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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군 이인
태종 이방원의 자녀는 서자까지 합해서 약 30명 정도되며
적자인 양녕, 효령, 충녕, 성녕 4명 외에
업적이 뛰어난 서자들중에서는
첫째인 경녕군과 둘째인 함녕군이 있음
함녕군이 태어난 시기는 정확히 안알려져있지만 세종보다 동생임
나머지 서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요절하거나 일찍 병들거나 사고로 사망
첫째 서자인 경녕군은 이방원의 1첩인 효빈김씨의 자녀고
둘째 서자인 함녕군은 이방원의 2첩인 신빈신씨의 자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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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에서 분이가 가상인물로 나오는데
실존 인물이었을때 1첩 효빈김씨 아니면 2첩 신빈신씨 였을것이라는 의논이 많았음
왜냐하면 시기적으로는 효빈김씨이고, 이방원이 부인들중에서는 신빈신씨를 가장 사랑하였고
신빈신씨는 실제로 이방원이 세상을 떠난후 매우 슬퍼해서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여승이 되고 생을 마감함
함녕군은 문무가 뛰어나고 특히 활을 잘 쏘았으며 묵묵히 과묵하면서도 할말이 있을땐 언변이 뛰어났음
1422년 이방원이 병상에 있을때 세종과 함께 밤낮으로 간병했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뒤에도 빈전에 항상 입직해 있을정도로 효성이 매우 지극했었음
그래서 세종이 이복동생 함녕군에게 빈전을 관리하게함
세종이 왕에 오르고나서 명나라에 금과 은을 무리하게 조공하는것 때문에 항상 골치였고
조선에서도 태종때부터 이런문제로 명나라에게 몇번 조공 면제를 해달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사이만 나빠져 있었음
그래서 세종은 이복동생 함녕군 이인을 명나라 황제 선덕제에게 보냄
(영락제 시절에는 경녕군이 외교에 활약을 했었고, 선덕제 시절에는 함녕군이 감)
선덕제에게
“조선에서는 금은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금은의 세공을 면제해 주고 그 대신에 토산물(土産物)을 바치게 해달라.”
함녕군이 논리 정렬하게 선덕제에게 말하자 바로 승낙하며 오히려 함녕군에게
중국 비단옷 4벌과 표리(表裏) 10필을 비롯하여 금대(金帶) 서대 각각 1개씩과 은화(銀貨) 1백 냥 등을 선물로 줌
그리고 그당시는 조선의 사신은 왕자라하여도 물소뿔대(각대)를 허리에 찰 수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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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군은 그자리에서 바로 허리에 차고나서, 이때부터 조선의 사신은 명나라와 외교할때
물소뿔대를 차는것이 가능하게됨
己酉世宗欲請免金銀歲貢(기유세종욕청면김은세공) : 기유년*에 세종이 중국에 금은(金銀)의 세공(歲貢)을 면제하기를 청할 때,
難其使(난기사) : 그 사신을 어렵게 여겨서
以裀充計稟使(이인충계품사) : 인을 계품사(計稟使)로 임명하니,
帝待之厚(제대지후) : 황제가 후하게 대접하고
特允其請(특윤기청) : 특별히 그 청(請)을 윤허하였고,
賚與甚隆(뢰여심륭) : 하사(下賜)가 매우 융숭하였고,
賜犀帶一腰(사서대일요) : 서대(犀帶) 1요(腰)를 내려 주었다.
先是(선시) : 이보다 앞서
朝廷使臣到本國(조정사신도본국) : 중국 조정(朝廷)의 사신(使臣)이 본국(本國)에 오면
雖王子不得帶犀以見之(수왕자부득대서이견지) : 비록 왕자(王子)라 하더라도 서대(犀帶)를 맨 것을 볼 수가 없었는데,
帶犀自裀始(대서자인시) : 서대가 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함녕군 이인의 졸기
외국 사신들이 북경에 오면, 회동관(會同館)에 머물고, 조선의 사신은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활을 일상 사용하는 달자(達子)의 사신들이 태감 윤봉에게 요청하기를,
“조선 사신 함녕군이 활을 잘 쏜다는 말을 들었는데, 특별히 강궁(强弓)을 가지고 한번 시합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므로, 함녕군 이인이 이를 흠쾌히 승낙하고, 회동관으로 가서 활쏘기 시합을 했음.
함녕군 이인이 강궁을 힘껏 당겨서 활을 쏠 때마다 백발백중으로 과녁을 맞혔으므로,
시합을 구경하던 외국 사신들과 달자 사신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함
在會同館(재회동관) : 회동관(會同館)에 있을 때
達子等聞善射(달자등문선사) : 달자(達子) 등이 활을 잘 쏜다는 말을 듣고
持强弓請於尹鳳令試之(지강궁청어윤봉령시지) : 특별히 강궁(强弓)을 가지고 윤봉(尹鳳)에게 청하여 이를 시험하게 하였는데,
裀引滿中的(인인만중적) : 인이 활을 힘껏 당겨 표적을 맞히니,
達子敬服(달자경복) : 달자(達子)가 경복(敬服)하였다.
-함녕군 이인의 졸기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세종이 크게 기뻐서
논 80결, 노비 8 명 하사 받았음
세조때까도 살았는대 정권에는 관여하지 않고
그 후에는 묵묵히 자기 할일하면서 세상을 떠남
능력과 업적이 대단했지만 아쉽게도 둘째서자 라는 신분이라서
위의 조선왕조 기록도 의역은 안되어있고 사극에서도 한번도 나오지 않음
(첫째서자 경녕군의 경우 대왕세종에서도 나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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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인(왕후) 아들은 적자 후궁아들운 서자
본처한테 나온 왕의아들을 대군이라하고 첩의 아들은 군이라고한답니당 왕자긴한데 서열은 낮은거졍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ㅜㅜㅜ아쉽
333
444 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22 ㅠ
33333
4444
진짜 이방원의 DNA가 남다르긴 남달났나봐..
이방원 자식농사는 거의 성공인듯
아부지랑 존똑이었네... ㅎㅎ
아부지도 명나라가서 황제 이쁨 받고 잘놀다 왔다던데.. ㅎㅎㅎ
사스가 이방원 아들
와...멋져...감동