錄》、
《明鏡數》, 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家藏者, 京中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超二階, 自願受賞者及公私賤口, 賞綿布五十匹,
隱匿不納者, 許人陳告, 告者依上項論賞, 匿者處斬。 其速諭中外。”
<해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志公記)》
- 《표훈천사(表訓天詞)》
- 《삼성밀기(三聖密記)》
- 《도증기(道證記)》
-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명경수(明鏡數)》 및
-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 성종 원년 12월 9일(무오) >
<원문>
○下書諸道觀察使曰:
前者,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
《河少良訓》, 文泰、王居仁、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壺中錄》、《地華錄》、
《明鏡數》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 無遺搜覓上送事, 曾已下諭。
上項《明鏡數》以上九冊、《太一金鏡式道詵讖記》, 依前諭上送, 餘書勿更收納, 其已收者還給。
<해석>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 《지공기(志公記)》
- 《표훈천사(表訓天詞)》
- 《삼성밀기(三聖密記)》
- 《도증기(道證記)》
- 《지리성모(智異聖母)》
- 《하소량훈(河少良訓)》
-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 《호중록(壺中錄)》
- 《지화록(地華錄)》
- 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 《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 글들을 보시면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수많은 역사책들이 왕명에 의해 수집되어졌으며
모조리 불태워지는 수순을 밟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사 또한 실제 고려시대의 역사를 상당부분 잘라내고
마음대로 왜곡하였던 바가 있습니다.
고려시대는 따로 역사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왕조실록이 있었던 것인데
그 길고긴 내용을 마구 잘라내어 간단하게 편집해 버린 것이 지금의 고려사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 이 것입니다.
바로 규원사화이지요.
개인적으로 볼 때, 환단고기와 단기고사등은 위서일 가능성도 상당하나
아래의 규원사화는 진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단기고사(檀奇古事)는 근대적 지식을 아는 글이나 용어가 너무 많이 나오며
전기 단군조선 시대에 명왕성을 관찰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람의 육안으로
관찰되지 않는 명왕성은 천체망원경을 통해 1930년 2월 18일에 가서야 최초로 발견했으므로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후세의 위작일 가능성이 상당하며,
한단고기(桓檀古記)는 태백일사편에 남녀평권(男女平權), 부권(父權)과 같은 근대적 용어가 나와있고
연개소문의 부친과 조부의 이름이 태조(太祚)와 자유(者游)라고 나와있는데
이것은 연개소문 아들의 무덤이 발굴됨으로 인해 1923년에 최초로 알게 된 것이므로
역시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위작일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위의 책들에 비해 규원사화는 비슷한 단군시대의 기록들을 담고 있지만
진본이 존재하며 여러 가지 내용들이 진실에 근접한 것이 많기에
진짜일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 "규원사화 진본사진"
▣ 북애노인 규원사화 진본
2. 도서열람번호 : 귀 629(고2105-1) 1책
3. 제작년도:1675년 조선조 숙종1년 3월 상순
4. 크기 : 24.7*16.6cm
5.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1675년 을묘)에 제작된 진본으로서의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함.
6. 구입날짜 :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사이
7. 등록일자 : 1946년 5월 25일
8. 구입장소 및 가격 100원에 책방에서 구입(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별도 특별관리목록 대장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1989년 11월
11일)
당시 100원은 지금의 100만원 수준으로 대단히 비싼 가격에 구입한 것입니다.
아래는 진본임을 확인한 감수위원들의 명단과 약력입니다.
< 이가원 (李家源) : (현)학술원 회원(한국한문학)
>
생년월일 1917/04/06 (음력) (생존)
출생지 경북 안동
자택주소 서울 종로구 명륜동3가 59
우편번호 110-523
자택전화번호 02-762-3929
<
학 력 >
- 1941 明倫專門 졸업
- 1952 성균관대학교국문학과( 학사 )
- 1954 성균관대학교대학원( 석사
)
- 1966 성균관대학교( 문학박사 )
- 1969 中華學術院( 철학박사 )
< 경 력 >
1955 - 성균관대학교문리대학조교수
1957 - 성균관典學
1958 - 연세대학교대우교수
1964 -
1982 연세대학교문과대학교수
1970 - 儒道會총본부위원장
1971 - 심곡서원원장
1975 - 한문학회회장
1981 - 한문학연구회회장
1981 - 도산서원원장
1983 - (현)단국대학교대학원초빙교수
1983
- 미술대전심사위원
1986 - 1989 퇴계학연구원원장
1997/07 - (현)학술원 회원(한국한문학)
< 손보기(孫寶基) : (현)단국대학교 석좌교수
>
생년월일 1922/07/07 (음력) (생존)
출생지 서울
본관 밀양
사무실주소 서울 용산구 한남1동 산8 단국대학교한국민족학연구소
우편번호 140-714
사무실전화 02-709-2268
자택주소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3동 1-750
우편번호 120-193
자택전화번호 02-313-5340, 팩스 02-313-3304
본적 서울 성북구 삼선동2가178
< 학
력 >
- 1940 휘문고등학교( 서울 )
- 1947 서울대학교사학과
- 1949 서울대학교대학원( 석사 )
- 1963 미국 캘리포니아버클리대( 철학박사 )
- 1996 몽골 과학아카데미역사연구소( 명예철학박사 )
<
경 력 >
1948 - 1957 서울대학교사범대학전임강사·조교수
1960 - 록펠러재단객원교수
1964 - 1987
연세대학교문과대학교수
1965 - 1981 연세대학교박물관관장
1967 - 연세대학교문과대학학장
1973
- 한국사硏회장
1975 - (현)세종대왕기념사업회고문
1982 - 1988 국사편찬위원
1984 - 1986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회장
1985 - 미국 캘리포니아버클리대객원교수
1986 - 1995 문화재위원
1987
- (현)한국선사문화연구소소장
1989 - 1991 한민족학회회장
1989 - (현)단국대학교초빙교수
1992
- (현)단국대학교민족민속학연구원원장
1992 - (현)韓·몽골공동학술연구협회회장
1996 - 겨레문화재단이사장
1990 - (현)장보고대사해양경영사연구회고문
1987 - 1989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회장
1987
- 겨레문화연구원이사장
1996/03 - (현)연세대학교용재석좌교수
1997/03 - (현)단국대학교석좌교수
1997/03 - (현)단국대학교중앙박물관관장
< 임창순
(任昌淳) : (전)한학자·금석학의 대가 >
생년월일 1914/05/30 (음력) (사망)
출생지 충북 옥천
< 학 력 >
1927 - 1932 報恩觀善亭書塾서 漢學수학
- 199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문학박사 )
< 경 력 >
1945 - 경북중학교敎諭
1946
- 1949 대구사범대학전임강사
1951 - 1954 동양의약대학교조교수
1954 - 1962 성균관대학교국사학과부교수
1963 - 1988 태동고전연구소소장
1971 - 1988 문화재위원회위원
1982 - 문예진흥원한국美展春季審위원장
1985 - 한림대학교객원교수
1988 - 1999/04 한림대학교태동고전연구소소장
1989 - 1993
문화재위원회위원장
1990 - 서지학회회장
1991 - 1999/04 경산대학교이사장
1995/05
- 문화재위원회위원장
1998/06 - 1999/04 청명문화재단이사장
1945년에 발견된 책이 44년이 지난 1989년에서야 밝혀졌으며 진본의 존재가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대출 및 열람불가의 도서로 분류되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봉쇄된 채 위서라는 설만이
식민시대 사학자들의 후예들에 의해 주장되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히는 44년동안 누군가에 의해서 진본의 위치가 비밀리에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현재 전하는《규원사화》필사본은 서기 1940년(단기 4273년, 昭和 15년) 9월에
梁柱東이 비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孫晋泰가 3본을 필사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각 1부씩 기증하여 소장하고 있던 중, 고려대학교본은 서기 1976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발간한 사실이 있고, 서울대학교본은 그 후 없어졌다가
方鍾鉉이 소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다시 등사하여 동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그밖에 언제 어디에서 누가 필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權相老 소장본을 필사하여 동국대학교에,
李瑄根 소장본을 등사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각각 소장하고 있고,
또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마이크로 필름본 1개를 역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등 도합 6종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 6종의 필사본을 비교 대조하여 보면 동국대학교본에서는 ‘啓發’을 ‘啓達’로,
고려대학교본에는 ‘壬儉’을 ‘王儉’ 등으로 잘못 필사한 흔적이 간혹 발견될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거의 동일합니다만 필사본과 진본사이에 약간의 글자첨가가 있습니다.
필사본 가운데 양주동 소장본을 손진태가 필사하여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기증하여
소장된 판본 가운데 하나가 서희건 著 고려원 발간의《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제2권의 부록으로
영인 수록되어 있으며, 책 제목을 제1쪽, 序의 시작 부분을 제3쪽으로 산정하였을 때,
총 148쪽 26,357자(제목 제외)입니다. 이 판본을 편의상 「필사본」이라 부릅니다.
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1) - 도서열람번호 2121.3 1책
②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2) - 도서열람번호 2105.1 1책
③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3) - 마이크로 필름본
④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 權相老 소장본을 필사한 것
⑤ 서울대학교 도사관 소장본 - 方鍾鉉 소장본을 등사한 것
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소장본 - 李瑄根 소장본을 등사한 것
<규원사화의 진위에 대하여>
《규원사화》는 저자인 북애자에 의하면 고려말의 청평산인 이명이 쓴
《진역유기》(3권)을 대본으로 삼고 거기에 저자가 안팎의 사서들에서
참고할만한 자료들을 뽑아서 추가하고 일정한 자기식의 설명을 가하기도 한 것이며
《진역유기》는 발해사람들이 편찬한《조대기》를 참고하여 쓴 것입니다.
《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 내용에서 단기고사나 환단고기와 달리
이 책의 저술년대인 1675년 이후에 추가기입하였다고 볼만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① 우선 인명에서 이 책에 보이는 사람이름들은 다 옛스러운 느낌을 주며
다른 비사들에서 보는바와 같은 중국식성씨를 가진 인물은 없습니다.
② 다음 지명 역시 매우 옛스러운 고장이름으로 된 지명이거나 소밀성, 길림 등과 같이
17세기 중엽에는 조선에도 잘 알려 진 지명들입니다.
③ 인용도서목록도 다 17세기 중엽이전에 출판 또는 필사, 보급되여 있었던 책입니다.
또 책이름을 밝힘이 없이 인용 또는 이용한 글도 다 그 이전시기의 책들의 내용입니다.
④ 사건, 사실들의 서술과 그에 대한 보충적해설도 조선과 중국의 고전, 역사책들에 나오는 것들과
그것을 가지고 자기식으로 해설한 것으로서 17세기 사람으로서는 능히 그렇게 쓸수 있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⑤ 관직명을 보아도 중앙관직명인 《단군8가》는 매우 옛스러운 명칭으로 되어 있고
수상(首相)이니, 상장(上將)이니, 호군(護軍)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쓰지 않았으며
지방관직도 여러《후》,《남해상장》(上長)등은 보이지만《태수》니《녹살》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없습니다.
이 역시 근대이후의 가필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⑥ 사상, 이론, 개념들도 17세기 사람들이 능히 쓸 수 있는 내용과 어휘들로 표현되어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태백일사》등에
보이는《천부경》이나《삼일신고》등은 나오지 않고
《서경》같은데도 보이는《대고(大誥)》가 나옵니다.
⑦ 과학, 기술관계 서술에서도 《단기고사》등에 보이는 근대부문과학도서나 비행기, 잠수함 같은
근대기술의 산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규원사화》단군기에 보이는《문화의 계발》이라는 표현에서
《문화》란 말은 서유럽근대의《Culture, Kultur》를 번역한 말이라고 보지만
그것은《문치, 교화》의 준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 《고려사》성종 10년조에 나오는 여진관계기사의 연대를《광종 10년》이라고 했으나
이 것은 같은 내용으로 된《해동역사》를 베낀것이고 따라서 1823년 이후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 것은 북애자와 한진서가 다 같이 선행한 어떤 책을 기초로 쓴 것이라고 보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북한 송영종박사 말 중 발췌
2.내용에 대해서
제3세 임검 가륵임검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때마침 하왕이 덕을 잃어 신하들 중에서 몇몇이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식달에게 남국과 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들을 치게 하니, 나라의 위엄은 크게 빛나게 되었다
(時夏王失德 其臣有謀逆者 乃使息達 率藍眞蕃之民
以征之於是國威益彰)."
여기서 식달은 사람으로 요즘 말하면 국무총리 벼슬에 있던 사람입니다.
또 단군조선은 나라를 아홉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진번과 남국은 그 아홉나라 중 두 나라에 해당되는 나라입니다.
위 대목에 보면 그 당시 중국임금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 내용과 부합되는 중국측 사서가 있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보면,
"하나라 임검 태강이 덕을 잃어 이인(夷人:동이인, 즉 조선사람)이 비로소 배반하기 시작했다
(夏后氏 太康失德 夷人始畔)"라는 내용이 있고,
그 주(註)에 "태강 예에게 쫓겨 났다"고 되어있습니다.
하왕 태강이 그 신하 예에게 추방당한 연대가 표준세계년표에 의하면
"태강 19년 신해(辛亥,서기전 2170년)"이므로, 이 연대를
우리 가륵(嘉勒)임검의 즉위년대수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측 기년(紀年)으로 환산하여 보면 가륵임검 37년 신해(단기 164년)에 해당하므로
위
사실은 대략 이 무렵에 일어난 것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내용이 부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군데 다 얘기하자면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이 내용은 환단고기에도 약간 나오는 내용입니다.
15세 벌음(伐音)단군 때의 기사를 보면, "때마침 하왕이 사신을 보내와 도와줄
것을 요청하여
말량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여 구해 주었다. 그 후 또다시 하왕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 무도함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時夏王遣使請援 乃末良 興兵進救 後夏王復請兵 儉以其無道却而不許)"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국측 사서 여러 군데를 찾아본 즉,
서기전 77년에서 서기전 6년에 살았던 유향(劉向)이라는 분이 쓴
설원(說苑) 제13권 권모편(權謀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위 벌음(伐音)과 같은 시기에 재위하였던 하왕 계(癸) 52년 갑오(甲午,서기전 1767년)에
"탕이 하왕 걸을 토벌하려고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조선의 군사[九夷之師]를 일으켜서
(조선 군사의 힘을 빌어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걸왕에게 사죄하였다(湯慾伐桀 桀怒起九夷之師 以伐之 湯乃謝罪)"
라고 되어있고,
그 다음해인 53년 을미(乙未,서기전 1766년)에는 "탕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아니하므로 걸이
다시 조선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군사를 일으켜 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서 걸왕을 토벌하여 남소(南巢)로 추방하였다
(湯不貢
桀起九夷之師 九夷不起 湯乃興師伐之 遷桀南巢)"
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 기사는 바로 앞서 말한 규원사화의 벌음임검의 기사내용을 뒷바침해주는 것입니다.
위 사실을 우리측 기년(紀年)으로 환산하여 보면, 벌음임검 5년 갑오(甲午,단기 567년)와
6년 을미(乙未,단기 568년)의 2년에 걸쳐서 일어난 사실임이 뚜렷하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동이가
"드디어 옥문에 찾아와서 음악과 춤을 바쳤다(遂賓於王門 獻其樂舞)"
라고 되어있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는 하나라 16세임검 발(發)의 기사 가운데
"원년(서기전 1837년)에 제이(諸夷:단군의 여러 제후들)가 하왕문에
와서
춤을 추고 들어왔다(帝發元年 諸夷 賓于王門 諸夷入舞)" 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규원사화의 단군기의 13세 흘달(屹達)단군 때
(단기 491-534년, 서기전 1843-1800년)의 기록을 보면
"이 때에 하나라가 이미 그 덕이 쇠약해지므로, 임검께서 사람을 보내어 그 정치하는 것을 보게 하고,
또 무악을 보내서 시험하게 하였다( ,時夏德旣衰 使人往觀其政 又送舞樂而 試之)"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위의 중국측 사서와 내용이 맞아 떨어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상시 변호사 글
중
연려실기술은 영정조 시대의 이긍익에 의한 저술로서,
강단 사학자 중에서 연려실기술이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분명히 연려실기술은 규원사화가 저술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 (숙종 시대) 이후의 저작입니다.
강단 사학자 중의 일부는 규원사화의 뿌리인 진역유기가 숙종 때까지 전해진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인용되지 않으므로 고려 시대에는 이미 실전되었을 것으로
단정해야만 하는 <삼한고기>가 숙종 이후의 영정조 시대에 저술된 연려실기술에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상고사학회에 올려져 있는 조성익님의 글
이와같은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우리나라의 역사왜곡은
명나라의 후광을 입어야 했던 조선초기 왕들의 상황 때문에
왕명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중국을 경영했다거나 중국에 우리의 조상이 살았다거나
우리나라가 중국과 맞먹는 대단한 나라였다는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와같은 주장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서
왕명에 의해 거두어진 책들은 천문, 음양서라고 말하지만
예를들어 거두어진 책인 삼성기와 같은 책들이 규장각을 비롯하여 국가의 서고에 존재하지 않으며
거두어진 이래로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고 그 책들을 후대에 봤다는 사람들이 없으며
천문서라면 당연히 중요한 책이므로 보관됐어야 함에도 같은 제목의 책들을 찾을 수가 없고
그 책들을 신고하는 사람은 포상하고, 감추는 사람은 참수형에 처했다는 것으로 볼 때
위 책들이 단순한 천문 음양서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조선비사와 같은 책은 절대로 천문음양서일 수는 없다고 여겨지네요.
책제목에서 이미 고조선을 언급하고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위와 같은 사실들을 토대로 규원사화는 더 연구되어야 하며
아울러 우리나라의 고대역사에 대해서도 기존의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심도깊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첫댓글 규원사화...새로운 사실 알게 되었네요.감사합니다.
그렇죠..단군관련 사서 지니고 있다 들키면 참형이었다죠.
좋은 글 두고두고 잘 보겠습니다
능력이 되면 저도 저렇게 고증하고 추론하여 바른 역사를 밝히고 싶지만..글을 읽으며 느낀건 내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되어 여러 뜻 있는 분의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일만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되네요..하늘 아래 모든 이가 바른 역사를 알게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