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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지파의 전멸
삿 20:36-48
36 이에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고 잠깐 베냐민 사람 앞을 피하매
37 복병이 급히 나와 기브아로 돌격하고 나아가며 칼날로 온 성읍을 쳤음이더라
38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39 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가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쳐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르기를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 하다가
40 연기 구름이 기둥 같이 성읍 가운데에서 치솟을 때에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
41 이스라엘 사람은 돌아서는지라 베냐민 사람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42 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
43 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싸고 기브아 앞 동쪽까지 추격하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44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니 다 용사더라
45 그들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이 또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으니
46 이 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47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48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삿 20:36-48 / 베냐민군은 그제야 자기들이 싸움에서 패한 것을 알았다.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주력 부대는 베냐민 군대가 쫓아오자 기브아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특공대를 믿고 뒤로 후퇴하였다. 37) 그러자 기브아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이스라엘 특공대가 기브아에서 멀리 나가 있는 베냐민군을 확인하고 기브아 성안으로 쳐들어가 거기 있는 사람들을 모두 칼로 쳐죽였다. 38)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은 기브아성에 연기가 치솟는 것을 신호로 39) 이스라엘 주력부대가 퇴각하다가 돌아서서 베냐민군을 공격하기로 미리 작전을 짜놓다.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 군인 30명 가량을 쓰러뜨린 베냐민군은 그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 주력 부대를 뒤쫓아갔다. 그러면서 `저 녀석들이 이번에도 도망 치기만 하는구나! 이번에도 우리가 이겼어' 라고 여유를 부리다가 40) 성읍 쪽을 바라보니 성읍에서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이 아닌가! 41) 그러자 뒤로 물러나던 이스라엘 주력 부대도 발길을 돌리 베냐민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베냐민군은 이스라엘 주력 부대가 뒤돌아서서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이제는 죽었구나 싶어 42) 빈들 쪽으로 도망 치려고 하였으나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주력 부대뿐만 아니라 기브아 성읍에서 쫓아나온 특공대까지 가세하여 베냐민군을 공격하였다. 43) 이들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은 베냐민군을 에워싸고 기브아 동쪽에 있는 ㄱ) 노하까지 추격하여 짓밟았다. (ㄱ. 참조 대상8:2) 44) 이때 쓰러진 베냐민군은 1만 8천 명이나 되었다. 45) 가까스로 살아 남은 일부 베냐민 군인들만 빈들 쪽 림몬 바위로 도망쳤다. 이스라엘군은 마치 이삭을 칼로 베듯 큰길에서도 베냐민군을 5천 명이나 쳐죽였다. 또 기돔으로 도망 치는 베냐민군까지 뒤쫓아가 2천 명을 더 쳐죽였다. 46) 이렇게 해서 쓰러뜨린 베냐민군의 수는 모두 2만 5천 명이었다. 47) 베냐민군 가운데에서 겨우 600명만이 빈들로 도망쳐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달을 숨어 지냈을 뿐이다. 48) 이스라엘 지파 연합군은 또 온 베냐민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까지 진멸하고 성읍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스라엘의 매복 전술은 한껏 사기가 올라있는 베냐민에게 유효했습니다. 자신감과 교만의 차이란 자신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절제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베냐민 지파의 전멸(36-44) 심기일전한 이스라엘은 단단히 준비했습니다. 전쟁에서 매복은 상대의 심리적인 허점을 파고드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며,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상대를 크게 이길 수 있는 전술입니다. 이미 두 번의 패배로 승리에 대한 의지가 강렬했던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가 매복에 걸려들자, 자비 없이 살육을 저지릅니다. 작은 것 같아 보였던 어느 레위인의 비행이 또 다른 행악자들의 범죄와 연루되어 충돌하자 돌이킬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베냐민 지파와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이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자신들의 모습을 먼저 되돌아볼 수만 있었다면 베냐민 지파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의 승리는 이스라엘 전체에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광야로 도망하는 베냐민(45-48) 거의 대부분이 멸절당한 베냐민 지파는 필사적으로 광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모든 연합군은 끝까지 쫓으며 그들을 죽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분노가 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600명의 베냐민 사람이 살아서 림몬 바위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 돌아와 그곳마저 모두 파괴해 버립니다. 이제 베냐민에게는 그들의 유업, 삶의 터전까지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분노가 아무리 크더라도 베냐민의 죄악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백성들을 남기십니다. 이후 베냐민 지파가 이전과 같이 회복되지 못하지만, 그 명맥을 유지하며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게 됩니다. 죄악의 참혹함과 무서움은 또 다른 죄악을 낳고 더 큰 죄악을 만들어 결국 모두를 심판과 멸망의 자리에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악은 그것의 크고 작음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흉내내서도 안 됩니다. 선한 데는 한없이 지혜로워지고 악한 데는 한없이 미련해져야만 합니다.
적용: 죄악된 세상에서 늘 말씀을 통해 깨어 있으며 하나님의 살아 계신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죄악은 두려울 수 있으나 말씀은 더 강력하여서 당신의 삶을 지켜주십니다. 오늘도 말씀의 인도와 보호하심 아래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이 표현은 헬라인들의 속담으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유행하던 속담입니다. 아직 고삐라는 것이 없을 때, 소의 방향을 이끌기 위해 소 엉덩이를 찌르는 도구가 있었는데 이것이 ‘가시 채’입니다. 엉덩이를 따끔하게 찔리면 소가 찔린 반대편으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그런데 멍청한 소는 그 가시 채를 향해 뒷발질하는 소입니다. 결과는 자기만 더 아플 뿐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짓을 계속하는 사람을 향해 사용하는 속담입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너에게 해가 되는 일, 너를 상하게 하는 그 일을 이제 그만하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설 교 >
同族相殘
삿 20:36-48 / 강릉장로교회
동족상잔의 기나긴 역사를 가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베냐민 지파 사울 왕이 폐위되고 유다 지파 다윗 왕가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윗 왕가도 솔로몬까지만 통일 왕국이었습니다.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면서 학정을 펼침으로 인해 여로보암에게 열지파가 이탈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남북왕국이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19장의 한 레위 사람이 첩의 시체를 열두 토막 내서 각 지파에게 택배로 보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지파사람들이 토막 시체를 보고 분노했습니다.
v.10-11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客氣 부리지 맙시다.
v.12-13a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열한 지파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 악행을 제거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기브아의 동성애자들과 불량배들을 색출해서 넘겨주면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악행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는 동성애자들과 불량배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하며 아무런 의미없는 것에 객기를 부렸습니다.
v.13b-14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예수님께서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전력을 분석해서 승산이 있는지 계산해보고, 빨리 화해를 하든지? 전쟁을 하든지? 결정하라고 하셨습니다.
눅14:31-32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그런데 객기로 똘똘 뭉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기브아의 동성애자들과 불량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승산도 없는 전쟁에 생명을 불싸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개죽음 당하면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고귀하게 순교해야 합니다. 돈도 함부로 쓸데없는 곳에 쓰면 개죽음과 똑같습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고 했습니다. 개같이 벌어서 짐승처럼 쓰면 진노당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곳에, 예배자를 세우는 곳에 귀하게 소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허비하면 안 됩니다. 자신도 가족과 다른 사람들도 두고두고 감사하고 기뻐하도록 인생을 살아야 주님 앞에 서는 날 상을 받습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짐승처럼 살지 말고 생각하면서 살라고 지식도 주고, 지혜도, 믿음도, 생명도 주셨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지혜롭게 합리적으로 은혜가 되도록 말씀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무릎꿇어 기도로 판단하고 결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미끼에 현혹되지 맙시다.
v.15-17 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v.36-45 이에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고 잠깐 베냐민 사람 앞을 피하매 복병이 급히 나와 기브아로 돌격하고 나아가며 칼날로 온 성읍을 쳤음이더라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하고 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가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쳐 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르기를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 하다가
연기구름이 기둥 같이 성읍 가운데에서 치솟을 때에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 이스라엘 사람은 돌아서는지라 베냐민 사람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 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싸고 기브아 앞 동쪽까지 추격하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니 다 용사더라 그들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이 또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더라
강태공에게 고기가 잡히는 이유는 미끼 때문입니다. 물고기는 저녁거리를 그냥 주는 줄 착각합니다. 그러다가 걸려들어서 잡혀 죽는 겁니다. 타짜들은 먹잇감이 얼마나 돈이 있는지 알고서는 절대로 처음부터 따먹지 않습니다. 초짜들에게 미끼로 꾸준히 잃어줍니다. 초짜들이 간이 배밖에 나온 후에 단 한방에 전 재산을 다 뺏어가는 겁니다. 절대로 미끼에 미혹되면 안 됩니다. 미끼를 무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은 슬피 울며 이를 갈면서 죽지 못해서 살아야 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분해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부디 생각 좀 하고 삽시다. 욕심부리지 말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무엇이든지 감사하면서 삽시다. 그리고 틈만 나면 생명의 복음 전하고, 예배자를 세우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셔서 복있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同/族/相/殘 = 가장 슬픈 역사입니다.
v.46-48 이 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조(趙)나라가 연(燕)나라를 치려 하자 때마침 소대(蘇代)라는 연나라 왕의 부탁을 받고 조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을 찾아가 말했다. <오늘 오면서 역수(易水)를 지나는데 민물조개가 입을 벌리고 햇볕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황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조갯살을 쪼아 먹자 조개가 입을 오므려 황새의 주둥이를 물어 버렸습니다. 황새가 말했습니다. ‘오늘도 비가 안 오고 내일도 비가 안 오면 넌 죽고 만다.’ 조개가 황새에게 대답합니다. ‘오늘도 못 빠져나가고 내일도 못 빠져나가면 너도 역시 죽고 만다.’ 둘이 서로 놔주려 하지 않자, 마침 지나가던 어부가 그 둘을 한꺼번에 잡아 버렸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연나라를 쳐 두 나라가 오래 대치하면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게 됩니다. 신은 강한 진(秦)나라가 어부처럼 진과 연 나라를 한꺼번에 취하는 이득을 얻게 될까 우려됩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연나라 치는 전쟁을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혜문왕은 소대의 간언을 감탄을 하고 연나라 공격 계획을 중지하였습니다.
<漁父之利>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어부지리는 동족상잔과 의미가 통합니다.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을 하자 이웃나라들이 득을 봅니다. 두 나라가 피를 토하면서 맞붙어 싸우는 바람에 엉뚱한 제삼자가 덕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한반도 정세가 그렇고, 대한민국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21세기 사탄이 교회를 파괴시키는 전술전략은 동족상잔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전쟁을 하고 함께 자멸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도록 교회를 풍비박살 내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 적이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가 싸웁니다. 권사들끼리 치고 박습니다. 성도들끼리 미워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비난거리가 되게 합니다. 전도의 문이 막힙니다. 교인들끼리 싸우느라고 전도하고 선교할 힘이 없습니다.
강릉가족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생각처럼 녹녹하지 않습니다. 말세지말에 정신차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근신하며 기도하십시오. 주님앞에 서는 날을 바라보면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베냐민의 패배,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파괴들
삿 20:35~48 / 송호영목사
* 오늘의 말씀 : 베냐민의 패배,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파괴들(사사기 20:35~48)
* 본문요약
이스라엘의 주력부대가 도망치자 베냐민 지파는 지난 번 전쟁처럼 그들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브아 성읍에서 먼 곳까지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그때 기브아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매복부대가 순식간에 기브아를 돌격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성읍을 불지릅니다.
그러자 미리 약속한 대로 성읍의 연기를 보고 도망치던 주력부대가 뒤돌아서 베냐민 군을 반격합니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한 베냐민 군은 크게 패하고, 이스라엘 군은 도망하는 베냐민 사람들까지 끝까지 추격하여 모두 25,000명을 죽입니다.
베냐민은 패잔병 600명만이 광야로 도망치고, 이스라엘은 주변 성읍을 닥치는 대로 불사릅니다.
찬 양 : 186장(새 254) 내 주의 보혈은
412장(새 290)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 본문해설
1. 이스라엘의 승리(35~44절)
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셨으므로, 그날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25,100명을 죽였으니, 모두 칼을 쓸 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36) 그제야 베냐민 사람들은 자기들이 패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력부대가 베냐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도망치는 척 하면서
뒤로 물러선 것은 기브아 주변에 매복한 군사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매복한 군인들은 순식간에 기브아로 돌격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칼로 그 성읍 주민을 다 쳐 죽였습니다.
38) 이스라엘의 주력부대는 매복부대의 사람들에게
성 안에서 큰 연기를 구름처럼 치솟게 하는 신호를 보내라고 했고,
그 신호를 보면 (도망을 하던) 이스라엘 주력부대가 뒤로 돌아서
다시 반격하여 싸우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39)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우다가 물러서자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30명 가령을 쳐 죽이면서
이스라엘 군이 지난 번 싸움처럼 패하여 도망치는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40) 그러나 성읍에서 큰 연기가 구름기둥처럼 치솟아 오를 때에
베냐민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온 성읍이 불바다가 되어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41) 그때 (도망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뒤로 돌아서 반격하니, 베냐민 사람들은 재앙이
자기들에게 다가온 것을 알고 (겁에 질려) 갈팡질팡하게 되었습니다.
42) 그들은 이스라엘 군 앞에서 발길을 돌려 광야 쪽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였으나,
그 길도 막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주력부대와 (매복했다가) 성읍을 치고 나온 부대 사이에 협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43)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들을 포위하여 틈을 주지 않고,
동쪽으로 기브아 맞은편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추격하여 짓밟았습니다.
44) 그때에 베냐민 사람들이 1만 8천 명이 쓰러졌는데, 모두 용감한 전사들이었습니다.
2. 동족을 잔인하게 진멸하는 이스라엘(45~48절)
45) 베냐민의 나머지 패잔병들은 방향을 바꾸어 광야 쪽 림몬 바위 있는 데까지 도망쳤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길에서 5천 명을 이삭 줍듯 모두 죽이고,
또 기돔까지 쫓아가서 나머지 2천 명을 죽였습니다.
46) 이렇게 해서 그날 베냐민 사람 2만 5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칼을 쓰는 용사들이었습니다.
47) 그러나 600명은 광야를 통과하여 림몬 바위까지 도망쳐서,
넉 달을 그 림몬 바위 있는 곳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48)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그 성읍에서
사람이나 가축 할 것 없이 그저 만나는 대로(닥치는 대로) 모두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들이 들어가는 성읍마다 모조리 불을 질렀습니다.
- 2만 5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46절) :
46절에서는 25,000명이 죽었다고 했고, 35절에서는 25,100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35절에서 죽은 자의 수가 100명이 더 많은 것은
앞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에서 죽은 베냐민 군사들을 여기에 합했기 때문입니다.
* 묵상 point
1.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
1) 이스라엘의 승리(35절)
본문 35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셨으므로
그날 죽은 자의 수가 25,100명에 이른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베냐민 사람들을 이긴 것은
그들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베냐민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과 베냐민간의 전쟁이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 이처럼 심판을 받는 자가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일을 방해하거나 훼방하면
그것은 곧 그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방해하는 일을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이 전쟁처럼 하나님께서 그와 전쟁을 벌이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 묵상 :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훼방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에 함께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그 어떤 예배나 예물로도 사함을 받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우리는 두려움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잔인한 공격 : 분노와 증오를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
1) 큰 그림으로 보면 이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의 전쟁이었습니다.
신명기 13장을 보면 만일 어떤 사람이 우상을 섬기자고 다른 사람을 유혹하면
그가 자녀나 아내나 친구나 그 누구일지라도 그를 죽일 것이요,
만일 그 성읍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우상을 섬기자고 유혹하는 것을 보고도 벌하지 않고 그를 두둔하면
그 성읍의 사람들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습니다(참조, 신 13:12~16).
그러므로 이번 이스라엘과 베냐민과의 전쟁은
큰 그림으로 보면 큰 죄를 범한 자들을 벌하지 않고 두둔한 자들을 벌한
하나님의 심판의 전쟁입니다.
2)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벌의 분량을 넘어섰습니다.
비록 베냐민 지파를 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량만큼만 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량을 훨씬 넘어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을 멸하라 하실 때처럼 그렇게 잔인하게 진멸했습니다.
3) 신명기 13장의 말씀을 과도하게 해석한 과도한 잔인한 공격
신명기의 말씀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주신 말씀이었고,
기브아 사람들은 우상 숭배한 것이 아니라, 레위인의 첩을 욕보이고 죽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죄를 지은 자들만 벌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혹시 어떻게 해서 이 사건을 신명기 말씀에 그대로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기브아 성읍 사람들만 벌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20개가 넘는 베냐민의 성읍들을 그저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살랐습니다.
➠ 이처럼 분노는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양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멸하는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 묵상 : 내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다스리십시오.
내 힘으로 안 되면 주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저 내 마음이 시원해질 때까지 끝까지 간다면
주변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파괴되고 맙니다.
3. 분노도 전염이 된다 : 레위인의 분노가 그 시작점
1) 이스라엘 사람들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여자이건 남자이건 간에 닥치는 대로 칼로 죽이고 불에 태웠습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짓밟아 죽이듯 그렇게 자기 동족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2) 이들이 이렇게 극도로 분노하게 된 것은 그 레위인 때문입니다.
만일 레위인이 첩의 시체를 토막 내어 보내지만 않았어도 이스라엘은 차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레위인이 분노하여 첩의 시체를 토막 내서 5보는 이들로 하여금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전체가 분노에 전염이 되어 동족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게 된 것입니다.
● 묵상 : 오래 전에 파리 한 마리 때문에 분노한 어느 경찰관이 마을 사람 50여 명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표현하기 전에 먼저 내 안에 일어나는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를 따져보십시오.
그 분노가 정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살펴야 합니다.
지나치면 오히려 내가 심판을 받게 됩니다.
4. 거룩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파괴들
1) 거룩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파괴에 조심하십시오.
물론 이 일 자체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본문 35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베냐민을 치셨으므로 그들이 25,100명이나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베냐민 사람들을 향한 자기들의 진노와 증오심을 쏟아 부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를 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벌레를 짓밟듯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2) 이처럼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우리 교회에서 가장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조심하십시오.
내 생각만이 아니라 실재로 하나님께서도 내가 하는 일을 거룩하고 선하신 일로 인정하고 계시다고 할지라도 마귀가 한 순간에 나를 미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 거룩하고 선한 순간 내가 파괴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묵상 : 나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일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조심하십시오.
나는 지금 정의의 사도로 저 사람을 책망하고 벌한다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하는 순간
내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파괴자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에 대하여 긴장하며 살펴야 합니다.
* 기도제목
1.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내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3.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그 분노를 어디까지 표현해야 하는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절제력을 주옵소서.
4. 거룩이나 진리나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악하고 파괴적인 일을 행하지 않도록 우리들 자신을 항상 긴장하며 살피게 하옵소서.
베냐민 지파의 전멸
삿 20:36-48 / 구성교회
빛은 담대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어둠을 힘차게 몰아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그분의 빛으로 채우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존재와 권능에 대한 빛나는 증거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 속의 어둠이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영광의 빛으로 대체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알아차리면 어둠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어둠은 어둠의 일을 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은 ‘빛’입니다. 세상이 어두워진다면 문제는 어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빛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마 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분의 거룩한 빛을 비추고, 우리 주변 사람들의 어둠을 몰아내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을 알리시면서,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늘과 땅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쳤다(마 4: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어둠이 쫓겨났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진리가 담대하게 선포되었고,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고, 위선이 폭로되었고, 죄인들이 용서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빛을 소개하신 후로 세상은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 주변의 어둠을 몰아내야 합니다.
매복을 통해 베냐민 지파를 공격했던 이스라엘은 기브아로 돌격하여 성읍을 함락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기브아를 공격하는 복병과 주력 부대의 약속이 성읍 함락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작전을 몰랐던 베냐민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긴다고 착각했습니다. 착각의 결과는 성읍이 불타는 것이었고, 성읍이 불타는 장면을 목격한 베냐민 군대는 광야로 도망가게 됩니다. 성읍이 불타는 장면은 신명기 13장 12-18절에 나오는 규례의 실현입니다. 불량배가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면 그 성읍에 사는 사람과 가축을 진멸하고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신명기 13장 13절의 ‘불량배’와 사사기 19장 22절의 ‘불량배’는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읍이 불탔다는 내용은 신명기 13장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로 도망친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 림몬 바위로 가는 길에서 5,000명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또한 기돔으로 도망간 2,000명도 죽이게 됩니다. 전쟁에서 죽은 베냐민 사람은 25,000명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 26,700명이었으니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공격을 피한 600명은 림몬 바위에 4달간 숨어 지냈습니다.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이스라엘은 기브아로 돌아와 남아 있는 베냐민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이렇게 상대방 진영을 진멸하는 일은 적에게 할 수 있는 최고 레벨의 전쟁 모습이었습니다.
악을 몰아내기 위해 허용되지 않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죄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선 하나님의 빛을 그대로 반사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빛을 반사한다는 명분으로 내 생각과 탐욕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빛은 오염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비추신 빛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주님의 빛만 비추는 하나님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승리
사사기 20:36-48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은 세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습니다. 두 번은 연합군이 패배하였고 마지막 전투에서는 이스라엘 연합군이 승리합니다. 그것도 만 명으로 베냐민 지파를 격파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3차 전투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
사십만 대군으로도 26,700명의 베냐민 지파 군대를 당해낼 수 없었는데 어떻게 단지 만 명으로 베냐민 지파 군대를 파멸 시킬 수 있었을까요? 세 번째 전투는 하나님이 분명하게 승리를 약속한 전쟁이었다는 점이 1차와 2차 전투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내 손에 넘겨주리라”(28절)
이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지난 두 번의 전투에서는 그들을 이스라엘 연합군의 손에 붙여주시지 않았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나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진정한 회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정하고 악한 죄를 지은 베냐민을 징벌하는 것에는 강했지만 그 일을 놓고 하나님 앞에 고심하는 시간은 부족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부정한 것을 징벌하는 데는 매우 분개하고 용감하며 즉각적이었지만 그 형제를 멸절하고 말살하는 것에 대한 아픔은 충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괘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앞의 35절 앞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언제나 앞에 가신다는 점이지요. 찬송가 가사 가운데에도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행진을 할 때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섰습니다.
우리가 어디 가든지 해가 앞에 있으면 그림자가 뒤쪽에 생깁니다.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염려 근심이 우리가 가는 길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지파연합군은 일차 공격에서 패전하고, 이차 공격에서도 패전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울며 금식하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승리의 약속을 보장받고 이제 삼차 공격을 합니다.
삼차공격을 하는데 굉장히 신중하게 합니다. 일부가 매복을 하고, 매복한 부대와 다른 부대 사이에 군호를 정합니다. 연기를 군호로 삼지요. 그냥 숫자로 밀어붙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공격할 때 너무 가볍게 여기고 삼천 명쯤만 올려 보냈다가 큰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 충격 때문에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다고 여호수아서 7장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공격할 때는 복병을 두고, 유인작전을 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점령하지요.
여호수아가 아이 성에서 패배한 것은 아간의 범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베냐민 지파를 공격하다가 두 번이나 패전을 합니다. 이 둘을 비교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께 묻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은 범죄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이스라엘의 삼차 공격처럼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빈틈없이 해야 합니다. 문제없다고, 자신 있다고 대강대강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전력질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공격에서 베냐민 사람들은 전멸을 당하다시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불량배들을 내 주었으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터인데 같은 지파라는 이유 하나로 감싸다가, 오기로 감싸다가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도려내야 합니다. 그것을 도려내지 않고 감싸고 있으면 베냐민 지파처럼 됩니다. 이제 베냐민 지파는 거의 전멸을 당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전투인데 베냐민이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베냐민 지파는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기까지는 열두 지파로 존속해 왔다가 이제부터는 열한 지파가 될 위험을 만났습니다.
베냐민 지파 군대는 모두 이만 육천 칠백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3차 전투에서 25,100명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베냐민 중에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었습니다. 다 용사였습니다. 더 나아가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은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였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습니다. 물론 앞에서 이미 베냐민 지파의 군대가 얼마나 죽었는지 이미 밝히고 있습니다. 25,100명입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과 100명이 차이가 나는데 앞에서 정확한 숫자를 밝혔기 때문에 뒤에서는 대충 전투에서 죽은 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전체 26,700이었는데 살아남은 자가 600명이라면 천명이라는 숫자가 차이가 납니다. 그것은 베냐민 지파가 1차와 2차 전투를 치르면서 희생당한 숫자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4만 명이나 죽었는데 베냐민이라고 하나도 죽지 않았겠습니까? 아무튼 림몬 바위로 도망친 600명 외에는 모두 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48절).
그런데 보세요. 육백 명이 도망을 쳐서 광야 바위에 숨습니다. 림몬 바위에서 넉 달을 숨어 지냅니다. 림몬 바위는 벧엘에서 동쪽으로 십 리가 좀 넘는 곳의 높이 757m 높이에 있는 큰 동굴인데 아주 넓고 샘이 있어서 여러 사람이 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베냐민 지파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도록 이 육백 명을 남겨 놓았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내용은 그 육백 명을 가지고 베냐민 지파가 존속할 수 있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는데 이상하게 어려운 일은 같은 기간에 겹쳐서 밀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일어날 용기를 갖기 힘들 정도로 밀려옵니다. 그러나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근거를 반드시 남겨놓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사람들이 다 우상숭배 하는 것 같았습니다. 엘리야가 그런 가운데서 예언 활동을 하다가 너무 지쳤습니다. 엘리야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19장 14절을 읽어 드립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래 맞다. 너만 남았다!’ 했습니까?
아닙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18).
여러분, 큰 어려움, 겹치는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까?
‘아, 나는 견딜 수 없다, 쓰러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끝났다!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남겨두신 육백 명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육백 명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냐민 지파가 파멸을 맞이하게 된 이유?
⎷1)의보다는 혈연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또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혈연을 중시하는 우리의 마음을 잘 표현한 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혈연을 중시하다가 악을 자행하기도 하고 또 은폐시키기까지 합니다. 혈연 때문에 의를 저버린, 그래서 패가망신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무리 혈연의 정이 끈끈하다고 할지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보다 결코 앞서서는 안 됩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징계하도록 내어 주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핏줄이라고 그들을 옹호하고 오히려 전쟁에 나섰다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사랑하시는 여러분! 혈연 때문에 의를 포기하는 베냐민 지파와 같이 되지 맙시다.
⎷2)순종보다는 자존심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로 온 인류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주장하는 소위 자존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존심이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인간을 더 천박하고 고집스럽고 강퍅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인간은 옳은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이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불의의 길을 고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베냐민 지파도 자기들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불의를 비호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만일 나아만 자존심을 계속 내세웠다고 한다면 그가 문둥병을 고침 받았겠습니까? 바울의 설교를 듣던 아그립바 왕은 자신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싫어서 결국 주를 부인한 것입니다.
행 26: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헛된 자존심 때문에 진리의 길, 순종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비호하며 야합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자신을 죽이고 순종하는 길 뿐입니다. 실로 자존심 때문에 패망한 베냐민 지파를 기억해야 합니다.
⎷3)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힘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대 금기 사항입니다. 사실상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되는 힘이야말로 앞에서 말한 혈연의 병폐와 자존심 확립을 증폭시키는 초석이 됩니다. 베냐민 지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원초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었습니다. 실상 그들의 군대는 “틀림없는” 정예 군대였습니다(16절).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싸우려하다가 파멸을 자초한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도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부자가 자신의 힘을 믿기에 그 힘을 근거로 자존심이 높아지고 혈연에 얽매여 진리의 길을 선택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실로 우리는 자신들의 힘을 믿고 형제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오히려 악을 도모한 베냐민 지파의 종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개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또 수준 높은 교육에 의해 개인마다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주관을 뚜렷이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진리의 길, 의의 길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용서와 사랑이란 명분으로 위장된 스스로의 힘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혈연, 자존심 등으로 인해 죄악 된 행실을 자행하거나 용납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의로운 길 말고는 그 어떠한 길도 이유와 명분을 내세운 추악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진리의 법은 우리의 혈연이나 자존심, 그리고 힘에 의해서도 변질 될 수 없음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